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침묵
질베르 시누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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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많은 생각을 했다. 삼위일체( )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무오(無誤)를 인정하는 내게 이 한 권의 소설은 적잖은 도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비롯하여 성경의 절대 권위를 전복하고 있어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자에 기독교를 소재삼아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상상력을 발동하는 미디어의 출현이 어디 한두 건이었던가. 어차피 허구는 허구일 뿐. 픽션임을 인정하며 작품 그 자체를 이해하기로 했다.  

  『신의 침묵』. 제목부터 강렬하다. 부제는 더욱 강렬하다. 소설의 표지에서 십자가를 가로로 횡단하며 적혀있는 '연쇄 살해범이 천사들을 죽이고 있다!'라는 부제는 요상한 그림과 문자와 조합되면서 강렬한 비쥬얼을 발산한다. 신은 무엇에 침묵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침묵한단 말인가. 천사들을 죽이는 연쇄살해범에 대한 침묵인가. 아니면 어떤 침묵이란 말인가. 다양한 사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침투된다. 

  배경은 스코틀랜드. 외딴 섬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저명한 추리소설 작가 클라리사 그레이 부인의 집에서 생면부지의 남자가 죽임을 당한다. 목에 상처를 입은 남자는 죽기 직전에 그레이 부인에게 한 권의 수첩을 건넨다. 그 수첩 속에는 알 수 없는 암호가 기록되어 있다. 그레이 부인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언어학자 매클린 교수와 함께 암호를 해독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음모가 숨겨있음을 밝혀내기 시작한다. 그 수첩의 주인공은 가브리엘 대천사. 그리고 천사들을 연쇄적으로 죽이는 살해범을 찾기 위한 힌트들이 암호화되어 적혀 있던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가는 '숫자 19'와 '쌍둥이 0.809'에서 풀이할 수 밖에 없다.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주변 사람들과 천사들의 죽음이 연이어 계속되면서 공포심을 느끼는 그레이 부인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천사 다니엘의 요청으로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심문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범인을 지목한다. 그런데 그 범인은... 

  작가 질베르 시누에는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의 핵심 인물을 등장시킨다. 모세, 예수, 마호메트. 유대인들로부터 경배의 대상으로까지 추앙을 받는 모세,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 알라신의 위대한 예언자 마호메트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이 셋 중에서 살해범이 있을 것임을 수첩 속의 암호를 통하여 그레이 부인에게 어필한다. 뿌리가 같은 종교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교리와 예언자들의 혼합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출발한다. 

  천사는 꽤 많은 책과 영화에서 소재가 되어 왔다. 사실 천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능력이 있는 고차원적 존재이다. 하지만 시누에가 창조한 천사의 이미지는 무능하고 연약하며 초라하기 그지 없는, 별볼일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 우주를 살아가는 그들이 신과 대면하지 못하고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누추한 존재로 부각된 점은 흥미롭다. 게다가 자신들의 연쇄살해범을 찾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나약함은 마치 소설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살해범의 초라한 정체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강한 연관을 내포한다. 요컨대 작가는 신과 천사에 대한 기존의 고차원적 신비성 부여를 거부한 채, 인간적인 눈높이 수준에서 창조한 것이다. 

  작가 시누에는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곳곳에 복선을 깔아 놓는다. 복잡다단하고 희미한 연속적 복선이 아닌 범인이냐 아니냐의 단순한 복선 구조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천사와 인간들은 하나둘씩 죽어가고 사건의 실마리는 점점 좁혀져 간다. 가브리엘 천사가 죽기 전에 남긴 수첩 속의 암호가 해독되면서 엉킨 실타래는 풀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 반은 예상했지만 반은 예상치 못한 범인의 출현은 마치 영화 《싸인》의 외계인의 등장 장면과 비견될 정도로 황당하다. 설마 그거였어? 고작? 

  문학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곧 작품의 생명과도 같다. 더욱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질적 수준이 독자와의 공감과 부합한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빛나게 된다. 하지만 자기우주적인 비공감적 상상력의 발현에는 독자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상상력의 활개를 자주 목도하며 그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꿈과 희망을 주는 상상력, 누구도 생각치 못한 기발한 상상력, 현실의 연장선상에 맞닿아 있는 수준 높은 상상력이 아닌, 기존 교리의 정통과 신뢰를 살포시 전복하여 얻는 충격효과, 파급효과에 기생한 상상력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경우, 성경과 코란을 인용하면서도 몇몇 본질적 속성에 대한 뒤집기를 통해 독자에게 충격과 파급만을 전달하고 있는 낮은 수준의 상상력으로 내게는 비춰졌다. 

  기독교인을 위시하여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경전과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흥분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픽션일 뿐이다. 작품 속에 작가의 신념과 철학이 얼마만큼 내재되어 있는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어쩌면 근자의 신을 소재로 한 다양한 미디어의 발생은 매력적인 존재로서의 신, 호기심이 발동될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는 인간의 또다른 신앙심의 표현이 아닐까. 

  소설의 제목 '신의 침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사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신의 계시는 침묵하는 듯 보인다. 지금 시대에서는 바다가 갈라지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출현하지 않는다. 반면에 수많은 기적과 회복을 통한 신자들의 간증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내가 확신하는 것은, 질베르 시누에가 상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신은 침묵하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그리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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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감성 - 기업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
시마 노부히코 지음, 이왕돈.송진명 옮김 / GenBook(젠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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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시류(流)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콘은 오랜 기간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음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대체된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이 진행됐던 20세기 이후부터는 그 교체주기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잘 발견하며, 잘 해석하는 개인이나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IQ(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가 개인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될 때가 있었다. 한 개인의 능력의 범주를 수치화된 지능의 지수로 한정하여 일반화 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리만 좋아서는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음을 인간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고 어느새 'EQ(감성지수, emotional quotient)'가 부각되는 시대가 되었다. 단지 머리만 좋은 것보다 감성이 풍부하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CQ(소통지수)', 'NQ(공존지수)' 등의 신조어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만 당분간은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구와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이니치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와 특파원으로 폭넓게 시대의 조류(流)를 탐구한 시마 노부히코는 『돈 버는 감성』을 통해 경제적 관점에서의 감성코드를 풀이한다. 기업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 감성의 힘이 일본의 기업과 지역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실현되었는지를 다양한 예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빛의 속도로 급변하는 시대의 감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역설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21세기의 감성 키워드로 여러가지 항목을 소개하고 있다. 안전·안심, 청결, 건강, 살기 편한 커뮤니티, 간호·의료, 교육, 자연·환경, 엔터테인먼트, 문화·전통·역사, 즐거운 식사, 친구·가족 등이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감성의 키워드들이다. 이것들이 앞으로 10~20년 동안의 사회와 소비, 라이프스타일, 정치 등에 이르기까지 기둥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저자는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인 1990년대 이후 성장한 기업이나 유행하는 상품, 인기 있는 장소, 지역·도시, 라이프스타일 등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어 설득력을 갖는다. 일본경제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날카로운 '감성'의 시대를 예견한 기업과 지역의 선견지명이 결국 돈 되는 성공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도요타, 세콤, 샤프 등 일본 내의 세계적인 대기업들과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실이 알찬 중소기업들의 성공신화 속에 담겨있는 감성코드를 많이 소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저자는 21세기의 조류로 여성과 실버 세대의 주도적인 소비문화를 예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남성과 기업이 경제를 이끌면서 20세기 고도성장기의 주역이 되었다면, 21세기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는 소비 패턴의 극변에 따른 여성과 고령자들의 역할이 매우 커지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응당 고개가 주억거리게 되는 내용이다. 저출산·고령화 시대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 또한 경제 생산성과 국가정책 등의 문제에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터라 남의 일이 아님이 실감된다.  

  한 사회의 경제적 현재와 미래를 감성적 코드로 해석한 저자의 논지는 전반적으로 신선하고 흥미롭다. 하지만 지나치게 일본의 상황과 실례를 중심으로만 기술하여 공감 형성이 안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뒷부분에서는 일본의 지역적 실례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공감적 지루함이 발산된다. 또한 '돈 버는 감성'이라는 제목과 핀트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 다수 있어 책 전체의 통일성과 몰입도가 떨어진 점은 아쉽기만 하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서 1988년 조지 부시(George Bush)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하는데, '가족이란 무엇인가?', '친구란 무엇인가?', '지역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건조해진 미국사회의 단면을 지적하고 국민들을 환기시킨 내용이다. 21세기는 결국 <인간>이라는 소중한 존재감을 재확인하는 시대가 될 것이며, 이는 커뮤니티 정신과 봉사의 정신이 개인과 기업, 지역과 국가에 충분히 고양될 때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 21세기 일본사회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과제이며, 그것이 진정한 '감성'의 올바른 미래상임을 강조한다. 응당 동의되는 내용이리라. 

  앞서 언급했듯이 시대의 냄새와 색깔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급변하는 시대에서 변화를 감지하고 흐름을 읽어 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불리우는 꽤 현명한 종족으로 자찬하지만 기실 그렇지 않은 면이 더욱 많다. 이성적인 만큼 감성적인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분명 한 시대를 대표하고 주도하는 감성적 조류가 있어 왔다. 그리고 그 흐름은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인정한다면, 어떤 감성이 돈이 되는 감성이요, 성공하는 감성인지를 추출하는 작업이 녹록지 않은 일임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이 한 권의 책은 적절한 앎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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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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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心)은 인간을 존재케 하는 요소 중 매우 특별한 것이다. 사실 자존심이 쎄느냐, 쎄지 않느냐, 하는 등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자존심을 소유한다. 타자를 비롯한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자존심 공격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응수하는 지에 대한 방법과 역량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 자체의 존재 유무에 대해선 이론이 없을 것이다. 분명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자존심의 사전적 정의다. 즉 자존심은 '남'과 관련된 매우 상대적인 마음이다. 남과 비교되지 않고, 남에게 공격 당하지 않는 이상 자존심의 성질은 쉽게 발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자존심의 본질을 매우 좁고 불완전하게 해석한 오류일 수 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서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존(存)적인 인간의 존재성을 사유한다면 자존심의 의미는 더욱 확장될 수 있다.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은 이 시대의 담론문화를 주도하는 여덞 명의 지식인들이 설파하는 '자존심' 강연집이다. 이미 한겨레출판사는 '교양'(2004년)과 '상상력'(2005년)과 '거짓말'(2006년)을 주제로 한국사회의 단면을 파헤친 바 있고,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정신적 힘이라 할 수 있는 자존심에 대해 아직 우리사회는 활발한 담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존재가치가 거기에 있다. 미학적 관점에서 자존심을 탐구하는 진중권을 위시하여 여덟 명의 진보 지식인들은 각기의 관점과 분야에서 자존심학을 강의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다양한 관점과 분야에서 우리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자존심 코드를 해석한다. 미학적 관점, 과학의 자존심, 한미FTA의 허와 실, 이주노동자의 국내 현실, 여성과 문화적 관점에서의 폭넓은 주제로 여덟 명의 지식인들이 전하는 강의는 매우 흥미롭다. 출판사와 강연자들의 코드가 부합해서인지 전반적으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색깔이 강하게 배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자존심들이 지켜져야 할까. 

  존재미학적 관점에서 자존심에 접근한 진중권의 강연 내용에 매료되었다. 평소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용기있고 합리적인 언사로 한국 진보담론을 대변하는 진중권은 자존심의 의미를 타자가 아닌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비교에서 결락된 공복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자기 자신의 존중감에서 자존심은 진정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능력과 감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66억의 DNA 코드는 모두 다르며 모두 특별하다. 내 안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는 '아레테(Arete)' 상태의 경험과 확인. 그것이 진정한 자존감을 완성한다는 진중권의 주장에 동의한다. 

  과학의 관점에서 자존심을 설파한 정재승의 강의도 솔깃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과학적 자존심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 정재승의 의견이다. 사실 그렇다. 인류의 역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정복하고자 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법칙을 하나 하나 발견할 때마다 인간의 자신감은 충만했고, 진리라 알고 있었던 것이 전복될 때마다 인간의 자신감은 무너졌다. 자연과 우주를, 겸허하게 탐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정복과 영광의 수단으로 봐왔던 것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를 넘는 경이로움이다. 과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진실되게 바라볼 때에 인간의 자존심은 명징하게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한미 FTA에서 국가적 자존심의 의미를 도출하는 강연도 무척 인상깊다. 한미 FTA 반대 선봉장인 정태인이 전하는 강연 속에는 한미 FTA에 대한 내밀한 사실들이 자세하게 담겨있다. 부존자원이 없는 무역국가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 무역량을 늘려야 한다는 명제는 일견 타당하다. 이 명제의 연장에서 정부는 미국과의 FTA를 타결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결안의 조항들을 미시적으로 보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독소항목이 존재하는 위험천만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피해의 범위를 농업에 국한시키며 국민을 호도한다. 지적지산권, 투자, 서비스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국내의 법과 제도를 수정해야 하며, 이에 따른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실과 심각한 대극적 양극화 현상이 불가피한 한미 FTA에 대한 재론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각도에서 자존심을 탐구한다. 대부분 한국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고 있어 공감되면서 동기가 부여된다. 실제 강의한 내용을 수록했기에 인문학의 딱딱하고 건조한 부담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강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구어체 문장의 정리와 강연 청중들의 다양한 질문과 강연자의 자상한 답변이 부가되어 매우 매끄럽게 완성된 점이 돋보인다. 더욱이 강연의 사회를 맡은 서해성 씨의 섬세한 질문과 유머러스한 추임새는 읽는 이에게 마치 강연장에 있는 듯한 생동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변화는 이제 한 개인의 과제가 아닌 국가와 세계의 과제가 되어 있다. 더욱이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냉전체제 이후 소멸된 패권을 다시 재현하려 하고, 중국은 전 세계 제조업의 23%를 빨아 들이면서 금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상하이 엑스포, 2014년 달착륙이라는 야심찬 대사를 계획하며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있으며, 일본은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갈망하며 명실상부한 강대국 탑 클래스에 진입하려는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주변 강국들의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자존심을 지키며 나아가야 할 것인가. 또한 나 자신은 어떤 자존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자존(尊)에 대한 농밀한 사유가 머리속에서 일렁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아우성이다. 인문학의 위축 현상은 현대 산업사회의 경쟁과 실용주의적 전신에 의해 더욱 심화되면서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문학의 소중함을 새삼 곱씹어야 한다. 인류 문화와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전받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현재의 세계를 반영하고, 변혁하기까지를 꿈꾸는 좋은 인문학 양서들은 인간에게 좋은 질문과 동기부여를 제시한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오류를 확인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변화시키는 힘. 그것은 가장 좋은 책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그런 책을 만들고 읽어야 할 의무는 응당 인간에게 있다. 바로 거기에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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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슬립 - 전2권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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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그리 심각한 수준의 스포일러는 아님. 혹여 스포일러가 걱정되는 분은 마지막에서 세 번째 문단은 읽지 않기를 권고 드림. 

'시간'은 인간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제이다. 오랜 기간동안 인류의 과학과 문화는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조명하고 분석했다. 시간에 대한 인류의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은 1차원 이상을 초월하지 못하는 인류 과학의 아쉬운 현주소를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미 공간(space)은 3차원의 우주를 가시적으로 입증했지만, 시간은 1차원의 선의 구조를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먼 미래, 과연 인류는 시간을 2차원 이상으로 확장하여 누릴수 있을 것인가. 

  시간에 대한 인류의 콤플렉스적 반증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 분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이 창조한 책과 음악과 영화와 각종 미디어 등에는 현실에서는 발생되지 않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들이 녹아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또는 미래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있는가 하면, 먼 우주로의 여행에서 뒤바뀐 시간 체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간 관련 소재들은 대중들의 관심과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도해가고 있다.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하드보일드 에그』, 『벽장 속의 치요』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서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오기와라 히로시는 그의 신작 『타임슬립』을 통하여 흥미로운 시간여행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한 사람의 단수적인 시간 이동이 아닌, 두 사람의 복수적 교체적 시간 이동을 통하여 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래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운명이 뒤바뀐 두 남자의 시간여행을 통하여 태평양 전쟁의 암울한 일본사와 9.11테러로 대변되는 우울한 21세기의 시작을 관통한다. 

  '1944년 9월 12일부터 1945년 8월 16일까지 일어난 이야기 or 2001년 9월 12일부터 2002년 8월 16일까지 일어난 이야기'라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2001년을 살아가는 오지마 겐타는 21세기 일본청년의 초상으로, 1944년을 살아가는 이시바 고이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을 위해 항전을 불사르는 충성된 청년군인의 초상으로 각각 등장한다. 두 남자의 운명적인 타임워프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교차식 구성으로 전개되면서 박진감 넘치는 스펙타클을 선사한다. 

  작가가 설정한 시대 설정이 흥미롭다. 작가는 왜 암울하고 피폐했던 20세기 최악의 전쟁의 심장부를, 그리고 21세기 시작과 함께 경종을 울린 처참한 테러를 시간적 배경의 전면에 배치한 것일까. 소설 속에서 두 남자 주인공은 끊임없이 '현실(기존)'로의 회귀를 갈망한다. 겐타와 고이치는 기존과 다른 세상, 꿈꾸는 듯한 세상, 비상식적인 세상을 목도하며 교체된 시대의 모순성을 인식한다. 죽을 이유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살하길 원하는 청년군인들의 모습, 기존의 모든 가치관과 습속이 파괴되고 순수성을 잃어버린 자극적 문화 등은 두 주인공이 타임워프되는 시대의 모순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암울함에서 암울함으로의 여행은 어쩌면 과거의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반추하고자 하는 넓은 역사의식이 함의된 작가의 외도된 기계장치가 아닐까.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흐름이 있다. 미나미라는 여인에 대한 두 남자의 방향성이다. 본래 겐타의 여자친구인 미나미는 두 남자의 뒤바뀐 운명 가운데서도 그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고 끊임없이 조명받는다. 이미 과거에 구속된 자신의 진짜 연인과 본성이 교체된 과거에서 온 가짜 연인으로부터 모두 사랑을 받는 여인이다. 겐타가 과거 시대에서 겪는 난관과 고생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추동, 그리고 고이치가 가졌던 과거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점차 수그러뜨리는 원동력이 바로 미나미의 존재성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러브 스토리다. 

  소설이 좋은 점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그 어떤 이야기도 창조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픽션이라 할지다로 암울한 과거 속에서 사랑하는 한 여인에 대한 방향성을 잃지 않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준비하는 겐타라는 인물에 강한 매료를 느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연인 미나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겐타의 행동과 의지는 무척이나 감동깊다.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종결된다. 아니다. 희망이 있는 비극이 올바른 정리가 아닐까 싶다. 두 남자 모두 죽음으로 운명을 완성하지만, 미나미의 몸속에 잉태한 하나의 생명은 과거로 간 겐타의 희생적 산물이요, 미래로 온 고이치의 비극적 열매가 합일되는 존재이기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무언가 종결되지 않은 기분. 그 이후의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기대. 그것이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의 솔직하고 즉각적인 느낌이었음을 고백한다. 

  두 남자의 시간을 초월한 운명적 뒤바뀜, 이라는 흥미있는 소재를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멋지게 그려낸 오기와라의 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을 염두한 활자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영상적 상상을 유혹하고 있다. 일본작가들의 넓고 튀는 이야기 창조 능력이 비단 어제 오늘의 공력은 아니지만, 활자에서 영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넓은 공간까지 확보해가는 그들의 능력에 새삼 부러움을 느낀다.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 애니나 드라마, 또는 영화. 그 가능성에 작은 기대를 걸어보면서 '시간'과 '사랑'의 조화로 빚어낸 오기와라의 러브 스토리를 여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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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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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필립 얀시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신앙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나는 하나님을 이분법으로 분리하여 해석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나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었고, 신약의 하나님은 따뜻한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과연 동일한 분인가, 할 정도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극명한 차이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당신의 신성을 깊이 알아가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한 분이시라는 참된 진리를 명징히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이시며, 용서와 인내가 많으신 사랑의 주님이시며, 절대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신이심을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속성과 비전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이 변하시는 분이었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 전에 멸종을 당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결국 '사랑'이라는 초고차원적 우주의 힘으로 발현된다. 인간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시고, 인간이 행복하기를 갈망하시며,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은 우주 시공간의 태동에서부터 무한대로의 종말에까지 계속된다. 

  탁월한 복음주의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필립 얀시는 신간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의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수많은 비쥬얼을 책 속에 놓여놓고 있어 아름다운 활자와 함께 은혜의 하나님을 수식한다. 

  책의 구성은 특이하다. 한 집안의 백년에 걸친 사랑 결핍과 비용서의 아픈 이야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은유하는 아름다운 언어들과 교차하여 들려준다. 이러한 교차식 구성은 올컬러판의 의미심장한 사진들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게 묵상케 한다. 각 페이지마다의 수많은 사진, 간결한 문장과 문단, 인용되는 명문구의 조합이 이뤄내는 연금술에 취해 불과 몇십 분만에 은혜의 강을 건널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한가. 필립 얀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받아 마땅한 것의 정반대 것을 받는다고 부언한다. 그럼에도 은혜는 놀랍고, 은혜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인생이 영원히 변할 것임을 고백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공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준은 결국 하나님의 넓은 사랑 안에서 통폐합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통하여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적 언어를 완성시킨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의인이 된 존귀한 존재들이다. 죄인이면서도 동시에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아의 역설적 존재감을 확인할 때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농밀하고 수준 높은 차원인지를 깨닫게 된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나는 죄인이다. 하지만 의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 안에서 공평함으로 완성된다. 이 놀라운 신의 언어를 곱씹으며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주의 은혜를 찬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를 찬양하리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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