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침묵
질베르 시누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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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많은 생각을 했다. 삼위일체( )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무오(無誤)를 인정하는 내게 이 한 권의 소설은 적잖은 도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비롯하여 성경의 절대 권위를 전복하고 있어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자에 기독교를 소재삼아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상상력을 발동하는 미디어의 출현이 어디 한두 건이었던가. 어차피 허구는 허구일 뿐. 픽션임을 인정하며 작품 그 자체를 이해하기로 했다.  

  『신의 침묵』. 제목부터 강렬하다. 부제는 더욱 강렬하다. 소설의 표지에서 십자가를 가로로 횡단하며 적혀있는 '연쇄 살해범이 천사들을 죽이고 있다!'라는 부제는 요상한 그림과 문자와 조합되면서 강렬한 비쥬얼을 발산한다. 신은 무엇에 침묵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침묵한단 말인가. 천사들을 죽이는 연쇄살해범에 대한 침묵인가. 아니면 어떤 침묵이란 말인가. 다양한 사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침투된다. 

  배경은 스코틀랜드. 외딴 섬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저명한 추리소설 작가 클라리사 그레이 부인의 집에서 생면부지의 남자가 죽임을 당한다. 목에 상처를 입은 남자는 죽기 직전에 그레이 부인에게 한 권의 수첩을 건넨다. 그 수첩 속에는 알 수 없는 암호가 기록되어 있다. 그레이 부인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언어학자 매클린 교수와 함께 암호를 해독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음모가 숨겨있음을 밝혀내기 시작한다. 그 수첩의 주인공은 가브리엘 대천사. 그리고 천사들을 연쇄적으로 죽이는 살해범을 찾기 위한 힌트들이 암호화되어 적혀 있던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가는 '숫자 19'와 '쌍둥이 0.809'에서 풀이할 수 밖에 없다.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주변 사람들과 천사들의 죽음이 연이어 계속되면서 공포심을 느끼는 그레이 부인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천사 다니엘의 요청으로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심문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범인을 지목한다. 그런데 그 범인은... 

  작가 질베르 시누에는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의 핵심 인물을 등장시킨다. 모세, 예수, 마호메트. 유대인들로부터 경배의 대상으로까지 추앙을 받는 모세,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 알라신의 위대한 예언자 마호메트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이 셋 중에서 살해범이 있을 것임을 수첩 속의 암호를 통하여 그레이 부인에게 어필한다. 뿌리가 같은 종교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교리와 예언자들의 혼합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출발한다. 

  천사는 꽤 많은 책과 영화에서 소재가 되어 왔다. 사실 천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능력이 있는 고차원적 존재이다. 하지만 시누에가 창조한 천사의 이미지는 무능하고 연약하며 초라하기 그지 없는, 별볼일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 우주를 살아가는 그들이 신과 대면하지 못하고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누추한 존재로 부각된 점은 흥미롭다. 게다가 자신들의 연쇄살해범을 찾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나약함은 마치 소설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살해범의 초라한 정체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강한 연관을 내포한다. 요컨대 작가는 신과 천사에 대한 기존의 고차원적 신비성 부여를 거부한 채, 인간적인 눈높이 수준에서 창조한 것이다. 

  작가 시누에는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곳곳에 복선을 깔아 놓는다. 복잡다단하고 희미한 연속적 복선이 아닌 범인이냐 아니냐의 단순한 복선 구조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천사와 인간들은 하나둘씩 죽어가고 사건의 실마리는 점점 좁혀져 간다. 가브리엘 천사가 죽기 전에 남긴 수첩 속의 암호가 해독되면서 엉킨 실타래는 풀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 반은 예상했지만 반은 예상치 못한 범인의 출현은 마치 영화 《싸인》의 외계인의 등장 장면과 비견될 정도로 황당하다. 설마 그거였어? 고작? 

  문학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곧 작품의 생명과도 같다. 더욱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질적 수준이 독자와의 공감과 부합한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빛나게 된다. 하지만 자기우주적인 비공감적 상상력의 발현에는 독자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상상력의 활개를 자주 목도하며 그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꿈과 희망을 주는 상상력, 누구도 생각치 못한 기발한 상상력, 현실의 연장선상에 맞닿아 있는 수준 높은 상상력이 아닌, 기존 교리의 정통과 신뢰를 살포시 전복하여 얻는 충격효과, 파급효과에 기생한 상상력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경우, 성경과 코란을 인용하면서도 몇몇 본질적 속성에 대한 뒤집기를 통해 독자에게 충격과 파급만을 전달하고 있는 낮은 수준의 상상력으로 내게는 비춰졌다. 

  기독교인을 위시하여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경전과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흥분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픽션일 뿐이다. 작품 속에 작가의 신념과 철학이 얼마만큼 내재되어 있는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어쩌면 근자의 신을 소재로 한 다양한 미디어의 발생은 매력적인 존재로서의 신, 호기심이 발동될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는 인간의 또다른 신앙심의 표현이 아닐까. 

  소설의 제목 '신의 침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사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신의 계시는 침묵하는 듯 보인다. 지금 시대에서는 바다가 갈라지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출현하지 않는다. 반면에 수많은 기적과 회복을 통한 신자들의 간증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내가 확신하는 것은, 질베르 시누에가 상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신은 침묵하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그리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신앙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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