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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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이 대단한 작가임은 분명한 것 같다. 단편이라 할 수도 없는 짧은 에피소드만으로 구성된 얇디 얇은 그의 신간 소설집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2위권까지 진입했으니 말이다. 만약 이번 신간을 신경숙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그게 바로 신경숙의 힘이기도 하다. 요컨대 신경숙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휘감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힘은 크게 두 군데서 발현된다. 하나는 '문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게'이다. 그의 문체는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자기 자신조차도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할 만큼 섬세하고 세련된 문체는 소설가 신경숙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질이다.

   또한 신경숙의 글쓰기는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신의 내면에만 있는 비밀 이야기를 꺼내어 냄으로써 산다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고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소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를 명징하게 관통하면서 인간 삶이 가진 내밀한 무게를 끊임없이 측정해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기존의 무겁고 진지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신경숙의 신간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스물여섯 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일상과 상상에서 다양한 소재를 선택해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각 에피소드들은 각기 독립적인 주제와 울림으로 독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이 짤막한 소설집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신경숙 소설의 '농담'과 '가벼움'의 색다른 세계로 독자를 편안하게 일탈시킨다.

   작가는 제목에서 이미 이야기의 전달 대상을 규정했다. 작가에게 달은 어떤 존재일까. 인류의 발이 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호기심을 발현시키는 달의 존재감은 유한한 친근성과 무한한 신비성의 합일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우주적 비밀이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달을 향한 방향성으로 전제되고 있는데, 이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약동이 마치 달에서는 전혀 다른 기적과 신비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는 작가적 장치가 된다.

   '달'로의 도피는 신경숙이 소설가로서 그간 지향해왔던 자신만의 창작세계의 고유개별성을 잠시나마 일탈하고자 하는 독특한 방식의 아이러니다. 이는 '작가의 말'에서 그가 고백한,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그의 집필철학으로 자연스럽게 회귀한다. 즉 신경숙은 자신의 문학사를 배반하는 이 가벼운 소설집을 친근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지구의 위성인 달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그의 기존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사실 이런류의 짧은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단문장의 힘은 믿는다. 문체와 문단의 간결함과 명확함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서사와 이야기의 짧은 호흡은 되도록 외면하고 있다. 단편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단편의 한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궁극적인 힘은 장편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의 분량도 못 되는 극히 짧은 에피소드 모음집을 내가 손에 든 이유는 간명하다. 그것은 순전히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텍스트로만 읽혀져야 한다는 내 신념이 가끔 굴곡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항시 작가의 존재성에서 발생된 문제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이 대목에서 묻는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서 평가해야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역사성과 개별성의 합일을 독자만의 주관적인 원리로 화확화할 수도 있다, 라고 한다면 지나친 궤변인가. 궤변이라 해도 좋다. 이러한 조악한 상대주의에 빠져도 될 만큼 나에게 신경숙은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돌아온 신경숙이 마냥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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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2013-04-11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경숙 이라서 였을겁니다. 형식을 경쾌하고 가벼운 쪽을 택했을뿐 읽고 난 여운은 어느 긴 소설보다 크더군요. 내겐 모처럼의 힐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