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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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心)은 인간을 존재케 하는 요소 중 매우 특별한 것이다. 사실 자존심이 쎄느냐, 쎄지 않느냐, 하는 등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자존심을 소유한다. 타자를 비롯한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자존심 공격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응수하는 지에 대한 방법과 역량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 자체의 존재 유무에 대해선 이론이 없을 것이다. 분명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자존심의 사전적 정의다. 즉 자존심은 '남'과 관련된 매우 상대적인 마음이다. 남과 비교되지 않고, 남에게 공격 당하지 않는 이상 자존심의 성질은 쉽게 발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자존심의 본질을 매우 좁고 불완전하게 해석한 오류일 수 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서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존(存)적인 인간의 존재성을 사유한다면 자존심의 의미는 더욱 확장될 수 있다.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은 이 시대의 담론문화를 주도하는 여덞 명의 지식인들이 설파하는 '자존심' 강연집이다. 이미 한겨레출판사는 '교양'(2004년)과 '상상력'(2005년)과 '거짓말'(2006년)을 주제로 한국사회의 단면을 파헤친 바 있고,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정신적 힘이라 할 수 있는 자존심에 대해 아직 우리사회는 활발한 담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존재가치가 거기에 있다. 미학적 관점에서 자존심을 탐구하는 진중권을 위시하여 여덟 명의 진보 지식인들은 각기의 관점과 분야에서 자존심학을 강의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다양한 관점과 분야에서 우리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자존심 코드를 해석한다. 미학적 관점, 과학의 자존심, 한미FTA의 허와 실, 이주노동자의 국내 현실, 여성과 문화적 관점에서의 폭넓은 주제로 여덟 명의 지식인들이 전하는 강의는 매우 흥미롭다. 출판사와 강연자들의 코드가 부합해서인지 전반적으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색깔이 강하게 배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자존심들이 지켜져야 할까. 

  존재미학적 관점에서 자존심에 접근한 진중권의 강연 내용에 매료되었다. 평소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용기있고 합리적인 언사로 한국 진보담론을 대변하는 진중권은 자존심의 의미를 타자가 아닌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비교에서 결락된 공복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자기 자신의 존중감에서 자존심은 진정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능력과 감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66억의 DNA 코드는 모두 다르며 모두 특별하다. 내 안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는 '아레테(Arete)' 상태의 경험과 확인. 그것이 진정한 자존감을 완성한다는 진중권의 주장에 동의한다. 

  과학의 관점에서 자존심을 설파한 정재승의 강의도 솔깃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과학적 자존심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 정재승의 의견이다. 사실 그렇다. 인류의 역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정복하고자 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법칙을 하나 하나 발견할 때마다 인간의 자신감은 충만했고, 진리라 알고 있었던 것이 전복될 때마다 인간의 자신감은 무너졌다. 자연과 우주를, 겸허하게 탐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정복과 영광의 수단으로 봐왔던 것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를 넘는 경이로움이다. 과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진실되게 바라볼 때에 인간의 자존심은 명징하게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한미 FTA에서 국가적 자존심의 의미를 도출하는 강연도 무척 인상깊다. 한미 FTA 반대 선봉장인 정태인이 전하는 강연 속에는 한미 FTA에 대한 내밀한 사실들이 자세하게 담겨있다. 부존자원이 없는 무역국가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 무역량을 늘려야 한다는 명제는 일견 타당하다. 이 명제의 연장에서 정부는 미국과의 FTA를 타결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결안의 조항들을 미시적으로 보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독소항목이 존재하는 위험천만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피해의 범위를 농업에 국한시키며 국민을 호도한다. 지적지산권, 투자, 서비스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국내의 법과 제도를 수정해야 하며, 이에 따른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실과 심각한 대극적 양극화 현상이 불가피한 한미 FTA에 대한 재론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각도에서 자존심을 탐구한다. 대부분 한국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고 있어 공감되면서 동기가 부여된다. 실제 강의한 내용을 수록했기에 인문학의 딱딱하고 건조한 부담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강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구어체 문장의 정리와 강연 청중들의 다양한 질문과 강연자의 자상한 답변이 부가되어 매우 매끄럽게 완성된 점이 돋보인다. 더욱이 강연의 사회를 맡은 서해성 씨의 섬세한 질문과 유머러스한 추임새는 읽는 이에게 마치 강연장에 있는 듯한 생동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변화는 이제 한 개인의 과제가 아닌 국가와 세계의 과제가 되어 있다. 더욱이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냉전체제 이후 소멸된 패권을 다시 재현하려 하고, 중국은 전 세계 제조업의 23%를 빨아 들이면서 금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상하이 엑스포, 2014년 달착륙이라는 야심찬 대사를 계획하며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있으며, 일본은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갈망하며 명실상부한 강대국 탑 클래스에 진입하려는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주변 강국들의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자존심을 지키며 나아가야 할 것인가. 또한 나 자신은 어떤 자존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자존(尊)에 대한 농밀한 사유가 머리속에서 일렁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아우성이다. 인문학의 위축 현상은 현대 산업사회의 경쟁과 실용주의적 전신에 의해 더욱 심화되면서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문학의 소중함을 새삼 곱씹어야 한다. 인류 문화와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전받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현재의 세계를 반영하고, 변혁하기까지를 꿈꾸는 좋은 인문학 양서들은 인간에게 좋은 질문과 동기부여를 제시한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오류를 확인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변화시키는 힘. 그것은 가장 좋은 책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그런 책을 만들고 읽어야 할 의무는 응당 인간에게 있다. 바로 거기에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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