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누군가 와서 '무인도에 단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책들을 가져갈 것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무런 고민 없이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그 리스트와 순번이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의 의미와 가치를 장대한 서사 속에 그려낸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중 첫 번째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진보적 힘은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 추동한다고 역설했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두 번째로 꼽힌다. 인간의 속성을 낙관적으로 인식하며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창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마지막 세 번째 순번에 놓인다. 요컨대 이 세 편의 걸작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보물과 같은 고전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밀의 주장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자유'와 '개별성'이야말로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의 가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발전과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밀은 무조건적인 자유를 지지하지 않는다. 밀이 자유를 주장한 밑바탕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교육 받고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자유 못지 않게 개인의 사회적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상치(相値)가 아닌 조화(調和)의 원리에서 개인의 개별성을 사회성과 긴밀하게 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밀이 '진보적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밀의 철학에서 '개별성(個別性, individuality)'과 '사회성(社會性, sociality)'에 대한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개별성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했을 때, 그것이 본래적으로 품고 있는 독창성과 신비성으로 사회적 진보를 추진시키는 원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을 사회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다양한 타자의 개별성과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 즉 사회성과 결합되었을 때 인간 사회는 궁극적인 행복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밀은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긍정하며 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밀의 낙관주의적 태도는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희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그의 사상 전체를 휘감고 있는 특질이다.
이 특질은 그의 사상이 벤담이 창시한 고전적인 것과 구별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도덕성의 쾌락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해 밀의 그것은 쾌락의 질적 고상성(質的 高相性), 즉 인간의 지성과 고귀함의 영역을 긍정하며 이를 최우선적인 전제로 상정한다. 이는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데,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외치며 쾌락의 양적인 면을 강조했던 벤담의 입장과는 분명하게 배치돼 있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밀의 명언은 인간 정신의 철학적 태도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잘 압축한다.

   내가 분명한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150년 전에 쓰여진 <자유론>을 다시 꺼내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지닌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형식의 엄연성에 비해 법률과 제도권, 언론과 다수 국민의 선진적인 의식 수준은 꽤 많이 결핍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표현하자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국사회는 불관용의 사회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너'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관용은 '다름'과 '틀림'을 혼동한다. '다른(different)'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 '틀린(be wrong)' 것은 곧바로 악(惡)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밀은 분명히 말한다. 설령 잘못된(옳지 않은) 의견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억압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심각한 문제와 위험을 담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버젓하게 살아있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네르바 사건' 같은 촌극이 다시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이는 좌파·우파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해온 내가 '국가보안법'과 '미네르바 사건'을 거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보안법 논쟁은 국가안보의 문제가 아니고 미네르바 촌극은 허위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사상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문제'인 것이다. 비록 당치도 않은 오류투성이의 의견이거나 귀담을 가치가 부족한 극소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을 주장하고 표현하는 자유 만큼은 전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닌 지성과 상식의 힘으로 충분히 분별하고 자정(自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은 사상 및 출판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매우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참된 것은 참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참된 것은 그 자체로서 진리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거짓된 것은 참된 것과 대비됨으로써 진리를 더욱 명징하게 빛낼 수 있는 원료로서의 가치를 띠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다. 즉 개인이 잘못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행위와 이를 보장하는 공동체적 관용은 오류 그 자체를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국가보안법 존폐 논쟁'이나 '미네르바 사법사건'을 위시하여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불관용의 카르텔은 바로 이 대목에서 새삼 곱씹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유가 모든 것을 구원할 수는 없다. 인간은 분명 유한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다른 가치가 환원할 수 없는 고유의 보편적 선을 갖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사실이다. 일시적으로, 혹은 특수적으로 잠시 역행하거나 굴곡된 적은 있었지만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조망에서 인류사는 개인의 자유가 뻗어나가는 역사였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장려되지 않는 사회는 발전이 없고 기대가 없으며 진보가 없다. 이는 역사가 명징하게 증명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고도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대중(大衆)'이라는 이름으로 평준화하고 획일화시킨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마저도 대량생산으로 일원화시키는 현대사회의 조악함은 개별성을 바탕로 하는 인간의 독창적인 진보와 발전을 저해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체주의적이고 산술적 평등의 사고를 고착시켜 결국 인간의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비자유의 사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 더 나아가 포스트 현대사회를 내다보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우려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밀은 150년 전에 이미 작금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밀의 고민이 분명한 현실로 드러난 이상, 우리에게 다른 해결책은 없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인 사회성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애쓰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150년의 시간차를 넘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야 마는 우렁차고 핵심적인 일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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