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김영하와 만났다. 여기서 '만났다'는 표현에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할 수 있겠다.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되어 독자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곧 작가와 독자의 만남을 의미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 호흡하며 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와 '만났다'는 것이다.

  김영하는 한때 한국 문학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작가 중에서 제일 선봉장에 서 있었다. 문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김연수보다 더 관심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김연수가 그를 넘어선 것 같다. 그것도 한참 넘어선 느낌이다. 이러한 원인은 그간 임팩트 있는 작품을 써내지 못한 김영하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김연수보다 김영하를 더 좋아한다. 엄밀히 말해서 김영하의 문학에 더 박수를 보내는 편이다. 김연수의 '성실함', '진지함', '소탈함'보다 김영하의 '댄디함', '자신감', '쿨함'의 이미지가 작가로서 더욱 매력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예술가보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를 사람들은 더 흠모해오지 않았던가. 내게 김영하는 그렇게 읽힌다.

  6년만의 소설집이다. 매우 매력적인 제목이다. 김영하의 최신 텍스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매력적인 제목만큼이나 각 단편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단편의 분량, 문체, 주제, 무게 등 동일한 작가가 쓴 것이라고는 쉽게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김영하의 작가적 다양성이 작품 곳곳에서 확인된다.

  총 열세 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문예지를 위시하여 그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발표했던 작품들과 공개하지 않았던 신작을 한데 엮어서 출간했다. 소설집은 정통적인 단편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진 개성있는 단편들을 담았다. SF적 요소와 현실과 환상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야기나 한 장 분량의 콩트와 같은 짧은 작품들도 있어 이야기꾼으로서 김영하의 면모를 만끽할 수 있다. 

  표지 사진이 인상적인데, 야간의 차로에서 주행하는 차들과 차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표지로 삼았다. 표지 속 여인은 왜 차도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일까. 여인의 얼굴과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고독과 불안함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표지는 소설집을 관통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불확정성과 불안감이 가득한 일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모프 박사의 '로봇 3원칙'을 소재로 과학기술이 발달된 고도의 정보통신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확정성을 그린 「로봇」이 소설집 전면에 배치됐다. 수경이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며 거듭 로봇의 3원칙을 말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로봇은 수경과 강렬하게 몸을 섞은 후 수경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결국 로봇은 수경을 떠날 수밖에 없다. 수경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물질문명에 오염되어 공허한 삶을 사는 한 여성과 인간보다 순수한 양심으로 자신의 태동성을 지키려는 로봇의 모습을 통해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행」도 꽤 인상적인 작품이다. 오래전 헤어진 한선과 수진의 재회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박사과정을 밝기 위해 미국유학을 떠났던 한선은 오랜만의 수진과의 전화통화에서 그녀의 결혼소식을 듣게 된다. 한선은 수진에게 갑자기 결혼 전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하며 수진의 집 앞에서 그녀를 납치하듯 차에 태우고 바다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테러를 당한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결혼소식을 듣고 불안의 자장에서 비상식적인 행위를 벌이는 엘리트의 광기와 공교롭게도 폭력으로 귀결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그려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단연 「밀회」다. 소설집의 제목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밀회」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분명히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는지 모르는 한 남자의 독백적 서술이 소설의 흐름을 지배한다. 남자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현재에서 과거로, 타자에서 자신에게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한 것은 남성화자의 애절함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남자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는 소설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남자는 왜 죽었으며 무슨 일이 있어난 걸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는 아무도... 

  이 책에 실린 13편의 이야기는 누구도 최종적인 심판을 내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다음 사건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어느 날 사고로 가족과 친밀감을 갖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을 가짜 아내라고 의심하는 남편과 사는 여자(「밀회」), 로봇과 원나잇스탠드 하는 여자(「로봇」),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가수(「악어」) 같은 인물 말이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속도감 있는 '수단'을 선사했을지는 몰라도 진실이라는 '목적'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한 정신은 황폐화시켰다. 진실을 갈망하지만 바쁜 삶 속에서 그것을 성찰할 여유나 방법을 모르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소설은 잘 포착해내고 있다.

  김영하 특유의 도시적 감수성과 속도감으로 일상의 단면을 예리하게 오려내는 솜씨는 여전히 발군이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문장에 실린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자유분방함은 단편에서 더 큰 여운을 발휘한다. 작가는 이 소설집에 대해 내용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낸 소설들이라고 했다. 마음 놓고 자유롭게 쓴 소설이기에 현실 세계와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적 상상력이 더 강력하게 내뿜는 듯하다. 게다가 13편의 단편들은 유쾌하고 쉼 없이 읽히지만 동시에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김영하의 힘 아니겠는가.

  김영하는 고백한다. 지금의 나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이라는 것을. 햄릿의 비현실성을 질문한 어느 독자에 대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답했던 대목을 인용하며 자신과 소설과의 관계를 되돌아봤다는 김영하의 작가적 진지함이 멋지다. 내 영혼은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이며 그것을 저 수면 아래에서 단단히 붙들어주는 게 바로 자신이 쓴 책들이라는 김영하의 고백은 실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소설 상찬론은 인간의 가변성과 불확정성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작가보다 작품이 우선한다는 극히 상식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고 있다. 작가는 반드시 작품을 통해서 말해야 하며 만들어진 작품의 존재성이 창조자인 작가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다. 근데 이게 왠 일인가. 김영하에게 이런 겸손함이 있었단 말인가.

  항상 댄디한 그의 작품들을 만나는 게 참 좋다. 매번 그의 신간을 만날 때마다 새롭고 다채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단에서도 인정하는 속필이라고 하지만 쓰고싶을 때 내키는대로 쓴 작품들을 모아 이 정도 퀄리티의 소설집을 낼 정도라면 과히 천재 소설가의 역량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평을 정리하자. 김영하의 최신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불안과 공허의 자장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일탈된 모습과 그것의 성찰과 변혁에 한계를 지닌 현대인들의 다양한 단면을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굳이 박민규의 추천사를 인용해야겠다. 이 작품에 대해 호평을 하는 것조차도 살짝 화가 난다. 왜냐하면 김영하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소름이 돋았을 독자들이 널리고 널렸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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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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