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는 작가들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파울로 코엘료와 같은 작가들 말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는 해외 작가들이다. 국내 작가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것 같다. 그중 하루키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거대한 선인세(先印稅)가 이를 증명한다. 선인세란 말 그대로 미리 주는 인세인데 출판사에서 총 판매량을 예상하고 주는 것이다. 2009년 출간작 『1Q84』의 선인세가 10억이라는 얘기가 정설처럼 돌았다. 그만큼 국내에서 믿고 보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 하루키가 6년 만의 신작을 들고 왔다.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지난 2017년 출간된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1980년 발표한 이래 책으로 출간하지 못한 중편소설을 다시 손보고 확장시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작가가 청년 시절에 쓴 작품을 43년이 지나 세계적인 작가가 된 시점에서 완성시켰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펜을 든 시점이 2020년이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전 세계의 벽이 세워진 때였다. 작가는 왜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미완성작을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열일곱 살의 남자 고교생 '나'가 한 살 아래 여고생 '너'를 좋아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둘은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에서 3등과 4등으로 처음 만난다. 고등학교 2학년 소년인 '나'와 1학년 소녀인 '너'의 이야기다. 너(소녀)는 나(소년)에게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이고, 지금 현실의 존재는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대역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돌연 사라져버린다. '나'는 좋아했던 소녀를 찾아 도시로 간다. 이후 소설의 시점은 벽 안팎이 교차되며 연신 판타지적 이야기가 쏟아진다.

2부에서는 중년이 된 현실의 '나'를 그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도시에 사는 소녀를 잊지 못한다. 출판사 일을 그만두고 지방의 작은 도서관으로 이직한다. 그곳에서 도서관장의 일을 하며 전임 관장인 고야스, 사서인 소에다, 매일 도서관에서 엄청난 속독술로 책을 읽는 소년 M, 역 앞 커피숍을 운영하는 여성과 교류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이곳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니면 자신이 실제인지 그림자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모호한 '나'의 의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판타지적인 일이 펼쳐지고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머릿속에서 감상을 정리하느라 혼쭐이 났다. 책을 읽은 후 되도록 남의 리뷰를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소설은 꽤 넓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끝맺는데 이런 식의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정리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특별한 건 없었다. 많은 독자들이 '벽'의 의미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M)의 정체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내 감상은 달랐다. 나는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에 주목했다. '나'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걸 핑계로 결국 '진짜 나'를 찾는 희미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아 찾기의 여정으로 소설을 이해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하나의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줄 때가 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도 그런 기억이 몇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안양천 또랑에서 친구들과 팬티만 입고 가재를 잡았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우리의 또랑 놀이를 지켜보던 어느 어른이 나보고 "귀엽다"고 격려해 주던 당시 그분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그 강렬한 기억에 의존해 내 자존감의 일부분이 만들어졌다. 소설 속 '나'는 돌연 소녀가 사라진 후 몇 번이고 기억을 재생하며 그 도시에 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곳에서 진짜 소녀를 만날 수 있기를 원했다. 이후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수시로 오가는 듯한 정신없는 이야기 전개는 모두 '나'에게 각인된 '너'를 찾는 갈망이었다. 전임 관장 고야스와의 신비한 접촉과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소년 M과의 소통이 나는 모두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읽혔다.

어쩌면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작가 하루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작품일지 모른다. 40년이 지난 작품을 일흔이 넘은 노 작가가 다시 꺼내들어 손보고자 한 건 창작의 부담이나 한계에 직면한 하루키의 자기 위안적 자아 찾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루키의 문장은 여전히 유려하다. 하지만 평행 이동 식의 억지 같은 스토리 전개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비록 만족스럽진 않지만 안 쓰고 내버려 두면 후회할 것 같아 인생의 느지막에 겨우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년의 하루키가 3040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훈수 두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고 계속 변주를 줄 뿐"이라는 보르헤스 말을 인용하는 거 보면 하루키 스스로 슬슬 창작에 한계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한 것 같다. 소설 초반부터 본체와 그림자 얘기가 나오고 분리와 구별의 개념이 나와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이나 신학적 비유가 있지는 않을까 사유했다. 결론적으로 무의미한 천착이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유령으로 등장하는 고야스, 도시로 가길 원하는 소년 M 모두 주인공 '나'의 관념의 세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관념과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하루키의 과거였고 내면이었고 글쓰기였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언제부턴가 하루키 소설에 집중하기 힘들어졌다. 하루키가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에게 『1Q84』 이후의 하루키는 예전과는 달랐다. 과거에는 항상 중2병이 든 것 같은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에 몰입이 잘 됐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아의 고독과 존재에 집착스럽게 함몰되어 있는 인물들에 공감이 잘 안됐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쟤는 왜 저러지.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등등. 이런 딴지 심성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감상을 옥죄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드는 소설 구조의 기시감 같은 것도 사실상 일상의 나열이나 목적 없이 흘러가는 서사와 다름없었다. 분명 다른 소설인데 매번 엇비슷한 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

나는 10년 전 하루키의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극찬하며 '하루키의 나'에 대해 내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바 있다. 당시 하루키의 '나'를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했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라고 고찰했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고 타인의 자아도 '나'가 의식한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며 하루키 표 주인공에 깊은 공감과 매력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견해가 달라졌다. 일본 경제 황금기 때 백인 흉내 내며 문화 향유하던 권태스러운 시대상에 구속된 고독하고 우울한 인물상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작품 속 '나'는 우울하거나 병들어 있지 않다.

내가 하루키를 높게 평가했던 건 문장 탓이 크다. 스토리와 메시지는 좋으나 오직 문장 때문에 싫어했던 김연수와는 완전히 반대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장은 훌륭한데 비해 스토리는 정말 빈약하다. 이런 점에서 과거 내 리뷰에서 하루키에 대한 긍정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 이런 인식은 이번 소설에서 강하게 작용했다. 작가는 글쓰기의 물리적인 양과 노력에서 성실해야 하지만 작품 안의 서사와 플롯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이러한 작가의 내·외재적 성실함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아무리 판타지라 해도 서사의 인과성과 합목적성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뜬금없는 사건으로 다른 사건을 대체하고야 마는 하루키 식 이야기 구조는 피로감을 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ana)'의 잦은 출현이랄까.

독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근데 호와 불호 사이의 온도가 다르다. 호는 대부분 미지근한데 불호는 거의 뜨겁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호평은 고만고만한데 악평은 나름나름이다. 하루키 표 상징은 이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사랑과 그림자, 도서관, 재즈와 클래식, 맥주와 와인, 파스타와 샐러드 등 하루키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이야기 곳곳에 출몰한다. 전에 비해 옅게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섹스 신은 아예 없다. 그간 하루키를 관습적으로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는 나쁘지 않게 읽힐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의미한 피로를 주었다. 길게도 썼다. 하루키 소설이 이렇게 지루한 적은 처음이다. 작가로서 할 얘기가 많았는지 예전엔 없던 '작가 후기'까지 보탰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하루키는 1949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넷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일 순위 후보로 거론된다. 노벨문학상의 최근 트렌드가 특정 작품이 아닌 작가의 전 문학 일생에 주는 헌사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써온 하루키만큼 노벨상에 가까운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노년으로 갈수록 소설에 힘이 빠지는 건 아쉽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키와 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 건 이번 신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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