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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세트 - 전2권
폴 존슨 지음, 조윤정 옮김 / 살림 / 2008년 1월
평점 :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를 2독했다. 오래전에 읽은 것까지 합치면 총 3독을 한 것이다. 성경책 두께의 두 배가 넘는 역사책을 세 번씩이나 정독한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이 세 번이나 읽을 만한 가치를 지녔는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관점에서 20세기사를 꿰뚫어보는 데 이 책 만큼 적확하고 흥미로운 책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존슨은 이 책에서 현대세계는 1919년 5월 29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된 날이다. 아인슈타인은 태양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빛이 자신이 제시한 수치만큼 휘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핵심적인 가설이 실제측정을 통해 입증된 날이 바로 5월 29일이다. 그렇다면 상대성이론과 현대세계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상대성이론은 왜 근대를 끝맺음시켰는가. 저자는 역설한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유대·기독교'라는 종교적 동인이 약화되고 그 여백을 니체가 주장한 권력의지가 채우기 시작하는 단계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기초 위에 상대주의로 대변되는 20세기 고유한 특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은 상대성이론과 상대주의를 혼동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 혼동의 시작이 근대를 끝맺음시키고 현대를 여는 기준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시대의 구분을 특정 종교가 갖는 정신의 쇠락적 관점으로 풀어나간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서양사와 기독교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저자의 시각은 넓은 포용력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서양사는 기독교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서양세계에 전달한 문화와 정신 면에서 서양인 스스로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엄연한 전제 앞에서 20세기의 역사는 그 틀이 규정되고 작동될 수밖에 없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역사 탐색은 1차 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자살'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현대사의 굴곡을 지나 1990년대의 언저리까지 도달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이후 냉전체제를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폐해와 무기력함을 신랄하게 고발하며, 다시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저자가 현대사를 풀어나가며 사용한 정신적 문체는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 自由主義)'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바탕이 된 만개한 자유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유를 훼손하거나 억압시키는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며 비판한다. 이는 경제 역사에서도 일관되게 적용시킨다.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1930년대 이후의 경제사를 저자는 가차없이 난도질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위시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 또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모든 지도자와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저자의 시각에서는 양심없고 독선적이며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재평가된다.
이러한 저자의 지나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의 역사기술은 보는 사람에 따라 거부감을 발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팩트를 무시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통계로 성실한 논증을 펼쳐낸다. 종전 후 스탈린의 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동유럽이 통째로 공산권이 되는 비극을 막지 못한 점을 꼬집는 존슨의 지적에 그 어떤 이념의 편향이 있단 말인가. 처칠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스탈린을 바라보고 예측하는 지혜에서만큼은 루즈벨트보다 몇 수 위였던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스탈린의 세계만큼 많은 수의 사람을 그토록 집요하게 살상한 체제가 있었던가. 스탈린 치하에서 죽은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1,300만 명이라는 건 주지의 통설이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히틀러라는 개버러지같은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전쟁 이후의 비극은 스탈린이라는 희대의 악마에 의해 진행되었다.
20세기 공산권과 소위 '제 3세계'로 불리는 독재국가에서 자행된 사회공학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동유럽 공산국가의 숱한 독재, 중국의 모택동이 저지른 문화혁명, 캄보디아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전원화정책, 아프리카의 내전과 남미의 독재자들에 의해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살육과 핍박 등은 플라톤주의(Platonism)에 기초한 전체주의가 얼마나 거짓되고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은 19세기를 번영시켰던 동력이다. 그것이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20세기의 역사는 처절하고 고달픈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말장난에 불과한 개버러지같은 변증법으로 국가를 '객관화된 정신의 최고의 인륜형태'로 규정한 헤겔식의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부인하지 말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 사회와 국가를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한 믿음은 곧바로 현실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플라톤주의와 헤겔주의는 본래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 거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오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를 가족과 같이 만들 수 있다는 잔인한 착각이다.
공산주의를 위시한 범사회주의적 사고의 맹점은 사회가 가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발생된다. 헤겔은 국가를 가족과 시민사회가 결합된 최고선의 인륜체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달콤한 말로 대중을 선동하며 사회와 가정을 혼동시켰다. 그러면서 폭력적 혁명을 부추겼다. 국가와 사회는 가정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인간은 산술적이고 결과적으로 평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거짓된 전제에 함몰된 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한 믿음과 착각은 결국 사회를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자기파괴였던 것이다. 현대사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모던 타임스>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로 끝맺음한다. 저자 폴 존슨은 미래를 무조건 희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가 얼만큼 지켜지고 확장되느냐의 관점, 동시에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식이 얼마나 생동감있게 살아있느냐의 관점을 통해, 바로 그 흐름의 과정에 달려있다고 일갈한다. 즉 저자는 사회와 국가가 아닌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인류의 희망찬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판단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이상 집단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사회라는 용광로에 빠져드는 참혹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각자의 창의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자유와 책임의 세계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쪽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서라는 한계는 반드시 존재한다. 저자의 주관적인 역사 해석이 너무 짙기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이 책의 한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차 대전 이후 세계를 뒤덮었던 전방위의 사회주의적 사고와 제도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무시하며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악마를 만들어냈던 토대가 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저자의 입장은 충분한 힘과 논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를 꿰뚫어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