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지방출장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지 않은 일정이었다. 둘째 날에 숙박으로 고생을 했는데 평소와 달리 방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도 많지 않았고 야심한 시각도 아니어서 의아한 면이 있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지방출장을 가져왔지만 저녁 8시 이전에 방이 없어 모텔을 잡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모텔 주인은 솔직히 고백했다. 화이트데이 대목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날이 날인 만큼 젊은 연인들의 대실을 꽉 차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숙박은 10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랬다. 화이트데이였다. 모텔촌 인근에 대학교가 있다는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삼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성관념이 얼마나 쿨하고 개방적인지를 말이다.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고결한 단어가 싸구려처럼 남발되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견디겠다. 사실 작금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해외입양은 거의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모른다. 그리고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오묘한 특질이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발현된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더욱 들끓게 했다.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를 일군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까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의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의 삶으로 몸소 보여줬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년 100권의 청소년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사회과학 교수들이 엄정하게 선정한 것인데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책 선정의 자료로 삼는 것같다. 그러나 문화 탓인지, 기호 탓인지, 수준(?) 탓인지, 나는 그들네의 책 추천에 공감하기 힘들 때가 많다. 특히 몇 년 전에 발표된 추천리스트를 보며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버드 대학 교수들의 자질을 의심할 정도로 실망적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100권의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버젓하게 추천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쓰레기'로 보는 책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이라는 평가는 우습다. 순수 페미니즘의 정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가진 폭넓은 위험성에 있다. 이 책은 청소년의 성의식을 왜곡된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뿜어내고 있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 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저자만의 꼴불견식 해석은 부아가 치밀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로스(Philos)'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지적인(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독립적이고 의도적으로 떼어놓는 저자의 논지는 사랑의 본질적 해석에 한참 벗어나 있는 무지몽매無知蒙昧의 극치이자 찬탄스런 사랑의 원형에 대한 모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 곳에나 굴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인과 부부 사이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서로에게 전적인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사랑의 구속성을 타파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소리가 따로 없지만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저자 드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전도자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드 보부아르에게 사랑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게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계약결혼이라는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만큼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한 개념상의 상대적 제시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를 구구절절하게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쳤던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결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 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일갈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가치는 공히 지독한 희생과 철저한 책임의 카테고리 내에서 작동되고 발현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절제하는 것이고 지켜주는 것이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자명하다.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e)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무조건적으로 거짓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그 '거짓'과 '교만'은 분명한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죄를 면할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젊음만의 특질이며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숭고하고 순전한 통로라는 것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잊지 말라. 세계의 모든 질서와 권위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