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쓰기가 유독 어려운 책이 있다. 난독難讀이나 난해難解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다르다. 쓰기는 읽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자기의 주관을 적용시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더욱 힘들게 하는 책을 만날 때면 리뷰어는 번민한다.

   사실 이런 경향은 장르를 불문하고 발생한다. 그러나 유독 문학에서 발생빈도가 높다.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은밀한 긴장관계에 기인한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은 부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렬하게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독자의 승리로 끝난다. 작가는 독자를 이길 수 없다. 문학은 독자의 내면에서 재해석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작가의 의도 또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유명한 소설을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분량이 소소하고 내용 또한 간략하다. 그러나 막장을 덮은 후 머리속을 정리하고 카뮈의 숨결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즉 카뮈의 <이방인>은 나에게 사유를 정리하고 후기를 남기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지불하게 한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본래 서평을 쓰기 전 타인의 후기를 둘러보지 않는 편이다. 내 감성과 정리가 미세하나마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충분히 천착되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폭넓게 열려 있는 고전만큼은 종종 들여다보는 편이다. 온라인상에서 <이방인>의 여러 후기를 훑어보면서 나는 일관된 흐름을 확인했다. 리뷰어 본인의 뚜렷한 입장과 독립된 해석이 밑바탕 된 창조적 텍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르트르나 역자 김화영의 작품해설을 인용하거나 미디어에 공개된 평론가의 것들을 스크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왠만한 시도나 작정이 아니고서는 <이방인>의 서평을 남기는 것은 녹록지 않은 부담과 적지 않은 작업량을 필요로 하는 고달픈 일인 것이다. 감히 누가 <이방인>을 논한단 말인가.

   소설 <이방인>은 문체, 인물, 주제 등 소설을 이루는 거의 모든 면에서 확고한 개성을 확립한 작품이다. 우선 카뮈의 문체는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독특하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실로 무서운 문체를 구사한다. 그의 문체는 시크하고 무심하며 수수하다. 그러나 오싹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간결한 문장 가운데 묵직한 무게를 담아낸다. 감정을 절제해서 거의 행동만을 드러낸다. 그래서 공허하고 심심하며 다분히 건조하다. 이런 문체는 주인공 뫼르소의 개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살인과 법정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핵심적인 서사를 더욱 단단하게 견인하는 요소가 된다.

   사실 카뮈의 문체는 언제나 화두였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작가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대한도의 거리두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문체도 문체지만 <이방인>이 묘한 여운을 주는 소설이 된 데에는 주인공인 뫼르소의 존재가 큰 몫을 담당한다.
카뮈는 세계 문학사에 손꼽힐만한 독특한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뫼르소는 매우 특색있는 인물이다. <이방인>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뫼르소를 평가함에 있어 심하게 엇갈리는 경향을 띤다. 그 대극점은 '매우 매력적인 인물', 혹은 '또라이'다. 중간은 없다. 뫼르소에게 '전형성', '평범성', '일상성'을 발견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수많은 텍스트를 탐색한 결과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되거나 아니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로 치부되거나, 하는 것이다. 세계의 독자들은 뫼르소를 바로 그렇게 양극단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우선 뫼르소의 행동을 보자. 그는 엄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최소한 외적으로는 그렇다. 엄마가 죽었다. 근데 울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의 장례식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잠을 잔다. 뫼르소의 이같은 행동은 기존 사회가 갖고 있는 보편적 전통과 질서의 자장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장례식에서 꼭 울어야 할까. 우는 것이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그것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걸까. 장례식에서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 안될까. 즉 작가는 주인공 뫼르소의 관점을 통해 사회의 당위성에 대해 질문하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이 실존주의라는 거대한 철학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
실 <이방인>은 카뮈의 타작품들과의 연계성과 실존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입체적으로 해석하기 힘든 작품이다. <이방인>의 입체적 수용은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를 함께 읽을 때 가능하다. 본래 민음사 구판은 사르트르의 해설이 실렸는데 신판은 역자 김화영 교수의 해설로 갈음됐다. 사르트르의 <이방인> 해설은 널리 읽혀진 유명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실존주의 카테고리 안에 묶어둔 일방성과 해설자 특유의 난해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휘발되어가고 있다.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의 사상적이고 현실적인 투쟁과 해석의 번역자적 측면을 고려하면 역자 김화영의 해설로 갈음한 것은 출판사의 멋진 용단으로 보인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방인>을 놓고 '실존주의 작품이냐 아니냐'로 열띤 논쟁을 벌였다.

   고백컨대, 나의 이십대는 실존주의에 흠취된 시기였다. '신의 예정'이라는 교리 안에 철저하게 갇혀 있었던 기독교도(장로교)인 나에게 인간의 실존에 방점을 찍은 카뮈와 사르트르의 철학은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인간은 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순간을 두고 행위와 행동으로 결의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고 역동적으로 살아숨쉬고 싶은 젊은 시기에 실존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화두였고 매혹이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허상을 알게된 후 굴곡되고 망가진 내 신앙의 상흔에 치를 떨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의 본래성과 순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신 존재의 부정을 향해 달려가는 명징한 불신앙의 통로였던 것이다.

   두 실존주의의 거장도 결국 두 갈래로 갈라서게 된다. 카뮈의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분단'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결국 카뮈가 옳았다는 것을 안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갈렸다. 반공주의자를 수없이 일갈했던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소련과 중국을 위시한 수많은 독재자들의 나라를 찬양했다. 반면 카뮈는 자신의 식민지 조국을 바라보면서도 어떠한 경우의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고 오직 '반항'만 할 뿐이라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이 갈라섬으로 보여준 각기 다른 삶의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존주의의 본질에 대해 의문하게 했다.

   카뮈가 우려했던 건 사르트르식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잘못된 양태였다. 사실 사르트르가 죽은 뒤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행동하지 않는 지성'에 불과했다.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을 찬양했고, 유고에서는 티토를 미화했으며, 쿠바에서는 카스트로를 치켜세웠다. 보부아르와 평생에 걸쳐 보여준 계약결혼의 행태도 자세히 알고 보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쓰레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사상의 연약성과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사르트르 철학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폐기처분됐다. 도대체 사르트르식 실존주의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하이데거와 후설이 사르트르 사상의 절정기와 시대를 공유했다면 "현상학을 표절 혹은 호도하지 말라"며 사르트르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 얘기를 길게 하는 건 카뮈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실존주의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문화인류학, 카프카의 소설 등을 소재로 해서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은 독특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내는가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화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방인>을 읽지 않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문학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 또한 '의식'이나 '주체'를 탐구하는 시대가 끝나고 '규칙'이나 '구조'를 천착하는 시대가 도래한 엄연한 과도기적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많은 독자들이 스토리는 이해하면서도 무언가의 찝찝한 여운으로 카뮈의 메시지를 받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이방인>을 재탐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방인>은 그런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