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웃님으로부터 폴 존슨(Paul Bede Johnson)의 <2천 년 동안의 정신,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세 권의 두꺼운 기독교 역사책을 추천받았다. 살림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데 현재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4대 온라인서점을 위시하여 오프라인 대형서점을 두루 훑고 다녔지만 단 한 권도 찾지 못했다. 중고로 사는 것은 마뜩치 않았다. 새 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출판사에 직접 연락했다. 종국적으로 파주시 출판단지까지 가서 몇 권 남지 않았던 새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간명하다. 기독교 역사 2천 년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물론 이 책만 갖고 교회사를 개괄해보려는 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이신 교회의 협동목사님으로부터 평신도가 읽는데 부담이 없고 동시에 가볍지 않은 책을 추천받았다. 그 책은 별도로 주문했다. 즉 기독교 내부의 시각에서 쓴 책과 외부의 관점에서 쓴 책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나름 확보해보려 한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다. 엄연한 보수주의자로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천착하고 있는 석학이다. 그의 저작 중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20세기 현대사를 꿰뚫을 수 있는 명저이며, <지식인의 두 얼굴, Intellectuals>은 기존 지식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파헤친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저자 특유의 방대한 자료 모음과 힘 넘치는 서술은 그의 저작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그간 읽어왔던 존슨의 책들을 통해 그의 집필 스타일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이웃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2천 년 동안의 정신>은 적기에 내 손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는 이곳저곳에서 어마어마한 욕들을 폭포수처럼 얻어맞고 있다. 물론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 중에는 사실과 다르고 논리가 빈약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한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욕 먹을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교회 관련 좋지 않은 뉴스를 접하게 되면 기독교인으로서 치솟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감출 방도가 없다.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면 이런 문제가 비단 한국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봉착한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간 인류에게 선사한 밝은 에너지의 이면에는 참혹한 역사적 편린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위시하여 참혹한 전쟁과 살육의 피의자로서 교회권력은 직·간접적인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해왔다. 이에 수박 겉 핡기 식으로 배우고 알아왔떤 교회사에 대해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정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며 세계와 대화하는 일은 적잖이 고통스럽다. 신神의 가르침은 세상과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을 선포한다. 이 '단절'과 '구별'을 구분하고 해석하며 실천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지식에 대해 제대로 알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고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필히 세상과 씨름할 수밖에 없는 이 지독한 '인간적 실존'은 본질적이고 태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추동하는 '신적 본질'에 종속된 채 맞물려 나아가는 함수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 고민은 결국 지성의 목마름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었다. 2천 년의 교회사를 침착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협동목사님의 추천도서는 분명한 신앙서적에 속한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오셨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건강하고 은혜롭게 다루었다. 반면 존슨의 책은 저자 자신이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객관성을 견지하며 교회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내부와 외부의 관점을 동시에 탐구하는 양자적兩者的 책읽기는 교회사를 균형있고 입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의 저서와 철학사 관련 책을 끝내면 바로 진행할 계획이다.

   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의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통과 질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직 믿음'으로 대변되는 칼빈주의(Calvinism , ─主義) 신학을 굳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무신론(atheism , 無神論)과 범신론(pantheism , 汎神論)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관념'으로 규정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 and Leinism)의 계급사상과 유물론(materialism , 唯物論)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자생적 행동과 행위에 존재적 본질을 두는 프랑스식 실존주의(existentialism , 實存主義) 철학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세상의 목소리에 무조건적인 배타로 일관하는 꽉 막힌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상과 타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세상과 따뜻하게 호흡하기를 소원하는 내 지성과 열정에 대한 존재론적 약동인 것이다. 이번 책읽기가 그 길을 안내하는 작은 촛불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
오. 주님. 신앙고백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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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톨스토이 전집이 출간된다. 그것도 국내 유일의 톨스토이 전문가인 박형규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전 교수의 번역을 통해서 말이다. 북한 미사일 사태를 위시하여 시끄럽고 우울한 뉴스의 홍수 속에서 톨스토이 전집 출간 소식은 단연 빛나는 보석과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더욱이 모든 작품을 박 교수가 직접 번역한다니. 날아갈 것 같다.

   사실 '톨스토이 전집'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재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모두 9권이 나와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 불멸의 대작 <전쟁과 평화>가 누락된 상태에서 중단된 상황이다. 박 교수는 이미 출간된 <안나 까레니나>를 시작으로 출판사 뿌쉬낀하우스를 통해 내년 말까지 모두 18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을 번역해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전집에서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에 세 권짜리로 들어 있는 <안나 까레니나>를 1,000쪽이 넘는 양장본 한 권으로 편집했으며, 200자 원고지로 1만장에 이르는 <전쟁과 평화>를 두 권으로 분책하는 등 분량부터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이번 전집 작업에 눈과 귀를 모으고 요란하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톨스토이의 본격적인 전집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작업이라는 데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전집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초기 중·단편집 <악마>, <결혼의 행복>, 희곡집 <어둠의 힘>, 후기 중·단편집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예술·문학·교육론집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종교·사회평론집 <고백> 등은 그의 번역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기존 번역 역시 신역에 가깝게 손을 보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는 박 교수의 비전은 나같은 톨스토이빠 독자에게는 환희이자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82세라는 연로한 연세에도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 수고하며 헌신하는 박 교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 교수는 러시아 문학자이자 해방 이후 1세대 번역가로서 톨스토이 문학의 천착과 번역작업에 60년의 시간을 바치며 오직 학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의 노고는 훗날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억해줄 것이다. 부디 무탈하게 귀하고 거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한다.

 

 

 

 

[사진출처:해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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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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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이 대단한 작가임은 분명한 것 같다. 단편이라 할 수도 없는 짧은 에피소드만으로 구성된 얇디 얇은 그의 신간 소설집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2위권까지 진입했으니 말이다. 만약 이번 신간을 신경숙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그게 바로 신경숙의 힘이기도 하다. 요컨대 신경숙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휘감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힘은 크게 두 군데서 발현된다. 하나는 '문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게'이다. 그의 문체는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자기 자신조차도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할 만큼 섬세하고 세련된 문체는 소설가 신경숙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질이다.

   또한 신경숙의 글쓰기는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신의 내면에만 있는 비밀 이야기를 꺼내어 냄으로써 산다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고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소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를 명징하게 관통하면서 인간 삶이 가진 내밀한 무게를 끊임없이 측정해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기존의 무겁고 진지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신경숙의 신간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스물여섯 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일상과 상상에서 다양한 소재를 선택해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각 에피소드들은 각기 독립적인 주제와 울림으로 독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이 짤막한 소설집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신경숙 소설의 '농담'과 '가벼움'의 색다른 세계로 독자를 편안하게 일탈시킨다.

   작가는 제목에서 이미 이야기의 전달 대상을 규정했다. 작가에게 달은 어떤 존재일까. 인류의 발이 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호기심을 발현시키는 달의 존재감은 유한한 친근성과 무한한 신비성의 합일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우주적 비밀이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달을 향한 방향성으로 전제되고 있는데, 이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약동이 마치 달에서는 전혀 다른 기적과 신비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는 작가적 장치가 된다.

   '달'로의 도피는 신경숙이 소설가로서 그간 지향해왔던 자신만의 창작세계의 고유개별성을 잠시나마 일탈하고자 하는 독특한 방식의 아이러니다. 이는 '작가의 말'에서 그가 고백한,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그의 집필철학으로 자연스럽게 회귀한다. 즉 신경숙은 자신의 문학사를 배반하는 이 가벼운 소설집을 친근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지구의 위성인 달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그의 기존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사실 이런류의 짧은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단문장의 힘은 믿는다. 문체와 문단의 간결함과 명확함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서사와 이야기의 짧은 호흡은 되도록 외면하고 있다. 단편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단편의 한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궁극적인 힘은 장편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의 분량도 못 되는 극히 짧은 에피소드 모음집을 내가 손에 든 이유는 간명하다. 그것은 순전히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텍스트로만 읽혀져야 한다는 내 신념이 가끔 굴곡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항시 작가의 존재성에서 발생된 문제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이 대목에서 묻는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서 평가해야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역사성과 개별성의 합일을 독자만의 주관적인 원리로 화확화할 수도 있다, 라고 한다면 지나친 궤변인가. 궤변이라 해도 좋다. 이러한 조악한 상대주의에 빠져도 될 만큼 나에게 신경숙은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돌아온 신경숙이 마냥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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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2013-04-11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경숙 이라서 였을겁니다. 형식을 경쾌하고 가벼운 쪽을 택했을뿐 읽고 난 여운은 어느 긴 소설보다 크더군요. 내겐 모처럼의 힐링이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건, 한 사람이 지닌 사랑의 순수성은 그의 사상과 철학에도 반드시 묻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테일러에 대한 밀의 사랑은 순수하고 애절하다. 그리고 전존재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한 여인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야말로 밀이 진정한 '자유'를 탐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밀의 역작 <자유론>은 테일러 부인이 죽은 후에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질이란 말인가.

   수없이 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자신의 추잡스러운 여자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레기 같은 '연애론'이나 '사랑론'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을 깊이 고찰하면 할수록 그들의 사상과 철학은 자신의 꼴사나운 사생활 못지 않게 별볼일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19세기부터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카테고리를 정면으로 해부하며 천착한다. 그러나, 진정 귀담아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랑이 곧 전부'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인내와 희생이 뒤섞인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의 주장과 논리에는 무언가의 공허와 결락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의 범주를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며 경험을 쌓아가는 연애의 '기술자'보다 한 사람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예술가'가 삶의 영역에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사랑의 본질은 '대상의 다양성'보다 '존재로의 침잠'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의 깊이는 곧 삶의 풍성함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가. 혹은 답답한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톨스토이의 명언 하나!

   "네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를 아는 것은 천 명의 여자를 아는 것 이상으로 모든 여자를 잘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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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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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누군가 와서 '무인도에 단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책들을 가져갈 것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무런 고민 없이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그 리스트와 순번이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의 의미와 가치를 장대한 서사 속에 그려낸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중 첫 번째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진보적 힘은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 추동한다고 역설했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두 번째로 꼽힌다. 인간의 속성을 낙관적으로 인식하며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창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마지막 세 번째 순번에 놓인다. 요컨대 이 세 편의 걸작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보물과 같은 고전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밀의 주장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자유'와 '개별성'이야말로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의 가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발전과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밀은 무조건적인 자유를 지지하지 않는다. 밀이 자유를 주장한 밑바탕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교육 받고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자유 못지 않게 개인의 사회적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상치(相値)가 아닌 조화(調和)의 원리에서 개인의 개별성을 사회성과 긴밀하게 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밀이 '진보적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밀의 철학에서 '개별성(個別性, individuality)'과 '사회성(社會性, sociality)'에 대한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개별성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했을 때, 그것이 본래적으로 품고 있는 독창성과 신비성으로 사회적 진보를 추진시키는 원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을 사회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다양한 타자의 개별성과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 즉 사회성과 결합되었을 때 인간 사회는 궁극적인 행복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밀은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긍정하며 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밀의 낙관주의적 태도는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희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그의 사상 전체를 휘감고 있는 특질이다.
이 특질은 그의 사상이 벤담이 창시한 고전적인 것과 구별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도덕성의 쾌락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해 밀의 그것은 쾌락의 질적 고상성(質的 高相性), 즉 인간의 지성과 고귀함의 영역을 긍정하며 이를 최우선적인 전제로 상정한다. 이는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데,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외치며 쾌락의 양적인 면을 강조했던 벤담의 입장과는 분명하게 배치돼 있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밀의 명언은 인간 정신의 철학적 태도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잘 압축한다.

   내가 분명한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150년 전에 쓰여진 <자유론>을 다시 꺼내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지닌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형식의 엄연성에 비해 법률과 제도권, 언론과 다수 국민의 선진적인 의식 수준은 꽤 많이 결핍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표현하자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국사회는 불관용의 사회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너'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관용은 '다름'과 '틀림'을 혼동한다. '다른(different)'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 '틀린(be wrong)' 것은 곧바로 악(惡)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밀은 분명히 말한다. 설령 잘못된(옳지 않은) 의견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억압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심각한 문제와 위험을 담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버젓하게 살아있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네르바 사건' 같은 촌극이 다시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이는 좌파·우파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해온 내가 '국가보안법'과 '미네르바 사건'을 거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보안법 논쟁은 국가안보의 문제가 아니고 미네르바 촌극은 허위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사상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문제'인 것이다. 비록 당치도 않은 오류투성이의 의견이거나 귀담을 가치가 부족한 극소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을 주장하고 표현하는 자유 만큼은 전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닌 지성과 상식의 힘으로 충분히 분별하고 자정(自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은 사상 및 출판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매우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참된 것은 참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참된 것은 그 자체로서 진리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거짓된 것은 참된 것과 대비됨으로써 진리를 더욱 명징하게 빛낼 수 있는 원료로서의 가치를 띠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다. 즉 개인이 잘못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행위와 이를 보장하는 공동체적 관용은 오류 그 자체를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국가보안법 존폐 논쟁'이나 '미네르바 사법사건'을 위시하여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불관용의 카르텔은 바로 이 대목에서 새삼 곱씹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유가 모든 것을 구원할 수는 없다. 인간은 분명 유한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다른 가치가 환원할 수 없는 고유의 보편적 선을 갖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사실이다. 일시적으로, 혹은 특수적으로 잠시 역행하거나 굴곡된 적은 있었지만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조망에서 인류사는 개인의 자유가 뻗어나가는 역사였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장려되지 않는 사회는 발전이 없고 기대가 없으며 진보가 없다. 이는 역사가 명징하게 증명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고도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대중(大衆)'이라는 이름으로 평준화하고 획일화시킨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마저도 대량생산으로 일원화시키는 현대사회의 조악함은 개별성을 바탕로 하는 인간의 독창적인 진보와 발전을 저해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체주의적이고 산술적 평등의 사고를 고착시켜 결국 인간의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비자유의 사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 더 나아가 포스트 현대사회를 내다보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우려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밀은 150년 전에 이미 작금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밀의 고민이 분명한 현실로 드러난 이상, 우리에게 다른 해결책은 없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인 사회성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애쓰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150년의 시간차를 넘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야 마는 우렁차고 핵심적인 일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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