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평소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기에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의 제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강의 주제는 '청년의 본질'이었다. 그리스 철학과 20세기 현대사를 넘나드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강의는 계획된 시간보다 꽤 많이 초과됐다. 그러나 청년들은 마지막까지 잘 따라와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청년들에게 역설했다. 청년시기에 올바른 지식과 건강한 사랑, 올곧은 비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지식'과 '사랑'과 '비전'은 청춘을 빛내는 보석과 같은 것이며 그 시기 젊은이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성인의 아우라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시간 관계상 사랑과 비전에 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그날은 청춘이 가져야 할 지식의 성질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보여준 구조적 무지와 같은 악의 평범성에 귀속되지 말 것을, 또한 중용을 파괴하는 편향된 지성에 함몰되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나 아렌트가 설파했듯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은 악의 평범성을 생산시키는 귀속적 기제다. 젊은 시절에 편견과 선입견에 빠진 무지는 훗날 건강한 어른이 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기대는 것은 일시적이고 징징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청춘의 본질은 아픔에 있지 않다. 청춘은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다. 청춘과 어른 사이의 시간차는 청춘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증거다. 어른이라는 실존은 청춘의 본질을 규정한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하고 넘어진다. 청춘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 이는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진정한 어른의 생으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게 될 때, 그때는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 당연하게 용서됐던 상처와 실수가 무조건 옳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의 내내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솔로몬 등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두들겨 깠다. 쓰레기 같은 삶과 사상을 남긴 과거의 인물을 천착하며 청년들이 고민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삶은 피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달콤한 말로 선동한 이데아idea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다른 곳'의 숭고한 비밀을 아는 자만이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곳의 비밀을 경탄하며 그것을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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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언젠가 어디선가 당신과 마주친 사랑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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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인간을 위시한 세계 내 모든 생명체의 원초적 갈망이자 기본능력이다. 인간의 사랑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원초적 갈망으로서 이성적 인식을 동반하고 의지에 의해 조종되면서 정감에 의해 깊이 각인되는 신비한 힘이다. 사랑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양면성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간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거나 반대로, 악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도 이끌 수 있는 두 얼굴을 가진 총체적 기본 능력이다. 사랑의 실천 여하에 따라 인간의 성장이나 성공 혹은 정체나 실패가 결정되는 것은 사랑이 이러한 서로 상반되는 방향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모든 문화·예술의 원천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을 다룬 꽤 괜찮은 책을 만났다. <사랑의 역사>는 문학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여러 고전들을 통해 다양한 사랑의 속성을 탐구한다. 저자 남미영 교수는 1597년 출간된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2012년 출간된 《사랑의 기초》까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34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사랑의 가치와 의미, 성장과 인생에 대해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사랑이 가진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상반되는 양면적 속성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폭포수처럼 뽑아낸다.

   34편의 불멸의 고전들을 살피는 것은 이 책이 선사하는 가장 우선적인 선물이다. 34편 모두 찬란한 텍스트들이다.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희대의 소설들을 담았다. 저자는 해당작품의 간단한 줄거리와 인상깊은 구절을 담아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를 배려했다. 이미 읽은 독자는 재음미하고 재해석한다는 차원에서, 아직 읽지 않은 독자는 다이제스트 식으로 미리 살핀다는 차원에서 이 책의 구성은 모든 독자를 아우르는 아량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랑을 탐구하는 다양한 시각에 있다. 저자는 첫 사랑, 열정, 성장, 이별, 도덕, 결혼 등 사랑과 연계된 다양한 각론들을 카테고리별로 묶어 일목요연하게 서술한다. 저자의 일방적인 논설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각 고전이 가진 권위를 밑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이 풍성하고 입체적이며 생명력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어느덧 자신이 《첫사랑》의 블라디미르,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침투할 수 있는 여력을 충분히 제공한다.

   또한 저자의 인문학적 공력과 유려한 문체가 빚어낸 문장은 사랑의 역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좋은 안내자가 된다. 아무리 좋은 글감이라 하더라도 저자 자체의 내공과 결합하지 못하면 매력있는 글은 완성되지 않는다. 문학과 창작, 독서교육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저자의 경험과 이력은 꽤 매력적인 사랑학 리뷰집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인용 하나 어색한 게 없고 문장 하나 군더더기 없다. 근래에 읽은 고전 리뷰집 중에서 단연 손꼽을 만한 수준이다.

   책장을 덮은 후 새삼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왜 불멸의 작가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말하고자 했을까. 인류 예술이 탐구하고자 했던 포괄적 메시지는 왜 대부분 사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을까. 인간의 문화·예술사는 끊임없이 사랑을 천착해왔건만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사랑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삶을 둥개고 있을까. 혹 사랑의 본성이 인간 너머에 존재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자아와 세계의 현존을 넘어 신으로 향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치열한 탐구과정 속에 사랑의 원형질이 놓여있는 건 아닐까. 이 지점에서 사랑은 고귀한 예술을 넘어 귀중한 은혜가 된다. 사랑을 인간이 절대로 임의로 지배하거나 간단히 조종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만에 맘에 드는 책을 만났다. 별점이 짠 리뷰어로 정평이 나있지만 훌륭한 텍스트 앞에서는 호평을 망설이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몇 마디 말로 내려진 사전적 정의로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사랑이라는 원천적 실재를 찬란한 문학작품 속에서 깊이있고 다양하게 탐구한 사랑학 참고서다. 별 네 개 이상이 아깝지 않다. 오랜만의 호평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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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를 개최했다. 필자는 중등부 교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주제는 「이성교제와 성性」이었다.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딱히 관심이 가거나 실제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주제임은 분명했다. 교회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꽤 높은 수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세미나는 정해진 시각을 넘어서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됐다. 이 칼럼은 어제 세미나를 통해 느낀 필자의 단상을 글로 추린 것이다.

   불신자(non-Christian)들이 갖는 한 가지 오해가 있다. 기독교는 성을 배척한다는 생각이다. 이 불편한 오해는 성과 거리를 두는 행위를 '거룩성'과 동일한 의미로 여기는 오류를 발생시켰다. 성적 추구를 마치 불신앙의 양태인 것처럼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는 성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나님은 성에 대한 인간의 후퇴와 외면을 지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부부夫婦'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 사랑의 연합은 부부관계라는 절대불변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기독교 성 사상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비극이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 그중 성에 대한 인식은 급변하고 있다. 당일 만난 남녀가 아무 조건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하는 게 가벼운 놀이처럼 되어 있다. 혼전순결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나 가야 할 처지가 됐다. 첫 성관계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성병 감염률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사랑'과 '섹스'는 더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포르노를 위시한 다양한 성적 미디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법률 제정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는 섹스 산업의 규모는 작금의 시대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에 대해 뭐라 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기 때문이다. 펄펄 끓어오르는 청춘의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만의 문화와 방식으로 성적 에너지를 불태우는 행동을 두고 일개 개신교 집사가 이러쿵저러쿵 지적한다는 건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욕 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 사랑이라는 인간 생명력의 원초적 갈망이자 고결한 기본능력이 싸구려처럼 취급받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 사실 현대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입양은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모른다.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찬란한 유전자가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들끓게 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흡수한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5월 칼럼(『사랑과 가정에 관한 신앙적·인문학적 고찰』)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두들겨 까며 이 책이 끼친 해악을 지적한 바 있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제2의 성>을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차원의 해석을 내놓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헛소리가 따로 없다. 과연 그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이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저자는 지적인(인격적인) 사랑과 육체적인(감각적인) 사랑 사이의 종속성과 삼투압성을 전제적으로 차단시키며 자신의 주관을 논증한다. 저자의 사랑관을 요약하자면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인과 부부 간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러한 탈구속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온전한 '자유'를 부여할 수 있고 구속성을 타파하는 열정에 복무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각한 수준의 개소리가 따로 없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 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보부아르에게 사랑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 게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이란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것과 달리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들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해 개념적으로 제시한 상대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의 디테일을 구구절절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두 철학자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친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부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각한 무언가를 느끼곤 한다. 마치 대한민국이 포스트모더니즘 국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력이 결핍됐다. 선과 악, 지식과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졌다. 프랑스 68혁명 이후 유럽사회를 휩쓸었던 쓰레기 담론들이 21세기 한국 대학강단의 주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학의 인문·사회과학계열 교수 중 80% 이상은 '구조주의 좌파'라고 규정한 모변호사의 외침이 결코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역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neo-Marxism)'와 살벌하게 씨름 중에 있다. 이미 8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폐기처분된 이론들이 아직까지 이 나라 지식사회와 담론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교수들이 의외로 논문 표절에 많이 노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 나라 청춘들에게 일갈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분리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둘은 공히 지독한 희생과 올곧은 책임의 영역 안에서 작동·발현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절제하고 지켜주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게 바로 인간의 성과 사랑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성과 사랑의 일체성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집 <향연>에서 에로스의 본질적 성격을 구명究明하고 다른 대화집 <파이드로스>에서 에로스로부터 필리아에로의 이전 경위를 명료하게 거론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로스에 대한 언급 대신에 필리아에 관한 놀랄만큼 깊이있고 상세한 서술을 남겼다. 기독교는 에로스와 필리아를 그리스도적 아가페의 개념으로 끌어들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시하고 몰이해할 정도로 사랑 탐구의 연원은 결코 녹록지 않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필경 악으로 귀결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이 '거짓'과 '교만'은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며 파괴다. 현실에서 지옥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든 자유가 용납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아무런 질서와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시공간,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기에 선악과는 필경 낙원에 존재했던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 실상 이 말은 개소리다. 인생은 징징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남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청춘이기 때문에 아플 수 있다.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비단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 할지라도 면죄받을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젊음이 가진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임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란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기도한다. 잊지 말라. 인간 세상의 가장 단단한 질서와 권위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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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무엇인가 - 정의가 묻고, 권력이 답하다 - SBS <최후의 권력> 21C 권력 대탐사 프로젝트
SBS <최후의 권력> 제작팀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이 시끄럽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로 촉발된 민심의 불편함은 집단감정의 과잉 수준을 넘어 어느덧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 전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식을 줄 모른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원인이 뒤섞여 있다. 개인의 책임, 부모의 심정, 국가의 역할, 개인과 사회 간의 소통방식, 언론의 수준, 권력의 속성, 현실 정치의 무가치성 등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복잡다단하게 엉켜서 개별 국민의 머리와 가슴을 붙잡았던 것이다. 이는 현재진행 중이고 상당기간 계속해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개인과 국가 간의 거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된 주제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위시하여 세계의 모든 혁명은 이 주제의식 위에서 잉태되고 폭발되었다. '토마스 홉스 - 존 로크 - 장 자크 루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설의 계보는 인류가 전제왕정, 입헌군주정, 민주공화정을 거치며 개인과 국가가 어떤 관계로 권력을 분산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앙시엥레짐(구체제)이 붕괴되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을 위시한 전 세계는 본격적인 '국민국가'의 출현을 알렸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의 붕괴와 함께 탄생한 140여 개의 신생독립국들은 다양한 형태로 권력의지를 분산시키며 작금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권력이란 무엇인가

   신간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법을 찾아볼 생각의 틀을 제공한다. SBS가 제작하여 작년 한국PD대상 작품상을 받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최후의 권력>과 일란성 쌍둥이인 책이다. 당시 방송했던 내용과 방송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다듬고 추가하고 수정해서 기존 방송을 보완한 측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이끌고 가는 힘, 즉 '권력'의 의미와 속성,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21세기인 지금도 왕조사회를 이루고 있는 세 나라를 소개하며 국가권력과 동의어인 '왕'과 개별 국민으로서의 '나' 사이의 거리를 포착한다. 이어서 초강대국 미국이 건국 초기와는 달리 돈과 권력이 융합되는 금권천하의 병든 나라가 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오바마 케어'로 대변되는 미국의 고장난 의료제도의 현실을 고발한다. 다음 장에서는 산마리노 공화국과 스위스 연방의 작은 도시 글라루스에서의 직접민주주의의 예를 소개하며 개별 국민이 국가권력을 어떻게 직접적으로 행사하고 통제하는지 보여준다. 마지막 장에서는 결국 문제의 핵심과 출발은 정치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새로운 정치혁명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처음과 마지막을 감곡마을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장식한다. 감곡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문제와 관련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직접 군수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설득하며, 결국 그것을 성취해내는 과정을 들려준다. 이는 책 속에서 긍정적 예로 글감이 된 산마리노 공화국과 스위스 글라루스의 직접민주주의 사례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공저자 SBS '최후의 권력' 제작팀의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기본인식이 어떠한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수천만, 수억 명이 넘는 현대사회의 초대형국가 속에서의 국민권력 작동방식을 소규모공동체의 메커니즘으로 풀이하려 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고도자본주의 간의 복잡다단한 알레고리에 무지한 SBS 제작팀의 지력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SBS 제작팀은 책 말미 에필로그에서 "우리가 <최후의 권력>과 <최후의 제국>을 통해 현대 마천루가 빽빽이 들어선 워싱턴의 금권정치나 혹은 신문명의 대안이라 주장하는 베이징의 검은 구름에 절망하며 인류의 전통적 권력 형태를 찾아 나선 것은 결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며 안전망을 쳤다. 기본적으로 전통 좌파가 향유하는 루소 식의 잘못된 시간관념에 대한 비판을 미리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보험제도 하나만으로 미국을 금권사회의 병든 사회로 규정하고, 다양한 형태의 촌락공동체와 소규모공화정의 예만을 반복적으로 거론하며 '직접민주주의'의 긍정성을 의도적으로 부각한 데에는 SBS 제작팀이 평소에 가져왔던 정치적·경제적 인식이 어떠한가를 어렵지 않게 엿보게 된다.

   사실 SBS뿐만 아니라 MBC, EBS 등의 공중파에서 반자본주의적 기제를 공유하고 마치 과거가 좋았던 것처럼 시계바늘을 예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 혹은 '자본주의의 그늘' 등과 같은 표어는 이제 지겨울 정도가 됐다. 대안과 대책은 없고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면만을 오려서 비판의 재료로 삼는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유럽에서 전개되는 좌·우파의 정책적 대립도 자본주의의 전제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실례로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을 보라. 두 정당의 정책 차이는 '빈부 격차'와 '경제력 독점'에 대한 문제만으로 집약되어 있다. 그 외에는 간주간성 안에서 서로 간에 포용적이고 공유적이다. 우리나라처럼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며 삿대질하는 진흙탕 싸움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국내 공중파의 역할이 컸다는 게 내 기본 인식이다.

   물론 이 책이 가진 힘은 존재한다. 권력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을 추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산마리노 국회의원들의 특색을 서술한 대목은 '참 권력'의 진수와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이다. 권력은 권리이기 이전에 책임이며, 직업이기 이전에 봉사라는 사실을 산마리노의 위정자들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관존민비官尊民卑로 대변되는 조선시대 주자학의 쓰레기 유산에 아직까지 함몰되어 있는 한국 정치권력의 현주소는 '국민이 국가의 주권'이라는 이 나라 헌법 1조 2항의 정신을 요상한 방식으로 굴곡시키고 있다. 온갖 특권과 특혜로 얼눅진 이 나라 국회의원의 자화상을 보라. 이런 면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함의된 가장 기초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존재목적일 것이다.

   내일은 지방선거다. '6·4 지방선거'는 유례가 없는 전 국민의 슬픔과 분노 속에서 치뤄질 예정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한다. 그러나 실상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서두에 언급한 세월호 참사의 후폭풍은 국가권력의 본질이 국민, 즉 '나'에게 있다는 헌법적 권리가 실상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흐려지고 파괴되는지, 그리고 이런 현상에 분노한 다수 국민의 목소리가 총체적으로 어떻게 결합하여 발산하는지 극단적으로 드러난 아웃풋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이번 선거의 결과가 자못 궁금한 건 비단 나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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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기에 이웃들과 나누며 조금이나마 분노를 삭이고자 한다. 영업직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영업은 인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간혹 매출, 수금 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냉정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 장부가 맞지 않는 문제는 꽤 악질적이다. 결제를 받아야 하는데 공급사와 주문사 사이에 잔액이 맞지 않으니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날은 평소에 좋은 관계를 가져온 거래처와 논쟁이 발생했다. 그 거래처와는 오래전부터 3,630원의 장부상 잔액 차이가 발생해왔다. 그랬기에 업체 측에서는 딱 그만큼의 차액을 제외하고 결제를 해왔다. 워낙 소소한 금액이라서 오랫동안 처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업체 측에서 금년부터는 서로 간의 장부상 일치를 깔끔하게 정리하자고 나선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바로 품의를 득해서 자사 잔액에서 3,630원을 떨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업체 측 장부와 동일하게 맞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업체 측도 3,630원을 함께 떨군 것이다. 팩스로 보내준 반품전표를 업체 측도 그대로 장부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적으로 예전과 동일한 차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업체 측 회계담당자는 이 간단한 수학적 상식을 이해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 측에서 반품 전표를 처리했으니 그 전표대로 자기네도 함께 처리하는 게 맞다고 오히려 역성을 내는 게 아닌가. 나는 몹시 황당했지만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업체 담당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 2011년 거래이력부터 보자며 그간 3년 간의 장부를 전부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명확한 확인이 되지 않으면 결제를 할 수 없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까무라쳤다. 우리회사 여직원은 뒤로 자빠졌다. 내 직속상관은 경악했다. 업체 회계담당자의 무지와 고집으로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무려 한 시간을 소비하며 에너지를 낭비했다. 바쁜 가운데 무더운 날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 받을 것인가. 거래처 회계담당자의 기초적 무지와 오만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기의 수준과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지각으로 보는 세계가 참 세계라고 생각하는 우를 쉽게 범한다. 진리의 문제가 아닌 개별성의 영역을 자신만의 객관화로 색칠하여 재단한다. 정작 진리의 영역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파이어아벤트가 <무엇이든지 좋아>에서 외쳤던 것처럼 진리의 구분선을 조롱하며 허투루 흘려보낸다. 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발생된 무지의 결과로서 인류 역사를 불행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20세기 현대사는 인간의 무지가 지구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시대였다.

   어떤 사람은 무지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 지와 행이 모두 마음의 활동으로서 하나라는, 즉 지식과 행위에 대한 근본 명제를 불러일으킨 양명학의 논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식과 실천 사이의 긴장관계를 탐구하는 지행합일설은 무지에 대한 기초적 해석 뒤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무지란, 구조론적 본질로서의 무지, 즉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체계적인 무지를 일컫는다.

   물론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니다. 순수하게 모르는 것 자체가 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형성된 '구조적 무지'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제대로 된 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비판한 것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본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를 고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중용中庸'의 정신과도 직통으로 연결된다. 자사子思가 자신의 명저 《중용》에서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가르친 중용의 개념은 산술적인 의미로서의 '가운데'가 결코 아니다. 중용은 시 속에서 중을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까지의 전체를 다 안 뒤의 시간적 선택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총량을 가늠하고 그중 시대와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것을 뽑아내는 능력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와 중용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앎이란 항시 겸손과 짝이 되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자신의 앎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의 토대에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존경받는 지식인은 항상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과 성실로 중무장한 사람들이었다.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훌륭한 지식인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도 아닐 뿐더러 교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상대의 말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거래처 회계 담당자의 작태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지와 불관용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고발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을 올리며 거래처와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나도 그런 편견의 무지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만큼은 이러한 구조적 무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강력한 도전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역설했듯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상은 누구나 자신이 옳고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달콤한 거짓이 엉성한 사실을 숨기고 편리한 불의가 불편한 진리를 가리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침묵의 미덕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공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만하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거래처 담당자와의 일화를 소개하며 새삼 참과 거짓의 매커니즘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3,630원의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거래처 회계담당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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