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건, 한 사람이 지닌 사랑의 순수성은 그의 사상과 철학에도 반드시 묻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테일러에 대한 밀의 사랑은 순수하고 애절하다. 그리고 전존재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한 여인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야말로 밀이 진정한 '자유'를 탐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밀의 역작 <자유론>은 테일러 부인이 죽은 후에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질이란 말인가.

   수없이 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자신의 추잡스러운 여자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레기 같은 '연애론'이나 '사랑론'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을 깊이 고찰하면 할수록 그들의 사상과 철학은 자신의 꼴사나운 사생활 못지 않게 별볼일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19세기부터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카테고리를 정면으로 해부하며 천착한다. 그러나, 진정 귀담아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랑이 곧 전부'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인내와 희생이 뒤섞인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의 주장과 논리에는 무언가의 공허와 결락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의 범주를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며 경험을 쌓아가는 연애의 '기술자'보다 한 사람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예술가'가 삶의 영역에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사랑의 본질은 '대상의 다양성'보다 '존재로의 침잠'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의 깊이는 곧 삶의 풍성함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가. 혹은 답답한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톨스토이의 명언 하나!

   "네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를 아는 것은 천 명의 여자를 아는 것 이상으로 모든 여자를 잘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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