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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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말 모시상식에서 은희경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평소 옷 잘 입고 개성있는 스타일을 가진 소설가라는 인식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첫인상이 좋았다. 무엇보다 당찬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심사위원으로 단상에 오른 그는 자신을 '편견이 많은 소설가'라고 밝혔다. 편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식적으로 편견은 좋지 못한 태도다. 사전에서는 편견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정의한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난 의심했다.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는 생각이 많은 소설가를 내가 과연 좋아할 수 있을까.

  작가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텍스트'다. 말이나 사생활, 외모나 도덕성은 비본질적인 부분에 속한다. 일차적으로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삶과 문학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글은 글쓴이의 인격과 특징을 반영한다. 작가의 삶과 세계관, 정신과 태도가 글 속에는 오롯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데미안>을 통해 헤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괴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은 곧 작가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바깥은 없다. 텍스트가 곧 작가(저자)이다.

  은희경의 최신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나에게 은희경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 텍스트다. 그간 각각 한 권의 단편과 장편만을 만났던,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 별다른 매력을 갖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흥미있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쓰게 되는 청춘의 이야기. 한국문단의 3대 여성작가이자 냉소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은희경이 말하는 청춘의 형태와 의미는 어떨지 자못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작가는 열입곱 살의 소년 강연우를 소설 전면에 배치한다. 이혼한 엄마와 사는 연우는 매사에 심드렁하고 삶에 질문이 많은 전형적인 사춘기 소년이다. 같은 고등학교에 배치된 독고태수와 이사온 집 주변을 맴도는 이채영이 연우와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인물이다. 태수의 여동생 마루도 소설 속에서 매우 개성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혼녀인 연우의 엄마 신민아와 엄마 애인 조재욱도 세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추동하는 중심인물로 자리한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 연우가 엄마, 엄마 애인, 친구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갖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그렸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 문체는 딱딱하지 않은 대화체를 사용하여 사춘기 시절의 익살스러움과 설익음을 잘 표현했다. 작가는 온전한 산문체가 아닌 대화와 묘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형식을 파괴하는 혁신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그럼으로써 청소년 시절의 역동을 살려냈다. 또한 소설에서 중요한 매개로 반복 재생되는 'G-그리핀'의 음악과 이를 실제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봉된 음악CD는 소설의 전달력을 배가하려는 작가의 열정으로 기분좋게 수용된다.

  하지만 소설 초반의 흡입력을 견인하지 못하는 중후반의 진부한 이야기 전개와 기존 청춘소설의 틀을 깨지 못한 통속성은 아쉽다. 날개를 단 듯한 자유로운 문체의 매력을 제외하고는 등단 17년차의 소설가의 내공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소설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 및 분배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개성 또한 획일적이다. 특히 주인공 연우의 절친인 태수의 죽음과 연우와 채영의 재회로 급마무리되는 소설의 말미는 매끄럽지 못한 산만한 종결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위로'의 감동이 크게 와 닿지 않는다는데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위로의 본질은 무엇일까. 가정의 불안정성, 현실에 대한 설익은 질문, 사랑한 대상의 상실과 재회는 이미 수없이 많은 청춘소설의 테마로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한 소년의 사춘기 시절을 수놓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제삼자가 어떻게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위로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혹 은희경이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理解'를 '위로慰勞'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독자에게 그것을 권유하는 작가의 오해가 불편하다. 누군가의 청춘시절의 요동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은 위로가 아닌 이해의 선상에서만 가능하다. 어찌 위로할 수 있으랴. 그 시절의 부자연不自然과 비합리非合理를.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그 시기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것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생물학적 나이보다 경험의 연륜이 어른의 의미에 더욱 적확히 닿아 있다. 기쁜 것이든 아픈 것이든 슬픈 것이든 그 어떤 형태의 경험이든 인간은 겪고 겪는 동안 깨닫고 성장해간다. 타자와의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해 기뻐하고 아파하며 슬퍼하는 연우의 고독을 나는 굳이 위로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이해하고 침묵할 뿐이다. 적어도 인간의 성장만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흐름이 매우 인과적因果的으로 작동되는 영역이다. 사랑하고 아파하며 상실했던 만큼 미래는 더 자라있지 않을까. 그것을 기대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것. 그것이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서평을 정리하자.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작가의 연차와 매력적인 책 제목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우 실망스럽게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는 충분히 진지했고 소설은 적절히 유쾌했다. 단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감동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장소설만큼은 감동이 필요하다. 그간 읽어왔던 대부분의 성장소설에서 꾸준한 감동을 받아왔던 내가 왜 은희경의 소설에는 반응하지 못하는 걸까.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 작가 은희경. 이쯤해서 말하고 싶다. 은희경을 위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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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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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코엘료와 만났다.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다. 전작이라 할 만큼 나는 그의 모든 소설들을 탐독해왔다. 『연금술사』는 삶과 꿈에 대한 내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하게 했다. 『베로니카 죽도록 결심하다』는 삶과 죽음을 탐색하면서 현존에서의 사랑이 얼마나 값비싼 것임을 교훈했다. 『순례자』는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음을 일깨웠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신의 여성성을 탐구함으로써 모성이라는 아가페의 인간적 현현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이게 했다.

  코엘료의 모든 작품들은 특유의 신비스러운 문체로 신과 자아를 동시에 천착하는 묘한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일부 기자들이 비판하는 '통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우주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신과 사랑에 대한 코엘료의 진지한 성찰로 볼 수 있다. 코엘료는 항상 진지했다. 신의 여성적 면모를 조명함으로써 삶과 우주에 대한 입체적 본질을 탐구했다. 무엇보다 꾸준한 자아찾기 과정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의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었고 빛났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기나긴 내적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에 어느덧 내 자신의 현재성을 투영시키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요컨대 코엘료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신비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던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코엘료식 허구는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코엘료 문학은 하나의 '브랜드'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 신비스러운 네러티브, 신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 여성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 자아를 찾는 지속적 열정 등은 코엘료 소설이 가진 일관적인 특징이다.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오롯한 개성을 확립한 것만으로도 코엘료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가늠된다.

  그의 최신 장편소설 『브리다』는 기존의 코엘료 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집필시기로 본다면 『연금술사』 다음에 놓이게 되지만 출간이 늦어져 2008년에서야 독자의 손에 잡히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 그의 대표작 『연금술사』의 주제의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다음 작품들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담당한다. 코엘료 문학의 키워드인 자아의 신화, 신성 차원의 사랑, 인간 본질의 탐구를 소설 『브리다』는 오롯하게 담아내고 있다. 보다 집약된 코엘료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브리다』는 코엘료가 순례중에 만난 브리다 오페른이라는 여성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숲속의 마법사를 찾아나선 주인공 브리다의 강렬한 열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코엘료표 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브리다가 얻고자 하는 마법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로 정의된다. 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들이 수없이 반복된다. '태양'과 '달'은 브리다가 이해해야만 하는 마법 전통의 두 가지 원류로 소개된다. 브리다의 첫 마스터인 숲속의 현자와 두 번째 마스터인 위카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중심인물로 소설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태양전승과 달전승으로 구분된 마법의 학습과정은 브리다의 숨겨진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더욱 역동성을 발한다.

  브리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두 마스터는 마법을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로 풀이한다. 브리다는 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브리다가 깨닫고자 하는 마법의 신비한 본질과 끝내 알게 되는 소울메이트의 존재는 코엘료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연장선상에서 상호유사성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명명되는 우주상의 최상위 가치로 연결되는데, 이를 코엘료는 매우 단순한 서사를 통해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것은 표면적으로 마법을 정의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랑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힘이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근원적인 깨달음이며, 세계를 올바르고 직선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광휘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코엘료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그의 문학사에서 사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전통적 신성을 거부하고 신의 양성적 면모를 묘사함으로써 사랑의 해석이 지엽적인 부분에서 호도되는 것을 차단했다. 또한 끊임없는 수련의 과정을 통해 자아의 진실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의 기초가 자아애自我愛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더 나아가 죽음이 갖는 찬란한 속성을 파헤침으로써 죽음에 대한 자각을 치열한 삶의 생명력으로 환원시키기도 했다. 코엘료식으로 따진다면 삶과 죽음, 행복과 열정은 모두 아가페의 또 다른 현현이다. 요는,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통합되고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네 인물의 사랑의 방향성은 인물 사이의 독특한 긴장의 간극을 만들어내며 사랑의 의미를 점차적으로 완성시킨다. 브리다, 로렌스, 마법사, 위카는 각각 서로의 소울메이트로서 얽혀 있다.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놀라움을 갖게 되고 자신이 상대의 소울메이트가 되지 못하는 엄연한 현실에 고개를 떨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울메이트는 매우 오래전, 어쩌면 시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운명적으로 계획되어졌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정되었다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과관계로 생성되지만 우주의 이치상으로 미리 계획될 수밖에 없는, 철저히 신의 디테일로 발현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코엘료가 풀이한 사랑의 메시지는 하루키의 세계와도 닿아 있다. 하루키는 그의 최신 베스트셀러 <1Q84>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매우 독특한 전제를 단다.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라고 말이다. 이는 사랑의 중요한 속성을 함의한다. 그것은 '정신'의 문제이자 '본질'의 문제이며 '차원'의 문제이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은하계를 관통하는 힘이다. 사랑은 공간을 무력화하고 시간을 굴절시킨다. 하루키가 소설 <1Q84>에서 그린 세계가 그랬다. <1Q84>의 여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죽음은 슬프지만 비극적이지는 않다. 이유는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영원성으로 물리적 시간의 유한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 『브리다』에서 그려진 마법 세계의 진본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그것은 종내 브리다가 알고자 했던 마법의 본질이었고 사랑의 정의였다. 인간은 분명 사랑을 통해서만이 차원의 간극을 넘어서는 초월을 경험할 수 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사랑을 대체하지 못한다. 사랑은 회귀하지 않고 환원될 수 없으며 치환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다. 코엘료의 비블리오그래피(bibliography)는 항상 사랑에 관대했다. 그것이 삶과 죽음, 자아와 세계, 신과 열정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소설 『브리다』의 문학적 감동이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색채로 사랑을 탐구하는 소설가 코엘료가 나는 좋다. 그가 사랑에 관대한 것처럼 나도 사랑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사랑을 그린 텍스트에 나도 모르게 관용의 수치는 무한대를 가리킨다. 어쩔 수 없다. 코엘료의 최신작 『브리다』에 대해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을 선사한다.

 
  창조의 정수髓는 오직 하나야. 그리고 그 정수를 사랑이라 부르지. 사랑은 세상 곳곳에 여러 개로 흩어져 있는 삶의 경험을 응축시키기 위해, 우리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는 힘이야.   -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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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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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단에서 소설에 가장 가까운 작가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신경숙을 꼽을 것이다. 신경숙은 자신 스스로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한다.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기에 읽는이의 가슴 구석구석을 매우 섬세한 울림으로 일렁이게 한다. 문단과 문장마다 빼곡히 박혀있는 그의 완벽한 단어조합은 시와 소설의 경계에서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창조한다. 독자는 그의 조사에 되새김하고 그의 동사에 희비하며 그의 쉼표에 멈칫한다. 그랬다. 신경숙의 모든 소설들은, 항상 '온전'했다.

  통속적 소재지만 철저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밀리언을 울렸던 『엄마를 부탁해』의 소름돋는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다. 한국 문학사를 새로 쓴 이 한 권의 소설로 인해 내 가슴은 흥건하게 젖어 한동안을 정지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장편으로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적신다. 고백한다. 나는 항상 신경숙의 문장을 통해 실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해왔다는 것을.

  '성장'과 '청춘'이라는 코드는 작가라면 한 번쯤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 같은 영역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작가의 손길 속에 인간의 자라남에 대한 탐색이 결핍된 적은 드물다. 대상을 잃어버린 아픔과 그것을 치유해가는 과정,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과 자아의 진본을 찾는 여정 등은 청춘이라는 명명 속에 언제나 살아 숨셨던 유전자들이다. 문학은 항상 그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세계의 글쟁이들은 그 관심의 원심력 안에서 역동했다. 그리고, 썼다.

  신경숙의 일곱번째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청춘'이라는 불멸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네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 우정, 꿈까지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투사하는 젊은 날의 원형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위로가 찬란한 열병을 지나는 청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윤'과 '단', '명서'와 '미루'는 개인적 상처를 짊어진 채 비극적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잃어버림'이다. 윤은 병으로 엄마를 일찍 여의었다. 미루는 언니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단은 자신의 영원한 사랑 윤을 저 도시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윤과 명서는 단과 미루의 죽음을 통해 큰 상처를 다시 한 번 겪는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불현듯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은 그들이 서로 마주보고 교감하게 되는 원초적 동기가 된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에서 공통했고 치유의 과정에서 농밀했다. 

  구성이 독특한데 소설의 각 장이 두 인물의 교차식 서술로 흘러간다. 윤과 명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된다. 윤의 1인칭 서술은 소설 전체의 이야기를 추동한다. '갈색노트'로 명명된 명서의 메모는 분량은 짧지만 윤이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서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보완한다. 두 시점 모두 차분하고 독백적이다. 대상을 보고 느끼는 관점 속에 설익은 젊은 날의 진지함이 잘 배어있다. 작가는 이십대 젊은 남녀의 시각에서 문장을 만들어냈고 사유를 이끌어냈다.

  소설 속에서 유독 '걷기'와 '죽음'이 많이 보인다. 윤이가 도시에 올라와 가장 많이 했던 것은 걷는 일이었다. 그녀는 걷는 것을 통해 스쳐간 생각을 불러오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봤다. 걷는 동안 지나간 것과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봤다. 하지만 아프지만은 않았다. 걷는 일은 현존을 탐색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윤은 묵묵히 걸음으로써 이미 지나가버린 정지된 과거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현재의 시간대를 통합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걷는 시간은 '지금'을 읽는 시간이었고 '마음'을 쓰는 시간이었다. 윤에게 걷기는 존재의 내외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인 동시에 현존의 무게를 지탱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작정한듯이 죽음의 장면을 소설 곳곳에 배치했다. 아주 친밀한 누군가를 당장 볼 수 없게 됐을 때 그 사실에 가장 영혼이 훼손되고 가장 강렬하게 자문할 시간은 바로 이십대의 청춘의 시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현존을 이탈한 것은 다르다. 지각을 벗어난 상실은 대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현존이 부정되는 현실은 상실의 최전선이다. 사랑했던 대상의 소멸은 내 자신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버림받는 것이다. 청춘의 시기는 존재한 대상이 갑자기 소멸되어 실존에 이탈된 현실의 엄연함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자라나고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청춘의 의미를 사유했다. 그 시절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걸까. 그 시기에 우리는 가장 크게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또한 누구보다 비극적인 시간을 만나고, 오래, 깊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과연 이것만으로 청춘의 아름다움은 설명되는 걸까. 아니다. 청춘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자.신.의.전.부.를.걸.기.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기에, 행하는 모든 의지적 발산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사한다. 비록 그것이 원치 않는 귀결을 만들어 낼지라도 자신의 모든 유한성을 단 하나의 시공간에 투사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청춘의 아름다움의 진본인 것이다. 

  신경숙의 힘을 실감한다.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한 번 읽어도 충분한 텍스트가 있는 반면 두 번 이상 읽어도 부족한 텍스트가 있다. 난이도나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감동의 밀도를 말하는 것이다. 감동적인 소설은 많이 읽어야 그 밀도를 포착할 수 있다. 완성된 작품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감동의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읽어내고 받아들이는 독자의 부피가 변할 뿐이다. 사실 신경숙의 질량과 독자의 부피를 계산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신경숙이 가진 질량이 워낙 크기에 부피와 무관하게 감동의 밀도는 언제나 무한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동의 무한대. 바로 신경숙 문학의 감동 밀도 함수값이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신경숙은 자신과 소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소설과의 이별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백한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진한 뒤 떠나고 싶다는 것을. 소설 속으로 완벽히 소멸하고 말 것임을.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것임을. 천상 소설가다. 소설은 신경숙을 사랑했고 신경숙은 소설로 존재했다. 이 세계에서 신경숙과 소설은 '하나'였다. 이 일체성의 현발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암유喩를 유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곧 신경숙의 세계라는 것을. 그렇다. 우리는 신경숙의 세계에 살고 있다. 

 


[사진출처: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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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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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내 단단해진 그의 성기를 귀두부터 살짝 핥아 보았다. 앞니가 귀두에 닿지 않도록 입술을 오므리고 혀끝으로 조심스레 성기를 감싸며 불알을 향해 내려갔다. (p. 208)


  간만에 보는 쎈 표현이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기억하지 않는가.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제 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제리』는 서스럼없는  성애묘사가 즐비한 소설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이십대다. 작가 김혜나 또한 이십대의 나이다. 이십대 여작가의 등단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섹스와 밤문화의 과감한 묘사와 적나라한 표현이 소설 『제리』 속에는 가득 차 있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 섹스씬에 깊은 관심을 피력해왔다. 섹스씬 자체에 관심이 있다보다는 섹스묘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묘사 수준은 그 다음의 문제다. 작품 속에서 섹스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과 인간을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하다. 문학 안에서 섹스는 반드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담지 않은 섹스씬의 병렬식 배치는 포르노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일본에서 하루키 소설의 섹스씬을 연구한 논문만 수십 편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과 섹스가 얼마나 농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설 『제리』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20대 남녀가 술 먹고 섹스하기를 반복하는 내용이다. 여대생들이 노래빠에서 남자 도우미들을 불러 선택하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왠지 고독하고 공허한 소설 속 화자 '나'의 파트너는 '제리'라는 이름의 연하 도우미다. 특별히 잘 생긴 것도 특출난 것도 없는 제리에게 '나'는 끌린다. 하지만 그 '끌림'이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저 끌릴 뿐이다.

  '나'에게는 '강'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둘 사이에 사랑이나 그 어떤 진정성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만나고 섹스하는 관계다. '강'과의 섹스는 항상 아프고 불편하다. 성기의 크기가 지나치게 클 뿐만 아니라 철저히 자기자신만의 만족과 쾌감을 누리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의 섹스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아프면 참으면 된다. 그냥 섹스할 뿐이다.

  그에 반해 제리는 부드러운 편이다. 제리의 성기는 평균보다 작고 몸도 왜소하다. 섹스의 하드웨어면에서 '강'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하지만 '강'보다 부드럽고 배려가 있다. 내가 아프다고 느낄 때 사정도 하지 않고 섹스를 중간에 중지한 남자는 제리가 유일하다. 수많은 남자와 자봤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이다. 제리에게 더 끌린다. 왠지 모르게 연락하고 싶고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제리』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모두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간다. 내 속에 내가 없다. 자아를 찾지 못한 불안과 공허를 타자와의 섹스를 통해 잠시 잊는다. 삶의 뚜렷한 방향이나 목적 없이 방황하는 이십대 청년들의 공허한 단면을 작가 김혜나는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 그려냈다. 거듭 반복되는 섹스씬의 나열이 충격적이거나 파괴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뒷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아프고 쓰라리다. '나'의 실존의 불확정성 가운데 고작 무의미한 섹스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이십대의 벌거벗은 형상이 가슴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온다.

  원인과 형태는 다를지라도 어느 누구에게나 이십대의 방황은 존재한다. 힘들고 괴로운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시야를 어느곳에 두는지에 따라 해결의 인과果는 다르게 작동한다. 어릴수록 외부를 보고 어른일수록 내부를 본다. 삶의 무게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한다. 이십대는 어쩌면 '상실의 시대'다. 그 시절 만큼 다양한 자아를 볼 수 있는 시기는 없다.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시기가 바로 이십대라는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매우 진지한 고백을 한다. '소설가로서의 삶'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꿈꾸게 되었을 때 소설은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는 것이다. 이는 소설 속 화자 '나'의 삶과도 상통한다. 나를 괴롭히고 구속하는 것, 동시에 나를 해방하고 구원하는 모든 것이 오직 나 자신뿐, 이라는 저자의 깨달음은 곧 소설 『제리』의 한 줄 리뷰가 된다.

  전체적으로 역량이 부족한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의 가능성은 충분히 엿보인다. 충격적이고 파괴적이며 반도덕적인 게 소설의 질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이런식으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뇌와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의 진보를 기대한다. 82년생 작가의 미래가 밝다. 이제 이런 소설은 다시는 쓰지 않았으면 한다. '충격'과 '파괴'보다는 '사유'와 '문장'으로 승부하는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 감각보다 의미를 담아내는 묵직한 소설을 써주길 희망한다. 이런 기대의 부응에서 별 반 개를 더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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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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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김영하와 만났다. 여기서 '만났다'는 표현에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할 수 있겠다.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되어 독자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곧 작가와 독자의 만남을 의미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 호흡하며 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와 '만났다'는 것이다.

  김영하는 한때 한국 문학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작가 중에서 제일 선봉장에 서 있었다. 문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김연수보다 더 관심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김연수가 그를 넘어선 것 같다. 그것도 한참 넘어선 느낌이다. 이러한 원인은 그간 임팩트 있는 작품을 써내지 못한 김영하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김연수보다 김영하를 더 좋아한다. 엄밀히 말해서 김영하의 문학에 더 박수를 보내는 편이다. 김연수의 '성실함', '진지함', '소탈함'보다 김영하의 '댄디함', '자신감', '쿨함'의 이미지가 작가로서 더욱 매력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예술가보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를 사람들은 더 흠모해오지 않았던가. 내게 김영하는 그렇게 읽힌다.

  6년만의 소설집이다. 매우 매력적인 제목이다. 김영하의 최신 텍스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매력적인 제목만큼이나 각 단편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단편의 분량, 문체, 주제, 무게 등 동일한 작가가 쓴 것이라고는 쉽게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김영하의 작가적 다양성이 작품 곳곳에서 확인된다.

  총 열세 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문예지를 위시하여 그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발표했던 작품들과 공개하지 않았던 신작을 한데 엮어서 출간했다. 소설집은 정통적인 단편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진 개성있는 단편들을 담았다. SF적 요소와 현실과 환상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야기나 한 장 분량의 콩트와 같은 짧은 작품들도 있어 이야기꾼으로서 김영하의 면모를 만끽할 수 있다. 

  표지 사진이 인상적인데, 야간의 차로에서 주행하는 차들과 차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표지로 삼았다. 표지 속 여인은 왜 차도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일까. 여인의 얼굴과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고독과 불안함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표지는 소설집을 관통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불확정성과 불안감이 가득한 일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모프 박사의 '로봇 3원칙'을 소재로 과학기술이 발달된 고도의 정보통신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확정성을 그린 「로봇」이 소설집 전면에 배치됐다. 수경이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며 거듭 로봇의 3원칙을 말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로봇은 수경과 강렬하게 몸을 섞은 후 수경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결국 로봇은 수경을 떠날 수밖에 없다. 수경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물질문명에 오염되어 공허한 삶을 사는 한 여성과 인간보다 순수한 양심으로 자신의 태동성을 지키려는 로봇의 모습을 통해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행」도 꽤 인상적인 작품이다. 오래전 헤어진 한선과 수진의 재회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박사과정을 밝기 위해 미국유학을 떠났던 한선은 오랜만의 수진과의 전화통화에서 그녀의 결혼소식을 듣게 된다. 한선은 수진에게 갑자기 결혼 전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하며 수진의 집 앞에서 그녀를 납치하듯 차에 태우고 바다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테러를 당한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결혼소식을 듣고 불안의 자장에서 비상식적인 행위를 벌이는 엘리트의 광기와 공교롭게도 폭력으로 귀결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그려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단연 「밀회」다. 소설집의 제목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밀회」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분명히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는지 모르는 한 남자의 독백적 서술이 소설의 흐름을 지배한다. 남자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현재에서 과거로, 타자에서 자신에게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한 것은 남성화자의 애절함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남자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는 소설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남자는 왜 죽었으며 무슨 일이 있어난 걸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는 아무도... 

  이 책에 실린 13편의 이야기는 누구도 최종적인 심판을 내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다음 사건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어느 날 사고로 가족과 친밀감을 갖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을 가짜 아내라고 의심하는 남편과 사는 여자(「밀회」), 로봇과 원나잇스탠드 하는 여자(「로봇」),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가수(「악어」) 같은 인물 말이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속도감 있는 '수단'을 선사했을지는 몰라도 진실이라는 '목적'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한 정신은 황폐화시켰다. 진실을 갈망하지만 바쁜 삶 속에서 그것을 성찰할 여유나 방법을 모르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소설은 잘 포착해내고 있다.

  김영하 특유의 도시적 감수성과 속도감으로 일상의 단면을 예리하게 오려내는 솜씨는 여전히 발군이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문장에 실린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자유분방함은 단편에서 더 큰 여운을 발휘한다. 작가는 이 소설집에 대해 내용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낸 소설들이라고 했다. 마음 놓고 자유롭게 쓴 소설이기에 현실 세계와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적 상상력이 더 강력하게 내뿜는 듯하다. 게다가 13편의 단편들은 유쾌하고 쉼 없이 읽히지만 동시에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김영하의 힘 아니겠는가.

  김영하는 고백한다. 지금의 나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이라는 것을. 햄릿의 비현실성을 질문한 어느 독자에 대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답했던 대목을 인용하며 자신과 소설과의 관계를 되돌아봤다는 김영하의 작가적 진지함이 멋지다. 내 영혼은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이며 그것을 저 수면 아래에서 단단히 붙들어주는 게 바로 자신이 쓴 책들이라는 김영하의 고백은 실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소설 상찬론은 인간의 가변성과 불확정성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작가보다 작품이 우선한다는 극히 상식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고 있다. 작가는 반드시 작품을 통해서 말해야 하며 만들어진 작품의 존재성이 창조자인 작가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다. 근데 이게 왠 일인가. 김영하에게 이런 겸손함이 있었단 말인가.

  항상 댄디한 그의 작품들을 만나는 게 참 좋다. 매번 그의 신간을 만날 때마다 새롭고 다채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단에서도 인정하는 속필이라고 하지만 쓰고싶을 때 내키는대로 쓴 작품들을 모아 이 정도 퀄리티의 소설집을 낼 정도라면 과히 천재 소설가의 역량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평을 정리하자. 김영하의 최신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불안과 공허의 자장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일탈된 모습과 그것의 성찰과 변혁에 한계를 지닌 현대인들의 다양한 단면을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굳이 박민규의 추천사를 인용해야겠다. 이 작품에 대해 호평을 하는 것조차도 살짝 화가 난다. 왜냐하면 김영하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소름이 돋았을 독자들이 널리고 널렸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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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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