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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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단에서 소설에 가장 가까운 작가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신경숙을 꼽을 것이다. 신경숙은 자신 스스로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한다.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기에 읽는이의 가슴 구석구석을 매우 섬세한 울림으로 일렁이게 한다. 문단과 문장마다 빼곡히 박혀있는 그의 완벽한 단어조합은 시와 소설의 경계에서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창조한다. 독자는 그의 조사에 되새김하고 그의 동사에 희비하며 그의 쉼표에 멈칫한다. 그랬다. 신경숙의 모든 소설들은, 항상 '온전'했다.

  통속적 소재지만 철저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밀리언을 울렸던 『엄마를 부탁해』의 소름돋는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다. 한국 문학사를 새로 쓴 이 한 권의 소설로 인해 내 가슴은 흥건하게 젖어 한동안을 정지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장편으로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적신다. 고백한다. 나는 항상 신경숙의 문장을 통해 실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해왔다는 것을.

  '성장'과 '청춘'이라는 코드는 작가라면 한 번쯤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 같은 영역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작가의 손길 속에 인간의 자라남에 대한 탐색이 결핍된 적은 드물다. 대상을 잃어버린 아픔과 그것을 치유해가는 과정,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과 자아의 진본을 찾는 여정 등은 청춘이라는 명명 속에 언제나 살아 숨셨던 유전자들이다. 문학은 항상 그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세계의 글쟁이들은 그 관심의 원심력 안에서 역동했다. 그리고, 썼다.

  신경숙의 일곱번째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청춘'이라는 불멸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네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 우정, 꿈까지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투사하는 젊은 날의 원형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위로가 찬란한 열병을 지나는 청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윤'과 '단', '명서'와 '미루'는 개인적 상처를 짊어진 채 비극적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잃어버림'이다. 윤은 병으로 엄마를 일찍 여의었다. 미루는 언니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단은 자신의 영원한 사랑 윤을 저 도시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윤과 명서는 단과 미루의 죽음을 통해 큰 상처를 다시 한 번 겪는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불현듯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은 그들이 서로 마주보고 교감하게 되는 원초적 동기가 된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에서 공통했고 치유의 과정에서 농밀했다. 

  구성이 독특한데 소설의 각 장이 두 인물의 교차식 서술로 흘러간다. 윤과 명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된다. 윤의 1인칭 서술은 소설 전체의 이야기를 추동한다. '갈색노트'로 명명된 명서의 메모는 분량은 짧지만 윤이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서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보완한다. 두 시점 모두 차분하고 독백적이다. 대상을 보고 느끼는 관점 속에 설익은 젊은 날의 진지함이 잘 배어있다. 작가는 이십대 젊은 남녀의 시각에서 문장을 만들어냈고 사유를 이끌어냈다.

  소설 속에서 유독 '걷기'와 '죽음'이 많이 보인다. 윤이가 도시에 올라와 가장 많이 했던 것은 걷는 일이었다. 그녀는 걷는 것을 통해 스쳐간 생각을 불러오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봤다. 걷는 동안 지나간 것과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봤다. 하지만 아프지만은 않았다. 걷는 일은 현존을 탐색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윤은 묵묵히 걸음으로써 이미 지나가버린 정지된 과거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현재의 시간대를 통합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걷는 시간은 '지금'을 읽는 시간이었고 '마음'을 쓰는 시간이었다. 윤에게 걷기는 존재의 내외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인 동시에 현존의 무게를 지탱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작정한듯이 죽음의 장면을 소설 곳곳에 배치했다. 아주 친밀한 누군가를 당장 볼 수 없게 됐을 때 그 사실에 가장 영혼이 훼손되고 가장 강렬하게 자문할 시간은 바로 이십대의 청춘의 시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현존을 이탈한 것은 다르다. 지각을 벗어난 상실은 대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현존이 부정되는 현실은 상실의 최전선이다. 사랑했던 대상의 소멸은 내 자신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버림받는 것이다. 청춘의 시기는 존재한 대상이 갑자기 소멸되어 실존에 이탈된 현실의 엄연함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자라나고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청춘의 의미를 사유했다. 그 시절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걸까. 그 시기에 우리는 가장 크게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또한 누구보다 비극적인 시간을 만나고, 오래, 깊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과연 이것만으로 청춘의 아름다움은 설명되는 걸까. 아니다. 청춘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자.신.의.전.부.를.걸.기.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기에, 행하는 모든 의지적 발산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사한다. 비록 그것이 원치 않는 귀결을 만들어 낼지라도 자신의 모든 유한성을 단 하나의 시공간에 투사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청춘의 아름다움의 진본인 것이다. 

  신경숙의 힘을 실감한다.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한 번 읽어도 충분한 텍스트가 있는 반면 두 번 이상 읽어도 부족한 텍스트가 있다. 난이도나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감동의 밀도를 말하는 것이다. 감동적인 소설은 많이 읽어야 그 밀도를 포착할 수 있다. 완성된 작품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감동의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읽어내고 받아들이는 독자의 부피가 변할 뿐이다. 사실 신경숙의 질량과 독자의 부피를 계산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신경숙이 가진 질량이 워낙 크기에 부피와 무관하게 감동의 밀도는 언제나 무한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동의 무한대. 바로 신경숙 문학의 감동 밀도 함수값이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신경숙은 자신과 소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소설과의 이별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백한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진한 뒤 떠나고 싶다는 것을. 소설 속으로 완벽히 소멸하고 말 것임을.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것임을. 천상 소설가다. 소설은 신경숙을 사랑했고 신경숙은 소설로 존재했다. 이 세계에서 신경숙과 소설은 '하나'였다. 이 일체성의 현발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암유喩를 유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곧 신경숙의 세계라는 것을. 그렇다. 우리는 신경숙의 세계에 살고 있다. 

 


[사진출처: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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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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