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인문학이 이슈다. 너나할 것 없이 인문학을 얘기한다. 인문학을 배우고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난리통이다. 특히 서점가는 '인문학'이라는 문구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문학이 위기라느니 빈곤이라느니 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던 만큼 작금의 인문학 열풍은 다소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사실 말은 바로 하자.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인문학을 중요시해왔던가. 외적인 열풍 현상과 내적인 중요시함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오직 대학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 나라 중등교육의 현주소는 궁극적으로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고등교육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철학과 역사는 전공자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외된 분야였다. 일반인이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나 칸트의 인식론의 체계를 머릿속에 담고 있기란 여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환경 탓이다. 이런 배경에서 TV와 신문, 서점에서 오버스럽게 인문학을 외쳐대고 있는 풍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좋은 것이다. 위기이자 빈곤인 인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질(質, quality)'에 있다. 과연 서점가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인문학 도서가 진정한 인문학을 다루고 있는 책들일까. 즉 인문학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에 담을 만한 내용이냐 하는가다. 서점에서 인문학을 전면에 내세운 다수의 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맹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컨덴츠의 질과는 무관하게 자기계발이나 처세술을 인문학으로 포장해놓은 출판사들의 카피문구는 그야말로 못 봐줄 코메디다.

   인문학은 자기계발이 아니다. 처세술은 더더욱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언어학ㆍ문학ㆍ역사ㆍ법률ㆍ철학ㆍ고고학ㆍ예술사ㆍ비평ㆍ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의 포괄적 집대성이 인문학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필히 지력의 무게와 깊이를 내재한다. 인문학의 보편성 안에 자기계발이나 처세술을 무리하게 적용시키려는 일부 저자와 출판사 들의 행태가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 더이상 인문학을 남용하거나 농락하지 말라.

   베스트셀러에 인문학 도서가 몇 권 올라 있다. 그중 광고 카피라이터 박웅현의 <여덟 단어>가 눈에 띈다. 오랜만에 베스트셀러에 재진입했다. 최근 TV와 영화에서 소개된 이유 때문인 듯하다. 저자 박웅현은 이 책에서 '인문학'을 얘기한다.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자못 진지한 부제를 책 전면에 배치했다. 여덟 단어를 주제로 하여 젊은이들에게 강의했던 저자의 강연 내용을 묶어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저자는 자존自尊ㆍ본질本質ㆍ고전古典ㆍ견見ㆍ현재現在ㆍ권위權威ㆍ소통疏通ㆍ인생人生 등 살아가면서 꼭 생각해봐야 할 여덟 가지 단어를 제시하며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조언한다.

   이 책의 강점은 어렵지 않다는 데 있다. 책의 태동이 되는 저자의 본래 강의는 2~30대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주제의 포괄성과 내용의 전달방식이 상당히 평이하다. 대학생보다는 오히려 중고생이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의 경험, 예술작품 관련 예화, 고전의 소개, 작가의 명언 등을 저자 자신의 사유로 뒤집고 비틀었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존어체는 강의의 현장감을 살렸다. 기술적으로 내용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전달방식이 따뜻하다. 독자는 마치 학생이 된 것인양 저자의 강의 속에 포근하게 안길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의 공허함이 문제다. 저자가 선택한 여덟 단어는 모두 묵직하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내는 내용에 있어서는 어디서도 들을 수 있을 만한 뻔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인문학이라면 태동적으로 소유해야 할 최소한의 지적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볍고 미지근하며 평범하다. 특색이 없다. 사유의 밀도와 지력의 중량이 포착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자기계발서와 다름 없는 가벼운 맥락이 자주 확인된다. 보다 신랄하게 말해서 이 책은 인문학과 자기계발 사이에 어중간하게 위치한, 텍스트로서의 자아의 정체에 몰이해적인, 지극히 개성 박약한 강연집이다.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임무를 '해석'이 아닌 '변혁'으로 설파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식인의 힘은 해석과 반영을 넘어 변혁에 다다를 수 있는 지력과 용기에서 나온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외연만 요란한 인문학 타령은 불필요하다. 지적 소음이자 종이 낭비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관통하는 속이 꽉 찬 컨덴츠가 필요하다. 이를 텍스트로 풀어내는 힘은 오직 저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해석'에 머물러 있는 저자의 역량은 아쉽다. 서두부터 정황하게 언급한 인문학의 위기, 혹은 빈곤에 직면한 현실 한국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요컨대 박웅현의 <여덟 단어>는 인문학의 정수를 느끼기에는 역부족인 딱 고만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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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문학계(출판계)에서는 흥미로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번역에 관한 것인데, 그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해왔던 기존 번역의 권위가 과히 '혁명'적인 내용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거리다. 무엇보다 해당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소설이 가진 모호한 매력에 한참이나 미쳐 지냈던 나에게도 그 관심의 폭발력은 응당 대단한 것이라 하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김화영의 번역을 최고로 쳐왔다. 고려대 김화영 명예교수는 평생을 카뮈 연구에 몰두해왔고 카뮈 전집을 번역해냈을 정도로 카뮈 전문가다. 프랑스 현지에서 카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다. 그렇기에 국내에 수십여 권에 달하는 <이방인> 번역판 중에서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민음사판(김화영 역)을 '갑'으로 꼽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번역이 오류투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한 <이방인>은 이정서(필명) 씨에 의해 번역됐다. 이런저런 논란 속에서도 역자가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해왔던 만큼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역자 이정서 씨는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기존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엉터리인지 구체적으로 공박해왔다. 주변에서 노이즈 마케팅이 아이냐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올린 글과 신문의 인터뷰 내용을 훑어보면서 논리의 세밀함과 논증의 설득력이 녹록지 않은 수준에 있어 쉽사리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정서 씨는 기존 번역을 비판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한다. <이방인>에 대한 기존 독자들의 해석적 통념은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뫼르소의 모호한 항변은 그 어처구니 없는 반논리성으로 인해, 소위 '부조리不條理'로 대변되는 20세기 문학 역사상의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부조리 문학의 창시자로서의 카뮈 문학의 거대한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정서 씨는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아랍인의 칼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조리적인 살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건을 오독한 김화영 교수의 잘못된 번역 때문에 한국 독자들이 수십 년 간 <이방인>을 오해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자의 말을 통해 <이방인>이 "어느 한 문장 이해되지 않는 곳도 없는, 완벽한 소설"이라고 결론내린다. 계속해서 "이제 경험해보면 아시겠지만 원래 카뮈의 '이방인'은 서너 시간이면 다 읽고 감탄할 소설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 국내에 형성돼왔던 <이방인> 해석에 대한 복잡성과 보편성을 재단하고 있다. 즉 김화영 교수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자신만의 <이방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방인>의 문학성은 법정에서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그리고 타인들(독자 포함)의 몰이해 사이의 압도적인 긴장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는 뫼르소의 살인동기로부터 출발하는 지점이며 불합리·불가해·모순으로 인도되는 이 소설의 핵심 사유이기도 하다. 즉 뫼르소의 살인동기가 '강렬한 태양'인지 '아랍인의 칼날'인지는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양립 불가능성의 단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번역 논쟁은 언어와 해석이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소설 <이방인>에 대한 궁극의 도전이다.

   문학에서 번역과 해석은 본질적으로 다른 체계를 가진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사를 해석의 관점에서 통일시켰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작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그러나 이를 번역에도 적용할 수는 없다. 해석의 주관적 완결성은 독자와 비평가의 권리이다. 역자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번역의 지엽적인 기능으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지만 역자는 본질적으로 작가의 입장에 있어야 한다. 작가적 의도를 관통하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야말로 최고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가장 주요한 출발은 '작가적 객관'인 것이다. 역자의 주관과 개성은 그 다음이다. 이번 번역 논쟁을 바라보는 독자와 출판계의 시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이정서 씨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김화영 교수는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 문학과 관련된 이런 식의 논쟁은 독자에게는 땡큐요 선물이다. 텍스트를 비틀고 뒤집어 봄으로써 하나의 문학작품을 과히 입체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국내 불문학계 최고의 석학이자 대학자로서 김 교수는 성실하게 본인의 학문적 견해를 피력해주기를 바란다. 듣보잡인 익명의 번역가가 도발적인 방식으로 본인이 쌓아올린 학문적 권위에 도전한 것 자체가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학자는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하는 법이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전범이 아니었던가.

   김 교수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의 번역으로 수없이 읽고 느낀 <이방인>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이방인>을 통해 내 젊은 시절의 불가해한 고민과 아이러니한 모호성을 녹여냈다. 카뮈가 제기했던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용솟음치는 반증적 열정을 통해 세계 속에서 내 실존의 현재상을 살폈던 것이다. 나에게도 김 교수의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정말 반갑고 기대되며 재미있는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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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얼빠진 철학자 니체도 간혹 멋진 말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혐오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니체를 조망하는 내 기준에는 여러가지 복잡성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의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겠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위의 명언 만큼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니체의 저 문장을 내 방식대로 풀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낙타-사자-어린아이'로 대변되는 '세 가지 변신'의 비유는 생성의 존재론, 위버멘쉬(초인), 영겁회귀론, 관점주의, 힘에의 의지 등과 함께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동력, 곧 힘에의 의지를 통해 허무적 문명을 긍정적 문명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삶의 온갖 모순적인 면, 즉 미와 추, 고통과 기쁨, 사랑과 증오 등을 모두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오로지 삶이 유일한 가치이자 가치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설파함으로써 쇼펜하우어가 온갖 악과 불행의 원천으로 보았던 의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면서 '초인(Übermensch, 超人)'으로 집대성되는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시킨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과 참 대신 힘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모든 세계관을 해체시킨 것과 다름없다.

    니체 식의 기독교 사멸론은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주장한 '신=인간' 도식에 비하면 그나마 세련(?)된 면이 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자의식이 절대화된 산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화 너머의 대상화로 역동적인 성장을 꾀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지금까지의 종교가 전제해온 인간의 필연적인 '유한성'은 신의 '무한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닌 제한된 개인의 사유에 갇히지 않고 외연의 가치로 확장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기제다. 을 주조해나가며 느끼는 인간 스스로의 제한성은 단순히 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분리되어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의 외연에 또 다른 무수한 주체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또 다른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실로 개소리가 따로 없다.

    여기서 니체와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反기독사상의 디테일을 서술한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닌 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준비과정이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앞서 인용한 니체의 명언을 일반적인 시적 구조가 가진 외연적 의미로 걸러내 해석하고, 바로 거기에서 멈출 수 있다면, 의외로 걸죽한 사유의 추출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요컨대 니체의 언어를 反니체적 입장에서 공격해보자는 것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단계는 인내력의 지고함이나 희생의 숭고성이 아니다. 또한 자유를 쟁취하고 자아실현을 도구적으로 전환시키는 내적 힘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근본적 웃음에서 생성되는데, 니체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규정하며 그 해석성을 부각시킨다. 어린아이는 잘 웃는 자로서 삶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갖고 놈으로써 인간의 자기변형의 최종적 단계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어린아이가 가진 초고차원적 힘의 원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이 아닌 심연을 관통한 인간의 내재적 삶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틀렸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총론은 현실의 다양한 각론들로부터 배반당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태도와 습성을 끊임없이 천착한다. 가끔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아이의 유치찬란한 행동 가운데 은연중 드러나는 찬란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다. 그때는 잠시 소름 돋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그 '찬란한 것'은 무엇인가. 치열한 현실을 견디는 과정과 깊은 고뇌의 끝에서 깨달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리고 '생명력'이었다.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는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내재된 힘이다. 여기에 생명력이 보태지면 그것을 더욱 오롯화하고 현실세계를 천국의 자장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는 초월적 자유가 추동하는 신적인 생명력이 존재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니체가 이를 어찌 알겠는가.

    어린아이의 초자유적 순수성은 태생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산물이다. 민족, 문화, 국경, 언어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는 초월적 생명력을 소유한다. 이는 본래적이다. 니체의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가 함의한 변신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본래적 실존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거룩한 창조성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신'밖에 없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현현되는 초월적 자기긍정의 힘은 근원적으로 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를 명확히 깨닫는다. 그리고 경외한다. 이 놀라운 경험의 연속성은 과히 폭포수가 샘솟는 것과 같다. 니체가 '어린아이'에게 부여한 저 많은 형용사들은 곧바로 신의 찬탄스러운 속성을 압도적으로 헌사하는 반증의 도구가 될 뿐이다. 결국 니체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신을 긍정하고 경외한 것이다.

    내가 니체의 말 한 토막을 끄집어내 이렇게 장황한 글로 버무리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됨을 바로 천착하자는 취지에 있다. 인생의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한 특질에 아파하는 주변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웃어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바로 그 지점에서 웃어야 한다. '희喜'와 '비悲'는 등가적으로 대립되는 게 아니다. 웃음은 울음을 포괄한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위대한 것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신성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웃음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웃음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의 본질이다. 웃음은 완벽히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라는 신의 명령에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은 생명의 약동이고 기쁨의 실현이다. 인간이라면 비단 웃어야 한다. 인생의 짧고 추악함, 고단과 가난함을 망각할 수 있는 힘은 웃음에 있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저 위대한 푸쉬킨의 말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웃어라. 신성한 긍정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서 발현된다. 웃음은 신적 행위이자 신의 축복이다.

    웃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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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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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사태가 갈수록 험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크림반도가 난리다. 전 세계가 경악하며 연신 러시아와 푸틴을 비난 중이다. 물론 크림반도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참여한 투표를 통해 러시아 귀속을 원했다. 러시아는 자결권이라는 수사로 포장하며 크림반도에 대한 야욕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남의 나라에 군대까지 파견시키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건 어디서 얻은 명분인가.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함께 알아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과거 구소련의 스탈린 집권기에 우크라이나에서는 600만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당시 스탈린은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체제를 만들기 위해 농민개혁을 실시했다.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은 과히 대단했다. 저항을 분쇄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모조리 불태워 고의적인 기근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600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아사로 죽어간 것이다. 이를 제 2의 홀로코스트, 즉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실로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라 하면 치를 떨고 스탈린은 악마와 같은 존재로 경멸해오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이 가진 악마성은 과히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사악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국가적 고의성으로 희생된 사람을 적게는 1,2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1991년 소비에트 붕괴 후 스탈린 비밀문서가 속속 공개되면서 스탈린 체제의 악질성이 여실히 증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서 구소련의 스탈린을 친구로 신뢰하고 협력했던 루즈벨트의 낙천적 태도가 악랄한 스탈린 정권의 공고화를 부추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얄타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놀아났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분단도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스탈린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전체주의 체제로 꼽힌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타민족도 아니고 자국민을 스탈린처럼 집요하고 단호하게 살육한 지도자는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당시에는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에 연합국 측에 속했던 스탈린의 악행이 구조적으로 묻혀버렸다. 더욱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공산유토피아의 대두로서 그에게 덮혀진 영웅적 신비성은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깡패를 잡기 위해 엇비슷한 다른 깡패의 악행을 허용한 것이다. 애당초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두 쓰레기 깡패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자신의 노동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하여 스탈린 체제의 지옥성을 고발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스탈린 체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처참한 단면을 극도의 세밀한 필치로 그려낸 걸작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거대한 생명력을 폭발시킨다. 작가는 참혹한 수용 생활의 일상성을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양면적인 문체로 담담히 그려냈다. 과히 불멸의 작품을 인류에 남긴 것이다.

    이 소설이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간명하다.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속성은 현실을 비틀어 픽션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고발하고 천착하는 것이다. 작가 솔제니친은 반소反蘇행위를 했다는 누명으로 1945년부터 약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삶을 보냈다. 그간 자신이 겪은 고통과 어두운 세월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담은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노동수용소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허상에 대해 낱낱이 토로했다.

    소설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작가 솔제니친의 분신이다. 슈호프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정부로부터 '반역죄'를 선고받고 노동수용소에 갇힌다. 소련 정부는 그가 이틀간 독일 포로생활을 했던 것을 꼬투리 잡았다. 반역죄의 내용은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됐으며,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한결같이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그들 모두 억울함으로 수용소에 갇힌 채 언제인지 모를 석방의 날을 기다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보낸다. 작가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상을 포착하면서 스탈린 체제가 수많은 약자를 억압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있음을 우회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수용소의 하루는 외면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같다. 주인공 슈호프는 하루 동안 몸이 아팠고, 요령을 피우며 작업을 했고, 감시원을 속이고 죽 한 그릇을 더 먹었고, 잎담배를 구했고, 줄칼 조각을 들키지 않고 숙소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 음식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저항하지도 않고, 탈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이는 다른 죄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담담한 일상성 속에 녹아있는 처참한 비인간적 삶의 단면들은 이 소설이 내재한 정치적 의미를 고결한 문학성 위에서 완성시킨 작가적 역량을 대변하는 장치들이다. 작가의 한 맺힌 분노, 혹은 고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 문학적 목소리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삶은 위대한 작가의 정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소련 정부의 보이콧으로 수상대에는 오르지 못한다. 결국 소련의 정치체제와 타협을 거부하여 1974년에는 반역죄로 추방되기에 이른다. 2008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전체주의를 비롯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웠다. 자본주의가 가진 물신적 속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문학으로 살았고 문학으로 저항했다. 그의 삶 자체가 문학이요, 문학은 그의 인생 전체를 휘감은 열정이었다. 솔제니친은 작가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전 인생을 통해 보여준 가장 빛나는 예였다. 그토록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며 체제에 저항했던 그가 생전에 스탈린의 향수를 공유하는 푸틴을 지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정권이었던 스탈린 체제에 대해, 보다 넓게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정치구조적 기제에 저항했던 솔제니친의 삶은 작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위시하여 전 세계에 도사리는 반자유적 카테고리를 향한 숭고한 일갈이다. 또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며 텍스트를 낭비하는 이 땅의 얼빠진 작가들에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사실을 조언하는 강력한 울림이기도 하다. 러시아 문학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와 '문학'은 러시아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프레임이다. 러시아는 미우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러시아가 스탈린과 푸틴, 공산혁명의 나라지만, 동시에 톨스토이와 푸쉬킨, 솔제니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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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언어 - 한국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사상 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서
양동안 지음 / 북앤피플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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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심한 사상 대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못지않은 좌·우익의 극렬한 사상 전쟁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치열한 방식으로 전개되며 국민의 삶을 옭아매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대한민국을 사상 전쟁의 한복판으로 만들었는가.

   물론 사상의 균형있는 대립과 절제된 토론은 건강한 사회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균형과 절제와는 거리가 먼 극단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객관적 지식이 호도되고 역사적 사실이 굴곡되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좌든 우든 극단적인 것은 반드시 악의 결과로 귀결된다. 2차 세계대전의 교훈이 명징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스탈린과 히틀러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사회에서 사상 대립과 담론 구조가 극단화되면 될수록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중용적 지성과 건강한 양심은 점점 더 많아져야 한다.

   양동안 교수의 <사상과 언어>는 바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집필된 책이다. 저자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다. 용어 탄생의 역사성과 현재의 통용 상황의 국제성을 논증으로 각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알려준다. 일반 국민은 물론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지식인마저도 사상과 언어 사이의 괴리가 많은 만큼 이 책이 교정해줄 수 있는 대상은 꽤 폭넓다.

   사상과 언어는 왜 일치해야 하는가. 저자의 말대로 사상과 관련된 용어들은 사물인식과 사유의 핵심적 기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물인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성과 정파성에 유독 예민한 국내 여론의 특질을 감안할 때 사상·정치용어들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찾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힘있고 건강한 언어생활의 첫 출발은 '바른 말'에서 시작된다. 언어가 담론을 구성한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올바른 언어생활이 사회의 건강한 담론문화를 형성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대한민국 만큼 '좌파·우파'와 '진보·보수'의 프레임을 남용하는 사회도 드물다. 그러나 문제는 좌·우파의 개념도 정확하게 모른 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매체들과 지식인 사회에서 '익翼: wing - 당黨: party - 파派: faction'로 일목요연하게 단위를 구분하여 사용되던 합리적인 정치세력 호칭법을 무시하여 사용해온 결과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진보'라는 용어가 좌익의 전유물이 되어 있다. '좌익(파)=진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공식이 우리사회의 여론 구조 속에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현실정치에서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의 'liberal'을 국내에서는 'progressive'와 동일하게 '진보적'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무지의 횡행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수주의(conservatism)는 개념화가 확립되어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갖춘 사상이다. 그래서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가능하다. 그러나 '진보주의'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의 뜻은 '보다 좋은 상태로의 변화'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보편적 명사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지 어떤 하나의 객관적인 사상체계로 지칭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용어다. 저자는 이러한 오용 사례를 풍성하고 깊이있는 설명으로 바로잡는다.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은 '자유주의·신자유주의', '민주주의·시장경제', '반공·메카시즘', '사회주의·공산주의', '민족해방·민종민족주의' 등 국내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정치용어들을 해부한다. 정치인 중에서도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와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다수인 한국의 현실에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각 용어의 중요성을 감안한 순서적 배치가 돋보인다. 매 장마다 깔끔한 설명을 통해 잘 정리했다. 정치학 교수다운 저자의 흠 잡을 데 없는 기술과 객관적 설명이 강점인 책이다. '바르고 고운 말'을 위해서라도 일독이 필요한 책이다.

   어느 누구보다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분들이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력과 무관하게 지력 자체가 미달되는 이 나라 국회의원들은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사전 시험을 쳐서 합격자에 한해서만 국회의원 입후보 자격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마냥 반가운 보물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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