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독서경향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분명 고무적인 일이리라. 사실 고백하자면, 본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다. 최소한 작년까지는 인문학이나 경제&경영도서, 자기계발서, 기독도서 등의 부류들로 독서경향이 한정되어왔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내 머리와 가슴을 크게 두들기기 시작한 것은 금년부터가 아닌 듯 싶다.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깊이 있는 소설 한 권이 더욱 웅숭깊은 삶과 지혜에 대한 통찰을 비춰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시점부터다.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붓는 심정으로 최근들어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독서를 즐기려 노력하고 있다. 주로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책을 구매하는 편인데 베스트셀러 중에서 반감이 생기지 않는 책과 오늘의 책 메뉴 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대부분 내 지갑의 문을 열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이 최근 한국과 일본을 넘어 동유럽소설까지 내 독서성향이 침투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차가운 피부』는 기대 이상의 강한 인상을 심어줬으며 최근 일간지에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바다의 성당』은 이미 구매하여 책장 속에서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 중 하나이다. 또한 제목에서부터 강한 호감을 불러 일으켰던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내 의지와 결정이 아닌, 블로그 이웃인 린드그렌님으로부터 책여행을 통해 소개받은 경우이기도 하다.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철저한 추리소설이다. 하지만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을 해결해가는 형사나 탐정의 존재는 없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네스터를 비롯하여 사건과 관계된 몇몇 중심인물들의 이야기로만 추리의 서사가 완성된다. 복잡한 플롯이나 반전의 연속도 그리 크지 않다. 추리소설이되, 나름대로 차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며 각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인간상 묘사를 재치있고 흥미롭게 그린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뜻하지 않게 냉동고 안에 갇혀 죽게되는 네스터의 현재의 시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이 벌어진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 있던 6명의 인물들. 소설의 시간은 과거로 회귀하면서 각 인물들과 네스터와의 인과관계가 마치 퍼즐을 조합하듯이 정리된다. 소설의 서사는 <네스터의 죽음>이라는 현재의 사건 결과가 과거의 사건의 원인으로 이동하면서 뒤엉켰던 실타래가 풀어지듯 인과성의 순서로 재정리된다. 하지만 결코 복잡하지는 않다. 

  <네 개의 T>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에 대한 설명은 논하지 않기로 함 - 의 존재와 네스터와의 상관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각 인물들을 다양하고도 섬서하게 묘사하고 있다. 호모와 동성애, 부정부패, 욕망과 불륜 등 지우고 싶은 과거와 현재의 비밀에 압박을 받고 있는 인간상들의 묘사는 흥미롭다. 각 인물들은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하지?', '누군가가 이 비밀을 알고 있다면?' 이라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방어에 대해 사유한다. 이러한 사유는 보다 더 진전된 사악한 마음과 오해와 선입견이 결합되어 어두운 인간상을 형성한다.

  과연 그들의 생각은 옳았던 것일까? 비밀에 대한 발설 염려와 그것을 알고 있는 자의 발설 의지가 일치했던 것일까? 잘못된 인식과 지나친 이기심과 자기방어, 그리고 인생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오해와 편견이라는 단어들..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수식하는 단어들을 음미하며 소설을 마지막 장을 덮는다.

  <아가사 크리스티>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서 크게 전복적이거나 크게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극도의 이기적 자기방어를 비교적 섬세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흥미있다. 추리소설이라는 기계적인 구성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 보다 철학적이고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꽤 흥미있는 소설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 비밀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려고 할 때에 인생사는 꼬이고 문제가 발생한다. 이 소설이 주는 교훈을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쌩뚱맞을까?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서 모르는 게 약이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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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일체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인간은 어떤 종족인가? 쉬운 질문일 수 있지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채 반추하면 쉽지 않은 질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어 왔다. 심리학, 미학,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수많은 종교들도 인간을 천착한다. 불교는 인간이 깊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신이 되는 종교이며,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나선 종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인간이란 종족은 만물의 영장인 동시에 이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 중에서 가장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인류의 교육과 종교 등에서 드러난 보편적 이상을 정리하면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사랑>에 민감하며, 갈구하며, 구속된 종족은 없다. 모든 교육과 이상과 종교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귀결된다. <사랑>은 동기에 질문하지 않으며,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절대선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철저하게 배치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미움이나 분노? 아니면 질투? 사실 미움이나 분노, 질투 등의 개념은 사랑의 정의를 외연적인 의미로만 해석했을 때 가능한 반의어들이다. 사랑의 웅숭깊은 내면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반의어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두려워하며, 두려움이 극대화되었을 때에 사랑이 결락된다. 사랑이 충만한 인간은 두려울 수 없고, 두려움이 충만한 인간은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우주의 시공간에서 사랑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친구격인 <외로움>은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 원인이다. 고독한 인간은 사회성 결핍에 빠지며 극도의 감정 불조절 인간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극도의 고독은 종국에는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적잖이 충격적이고 폐륜적인 사건들이 여기서 연유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한 고독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 66억의 인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있고 너와 우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인류의 불행이기도 하며 <불관용>이라는 또다른 성질의 절대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절대선인 사랑을 지향하며 갈구하는 인간이 과연 선한 존재라 정의될 수 있을까? 답변을 함에 있어 꽤나 머뭇거림을 제공하는 질문이다. 나 또한 인간종족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종족이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부의 개념이 정립되어가면서 경쟁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점차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의 만연은 인간성을 상실케 했고 극도의 이기심과 거짓을 양산하였다. 전쟁과 테러, 성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 양심의 실종 등 인류는 온갖 부패함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또는 비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지금도 냉혹하게 진행되고 있다.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는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고독, 미움과 두려움, 잔인함과 폭력성을 깊이 있고 수준 높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그의 처녀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전개로 원초적 인간의 내면상을 통찰하고 있다. 세상에 절망하고 소통을 거부한 채 남극의 외딴 섬에 도착한 한 남성화자를 통해 절대 고독과 소통 불가함이 설정된다. 원초적인 공포에 앞선 두려움과 그로테스크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잔인함과 폭력성 등 인간의 악한 내포적 성향들이 다채롭게 출현하고 있다. 

  <차가운 피부>는 징그럽다 못해 섬뜩하다 . 소설을 읽은 후 차가운 피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면 닭살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다. 한 남자의 1년여의 섬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 인간의 고독이 외로움을 만들고, 그 외로움의 잘못된 전이가 기괴한 사랑의 감정을 만들며, 이에 소통의 불가능이 합쳐지면서 미움과 비인간성의 극대화로 실현되는 것을 특이한 소재와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연출로 그려낸 수작이라 할 만하다.  

  제목 <차가운 피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실 인간의 피부는 전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피부다. 인간은 위대한 온혈동물의 포유류로서 가장 발달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직립종족이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가장 차가운 마음을 지닌, 냉혈한 종족이기도 하다. 아마도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차가운 피부>를 통해 현실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냉혈한 <차가운 인간>종족의 본성을 그림으로써 인류에게 얼마나 <사랑>이 결락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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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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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는 섬세한 관찰력을 가진 작가다. 그 관찰력이라는 것이 제법 흥미롭다. 옆집 강아지부터 여행중의 맛집 간판의 문구, 방문한 치과의사의 외모, 과거 명시의 어느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찰력은 다양함의 다양함의 다양함의 쌩뚱함이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끄집어 내서 글의 재료로 삼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지식의 내공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의 글은 엉뚱하기도 하고 유쾌한 면도 있으며 신선하면서 쌩뚱맞다. 순간적으로 발견한 것들과 세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상식 이상의 지식들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한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도 이러한 성석제표 브랜드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이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통하여 성석제가 굉장히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작가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잊지 않고 메모하면서 활자로 풀어놓는다. 문체 또한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기 그지 없어 독자는 그의 글에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이 <재미>있어 한다. 그의 최근 출간작인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는 바로 이러한 그의 특질에 더하여 범박한 지식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책속의 책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힘」, 「관점에 따라 다르다」, 「오후의 국수 한 그릇」, 「문자의 예술」, 총 4개의 큰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수없이 많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코믹한 백과사전이라 정의할 만큼 그의 경험담과 지식이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에 양념되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특히 「오후의 국수 한 그릇」편에서는 음식의 기원 및 맛나는 음식에 대한 소개 등의 풍성한 음식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얘기하고 있어 읽는 내내 입 안에서 침샘의 활성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더불어 「문자의 예술」편에서는 재미있는 <문자>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주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문자의 예술」편을 꽤 흥미있게 읽었다. 성석제가 언급한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최고수준의 문자라 할 만하다. 한글의 과학성과 예술성은 이미 국내외의 저명한 전문가들로부터 공감되고 있다. 세계의 공용어인 영어가 동사가 발달한 언어라면, 한국어는 형용사가 발달한 언어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번역계의 정설이다. 한국어의 깊이있고 다채로운 형용문구를 영어의 어휘로는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문자를 지녔음에도 노벨문학상을 단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씁쓸함을 넘어서서 억울하기까지 하다. 번역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국력의 신장과 자국문학의 사랑을 고양시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리라. 

   문학은 다양한 기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비단 문학의 교화적 기능이니 쾌락적 기능이니 하는 전문적 문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문학은 오롯하게 인간을 자극한다. 성석제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이 독자들에게 부담 없고 걸죽하게 <재미>와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의 글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높낮이가 교차되지 않으며, 냉정함이나 강렬한 느낌도 추구하지 않는다. 전복적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재미>가 있다. 그것이 성석제표 활자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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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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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극작술에서 인과성의 질서는 매우 중요하다. 한 이야기 다음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한 이야기의 결과로써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는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이야기가 잘 흐르는 듯하다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난데없는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면 관객과 독자는 어리둥절하기 마련이다. 최근 「디-워」 논쟁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2,500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에서부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어려운 문구를 인용하면서까지 흥분한 것이 이해될 만하다. 원인과 결과의 질서가 상식 안에서 정리되어야 관객과 독자는 허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야기(story)와 플롯(plot)은 다른 개념이다. 이야기는 일정한 시간적 연속성에 의해서 정리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처럼 정리된 것은 아무런 흥미가 유발되지 않고 단순한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 말이다. 흔히 접하는 일기나 신문의 기사같은 것, 바로 그러한 일반적인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플롯은 그 흐름 속에 끼어들어 앞뒤의 관계를 밝혀주는 구성원리가 된다. 즉 "왕이 죽고 여왕도 죽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전제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만이 제시된 '스토리'에 해당된다. 하지만 "왕이 죽고 나서 여왕은 슬픔에 못 이겨 죽었다"고 하면 무언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서도 시간 순서는 있다. 왕이 죽고 여왕도 죽었다는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여왕이 죽었는지에 대한 원인과, 또 그래서 여왕이 죽었다는 결과가 확실히 존재함으로써 왕이 죽고 여왕이 죽었다는 시간순서를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플롯은 한 사건의 이야기의 재구성에 작용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성이 제법 탄탄한 영화나 연극, 문학이 제법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재미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꽤 훌륭한 구성력을 갖춘 소설을 만났다. 온다 리쿠의 최신 출간작 『유지니아』를 읽었다.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 문학의 거대함에 대해 새삼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온다 리쿠와 같이 짧은 시일에 한꺼번에 그리 많은 작품을 출간한 작가가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난 2년간 19편이 출간되었고, 더욱이 지난 한 달간 7편이 쏟아졌으니 봇물 터진다는 얘기가 여기에 쓰는 말일 것이다. 현재 온다 리쿠 소설은 하나의 존(zone)을 형성하여 두꺼운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다. 그 유명하고 위대한(?) 아줌마 작가와의 첫만남이 『유지니아』라는 미스테리 소설로 이뤄진 것이다.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이라는 객관적인(?) 평가와 '노스텔지어의 마법사'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책의 첫 장을 넘기는데 기대감과 흥분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구성은 미스테리 소설답게 매우 복잡하다. 각 장이 바뀔 때마다 1인층과 3인층의 서술 시점이 교차되며 소설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공간 변화가 수시로 이뤄진다. 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과 각 장의 인물들의 현재적 플롯이 교차되면서 탄탄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방 재력가문인 아오사와 가의 잔칫집에서 일가족을 비롯해 친적과 이웃사람들까지 열일곱 명이 희생된 독살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사건이다. 현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 아오사와 히사코만이 유일하게 화를 면한다(소설을 읽다보면 가정부도 한 명 살아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장에는 수수께끼 같은 편지가 남겨져 있다. “유지니아, 나의 유지니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 몇 달 뒤, 한 남자가 자신이 아오사와 가 독살 사건의 범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결정적인 몇 가지 증거로 인해 사내가 범인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고 사건은 종결된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소설은 이미 밝혀진 범인 이외의 또 다른 진범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마치 퍼즐을 맞춰나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퍼즐이 하나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명확하고 확실함이 아닌, 항상 2% 부족한 공간을 남겨놓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상들은 철저하게 과거에 얽매여있다. 20년 전의 사건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과거로의 회귀를 매우 뛰어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 인물들마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부 다르다. 다른 시각, 다른 관찰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소설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사건과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독자를 압도한다. 더욱이 저기압이 몰고오는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공기, 갑자기 불어닥치는 비바람, 숨이 멎을 듯 옥죄어드는 더위에 대한 묘사는 전율이 느껴질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묘사는 무언가 명확하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있는 듯한, 앞으로 완성될 퍼즐로 향하는 서사 전개와 좋은 궁합을 이루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고전적인 추리소설과는 맥을 달리한다. 작가는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 이상의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사실 범인의 존재는 도입부에서부터 암시된다. 그 작은 암시가 소설의 서사구조가 완성되어가면서 보다 뚜렷하고 좁혀져가는 듯 보인다. 마지막 한 존재를 향해 밀려가는 소설의 흐름 속에서 결말은 시원함을 제공하지 못한다. 진범의 존재감, 범행의 동기, 편지가 의미하는 뜻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은 채, 작가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의무를 넘기고 있다. 무언가 시원한 한 방을 원했던 독자는 무언가 흐릿흐릿하고 몽환적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자신의 전두엽을 활발하게 작동시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중심 화자 두 명은 어느 한 존재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다. 강렬하게 그 존재를 향해 몰입한다. 그들의 목마름은 소설의 서사가 완성되어가면서 더욱 확연해진다. 그 목마름의 본질은 호기심을 넘어선 연민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사랑의 감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넘어선 마치 내 자신이 네가 되려고 하는 심정으로 강렬하게 갈구한다. 두 명의 인물, 즉 인터뷰를 진행하는 자와 당시 사건을 소설로 재탄생시킨 자의 시간성과 방향성은 철저하게 과거의 그 존재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사실은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어느 한 방향에서 본 주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세상에 명확한 사실은 존재하는 걸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일까? 깊은 사색이 밀려온다. 

  복잡하면서 잘 짜여진 뛰어난 플롯과 흐릿하고 명확한 답이 없는 무의식적 세계가 잘 조합되어 서사의 훌륭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온다 리쿠라는 거대한 이름값에 대한 첫만남을 풍성한 만족감으로 채워주었다.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 속으로 침투하고 싶다. 그녀의 다른 소설들이 어떤 완성도와 무게감으로 읽힐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을 꺼리며 내내 한 사람의 시점에 갇히는 것이 자기에게 잘 맞지 않는다, 라는 온다 리쿠의 고백이 진실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내가 그녀의 작품세계를 천착할 가치는 충분하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더 나아가 그 탐구의 다각적인 시선과 다채로운 해석에 전적으로 내 독서기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왠지 전작주의에 빠질 것 같다. 온다 리쿠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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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굿모닝! 온다리쿠의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님의 리뷰가
상당히 치밀합니다. 꾸욱^^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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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경욱과의 두 번째 만남이 이뤄졌다. 신작 장편역사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2년 전 출간된 그의 단편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읽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밋밋하기 그지 없는 소설집이다. 그의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간적 순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의 역행에서 2년만큼 퇴보했고, 시간의 순행에서 2년만큼 진보했다. 즉, 김경욱은 『천년의 왕국』으로 굉장한 진화와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만큼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재미없는 소설집이다.

  소설의 창조목적은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인간상들의 모습에서 독자는 나와 너를 보고 우리를 보며 우주를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추기도 한다. 나의 독서경향도 이러한 보편적 문학의 특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면서 다양한 인간상들과의 호흡과 만남, 그것이야말로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절대불변의 이유이자 목적이다. 

  이번 소설집에서의 김경욱표 인간탐구는 2%가 부족한 것이 아닌 2%만 만족했을 정도로 초라하다. 읽기 진도를 더딜게 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스토리 텔링, 화려한 외연적 수사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밋밋한 플롯,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설정과 인물에 대한 미지근한 천착, 등장인물과 주제선정의 획일화 등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나마 건질 단편이 있다면 표제작이자 최전선에 비치한 「장국영이 죽었다고?」와 신선한 구성과 사랑에 관한 주옥같은 표현이 돋보이는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뿐이다. 그 외의 단편들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에서의 미지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말미작 「나가사키여 안녕」은 허무하기만 하다. 

  「장국영이 죽었다고?」에서 저자는 인터넷 채팅으로 대변되는 가상공간의 세계를 비웃고 있다. '장국영'이나 '아비정전'은 그저 극적 소재로 사용될 뿐이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에서 동일한 복장을 하며 매표소에 줄을 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목도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은 사이버 세계의 모순과 허구를 비아냥거리고 있는 듯 애처롭고 가련하기만 하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은 꽤 훌륭한 단편이다. 주인공의 세 번에 걸친 우연이 서사의 맥을 이루고 있으며 틈틈히 주옥같은 사랑에 대한 명언들이 채워진다. 극장에서의 첫 번째 우연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은행에서의 두 번째 우연으로 결혼을 한다. 결국 이혼하지만 미술관에서의 세 번째 우연이 일어난다. 일식집에서의 네 번째 필연을 다짐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우연을 필연으로 미화하고자 하는 낭만적 상상의 의지를 엿본다. 이런 서사의 흐름에서 작가는 사랑과 관련된 주옥같고 정제된 표현들을 교차해서 들려주며 낭만적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 상상은 우연이 필연으로 비약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를 터무니없이 줄여준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단 한 번의 우연조차도 필연으로 미화하는 논리적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본디 사랑이라는 감정은 비약에 근거하므로.   <p98>
  사랑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사랑이어서 연인과 헤어질 때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녀를 잃었다는 슬픔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다는 슬픔이다. 내가 사랑(욕망)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욕망)이었다.   <p110>


  그 외의 단편들은 가벼움과 무거움, 냉정함과 강렬함이 부족하고 전복적이지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도 않는, 그저 미지근하기만 하다. 단편소설집이 갖는 다양성이라는 명확한 물리적 무기가 있음에도 다채롭지 못한 획일성에 다분히 재미없는 소설집이 되어 버렸다. 남는 것은 작가 자신의 개인기인 화려한 수사 정도다. 하지만 그 어떤 외연적인 힘도 내포적인 힘을 압도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자, 문학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자명한 공식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통해 고백한 김경욱의 언급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이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이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민은 지나간 문장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이고 사랑은 다가갈 문장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입니다. 베어내면서 조금씩 나아 가겠습니다.   <p304, 작가의 말>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2년 후 『천년의 왕국』이 완성된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상상력의 창조물인 『천년의 왕국』에서 보여줬던 그의 내포적인 힘을 나는 지지한다. 더 나아가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내는 작업이 지속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문학의 미래가 진보와 진화로 점철되기를 기대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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