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누가 국민을 대표하는가 - '우리'는 누구인가

   

드라마 <시크릿 가든> - 사라진 두 사람

마지막으로 드라마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2011년 초에 종영된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현빈 분)은 길라임(하지원 분)에게 나 같은 남자가 왜 당신 같이 가난한 여자한테 끌리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며 “인어공주처럼 옆에 있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라”고 주문한다. 어린 시절 나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읽으며 대체 인어공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게 한 그 사랑이라는 것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궁금했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동안 정들었던 가족, 친구, 환경을 모두 떠나기로 결심한다. 심지어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마녀를 찾아가 물고기 다리를 인간의 다리로 바꿔달라고 청하고 그 대가로 목소리를 잃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왕자에게 인어공주는 그저 말 못하는 낯선 여인일 뿐이다. 인어공주는 바다 속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꼬리 덕분에 물에 빠진 왕자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었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는데 이 꼬리는 비정상적인 몸을 의미할 뿐이다. 더구나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왕자에게 자신이 바로 당신을 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릴 방도가 없다. 결국 언어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왕자가 다른 나라의 인간 공주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며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Edmund Dulac / The Mermaid, The Prince
이미지 출처 : Gutenberg.org: Stories from Hans Andersen, with illustrations by Edmund Dulac, London, Hodder & Stoughton, Ltd., 1911.
 

<시크릿 가든>의 남자주인공 김주원이 하층 계급 출신의 길라임을 인어공주로 보는 설정은 계급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몸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지고 있는 사회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반전은 몸을 바꾸는 게 인어공주가 아닌 왕자라는 데 있다. 김주원은 자신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길라임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자 스스로 자신을 인어공주로의 위치에 놓고 자신의 몸과 길라임의 몸을 바꾼다. 그는 길라임에게 남긴 유서에다 자기 몸으로 행복하게 살라고까지 얘기한다. 결국 김주원의 자기희생은 기적적인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길라임의 몸으로는 결코 불가능했을 해피엔딩이다.

비정상적인 몸, 타자화된 계급/젠더 위치를 가진 이들이 정상성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변형하게 되면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를 잃는다. 정상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은 비정상성을 가진 이들이 정상성의 기준에 통과하는 형태가 아니라 정상성과 보편성의 지위를 가진 이들이 스스로 특권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는 사.랑.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그렇게 오직 정상성을 가진 이들이 정상성의 특권을 스스로 버릴 때만 해피엔딩이 가능하다면 타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특권화된 위치를 욕망하지 않고,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정치의 실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정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지어 이 저출산 사회에 아이를 세 명이나 낳아 보건복지부의 출산홍보대사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행복한 두 주인공의 모습 뒤로 거품처럼 사라진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인어공주도, 인어공주로 몸을 바꾼 왕자도 아니었다. 거품처럼 사라진 인물은 다름 아닌 게이로 나온 ‘썬’(이종석 분)이었다. 드라마에서 썬은 심지어 오스카를 사랑하거나 좋아한다고 말하지조차 못한다. 그저 그는 오스카에게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할 뿐이다. 오스카는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썬을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대신 게이라는 사실 자체를 ‘무시’하고 그저 뛰어난 음악가로 대한다. 썬은 결코 오스카를 유혹하지 않고 오직 위기에 빠진 오스카를 구해주는 역할만을 하다가 윤슬(김사랑 분)과 오스카가 사랑을 확인하자 쿨하게 자리를 떠난다. 말 한마디 못하고 극중에서 사라진 그의 커밍아웃은 아무런 성적 긴장과 가능성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떠나는 썬에게 윤슬은 “그냥 지금처럼 잘 지내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썬은 “아줌마는 오스카랑 연애하고 나는 친구하라고? 됐어”라며 마음을 드러내고, 그러자마자 극중에서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성적 타자들의 성의 정치가 있는 그대로의 ‘인정’을 넘어서 매우 구체적인 ‘관계’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지점이 제대로 재현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생활을 ‘넘어서’ 우리로서 함께 살 권리

윤슬은 썬에게 ‘지금처럼 잘 지내자’고 제안했지만, 썬에게 지금은 잘 지내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 괴로운 상태다. 윤슬은 승리자로서 썬을 포용할 수 있지만 썬이 경쟁자로 남는 것은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의 제안은 포용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썬이 가진 마음을 완전히 부인해야만 가능한 태도다. 당연하게도 썬은 괴로운 채로 옆에 있거나,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만약 썬이 떠나지 않고 윤슬과 앞으로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되면 길라임이 김주원의 몸으로 오스카와 엉겁결에 키스를 하게 되었던 장면은 이 드라마의 서사에서 하나의 불연속적인 에피소드 정도의 위치 이상으로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오스카의 바람둥이 기질이 좀 더 성적으로 진보적인(?) 태도로 묘사되었다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흥미로웠을 거라 생각했다. (윤상현이 연기한 오스카는 누구랑 있어도 성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무술 감독으로 분한 최필립과 서 있을 때 가장 ‘케미가 돋았다’고 생각한다.)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온 ‘썬’
이미지 출처: http://tv.sbs.co.kr/secretgarden/
 


앞서 나는 대표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적 개인과 사생활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고 썼다. 사생활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사생활로 특별히 구분되는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성적 타자들의 대표 가능성은 사생활만을 가진 존재로 규정당하지 않는 동시에 성과 사랑과 관계 맺기에 대한 그들만의 다른 방식에 대해 공적 공간이 얼마나 개방되어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누가 ‘우리’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따라 대표 가능성이라는 보편성의 헤게모니로 진입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라는 말을 다양한 경험들의 연쇄를 통해 나타나는 우연한 조합,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책임의 윤리와 환대의 정치 등 스피박, 데리다, 레비나스 등이 공유하는 말로서 사용하고자 한다.)

사생활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서로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때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관계들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경험들을 해왔는지에 대해 듣고 싶어 한다. 이런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타인들은 낯선 타자에서 나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변화한다. 이주노동자가 본국에 두고 온 가족 얘기를 할 때, ‘우리’는 낯선 타자로서의 그들이 우리와 유사한 이웃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불행한 어린 시절 얘기를 할 때 ‘우리’는 그가 겪은 불행이 곧 우리 사회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아픈 순간에도 수술 동의서조차 작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인간적 연민과 우정어린 공감을 느낀다.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익숙한 이웃들이 순식간에 낯선 타자가 되기도 하며 낯선 타자들의 이질성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타자들이 타자로서 자신을 대변하면서 또한 ‘우리’를 만들어내는 길을 또 얼마나 멀고도 험한가. 앞서 여성 대표들에게 놓인 곤경을 설명하면서 쓴 것처럼, 성적 타자로서의 여성들은 타자로서의 위치가 변화하지 않고 징표적 존재로 정박되거나,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혼자 예외적인 존재로서 부각될 위험에 처한다. 타자화에 놓인 재현의 위기는 고스란히 타자의 몫으로 떨어지며, 여성이 과소 대표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매우 간명하고도 명확한 문제 제기는 성차에 대한 해묵은 정치철학적 논쟁을 경유하며 매우 복잡하고도 해결 불가능한 근본적 문제로 변형된다. 여성들이 내용, 형식, 조건이라는 차원에서 대표 가능성의 문을 계속 두드린 결과, 모성과 이성애라는 경험을 성차가 발생하는 불변의 토대로 특권화하면서 보편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혼성의 민주주의는 여성/남성이 커플로서 인간 전체를 대표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산출된 성적 차이를 대칭적이며 평등한 차이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때 이성애적 토대를 공유하지 않는 성적 타자들은 보편성의 조건 바깥으로 완전히 퇴출되었다. 성차의 지위가 이성애를 기반으로 강화되고 보편화되면서 성적 타자들은 소수자의 존재로서만 인정될 뿐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예외의 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타자로서의 여성을 스스로 대표하지 못한다. 최근 선출된 북유럽 국가의 여성 대표들은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성 과소 대표성의 위기를 벗어난 스웨덴에서 다시 페미니스트 정당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모성 정치를 둘러싼 담론과 남녀동수 운동에서 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변형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 만들기의 과정에서 정상 가족에 기반을 둔 특정한 문화적 전형들이 반복되곤 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나의 실례를 살펴보자. 2011년 초, 홍익대의 청소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을 결성했다가 학교 측으로부터 전원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알려졌다. 청소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분노하며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몇몇 이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우리 어머니, 할머니”라는 수사를 사용했다. 실제로 이 호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가족이라는 익숙한 문화적 전형성으로 보편적 ‘우리’를 만들려고 할 때 공적 공간에서의 정치적 논의가 실종되기 쉽다는 데 있다.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우리’ 중 하나가 되길 원했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시 어머니나 할머니가 되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였다. (“홍대 청소 노동자, 우릴 자꾸 할머니라고 부르지 마, 우린 청소 노동자야”, 경향신문 2011년 1월 27일자, 하종강 사설) 때문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전체주의적으로 변질될 우려, 가족주의적 보수성을 강화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만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냉소적 태도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타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거나,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가끔 극단적인 폭력을 낳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지는 폭력이 바로 무관심이라는 형태이다. 레즈비언이든 아니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내 앞에서 말은 하지 말라거나, 동성끼리 좋아하는 것을 인정할 테니 동성애를 싫어하는 마음도 존중하라(!?)는 식의 태도는 민주주의의 수사를 차용한 자유주의적 태도로 보이지만 더불어 살 권리에 대한 가장 특권화된 방식의 거부이다. 이때 보편적인 것과 대표 가능성의 영역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고, 나와 관계된 ‘우리’를 다시 재구성하자고 요청하는 보편주의적 요구 자체가 거품처럼 사라져버린다. 나는 보편성을 둘러싼 투쟁은 정상성과 보편성을 독점하는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운동이자, 차이들을 사생활의 권리로서 수렴하는 자유주의적 보수 정치와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사생활을 존중받을 자격에 대한 투쟁은 소수자라는 지위를 넘어서, 우리가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될 권리에 대한 투쟁이다. 그러므로 강조하건대 성적 타자의 성의 정치란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넘어서’ 이웃과 가족의 일부이자 동료의 일원으로 사생활을 공유하면서 더불어 살 권리에 대한 요구이며, 그런 의미에서 대표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단지 현실 정치에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을 공정하게 분배받겠다는 자유주의적 요구를 ‘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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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적 타자의 대표 (불)가능성

   

사적 개인을 ‘넘어서’

대표자의 자질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에서 대표자의 자질(qualification)을 결정짓는 것은 높은 학력과 많은 재산, 훌륭한 가문 등과 같은 조건이 아니(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자질들이 영향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핵심 자질은 아니(어야 한)다. 특정한 학벌, 신분, 계급과 같은 것이 대표의 자격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의미를 잃게 된다. 대표로서 통치하되 권력의 사적 행사가 금지된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선출된 대표는 결코 사적인 존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사화(私事化)된 권력은 특권의 남용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된다. 따라서 대표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사적 개인을 ‘넘어서’ 공인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다.

재차 강조하자면, 공인이 된다는 것은 사적 개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즉 공인으로서의 자질이란 ‘사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해관계가 모두의 이해와 모순 없이 녹아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인이 사적 개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은 사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곧 공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회 청문회에서 ‘재벌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우리 사회가 성장하는 길이다’,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합법적인(?) 부의 증식 과정까지 문제 삼으면 어쩌란 말인가’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저 최대한도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라는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 점에서 자본 자체가 공리가 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놓인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넘어 선다’는 말은 배제하거나 제외하는 것(apart from)도 아니고,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above)도 아니다. 이 둘 간의 관계는 동등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며(besides), 하나가 다른 것을 포함할 수 없는 관계다. 민주주의 대의제에서의 대표성은 바로 이 ‘넘어서’라는 말을 통해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며, 개인도 아니고 전체도 아닌 차원에서 형성된다. 이중 긍정과 이중 부정의 어느 지점에서도 정박하지 않은 채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이 ‘넘어서’의 지점에서 대표 가능성이라는 민주주의 특유의 정치적 형식이 출현한다. 
 

대표의 자격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대표자 자질을 결정짓는 핵심 키워드는 대표성의 출현 배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첫 번째는 대표자로 나서기 이전이다. 이 시점에서는 성원권을 가진 모든 개인이면 누구나 대표자가 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공표된다. 이 원칙 하에서의 개인들은 사적 개인에서 추상적 개인으로 변형된다. 두 번째는 대표자로서 출마하고 표를 얻기 위해 설득하는 순간의 시점이다. 대표에 도전하는 이들은 주민/구민/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모두에게 좋은 것’을 주민/구민/국민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설득할 수 있는 공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이들이다. 이때 후보들의 자질은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당대의 공적 가치에 대해 얼마나 자신을(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마지막은 대표가 된 이후의 시점이다. 이때 대표에게는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서 리더십이라고 일컬어지는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특질을 발휘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세 개의 시점에서 각각 요구되는 개인의 변형(추상성, 보편에의 동일시, 고유성)이 이루어질 때만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표성을 둘러싼 정치의 출현  

 

출마 이전, 추상성의 시기(A)에는 ‘누구나 가능’하다고 전제된 대표 가능성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이 정치적 목표가 된다. 인간의 자율성을 추상적으로 믿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는 대체로 여기에 머문다. 문제는 보편성의 시기(B)에 더욱 심화된다. 이 시기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보통과 일반에 동일시할 수 있는 공인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건강한 가정”의 일원이자, 아이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처럼 정상성과 책임성의 상징적 모델들은 가족, 교육, 정신 건강, 법 제도의 구조들을 통해 일상적으로 드러난다. 이때 이러한 일상성 바깥에 있는 타자들은 보편성에의 동일화라는 헤게모니 투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완전히 고립되거나 스스로 숨기거나 이중의 삶을 살도록 암묵적으로 강제된다. (타자들의 보편성에서의 배제 구도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보편성 비판을 참고했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최원·서관모 역, 도서출판 b, 2007, 533쪽) 

두 번째 시점에서, 배제된 집단들의 정치적 저항은 보편성과 정상성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앞서 설명했듯이 여성 운동에서는 여성이 소수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편에의 동일시를 모성 정치와 같은 방식으로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모성’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 한 정상성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한편 소수자들은 정상/비정상의 폭력적 범주 구분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통과 일반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의료적 진단 기준이라는 권력 장치에 의해서 ‘정상성’의 기준에 도달하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보통과 일반에 포함시켜주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정상성은 진단받거나 승인받는 것이 되며, ‘정상성’ 여부에 대한 응답은 의료적 진단과 문화적 관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정상성의 범주 자체에 대한 투쟁은 보편성에 대한 질문을 포함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이라는 시점에서 전개된 자유주의적인 포함과 배제의 정치학처럼 보이도록 변형된다. 누가 정상/비정상을 가늠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보편성의 기준에 대한 비판이 탈각되고) 정상성의 진단 기준만이 부각되면서 ‘보편성과 정상성’을 둘러싼 정치적 저항은, ‘차이를 정상성 안으로 포함되도록 하는 협소한 의미에서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주장으로 재현된다. 
 

사생활을 ‘넘어서’

“우리는 비정상이 아니다”라는 슬로건, “우리는 행복한 동성애자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슬로건은 동성애자로서의 자기에 대한 확신과 승인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정체성 정치학의 문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동성애자로서의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대표적인 정체성의 정치로 언급되는 게이 퍼레이드(gay-pride parade)의 슬로건은 포함과 승인에 대한 요구로만 수렴되지는 않는다. 
  
 

 

2004년 퀴어문화축제 홍보 엽서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
이미지 출처: http://www.kqcf.org/ 
 


한국의 퀴어문화축제 슬로건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2004년)”처럼 자기 동일시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에 호소하기도 하고, “퀴어 절정(2005년)”처럼 성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축제의 공식 언어로 채택함으로써 문화적 코드를 다시 만들기도 하며, “THIS IS QUEER(2007년)"처럼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묶음들로서 성적 타자들을 재배치하기도 했다. 정체성 정치는 여성, 민족, 소수자 등을 고유한 정체성으로 주장하는 집단을 고립시킬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을 받아왔지만, 정체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소수성/타자/탈식민/여성주의 정치학은 없다. 정체성은 부인하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체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정체성들은 적의 언어로 적과 싸우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의 정치적인 구성물이다. 또한 정체성은 저항과 적대가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위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정체성의 정치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문제를 심리적·육체적 자기 동일시의 (내재적이고도 초월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문화적 습관과 새로운 권력 장치로서의 심리적·의료적 지식 권력에 있다. 정체성 자체를 정치적인 구성물과 조건이 아니라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속성으로 이해하게 될 때 누가 차이를 만들어내는가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는 자유주의적 요구로 수렴되어버린다‘(B:5-1)+(B:5-2)=(A:5-1)’.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A:5-1)에서 개인들은 서로 대체 가능한 추상적 개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개인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체성‘ 문제는 자유주의 정치학의 관심사가 아니다. 자유주의 정치에서 정체성은 ‘내적/사적 속성’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정치적 변형들과 재배치들 과정에서 타자화된 정체성 문제는 타자들의 ‘사생활’ 보호와 존중이라는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쉽게 해결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타자들을 타자화하지 않으면서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은 가장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해법이다. 여성 대표의 사생활은 언제나 남성보다 더 쉽게 드러나고 더 취약한 고리가 되며, 소수자 집단의 (사적) 도덕성 문제는 기득권의 (공적) 부패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처벌된다.

사람들은 종종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 곧 동성애자로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일수록, 폭로의 위협은 증가한다. 모두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높아질수록 타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도 상승한다. 더구나 성적으로 타자화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분류당한 이들의 사생활은 그 자체로 지켜야 할 숭고한 무엇이 아니라 비밀과 음모, 타락이 숨어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가십성 기사에는 언제나 동성애자의 ‘진짜’ 현실을 폭로하는 이들, 성매매 업소에 대한 밀착취재 보도, 트랜스젠더의 사생활과 관련된 르포 등이 속출한다. 성적으로 타자화된다는 것은 단지 ‘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오직 사생활만으로 구성된 존재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수자의 사생활권은 (이른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모델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공사 영역의 구분을 통해 분리해놓은) 프라이버시권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층위에 놓인다. 사생활만을 가진 이들에게 사생활을 보호해준다는 것은 곧 사생활만을 향유하라는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사생활을 ‘넘어설’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타자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들은 결코 제거되지 못한다.

2008년 종로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최현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국회의원으로 일만 잘하면 (레즈비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라고 답했다. 이 답은 (성 정체성과 같은) ‘사생활 문제’를 공적인 국회의원 선거에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관없다, 왜 굳이 커밍아웃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은 사생활 외에 아무것으로도 재현될 수 없는 성적 타자들이 사생활을 숨겨야만 이 경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공표하는 것이다. 이 규칙에 따르면 성적 타자들은 대표의 자격을 둘러싼 세 번째 차원(C)의 정치, 즉 “누가 국민을 가장 잘 대표할 만한 사람”(C-2)인지를 둘러싼 대표 가능성에 ‘타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생활 문제를 접근하는 자유주의적인 방식을 넘어선 급진적 성 정치가 필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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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성적 차이를 정치화하기

   

‘성차’의 위치/지위 문제

해부학적 성차와 문화적 성차를 각각 섹스/젠더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페미니즘 비판 이후, 성차 논쟁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남성/여성이라는 근대적 주체 구성 과정에 성차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였다. 즉 성차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지가 문제였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는 어머니와의 ‘분리’, 어머니에 대한 애정의 ‘상실’, 그리고 거세 공포와 남근 선망이라는 상실의 ‘수용’이라는 도식으로 성차를 자아(self)의 세계 속에서 형상화해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차이로 공식화한다. 이 도식에서 상징화되는 것은 아버지의 법이며, 어머니의 질서는 추상화될 수도, 따라서 재현될 수도 없으나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성차의 상징적 위치는 ‘남근’의 기표를 둘러싸고 재현되며, 성차의 ‘정치적’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의 권리 투쟁으로 서술되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 작용의 바깥에서 여성들은 결코 자기 경험과 감각의 한계를 넘어선 추상적 개인의 하나로서 스스로 사고하지 못한다고 간주된다. 그래서 여성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대표하기는커녕 공동체의 일원으로 재현되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여성은 공동체의 아이러니이며, 스피노자의 표현대로라면 여성은 그 유혹적 나약함 때문에 공동체에 치명적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근원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공동체 안의 여성의 역설적 지위를 보여주는 안티고네.
Nikiforos Lytras, Antigone in front of the dead Polynices (1865),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Greece-Alexandros Soutzos Museum
 


버틀러는 라캉 이론의 용어에서 성차가 전복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예측과 개입은 불가능하며, 때로는 변화조차 보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장, 즉 역사적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없는 ‘실재’의 위치에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유년기의 성차 분석에 내포된 정신분석학의 성차별주의를 극복하려 한 재클린 로즈나 줄리엘 미췔과 같은 정신분석학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의 이론조차 “유년기 발달과정의 메타 내러티브의 안정성을 유지시키는 가운데 일관된 젠더를 만들어낸다“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성차를 지배하는 규칙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역사화하는 데 실패하면 모든 이해가능한 문화의 구체화된 토대로서의 성차를 필연적으로 제정하게 되며(Judith Butler, ‘Gender Trouble, Feminist Theory and Psychoanalytic discourse’, Feminism/Postmodernism, ed. Linda J. Nicholson, p324-340), 그 결과 성차가 역사 이전, 의미 이전, 정치 이전의 것으로 회귀하여 인식 불가능, 재현 불가능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사초월적 지위인가 형식적 위치인가

성차에 대한 라캉적 용법에 대한 이러한 집요한 비판에 대해 지젝은 “주어진 장의 포함/배제를 둘러싼 끝없는 정치적 투쟁과 바로 이 장을 지탱하는 보다 근본적인 배제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응답한다. 지젝은 포함/배제의 정치 투쟁이 ‘역사적’인 것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배제는 (심리적) 주체의 구성 과정에 내적으로 실재하는 결여에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것이라고 이 두 가지 층위를 구분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지젝이 주체의 결여와 연계되는 외상을 연결하는 라캉주의적 공식에서 거세의 장면과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인 구조로 설정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묻는다. 라캉주의적 공식은 “인간의 사회적 현실을 개시하고 정의하는 결여에 대해 쓰면서 사회적 현실에 초문화적 구조를 설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사회적 현실은 “허구적이고 이상화된 친족 위치-이성애 가족이 모든 인간에게 결정적인 사회적 유대를 구성한다고 가정하는-에 기초한 사회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주디스 버틀러‧어네스토 라클라우, 박미선 등 옮김, <헤게모니, 우연성, 보편성>, 도서출판 b, 2009, 199쪽) 
     

 

슬라보예 지젝‧주디스 버틀러‧어네스토 라클라우, 박미선 등 옮김,
<헤게모니, 우연성, 보편성>, 도서출판 b, 2009.
 


이것은 성차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차를 구성적 외부, 즉 내부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결코 내부가 될 수는 없는 ‘유사초월적’ 지위 혹은 제약을 부과하려는 시도이다. 버틀러는 계급과 민족에 대한 분석에서 노동자 계급과 피식민지인이라는 위치는 역사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이때 계급과 민족이라는 개념은 ‘차이’를 구성하는 포함/배제의 정치 투쟁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지 ‘추상적 인간의 분리 가능성’이라는 차원에 내재되어 있는 형식적 결여의 양식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답하면서 다시 묻는다. 오히려 계급과 민족이 환기하는 차이, 즉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인이라는 차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라는 차이는 ‘인간의 보편성’을 서구 중산층 백인 중심적으로 구성해내는 인식론적 폭력을 상기시키며 차이를 생성하는 권력 자체에 대한 저항과 변혁을 요구한다.

이렇게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범주로서 민족과 계급이 사고되는 것과는 달리, 성차는 계급과 민족과 같은 (정치적이고도 역사적인) 범주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 구성 과정의 ‘결여’라는 형식적 차원, 즉 유사-초월적이거나 근원적인 토대로서 인식된다. 여기에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은 어디에 있는가. 라클라우는 같은 책에서 라캉적 실재라는 개념 속에서 “텅빈 기표라는 개념이 산출되는 것이야말로 정치와 정치 변동의 조건”(같은 책, 255쪽)이라 했다. 그러나 “텅빈 기표”라는 개념이 “남근”으로서 상징적으로 산출되면서 여성의 육체는 결코 추상화될 수 없는 파편으로 남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때 성차는 정치와 정치 변동의 ‘조건’이 될 뿐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토대로서의 성차 문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앞서 언급한 프랑스의 ‘남녀동수’ 법과 관련된 논쟁의 양상이다. 1992년에 <여성들에게 권력을!>이라는 팜플렛과 함께 대중적으로 전개되었던 남녀동수 운동에서 ‘성차’는 이성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남녀동수’는 민주주의에서 차별되고 배제되었던 집단에 더 많은 기회와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려는 기획으로 이해되었고, ‘성차’는 그러한 정치적 차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보편적 상징이었다. 그러나 1995년 아가젠스키 등이 ‘남녀동수’를 남녀의 분리에 입각한 ‘혼성’으로 재정의하면서 차츰 성차 문제는 차별의 시정과 권력의 공유를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성차 자체의 보편적 ‘조건’을 증명하는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이후 동성 커플의 권리를 인정하는 시민연대 협약과 관련된 논쟁에서 ‘보편적 토대’로서의 성차는 명백하게 이성애적 상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성 커플들이 보편적 결혼 제도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동성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타자성(alterity)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추상적 자기초월 능력을 방해하는 욕정에 불과하다거나, 동성 커플들은 분리에 기반을 둔 상보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미를 생산할 수 없다거나 하는 여성주의 내부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던 동성애와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남녀동수’ 담론의 정당화 논리와 정확히 겹쳐졌다.

이는 성차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성차를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토대로 두는 형식, 즉 성차를 개체들의 고유성이 출몰하는 보편적인 형식적 조건으로 사고하는 것은 이성애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조건들의 보편화에 의존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남녀동수의 정치학이 보편적인 주체의 위치에 대한 이론이나 정치학을 정당화하려는 욕망과 연루되게 된 것은 남/녀 이원론을 보편적인 토대로서 전제하면서였다. 이원론에 들어맞지 않는 성적 타자들은 덜 진화한 자웅동체적이고 자기동일시적인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성원권 박탈의 위기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토대나 조건을 재확정 짓지 않으면서, 이미 구성적 권력의 일부로서 산출된 주체의 위치를 정당화시키려는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성적 타자‘들의 성적 권리는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소수에 대한 인정 혹은 관용이라는 휴머니즘적 수사를 넘어서 정치적인 장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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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보편화 욕망과 이성애 정상성의 조우

   

혼성으로서의 남녀동수

실비안느 아가젠스키는 1998년 <성의 정치>를 출간하며 ‘남녀동수’는 분리 혹은 보호에 대한 정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들을 추상적 개인으로 동등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공화주의는 매우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상 이것은 남성의 권력 독점을 유지하는 술책”이며 “남성 중심주의는 전적으로 남성적 인간성 속에서 모든 인간성을 보며 그 나머지를 일부분으로 간주한다”라는 것이다. (실비안느 아가젠스키, 유정애 역, <성의 정치>, 일신사, 2004, 10~11쪽) 아가젠스키는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이 인류의 일부로서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의 레토릭’을 비판하는 점에서는 ‘남녀동수’의 초기 주장과 유사했으나, 이를 접근하는 방식은 달랐다. 성차를 고려하되, 궁극적으로 성차가 사라질 수 있도록 정교하게 고안되었던 초기 ‘남녀동수’ 운동의 입장과는 달리, 성차를 남녀 간의 환원 불가능한 상보성으로 규정하는 ‘혼성[mixité(믹시떼)]’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보편성의 형식으로 ‘혼성’의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혼성’은 프랑스 특유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와 성차의 이중성(duality)이 만난 결과였다.  


  

실비안느 아가젠스키, 유정애 역, <성의 정치>, 일신사, 2004
 


아가젠스키는 인간성의 단일 모델론이 깨지지 않는 이상 여성이 정당하게 인간성의 한 형식으로 결코 인정받을 수 없으며, 인간은 여자와 남자 두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아가젠스키는 성차의 지위를 민족, 인종, 계급 등과 같은 다른 차이들과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실재하는 모든 차이에 대한 공리(axiom)로 끌어올린다. 세포의 분화 과정이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갈라지면서 이루어진 것처럼 인간의 생명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해 의존하며, 이 차이의 분화와 반복의 과정에서 개체로서의 한 인간이 고유하고도 특수한 존재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반드시 하나가 둘로 이어져야 한다. ‘둘’은 복수로, 수천으로, 수만으로 열린 길이다. 말하자면 둘은 첫 번째의 복수이며, 열림이며, 탄생”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46쪽) 이때 성차의 이원적 구성, 즉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단순히 생물학적 성차의 문화적 규범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시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분리는 보편적이다. 인간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둘로서 하나’라는 것이다. 
 

분리의 보편성과 성차의 지위

아가젠스키의 ‘혼성’ 개념은 성차의 이원성(duality)이라는 ’실재‘로서 다룰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남녀의 이원론(dualism)과는 구분된다. ’인간을 지탱하는 두 다리‘는 서로 환원/대체 불가능하며, 오직 다리가 둘로 분화되어 있을 때만 하나의 인간을 (상상적으로) 형성한다. 이때 성차는 추상적 개인의 구체적 ’실재‘의 자리에 놓여 있으며 어떤 인간의 조건도 이러한 성차의 실재성을 반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아가젠스키는 ’혼성‘ 개념을 통해 이성애적 커플의 상보성에 기반을 둔, 여성/남성 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인간이 탄생해 왔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아가젠스키는 ‘남녀동수’가 하나의 프랑스를 둘로 분리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공화주의자들은 사실상 남성에 의해 국민이 대표되고 있는 현실에는 침묵을 지킨다며, 1867년 왕정복고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인 쥘르 시몽의 예를 든다. 그는 여성의 투표권에 대해 “가족은 하나의 투표권을 갖는다. 한 가족이 두 개의 투표권을 가질 경우, 가족은 분리되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정치가 부부를 분리시킬 것이라는 불안이 여성의 투표권을 금지시켰다면, 성차가 국가를 분리시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여성의 과소대표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아가젠스키는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해서 가족이 파괴된 것은 아니며, 소멸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와 남편이 아내와 자식에게 행사했던 권력 그 자체이지 않았냐며 공화주의의 비판에 응수했다. 아가젠스키의 주장처럼 ‘남녀동수’가 국가를 분열시킬 것이라는 걱정은 남성 정치집단과 국가를 동일시하기 때문이었다.  


 


쥬느비에프 프레스 사진 


엠블렘 

 

이렇게 해서 ‘남녀동수’에 대한 주장은 지금까지의 ‘추상적 개인’이 사실상 특정 계층의 ‘남성’으로 대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 남녀동수주의의 주창자 중 하나인 쥬느비에프 프레스는 혼성에 대한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남녀동수’ 운동의 과정에서 벌어진 논쟁들로 인해 지금까지 명백하게 추상적 개인이 남성으로 대표되어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제 그러한 추상적 개인은 마땅히 달라져야 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만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가젠스키는 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리의 보편성’만을 설명했을 뿐 ‘차이화된 성차의 추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시 총체적 보편성이라는 문제로밖에 답하지 못한다. ‘혼성’의 개념에서는 성차로 분리된 여자와 남자를 추상적 개인이라는 하나의 기표 작용을 하는 총체성으로 수렴하기 위해 이성애적 결합이 문화적으로 보편적이며 생명 탄생에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혼성’은 결코 새로운 보편주의적 주장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혼성은 모든 것을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환원론이나 성차의 본질주의에 기반을 둔 이원론과는 구분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성애적 커플의 상보성‘의 문화적 편재(遍在)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각인시키면서 스스로 성차의 추상 가능성/상징화 가능성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적 커플에 기반을 둔 ’혼성‘의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은 성차를 문화적으로 편재하며,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추상화될 수 없는 ’실재적‘ 지위로 재각인하도록 하는, 즉 근대적 핵가족의 이성애 중심성을 보편화의 계기로 끌어들이면서 가족 중심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재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다. 
 

특권화된 성차

 ‘남녀동수’ 법과 관련된 논쟁은 분리된 성차(sexual difference)의 보편적 지위와 관련된 투쟁이었다. 이 논쟁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성차가 정치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에서 성차는 언제나 정치적인 이슈였지만 이를 정치적인 장에서 토론하는 것은 성차를 탈정치화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들로 인해 저항에 부딪히고는 했다. 생물학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성차 문제는 정치 외부로 축출되었고, 자유주의적 원칙에서 성차는 언제나 특수성의 영역에서 임시적이고 임의적인 정책과 관련된 ‘문제’로 취급되었다.
 
한편 성차에 대한 문화 분석과 정치 이론에서 성차는 있다/없다, 성관계는 있다/없다, 여성은 있다/없다 등을 반복하는 성차의 허구와 실재에 대한 숨바꼭질 놀이로 이어지거나, 성차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권력을 심문할 것인가 아니면 성차 자체를 해체할 것인가 아니면 성차라는 범주를 문화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맥락적인 것으로 다시 사고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합 사이에서 교착되었다. 또한 페미니즘에서 성차 문제는 무엇보다 여성 주체성의 전략적이고 저항적인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작전 회의처럼 논의되고는 했는데, 남성 중심 사회에서 타자로서 범주화된 ‘여성’이라는 오염된 이름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타자성을 중심으로 여성성을 대안적으로 구축할 것인가 등이 이 작전 회의의 내용이었고, 종종 이 회의는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 버린다’라는 모성의 죄책감을 환기시키는 질 나쁜 경구를 반복하는 효과마저 생산해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남녀동수 논쟁은 여성을 여성으로서 호명하는 특수주의적 호명에 기대어 성차를 보편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성차를 정치화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가젠스키의 ’혼성‘ 개념과 남성 정치인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2000년 6월 ’남녀동수‘ 법이 통과되면서 이 법은 추상적 개인으로서 여성의 대표성을 획득하려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보호주의적 ’할당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즉, 배제의 근원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배제라는 현재의 차별적 사실에 입각해서 단순하게 여성들을 더 포함하는 형태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앤 W. 스콧, 239쪽) 아가젠스키가 점점 더 ’남녀동수‘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가시화되면서 초기 ’남녀동수‘ 운동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진 ’성차‘는 곧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적 결합을 의미하는 ’커플‘이라는 개념으로 굳어져가기 시작했다. 이 개념 하에서 성차의 지위는 다른 차이들과 다른 위치로 특권화되었고, 이 특권은 명백히 이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동성 간의 시민 협약을 승인하는 시민 결합법[Pacs(팍스)]이 ’사생활‘에 대한 권리로 축소되고, 종교·민족·인종 등과 같은 차이에 기반을 둔 권리는 오직 그 차이와 관련해서만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어간 것은 성차의 보편화 과정에서 이성애적 특권을 전제로 사용하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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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편의 조건으로서의 할당제와 '남녀동수'

   

성 평등 할당제의 도입

스웨덴의 정치학자 달럽은 1988년 여성이 상징적 존재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집단 내에 일정 정도 이상의 수(최소 30%)가 확보되어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임계 수치(critical mass)'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임계 수치‘가 확보되면 그때부터는 소수의 대표들이 상징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며, 남성 정치인들의 네트워크에 집중된 자원이 약화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자원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권력 관계가 실질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계 수치‘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성 평등 할당제(gender quota-system)이다. 

 

<quotaproject.org>에서는
전 세계 국가들의 쿼터제 운영 현황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여성 대표성 제고를 위한 대표적 정책인 ‘성 평등 할당제’는 각 국의 역사와 정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세계 최초로 성 평등 할당제를 실시한 나라는 핀란드다. 핀란드의 할당제 정책은 놀랍게도 1907년 첫 민주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핀란드는 개혁 국회 이후 첫 선거부터 ”여성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여성“이라는 슬로건으로 10% 여성 의원 할당제를 실시하여 세계 최초의 여성 의원을 배출한다. 이후 점진적으로 여성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나던 차에, 1993년에는 40% 성 평등 할당제를 도입하였고, 2010년에는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공기업의 이사직에도 최소 40% 이상의 여성들이 배치되도록 법안이 개정되었다. (여성 할당제뿐만 아니라 무상 도서관, 무상 보육·교육, 무상에 가까운 공공임대주택 등 핀란드의 눈부신 복지 정책이 궁금하다면 다음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일까 따이팔레 저, 조정주 역, 《핀란드 경쟁력 100》, 비아북, 2010. 이 책은 2006년 유럽의회의장국이 된 기념으로 핀란드가 발간한 ‘홍보 책자’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사회 창안 아이디어들이 가득하다.) 

스웨덴의 여성 할당제도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스웨덴의 여성 의원 비율은 할당제 도입 이전에도 30% 이상이었는데, 1993년 할당제의 도입 이후에는 40%대로 변화했다. 노르웨이도 1988년 할당제를 도입하여 한 성이 40%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북유럽 국가의 할당제가 여성 참정권 투쟁의 오랜 역사와 남녀고용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의 제정 등을 거쳐 사회적 합의가 잘 이루어진 편이라면, 미국의 할당제는 역차별이라는 논란 속에서 종종 사회적 갈등을 겪었고 정치적으로 이슈화되었다. 북유럽 및 아프리카 국가에서의 여성 할당제가 보편적 대표성에 대한 성별 고려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미국에서의 할당제는 유색 인종에 대한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1961년 케네디 정부에서 고안한 정책이었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은 차이를 가진 개인들의 집합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할당제는 이런 차이를 좀 더 잘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적극적 조치’는 미국식 다문화주의라는 이념으로 정당화되어왔는데, 이때 성적 차이는 인종, 민족, 계급, 지역, 성 정체성 등 다른 차이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공화국의 보편성과 ‘남녀동수’의 논리

그러나 2000년 6월 프랑스에서 입안된 ‘남녀동수(Parité : 빠리떼)'법에서 ’성차‘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여성 친화적인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 중 하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인정했으나, 여성들의 참정권은 유보했다. 1849년에는 잔느 드로앵이 여성의 투표권과 함께 입법부의 의석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1880년 위베르틴 오클레르는 도지사에게 “투표권이 없다면, 세금납부도 안하겠다”라는 도전적인 편지를 보내고 보통 선거 제도에 여성이 완전히 접근할 것을 요구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이후 1919년 1차 세계대전 후 잠시 하원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이 역시 부결되었다. 여성은 가족 내의 남편 혹은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독립적인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이른바 ‘혁명파’의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1944년 드골 정부에 의해서 가까스로 여성의 투표권이 허용되었지만, 프랑스의 여성 의원 비율은 1946년 6.8%, 1958년 1.5%, 1978년 3.7%, 1993넌 6%로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프랑스에서 “여성이 원하는 것은 여성이 안다”라는 핀란드식 슬로건이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공화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보편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남녀동수(Parité)’ 법안 제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도 역시 ’공화국‘으로서의 ’하나의 프랑스‘가 전제하는 보편주의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남녀동수’법과 관련된 논쟁은 다음 책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조앤 W. 스콧, 오미영·국미애·김신현경·나성은·유정미·이해응 역,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2009, 인간사랑)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책 표지


’남녀동수‘의 공화주의 비판자들은 성적 차이로 프랑스가 분리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미국식 소수집단 우대 정책이나 할당제와 같은 특수 집단을 ’특별 보호‘하는 권력 배분의 정치는 프랑스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적인 것은 곧 ’공화국‘(전 세계에서 자신의 나라를 습관적으로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로 부르는 나라는 딱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프랑스이고, 또 하나는 북한이다. 이 두 나라는 다른 나라 앞에서도 스스로를 ’공화국‘이라 칭한다.)으로서의 보편성과 추상성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남녀동수‘의 지지자들은 ’남녀동수‘가 남자와 여자가 각각 분리 통치하자는 아이디어거나 혹은 배제된 집단에 대한 미국식 우대 정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즉, ’남녀동수‘는 배제된 집단에 대한 과거의 차별을 교정하는 적극적 조치가 아니라, 성의 물질적 차이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에 기반해 인간에 대한 정의 방식을 일원론(인간-남성)에서 이원론(인간-여성/남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었다. 이전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같음과 다름‘의 논리에 몰두했다면, ’남녀동수‘ 운동은 젠더 정형이 점차 깨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적이 되려고 애쓰거나, 여성성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성차‘ 자체의 물질성, 즉 개인들이 남성과 여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으로 드러냄으로써, 대의제에 전제되어 있는 남성성이라는 성적 특성을 없애려 하는 보편성에 입각한 주장이었다. 
 

추상적 개인의 문제

’남녀동수‘에 대한 주장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남녀동수‘가 해부학적 이원론을 재강화하는 본질주의의 수사가 될 것이라는 의심을 가졌다. 그러나 분리주의나 본질주의가 여성성을 남성성과 대체 불가능한 ’특수‘로 구성하고 특수성 자체의 의미를 고정시키고자 했다면, ’남녀동수‘는 성차의 특수성을 추상적 개인 속에 녹여 ’보편‘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남녀동수’의 지지자들은 ‘남녀동수’를 통해 뽑힌 “여성 지도자들이 과연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 자체가 ‘남녀동수’를 보편주의적 주장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여성은 여성만을 대표하지도, 여성의 이해관계를 대리하지도 않는다. ’남녀동수‘는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남성들만큼이나 여성들에게도 공동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로서 제기되었다. (조앤 W. 스콧, 144쪽) 프랑스 공화국을 대표한다는 것은 추상적 개인이 된다는 것이며, 이는 모든 차이에서 비롯된 특수주의적 이해를 버리는 걸 의미한다.  

이런 견지에서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이 되어야 했다. ’남녀동수‘가 주장한 것은 추상적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하거나, 성차 자체를 없는 것처럼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남녀동수‘는 성차화된 개인들이 ’남녀동수‘로 후보에 진입하고 대표로 선출되며, 실제 통치 행위에서는 성적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 형태를 고안했다. 이는 결국 생물학적 성차의 문화적 구성을 재강화하지 않으면서, 현실적인 평등을 결과적으로 안겨줄 수 있는 실용적이고도 타협적인 방안이었지만, 특수성에 기반하되 특수로 환원되지 않는 성차화된 개인이라는 추상성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추상성이라는 것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것들 사이에 발견되는 전형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전형성이 곧 개체의 특수성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추상성은 언제나 이미 드러난 과거 시점의 전형성에 덧붙여 아직 오지 않은 잠재성을 포함하여 구성된다. 여성답거나 남성답다는 식의 젠더 전형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차의 보편적 지위를 주장하는 것은 다시 젠더 전형을 강화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할 수 있었다. ’남녀동수‘가 성차를 보편적 조건이자 추상적 개인에 내재된 잠재성으로 각기 다른 차원에서 다른 의미로 이중화시켜 사용하고자 한 것은 새로운 시도였고, 이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중화 과정의 긴장이 잘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혼성‘이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이 긴장이 와해되면서 성차는 차이의 ’특권화‘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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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2011-02-14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연재는 편집자의 사정에 의해 3일 늦게 게시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