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타임스 세트 - 전2권
폴 존슨 지음, 조윤정 옮김 / 살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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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를 2독했다. 오래전에 읽은 것까지 합치면 총 3독을 한 것이다. 성경책 두께의 두 배가 넘는 역사책을 세 번씩이나 정독한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이 세 번이나 읽을 만한 가치를 지녔는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관점에서 20세기사를 꿰뚫어보는 데 이 책 만큼 적확하고 흥미로운 책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존슨은 이 책에서 현대세계는 1919년 5월 29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된 날이다. 아인슈타인은 태양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빛이 자신이 제시한 수치만큼 휘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핵심적인 가설이 실제측정을 통해 입증된 날이 바로 5월 29일이다. 그렇다면 상대성이론과 현대세계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상대성이론은 왜 근대를 끝맺음시켰는가. 저자는 역설한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유대·기독교'라는 종교적 동인이 약화되고 그 여백을 니체가 주장한 권력의지가 채우기 시작하는 단계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기초 위에 상대주의로 대변되는 20세기 고유한 특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은 상대성이론과 상대주의를 혼동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 혼동의 시작이 근대를 끝맺음시키고 현대를 여는 기준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시대의 구분을 특정 종교가 갖는 정신의 쇠락적 관점으로 풀어나간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서양사와 기독교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저자의 시각은 넓은 포용력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서양사는 기독교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서양세계에 전달한 문화와 정신 면에서 서양인 스스로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엄연한 전제 앞에서 20세기의 역사는 그 틀이 규정되고 작동될 수밖에 없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역사 탐색은 1차 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자살'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현대사의 굴곡을 지나 1990년대의 언저리까지 도달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이후 냉전체제를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폐해와 무기력함을 신랄하게 고발하며, 다시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저자가 현대사를 풀어나가며 사용한 정신적 문체는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 自由主義)'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바탕이 된 만개한 자유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유를 훼손하거나 억압시키는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며 비판한다. 이는 경제 역사에서도 일관되게 적용시킨다.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1930년대 이후의 경제사를 저자는 가차없이 난도질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위시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 또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모든 지도자와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저자의 시각에서는 양심없고 독선적이며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재평가된다.

   이러한 저자의 지나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의 역사기술은 보는 사람에 따라 거부감을 발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팩트를 무시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통계로 성실한 논증을 펼쳐낸다. 종전 후 스탈린의 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동유럽이 통째로 공산권이 되는 비극을 막지 못한 점을 꼬집는 존슨의 지적에 그 어떤 이념의 편향이 있단 말인가. 처칠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스탈린을 바라보고 예측하는 지혜에서만큼은 루즈벨트보다 몇 수 위였던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스탈린의 세계만큼 많은 수의 사람을 그토록 집요하게 살상한 체제가 있었던가. 스탈린 치하에서 죽은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1,300만 명이라는 건 주지의 통설이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히틀러라는 개버러지같은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전쟁 이후의 비극은 스탈린이라는 희대의 악마에 의해 진행되었다.

   20세기 공산권과 소위 '제 3세계'로 불리는 독재국가에서 자행된 사회공학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동유럽 공산국가의 숱한 독재, 중국의 모택동이 저지른 문화혁명, 캄보디아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전원화정책, 아프리카의 내전과 남미의 독재자들에 의해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살육과 핍박 등은 플라톤주의(Platonism)에 기초한 전체주의가 얼마나 거짓되고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은 19세기를 번영시켰던 동력이다. 그것이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20세기의 역사는 처절하고 고달픈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말장난에 불과한 개버러지같은 변증법으로 국가를 '객관화된 정신의 최고의 인륜형태'로 규정한 헤겔식의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부인하지 말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 사회와 국가를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한 믿음은 곧바로 현실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플라톤주의와 헤겔주의는 본래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 거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오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를 가족과 같이 만들 수 있다는 잔인한 착각이다.

   공산주의를 위시한 범사회주의적 사고의 맹점은 사회가 가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발생된다. 헤겔은 국가를 가족과 시민사회가 결합된 최고선의 인륜체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달콤한 말로 대중을 선동하며 사회와 가정을 혼동시켰다. 그러면서 폭력적 혁명을 부추겼다. 국가와 사회는 가정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인간은 산술적이고 결과적으로 평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거짓된 전제에 함몰된 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한 믿음과 착각은 결국 사회를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자기파괴였던 것이다. 현대사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모던 타임스>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로 끝맺음한다. 저자 폴 존슨은 미래를 무조건 희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가 얼만큼 지켜지고 확장되느냐의 관점, 동시에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식이 얼마나 생동감있게 살아있느냐의 관점을 통해, 바로 그 흐름의 과정에 달려있다고 일갈한다. 즉 저자는 사회와 국가가 아닌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인류의 희망찬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판단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이상 집단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사회라는 용광로에 빠져드는 참혹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각자의 창의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자유와 책임의 세계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쪽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서라는 한계는 반드시 존재한다. 저자의 주관적인 역사 해석이 너무 짙기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이 책의 한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차 대전 이후 세계를 뒤덮었던 전방위의 사회주의적 사고와 제도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무시하며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악마를 만들어냈던 토대가 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저자의 입장은 충분한 힘과 논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를 꿰뚫어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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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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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이게 바로 소설이다. 무릇 소설은 이래야 한다. 하루키는 문학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전범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다. 문학의 궁극은 인간이다. 소설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세밀하고 입체적인 성찰 위에 놓여 있다. 하루키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인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는 '인간 탐구'로 정리되는 소설의 목적론적 원형에 가장 성실한 의무이자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하루키의 힘이다.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긴 제목과는 달리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한 편의 소설을 평가하면서 인물과 플롯보다 문장을 먼저 논하는 게 매끄러운 순서가 아닐 수 있다. 본래 소설의 힘은 우선적으로 등장인물의 생명력과 탄탄한 구성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루키의 소설만은 예외다. 하루키 문학의 고유하고 독특한 주제인 '세계를 외면하며 자아 속으로 침투하는 나'를 표현하는데 있어 간결한 문장만큼 적확한 재료는 없다. 애매모호한 표현법이나 지나치게 만연한 문장은 하루키 스타일이 아니다. 딱딱 끊어지는 명료한 단문장이야말로 하루키 세계의 인물들에게 내재된 '우주 위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애'를 가장 잘 발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자 방법인 것이다.

   소설은 36세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나서는 순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쓰쿠루의 여정을 통해 개인과 개인 간의 거리, 자아와 타자 사이의 여백,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시간의 종속성, 내밀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 과정 등을 매우 담담하게 그려냈다. 어떤 장면에선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엄연하게 배리되어 있는 꿈의 세계를 통해, 또 어떤 곳에선 잃어버린 과거를 현재와 미래라는 전혀 다른 시간대의 배경으로 치환시키는 차원 이동의 놀이터로, 또 다른 곳에선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더이상 진실됨의 유의미성을 보증할 수 없는 '본질된 참'의 애매성으로, 작가는 한 개인이 반드시 짊어져야만 하는 숭고한 순례의 길을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주인공 쓰쿠루는 극도 공허와 절대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하루키적 인물의 전형이다. '삼십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현재의 시점과 학창시절의 잃어버린 과거의 시점이 반복적으로 교차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때는 세계의 전부로만 여겨졌던 학창시절의 네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버림받은 쓰쿠루의 아픈 상처와 이로 야기된 극강의 외로움은 소설 전체의 질감을 규정해버리는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대학시절 잠시나마 쓰쿠루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하이다와 현재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 사라는 쓰쿠루에게 긍정의 아이콘이다. 그토록 절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한 쓰쿠루에게 하이다와 사라는 쓰쿠루 자신의 삶을 재차 돌아보게 하고 원했던 죽음을 포기하게 하는 희망의 동력이 된다.

   외연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색채'에 대한 이야기다. 쓰쿠루를 버렸던 나고야 학창시절의 네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담고 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등 색채가 들어가 있는 네 친구들과 달리 쓰쿠루는 색채가 없다. 남자 친구 둘은 성이 아카마스(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친구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野)였다. 오직 쓰쿠루만이 색깔과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쓰쿠루의 컴플렉스(?)는 차후 그가 인간관계에서 아이러니한 민감성을 갖게 되는 내밀한 원인이 된다. 이후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이름에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쓰쿠루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이름에 국한된 것임에도 색깔의 결여를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존재론적 위험으로 규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쓰쿠루의 이 불편한 착각이 소설의 분위기를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네 친구들로부터 그룹에서 버림받았을 때, 그것은 마치 쓰쿠루의 '무색채'가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영을 통해 사귄 하이다와의 짧은 만남과 친구이자 연인인 사라와의 관계를 통해 쓰쿠루는 자신에게도 색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나간다. 사라의 제안에 따라 16년만에 네 친구들을 직접 만나는 용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절교당한 이유와 이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을 하나둘씩 알아가게 된다. 이 순례의 여정은 쓰쿠루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했던 '본질된 참 나'로서의 색채가 지니고 있던 고유성과 명징성을 발견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하루키 문학의 전형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는 소설 속 장치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음악'과 '섹스'는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들이다. 하루키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에서 일관되게 음악을 틀어왔고 끊임없이 섹스를 표현해왔다. 소설에서 베르만이 연주하는 <순례의 해>가 끊임없이 재생 반복되는데 이는 쓰쿠루의 내면을 정돈시키는 핵심적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섹스씬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성행위 묘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방향성과 현재성을 담아내는 중요한 메타포가 된다. 즉 음악을 통해 평정을 얻는 인간상의 설정과 거듭 반복되는 구체적인 섹스장면의 배치는 인간의 내면와 외연을 이어주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합치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에 대한 소중한 이미지인 것이다.

   한 가지 의문해보자. 소설에서 하루키가 제시한 '순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이에 대한 사유는 이 소설을 오롯하게 흡수하는데 꽤 중요하다. 왜냐하면 쓰쿠루의 순례가 외연적으로는 절교당한 이유를 찾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종국의 내포적 의미는 '나'를 객관적으로 천착하기 위해 나서는 열정적인 자기발견과정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참된 내면 속으로 끊임없이 침잠하며 진정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된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타인의 자아도 '나'의 의식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하루키의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나'가 된다.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 즉 결락 내지는 타자화한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외부세계로 한걸음 내딛게 된다. 즉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그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흐름인 동시에 전작 『1Q84』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사실 새로울 건 없다. '나'에 대한 끊임없는 객관성의 부여, 그리고 그 유일한 매개로써 '사랑'이라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선善을 제시한 이야기 구도는 항시 하루키가 그려왔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음으로써 시작된다. 거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소년의 행동이 세계가 일그러지는 모든 판타지 현상을 추동한다. 즉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종교, 문화, 관념, 철학, 현실, 상실, 고독 등은 '나'라는 실존성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1Q84』의 초반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지류들이 후반부에서는 한 줄기 본류로 통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내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1Q84』의 주제를 그대로 재청한다. 결국 쓰쿠루를 억누른 극도의 공허와 불안은 현실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해결책으로 존재한 사라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해소되고 부서진다. 쓰쿠루가 순례의 길을 통해 가장 핵심적으로 깨달은 것은 사라를 사랑하고 있는 엄연성에 대한 명확한 자기인식이었다. 사라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후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국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에 대해 쓰쿠루는 선연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혼란의 실타래를 종국적으로 사랑이 끝맺음시킨다는 하루키적 메시지의 보편을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개인 간의 거리를 천착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자신의 진본을 명징화해 나가는,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참 잘 썼다. 역시 하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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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이웃님으로부터 폴 존슨(Paul Bede Johnson)의 <2천 년 동안의 정신,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세 권의 두꺼운 기독교 역사책을 추천받았다. 살림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데 현재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4대 온라인서점을 위시하여 오프라인 대형서점을 두루 훑고 다녔지만 단 한 권도 찾지 못했다. 중고로 사는 것은 마뜩치 않았다. 새 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출판사에 직접 연락했다. 종국적으로 파주시 출판단지까지 가서 몇 권 남지 않았던 새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간명하다. 기독교 역사 2천 년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물론 이 책만 갖고 교회사를 개괄해보려는 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이신 교회의 협동목사님으로부터 평신도가 읽는데 부담이 없고 동시에 가볍지 않은 책을 추천받았다. 그 책은 별도로 주문했다. 즉 기독교 내부의 시각에서 쓴 책과 외부의 관점에서 쓴 책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나름 확보해보려 한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다. 엄연한 보수주의자로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천착하고 있는 석학이다. 그의 저작 중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20세기 현대사를 꿰뚫을 수 있는 명저이며, <지식인의 두 얼굴, Intellectuals>은 기존 지식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파헤친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저자 특유의 방대한 자료 모음과 힘 넘치는 서술은 그의 저작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그간 읽어왔던 존슨의 책들을 통해 그의 집필 스타일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이웃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2천 년 동안의 정신>은 적기에 내 손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는 이곳저곳에서 어마어마한 욕들을 폭포수처럼 얻어맞고 있다. 물론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 중에는 사실과 다르고 논리가 빈약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한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욕 먹을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교회 관련 좋지 않은 뉴스를 접하게 되면 기독교인으로서 치솟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감출 방도가 없다.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면 이런 문제가 비단 한국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봉착한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간 인류에게 선사한 밝은 에너지의 이면에는 참혹한 역사적 편린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위시하여 참혹한 전쟁과 살육의 피의자로서 교회권력은 직·간접적인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해왔다. 이에 수박 겉 핡기 식으로 배우고 알아왔떤 교회사에 대해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정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며 세계와 대화하는 일은 적잖이 고통스럽다. 신神의 가르침은 세상과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을 선포한다. 이 '단절'과 '구별'을 구분하고 해석하며 실천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지식에 대해 제대로 알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고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필히 세상과 씨름할 수밖에 없는 이 지독한 '인간적 실존'은 본질적이고 태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추동하는 '신적 본질'에 종속된 채 맞물려 나아가는 함수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 고민은 결국 지성의 목마름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었다. 2천 년의 교회사를 침착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협동목사님의 추천도서는 분명한 신앙서적에 속한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오셨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건강하고 은혜롭게 다루었다. 반면 존슨의 책은 저자 자신이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객관성을 견지하며 교회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내부와 외부의 관점을 동시에 탐구하는 양자적兩者的 책읽기는 교회사를 균형있고 입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의 저서와 철학사 관련 책을 끝내면 바로 진행할 계획이다.

   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의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통과 질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직 믿음'으로 대변되는 칼빈주의(Calvinism , ─主義) 신학을 굳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무신론(atheism , 無神論)과 범신론(pantheism , 汎神論)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관념'으로 규정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 and Leinism)의 계급사상과 유물론(materialism , 唯物論)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자생적 행동과 행위에 존재적 본질을 두는 프랑스식 실존주의(existentialism , 實存主義) 철학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세상의 목소리에 무조건적인 배타로 일관하는 꽉 막힌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상과 타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세상과 따뜻하게 호흡하기를 소원하는 내 지성과 열정에 대한 존재론적 약동인 것이다. 이번 책읽기가 그 길을 안내하는 작은 촛불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
오. 주님. 신앙고백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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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톨스토이 전집이 출간된다. 그것도 국내 유일의 톨스토이 전문가인 박형규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전 교수의 번역을 통해서 말이다. 북한 미사일 사태를 위시하여 시끄럽고 우울한 뉴스의 홍수 속에서 톨스토이 전집 출간 소식은 단연 빛나는 보석과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더욱이 모든 작품을 박 교수가 직접 번역한다니. 날아갈 것 같다.

   사실 '톨스토이 전집'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재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모두 9권이 나와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 불멸의 대작 <전쟁과 평화>가 누락된 상태에서 중단된 상황이다. 박 교수는 이미 출간된 <안나 까레니나>를 시작으로 출판사 뿌쉬낀하우스를 통해 내년 말까지 모두 18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을 번역해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전집에서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에 세 권짜리로 들어 있는 <안나 까레니나>를 1,000쪽이 넘는 양장본 한 권으로 편집했으며, 200자 원고지로 1만장에 이르는 <전쟁과 평화>를 두 권으로 분책하는 등 분량부터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이번 전집 작업에 눈과 귀를 모으고 요란하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톨스토이의 본격적인 전집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작업이라는 데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전집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초기 중·단편집 <악마>, <결혼의 행복>, 희곡집 <어둠의 힘>, 후기 중·단편집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예술·문학·교육론집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종교·사회평론집 <고백> 등은 그의 번역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기존 번역 역시 신역에 가깝게 손을 보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는 박 교수의 비전은 나같은 톨스토이빠 독자에게는 환희이자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82세라는 연로한 연세에도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 수고하며 헌신하는 박 교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 교수는 러시아 문학자이자 해방 이후 1세대 번역가로서 톨스토이 문학의 천착과 번역작업에 60년의 시간을 바치며 오직 학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의 노고는 훗날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억해줄 것이다. 부디 무탈하게 귀하고 거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한다.

 

 

 

 

[사진출처:해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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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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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이 대단한 작가임은 분명한 것 같다. 단편이라 할 수도 없는 짧은 에피소드만으로 구성된 얇디 얇은 그의 신간 소설집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2위권까지 진입했으니 말이다. 만약 이번 신간을 신경숙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그게 바로 신경숙의 힘이기도 하다. 요컨대 신경숙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휘감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힘은 크게 두 군데서 발현된다. 하나는 '문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게'이다. 그의 문체는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자기 자신조차도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할 만큼 섬세하고 세련된 문체는 소설가 신경숙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질이다.

   또한 신경숙의 글쓰기는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신의 내면에만 있는 비밀 이야기를 꺼내어 냄으로써 산다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고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소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를 명징하게 관통하면서 인간 삶이 가진 내밀한 무게를 끊임없이 측정해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기존의 무겁고 진지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신경숙의 신간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스물여섯 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일상과 상상에서 다양한 소재를 선택해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각 에피소드들은 각기 독립적인 주제와 울림으로 독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이 짤막한 소설집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신경숙 소설의 '농담'과 '가벼움'의 색다른 세계로 독자를 편안하게 일탈시킨다.

   작가는 제목에서 이미 이야기의 전달 대상을 규정했다. 작가에게 달은 어떤 존재일까. 인류의 발이 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호기심을 발현시키는 달의 존재감은 유한한 친근성과 무한한 신비성의 합일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우주적 비밀이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달을 향한 방향성으로 전제되고 있는데, 이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약동이 마치 달에서는 전혀 다른 기적과 신비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는 작가적 장치가 된다.

   '달'로의 도피는 신경숙이 소설가로서 그간 지향해왔던 자신만의 창작세계의 고유개별성을 잠시나마 일탈하고자 하는 독특한 방식의 아이러니다. 이는 '작가의 말'에서 그가 고백한,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그의 집필철학으로 자연스럽게 회귀한다. 즉 신경숙은 자신의 문학사를 배반하는 이 가벼운 소설집을 친근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지구의 위성인 달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그의 기존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사실 이런류의 짧은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단문장의 힘은 믿는다. 문체와 문단의 간결함과 명확함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서사와 이야기의 짧은 호흡은 되도록 외면하고 있다. 단편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단편의 한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궁극적인 힘은 장편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의 분량도 못 되는 극히 짧은 에피소드 모음집을 내가 손에 든 이유는 간명하다. 그것은 순전히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텍스트로만 읽혀져야 한다는 내 신념이 가끔 굴곡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항시 작가의 존재성에서 발생된 문제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이 대목에서 묻는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서 평가해야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역사성과 개별성의 합일을 독자만의 주관적인 원리로 화확화할 수도 있다, 라고 한다면 지나친 궤변인가. 궤변이라 해도 좋다. 이러한 조악한 상대주의에 빠져도 될 만큼 나에게 신경숙은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돌아온 신경숙이 마냥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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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2013-04-11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경숙 이라서 였을겁니다. 형식을 경쾌하고 가벼운 쪽을 택했을뿐 읽고 난 여운은 어느 긴 소설보다 크더군요. 내겐 모처럼의 힐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