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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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힘들다. 홉스는 말했다. 인생은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을. 잠시 웃다가도 순간을 서글퍼하며 찰나에 좌절하는 게 인간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성 위에서 펼쳐진다. 자기 앞에 놓여진 복잡다단한 일상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힘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항시 고단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도 하다.

   고단한 인생 가운데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삶의 배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상理想이 아니다. 인간이 고통이라는 삶의 엄연한 터널을 통과하게 될 때, 그 속의 공허와 빛의 결여는 행복을 이루는 과정인 동시에 행복 그 자체가 된다. 즉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본질이다. 실존은 그 다음이다. 이것이 바로 유일한 인간 삶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항시 고통을 포용한다. 그 점이 삶의 딜레마다.

   기다림은 본래 신神의 영역이다. 인간은 설계학적으로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종족이다. 인간사 모든 불행의 근원은 기다림의 부재 혹은 망각에서 비롯됐다. 인간은 기다린 만큼 행복했고 기다리지 못한 만큼 불행했다. 기다림의 마지노선을 지켜내지 못한 인간은 결국 늪에 빠졌다. 신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다. 그 벌은 바로 '상실喪失'이라는 참혹한 슬픔이다. 결국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를 통해 끓어오르는 최극한의 슬픔에 직면하여 자신의 교만을 뒤엎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채웠던 것의 반의지적 결락은 슬픔의 무한대를 통과하여 극한의 고통을 완성시킨다. 궁극의 대상이 시공간에서 이탈되는 경험은 아픔을 말할 수조차 없는 최고의 고통이자 비극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실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잊고 잃으며 잃고 잊는 게 인간의 수준이다 . 상실은 회복되지 않지만 때로는 망각을 통해 구원받는다. 즉 인간은 상실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망각을 지향하는 특수한 시간의 물리력으로 무장한 단 하나의 존재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은 항시 어둡고 처연한 배경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그러나 어두움이 어두움만으로, 처연함이 처연함만으로 존재했다면 호세이니의 소설은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항상 인간의 깊고 낮은 곳을 응시한다. 절망 가운데서도 한줄기의 희망이 포착돼 이것을 긍정의 드라마, 즉 빛의 서사로 환원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추는 빛보다 고결하고 숭고한 본질상의 아름다움말이다. 호세이니의 소설은 항시 그 아름다움을 주목해왔다.

   호세이니의 신간 <그리고 산이 울렸다>도 바로 그 아름다움의 선상에 올라 서 있다. 그의 전작들은 한결같이 삶의 처연한 배경을 통해 찬란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는 여성성이 갖는 본질적인 위대함을, <연을 쫓는 아이>에서는 위대한 우정의 파노라마를, 작가는 탄탄하고 숨막히는 서사로 그려냈다. 새 소설은 가난 때문에 운명적인 이별을 맞게 된 남매와 가족의 사랑을 더듬어가며 아프가니스탄 60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소설의 배경은 아프카니스탄이다. 작가의 모든 작품은 아프카니스탄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작가의 고국이기도 하지만 아프카니스탄이 갖는 현대사의 특수성과 상징성은 인간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적확한 시공간으로 작용한다. 아프카니스탄은 전쟁, 이념, 종교, 여성, 가난 등의 암울한 현대사의 키워드들이 오롯하게 녹아있는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삶을 향한 다양한 몸부림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타국의 독자들에게 녹록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신작이 전작과 다른 점은 서사구조의 복잡성이다. 소설은 총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2년 가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3세대를 거치며 1949년과 2010년, 1974년을 오간다. 궁극적인 중심 인물은 파리와 압둘라이지만 9개 장의 주인공은 모두 다르다. 파리를 입양하는 진보적인 여성 시인 닐라, 닐라를 사랑하는 운전사 나비, 카불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그리스 의사 마르코스 등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작품은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반세기를 훑는다. 또한 작가는 1인칭과 3인칭 시점, 편지 글, 잡지 인터뷰 같은 다양한 형식을 구사하며 극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다양한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굵직한 단 하나의 방향성을 감지하게 된다. 오빠 압둘라에 대한 여동생 파리의 방향성이 그것이다. 파리의 나이 세 살 때 헤어진 두 남매의 비극적 운명은 60년이라는 긴 시간의 벽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차원을 넘나드는 무언가의 신비한 힘을 통해 두 남매는 결국 가족의 공명현상共鳴現象을 완성시킨다. 더욱이 그 공명성共鳴性은 동생의 기억을 초월하고 오빠의 질병을 넘어서는 영역에 존재함으로써 가족애가 지닌 태초적 숭고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는 절대고차원의 물리력이 된다.

   소설에서 숨막히는 대목은 두 장면이다. 공항에서 압둘라의 딸이 자신의 고모와 대면하는 장면, 그리고 압둘라가 딸을 통해 동생에게 전하려 했던 편지가 공개되는 장면은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눈물없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없다고 한 AP통신의 추천사는 전혀 오버스럽지 않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장대한 서사를 뚫고 이야기의 말미에 도달하게 되면 독자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강렬한 감동의 자장에 사로잡히게 된다.

   막장을 덮은 후 나는 한동안 정지해 있었다. "삶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이며 "내 행복의 현상태는 어떠한가" 하는 내 삶의 기초 철학적 질문이 가슴속에서 폭포수처럼 샘솟았기 때문이다. 한참 뒤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고 연이어 곱씹었다. '살아간다는 것'의 엄연한 실재와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의 분명한 당위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결합되기 위해서는 오직 '가족'이라는 작은 천국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명징한 진리를 반추하게 한 것만으로도 할레드 할레이니의 <그리고 산이 울렸다>는 별 다섯 개를 받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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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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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쓰기가 유독 어려운 책이 있다. 난독難讀이나 난해難解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다르다. 쓰기는 읽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자기의 주관을 적용시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더욱 힘들게 하는 책을 만날 때면 리뷰어는 번민한다.

   사실 이런 경향은 장르를 불문하고 발생한다. 그러나 유독 문학에서 발생빈도가 높다.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은밀한 긴장관계에 기인한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은 부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렬하게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독자의 승리로 끝난다. 작가는 독자를 이길 수 없다. 문학은 독자의 내면에서 재해석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작가의 의도 또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유명한 소설을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분량이 소소하고 내용 또한 간략하다. 그러나 막장을 덮은 후 머리속을 정리하고 카뮈의 숨결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즉 카뮈의 <이방인>은 나에게 사유를 정리하고 후기를 남기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지불하게 한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본래 서평을 쓰기 전 타인의 후기를 둘러보지 않는 편이다. 내 감성과 정리가 미세하나마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충분히 천착되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폭넓게 열려 있는 고전만큼은 종종 들여다보는 편이다. 온라인상에서 <이방인>의 여러 후기를 훑어보면서 나는 일관된 흐름을 확인했다. 리뷰어 본인의 뚜렷한 입장과 독립된 해석이 밑바탕 된 창조적 텍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르트르나 역자 김화영의 작품해설을 인용하거나 미디어에 공개된 평론가의 것들을 스크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왠만한 시도나 작정이 아니고서는 <이방인>의 서평을 남기는 것은 녹록지 않은 부담과 적지 않은 작업량을 필요로 하는 고달픈 일인 것이다. 감히 누가 <이방인>을 논한단 말인가.

   소설 <이방인>은 문체, 인물, 주제 등 소설을 이루는 거의 모든 면에서 확고한 개성을 확립한 작품이다. 우선 카뮈의 문체는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독특하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실로 무서운 문체를 구사한다. 그의 문체는 시크하고 무심하며 수수하다. 그러나 오싹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간결한 문장 가운데 묵직한 무게를 담아낸다. 감정을 절제해서 거의 행동만을 드러낸다. 그래서 공허하고 심심하며 다분히 건조하다. 이런 문체는 주인공 뫼르소의 개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살인과 법정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핵심적인 서사를 더욱 단단하게 견인하는 요소가 된다.

   사실 카뮈의 문체는 언제나 화두였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작가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대한도의 거리두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문체도 문체지만 <이방인>이 묘한 여운을 주는 소설이 된 데에는 주인공인 뫼르소의 존재가 큰 몫을 담당한다.
카뮈는 세계 문학사에 손꼽힐만한 독특한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뫼르소는 매우 특색있는 인물이다. <이방인>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뫼르소를 평가함에 있어 심하게 엇갈리는 경향을 띤다. 그 대극점은 '매우 매력적인 인물', 혹은 '또라이'다. 중간은 없다. 뫼르소에게 '전형성', '평범성', '일상성'을 발견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수많은 텍스트를 탐색한 결과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되거나 아니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로 치부되거나, 하는 것이다. 세계의 독자들은 뫼르소를 바로 그렇게 양극단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우선 뫼르소의 행동을 보자. 그는 엄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최소한 외적으로는 그렇다. 엄마가 죽었다. 근데 울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의 장례식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잠을 잔다. 뫼르소의 이같은 행동은 기존 사회가 갖고 있는 보편적 전통과 질서의 자장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장례식에서 꼭 울어야 할까. 우는 것이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그것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걸까. 장례식에서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 안될까. 즉 작가는 주인공 뫼르소의 관점을 통해 사회의 당위성에 대해 질문하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이 실존주의라는 거대한 철학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
실 <이방인>은 카뮈의 타작품들과의 연계성과 실존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입체적으로 해석하기 힘든 작품이다. <이방인>의 입체적 수용은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를 함께 읽을 때 가능하다. 본래 민음사 구판은 사르트르의 해설이 실렸는데 신판은 역자 김화영 교수의 해설로 갈음됐다. 사르트르의 <이방인> 해설은 널리 읽혀진 유명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실존주의 카테고리 안에 묶어둔 일방성과 해설자 특유의 난해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휘발되어가고 있다.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의 사상적이고 현실적인 투쟁과 해석의 번역자적 측면을 고려하면 역자 김화영의 해설로 갈음한 것은 출판사의 멋진 용단으로 보인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방인>을 놓고 '실존주의 작품이냐 아니냐'로 열띤 논쟁을 벌였다.

   고백컨대, 나의 이십대는 실존주의에 흠취된 시기였다. '신의 예정'이라는 교리 안에 철저하게 갇혀 있었던 기독교도(장로교)인 나에게 인간의 실존에 방점을 찍은 카뮈와 사르트르의 철학은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인간은 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순간을 두고 행위와 행동으로 결의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고 역동적으로 살아숨쉬고 싶은 젊은 시기에 실존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화두였고 매혹이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허상을 알게된 후 굴곡되고 망가진 내 신앙의 상흔에 치를 떨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의 본래성과 순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신 존재의 부정을 향해 달려가는 명징한 불신앙의 통로였던 것이다.

   두 실존주의의 거장도 결국 두 갈래로 갈라서게 된다. 카뮈의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분단'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결국 카뮈가 옳았다는 것을 안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갈렸다. 반공주의자를 수없이 일갈했던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소련과 중국을 위시한 수많은 독재자들의 나라를 찬양했다. 반면 카뮈는 자신의 식민지 조국을 바라보면서도 어떠한 경우의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고 오직 '반항'만 할 뿐이라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이 갈라섬으로 보여준 각기 다른 삶의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존주의의 본질에 대해 의문하게 했다.

   카뮈가 우려했던 건 사르트르식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잘못된 양태였다. 사실 사르트르가 죽은 뒤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행동하지 않는 지성'에 불과했다.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을 찬양했고, 유고에서는 티토를 미화했으며, 쿠바에서는 카스트로를 치켜세웠다. 보부아르와 평생에 걸쳐 보여준 계약결혼의 행태도 자세히 알고 보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쓰레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사상의 연약성과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사르트르 철학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폐기처분됐다. 도대체 사르트르식 실존주의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하이데거와 후설이 사르트르 사상의 절정기와 시대를 공유했다면 "현상학을 표절 혹은 호도하지 말라"며 사르트르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 얘기를 길게 하는 건 카뮈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실존주의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문화인류학, 카프카의 소설 등을 소재로 해서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은 독특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내는가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화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방인>을 읽지 않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문학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 또한 '의식'이나 '주체'를 탐구하는 시대가 끝나고 '규칙'이나 '구조'를 천착하는 시대가 도래한 엄연한 과도기적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많은 독자들이 스토리는 이해하면서도 무언가의 찝찝한 여운으로 카뮈의 메시지를 받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이방인>을 재탐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방인>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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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나 또한 일천한 책읽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누구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이 적절한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를 함께 나누고 그것을 통해 책읽기의 순기능을 확장시키자는 취지에서는 용기를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을 추천하며 서평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독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책을 선택하는 자신만의 기준과 방법이다. 그 책이 좋은 책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이다. 가령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실존주의 철학의 교과서로 보고 성경처럼 머리맡에 두는 독자가 있는 반면 독일 현상학의 아류작으로서 쓰레기로 규정하는 나같은 독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고르는 기준은 본질적으로 타자의 견해를 인식하기 이전에 자기자신의 내면의 기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읽지 말아야 할 책들이 우리세계에 많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두가지로 정리되는데 바로 '고전'과 '자기계발서'다. 아니 고전을 읽지 말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항상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내가 읽지 말아야 할 책으로 고전을 꼽고 있지 않는가. 내가 말하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어렵고 난해한 텍스트로서의 고전'이다.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텍스트를 앞에 두고 낑낑대며 오기로 읽는 책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한 번 보자. 케인즈의 <일반이론>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아무런 어려움없이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들 서적은 전공자도 혀를 내두르는 난해한 전문서적이다. 이를 고전이라는 명분으로 일반독자에게 읽히게 하거나 읽으려 하는 자들을 보면 씁쓸하다. 왜 이해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해설서를 끼고 독서를 둥개는가. 어떤 책에 대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고전을 앞에 두고 시간을 낭비하며 독서를 둥개는 독자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읽지마!

   독서는 오기와 허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오기로 읽은 책은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물론 본인의 필요에 따라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순수한 관심과 진지한 공부의 차원을 넘어 허세와 위선의 영역으로 넘어든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책은 읽지 말라. 정 읽고 싶으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지력을 쌓은 후에 다시 도전하거나, 다이제스트 수준의 것으로 핵심만 짚어내라.

   또 하나는 자기계발서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계발서를 읽지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내가 계발서를 거부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계발서가 가진 본질적인 구조 면에서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자기계발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의 열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외람된 얘기일 수 있으나, 계발서에 고무되고 요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명확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내면 속에 실존하고 있는 '참 나'로서의 견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초적인 인문학적 지식과 식견이 부재하거나 결락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적 견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는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견인하는 지성의 통찰력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이 부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계발서는 불티나게 풀려나간다.

   웃긴 예를 들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가 파산한 것을 아는가. 인세로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파산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가 한 답변이 가관이다. 책에 기록된 '7가지 습관'을 자기 스스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부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읽지 말라는 것이다.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고전서적과 자기계발서적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양서를 선택하는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지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인간의 삶이란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을 만큼 길지 않고 한가롭지 않으며 값싸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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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세트 - 전2권
폴 존슨 지음, 조윤정 옮김 / 살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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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를 2독했다. 오래전에 읽은 것까지 합치면 총 3독을 한 것이다. 성경책 두께의 두 배가 넘는 역사책을 세 번씩이나 정독한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이 세 번이나 읽을 만한 가치를 지녔는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관점에서 20세기사를 꿰뚫어보는 데 이 책 만큼 적확하고 흥미로운 책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존슨은 이 책에서 현대세계는 1919년 5월 29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된 날이다. 아인슈타인은 태양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빛이 자신이 제시한 수치만큼 휘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핵심적인 가설이 실제측정을 통해 입증된 날이 바로 5월 29일이다. 그렇다면 상대성이론과 현대세계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상대성이론은 왜 근대를 끝맺음시켰는가. 저자는 역설한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유대·기독교'라는 종교적 동인이 약화되고 그 여백을 니체가 주장한 권력의지가 채우기 시작하는 단계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기초 위에 상대주의로 대변되는 20세기 고유한 특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은 상대성이론과 상대주의를 혼동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 혼동의 시작이 근대를 끝맺음시키고 현대를 여는 기준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시대의 구분을 특정 종교가 갖는 정신의 쇠락적 관점으로 풀어나간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서양사와 기독교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저자의 시각은 넓은 포용력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서양사는 기독교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서양세계에 전달한 문화와 정신 면에서 서양인 스스로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엄연한 전제 앞에서 20세기의 역사는 그 틀이 규정되고 작동될 수밖에 없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역사 탐색은 1차 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자살'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현대사의 굴곡을 지나 1990년대의 언저리까지 도달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이후 냉전체제를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폐해와 무기력함을 신랄하게 고발하며, 다시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저자가 현대사를 풀어나가며 사용한 정신적 문체는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 自由主義)'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바탕이 된 만개한 자유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유를 훼손하거나 억압시키는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며 비판한다. 이는 경제 역사에서도 일관되게 적용시킨다.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1930년대 이후의 경제사를 저자는 가차없이 난도질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위시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 또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모든 지도자와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저자의 시각에서는 양심없고 독선적이며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재평가된다.

   이러한 저자의 지나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의 역사기술은 보는 사람에 따라 거부감을 발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팩트를 무시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통계로 성실한 논증을 펼쳐낸다. 종전 후 스탈린의 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동유럽이 통째로 공산권이 되는 비극을 막지 못한 점을 꼬집는 존슨의 지적에 그 어떤 이념의 편향이 있단 말인가. 처칠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스탈린을 바라보고 예측하는 지혜에서만큼은 루즈벨트보다 몇 수 위였던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스탈린의 세계만큼 많은 수의 사람을 그토록 집요하게 살상한 체제가 있었던가. 스탈린 치하에서 죽은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1,300만 명이라는 건 주지의 통설이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히틀러라는 개버러지같은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전쟁 이후의 비극은 스탈린이라는 희대의 악마에 의해 진행되었다.

   20세기 공산권과 소위 '제 3세계'로 불리는 독재국가에서 자행된 사회공학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동유럽 공산국가의 숱한 독재, 중국의 모택동이 저지른 문화혁명, 캄보디아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전원화정책, 아프리카의 내전과 남미의 독재자들에 의해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살육과 핍박 등은 플라톤주의(Platonism)에 기초한 전체주의가 얼마나 거짓되고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은 19세기를 번영시켰던 동력이다. 그것이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20세기의 역사는 처절하고 고달픈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말장난에 불과한 개버러지같은 변증법으로 국가를 '객관화된 정신의 최고의 인륜형태'로 규정한 헤겔식의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부인하지 말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 사회와 국가를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한 믿음은 곧바로 현실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플라톤주의와 헤겔주의는 본래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 거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오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를 가족과 같이 만들 수 있다는 잔인한 착각이다.

   공산주의를 위시한 범사회주의적 사고의 맹점은 사회가 가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발생된다. 헤겔은 국가를 가족과 시민사회가 결합된 최고선의 인륜체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달콤한 말로 대중을 선동하며 사회와 가정을 혼동시켰다. 그러면서 폭력적 혁명을 부추겼다. 국가와 사회는 가정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인간은 산술적이고 결과적으로 평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거짓된 전제에 함몰된 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한 믿음과 착각은 결국 사회를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자기파괴였던 것이다. 현대사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모던 타임스>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로 끝맺음한다. 저자 폴 존슨은 미래를 무조건 희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가 얼만큼 지켜지고 확장되느냐의 관점, 동시에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식이 얼마나 생동감있게 살아있느냐의 관점을 통해, 바로 그 흐름의 과정에 달려있다고 일갈한다. 즉 저자는 사회와 국가가 아닌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인류의 희망찬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판단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이상 집단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사회라는 용광로에 빠져드는 참혹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각자의 창의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자유와 책임의 세계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쪽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서라는 한계는 반드시 존재한다. 저자의 주관적인 역사 해석이 너무 짙기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이 책의 한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차 대전 이후 세계를 뒤덮었던 전방위의 사회주의적 사고와 제도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무시하며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악마를 만들어냈던 토대가 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저자의 입장은 충분한 힘과 논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를 꿰뚫어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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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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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이게 바로 소설이다. 무릇 소설은 이래야 한다. 하루키는 문학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전범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다. 문학의 궁극은 인간이다. 소설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세밀하고 입체적인 성찰 위에 놓여 있다. 하루키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인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는 '인간 탐구'로 정리되는 소설의 목적론적 원형에 가장 성실한 의무이자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하루키의 힘이다.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긴 제목과는 달리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한 편의 소설을 평가하면서 인물과 플롯보다 문장을 먼저 논하는 게 매끄러운 순서가 아닐 수 있다. 본래 소설의 힘은 우선적으로 등장인물의 생명력과 탄탄한 구성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루키의 소설만은 예외다. 하루키 문학의 고유하고 독특한 주제인 '세계를 외면하며 자아 속으로 침투하는 나'를 표현하는데 있어 간결한 문장만큼 적확한 재료는 없다. 애매모호한 표현법이나 지나치게 만연한 문장은 하루키 스타일이 아니다. 딱딱 끊어지는 명료한 단문장이야말로 하루키 세계의 인물들에게 내재된 '우주 위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애'를 가장 잘 발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자 방법인 것이다.

   소설은 36세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나서는 순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쓰쿠루의 여정을 통해 개인과 개인 간의 거리, 자아와 타자 사이의 여백,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시간의 종속성, 내밀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 과정 등을 매우 담담하게 그려냈다. 어떤 장면에선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엄연하게 배리되어 있는 꿈의 세계를 통해, 또 어떤 곳에선 잃어버린 과거를 현재와 미래라는 전혀 다른 시간대의 배경으로 치환시키는 차원 이동의 놀이터로, 또 다른 곳에선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더이상 진실됨의 유의미성을 보증할 수 없는 '본질된 참'의 애매성으로, 작가는 한 개인이 반드시 짊어져야만 하는 숭고한 순례의 길을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주인공 쓰쿠루는 극도 공허와 절대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하루키적 인물의 전형이다. '삼십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현재의 시점과 학창시절의 잃어버린 과거의 시점이 반복적으로 교차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때는 세계의 전부로만 여겨졌던 학창시절의 네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버림받은 쓰쿠루의 아픈 상처와 이로 야기된 극강의 외로움은 소설 전체의 질감을 규정해버리는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대학시절 잠시나마 쓰쿠루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하이다와 현재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 사라는 쓰쿠루에게 긍정의 아이콘이다. 그토록 절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한 쓰쿠루에게 하이다와 사라는 쓰쿠루 자신의 삶을 재차 돌아보게 하고 원했던 죽음을 포기하게 하는 희망의 동력이 된다.

   외연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색채'에 대한 이야기다. 쓰쿠루를 버렸던 나고야 학창시절의 네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담고 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등 색채가 들어가 있는 네 친구들과 달리 쓰쿠루는 색채가 없다. 남자 친구 둘은 성이 아카마스(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친구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野)였다. 오직 쓰쿠루만이 색깔과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쓰쿠루의 컴플렉스(?)는 차후 그가 인간관계에서 아이러니한 민감성을 갖게 되는 내밀한 원인이 된다. 이후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이름에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쓰쿠루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이름에 국한된 것임에도 색깔의 결여를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존재론적 위험으로 규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쓰쿠루의 이 불편한 착각이 소설의 분위기를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네 친구들로부터 그룹에서 버림받았을 때, 그것은 마치 쓰쿠루의 '무색채'가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영을 통해 사귄 하이다와의 짧은 만남과 친구이자 연인인 사라와의 관계를 통해 쓰쿠루는 자신에게도 색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나간다. 사라의 제안에 따라 16년만에 네 친구들을 직접 만나는 용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절교당한 이유와 이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을 하나둘씩 알아가게 된다. 이 순례의 여정은 쓰쿠루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했던 '본질된 참 나'로서의 색채가 지니고 있던 고유성과 명징성을 발견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하루키 문학의 전형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는 소설 속 장치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음악'과 '섹스'는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들이다. 하루키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에서 일관되게 음악을 틀어왔고 끊임없이 섹스를 표현해왔다. 소설에서 베르만이 연주하는 <순례의 해>가 끊임없이 재생 반복되는데 이는 쓰쿠루의 내면을 정돈시키는 핵심적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섹스씬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성행위 묘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방향성과 현재성을 담아내는 중요한 메타포가 된다. 즉 음악을 통해 평정을 얻는 인간상의 설정과 거듭 반복되는 구체적인 섹스장면의 배치는 인간의 내면와 외연을 이어주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합치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에 대한 소중한 이미지인 것이다.

   한 가지 의문해보자. 소설에서 하루키가 제시한 '순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이에 대한 사유는 이 소설을 오롯하게 흡수하는데 꽤 중요하다. 왜냐하면 쓰쿠루의 순례가 외연적으로는 절교당한 이유를 찾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종국의 내포적 의미는 '나'를 객관적으로 천착하기 위해 나서는 열정적인 자기발견과정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참된 내면 속으로 끊임없이 침잠하며 진정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된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타인의 자아도 '나'의 의식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하루키의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나'가 된다.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 즉 결락 내지는 타자화한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외부세계로 한걸음 내딛게 된다. 즉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그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흐름인 동시에 전작 『1Q84』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사실 새로울 건 없다. '나'에 대한 끊임없는 객관성의 부여, 그리고 그 유일한 매개로써 '사랑'이라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선善을 제시한 이야기 구도는 항시 하루키가 그려왔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음으로써 시작된다. 거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소년의 행동이 세계가 일그러지는 모든 판타지 현상을 추동한다. 즉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종교, 문화, 관념, 철학, 현실, 상실, 고독 등은 '나'라는 실존성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1Q84』의 초반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지류들이 후반부에서는 한 줄기 본류로 통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내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1Q84』의 주제를 그대로 재청한다. 결국 쓰쿠루를 억누른 극도의 공허와 불안은 현실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해결책으로 존재한 사라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해소되고 부서진다. 쓰쿠루가 순례의 길을 통해 가장 핵심적으로 깨달은 것은 사라를 사랑하고 있는 엄연성에 대한 명확한 자기인식이었다. 사라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후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국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에 대해 쓰쿠루는 선연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혼란의 실타래를 종국적으로 사랑이 끝맺음시킨다는 하루키적 메시지의 보편을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개인 간의 거리를 천착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자신의 진본을 명징화해 나가는,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참 잘 썼다. 역시 하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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