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개인을 ‘넘어서’
대표자의 자질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에서 대표자의 자질(qualification)을 결정짓는 것은 높은 학력과 많은 재산, 훌륭한 가문 등과 같은 조건이 아니(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자질들이 영향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핵심 자질은 아니(어야 한)다. 특정한 학벌, 신분, 계급과 같은 것이 대표의 자격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의미를 잃게 된다. 대표로서 통치하되 권력의 사적 행사가 금지된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선출된 대표는 결코 사적인 존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사화(私事化)된 권력은 특권의 남용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된다. 따라서 대표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사적 개인을 ‘넘어서’ 공인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다.
재차 강조하자면, 공인이 된다는 것은 사적 개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즉 공인으로서의 자질이란 ‘사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해관계가 모두의 이해와 모순 없이 녹아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인이 사적 개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은 사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곧 공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회 청문회에서 ‘재벌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우리 사회가 성장하는 길이다’,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합법적인(?) 부의 증식 과정까지 문제 삼으면 어쩌란 말인가’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저 최대한도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라는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 점에서 자본 자체가 공리가 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놓인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넘어 선다’는 말은 배제하거나 제외하는 것(apart from)도 아니고,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above)도 아니다. 이 둘 간의 관계는 동등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며(besides), 하나가 다른 것을 포함할 수 없는 관계다. 민주주의 대의제에서의 대표성은 바로 이 ‘넘어서’라는 말을 통해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며, 개인도 아니고 전체도 아닌 차원에서 형성된다. 이중 긍정과 이중 부정의 어느 지점에서도 정박하지 않은 채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이 ‘넘어서’의 지점에서 대표 가능성이라는 민주주의 특유의 정치적 형식이 출현한다.
대표의 자격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대표자 자질을 결정짓는 핵심 키워드는 대표성의 출현 배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첫 번째는 대표자로 나서기 이전이다. 이 시점에서는 성원권을 가진 모든 개인이면 누구나 대표자가 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공표된다. 이 원칙 하에서의 개인들은 사적 개인에서 추상적 개인으로 변형된다. 두 번째는 대표자로서 출마하고 표를 얻기 위해 설득하는 순간의 시점이다. 대표에 도전하는 이들은 주민/구민/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모두에게 좋은 것’을 주민/구민/국민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설득할 수 있는 공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이들이다. 이때 후보들의 자질은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당대의 공적 가치에 대해 얼마나 자신을(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마지막은 대표가 된 이후의 시점이다. 이때 대표에게는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서 리더십이라고 일컬어지는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특질을 발휘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세 개의 시점에서 각각 요구되는 개인의 변형(추상성, 보편에의 동일시, 고유성)이 이루어질 때만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표성을 둘러싼 정치의 출현

출마 이전, 추상성의 시기(A)에는 ‘누구나 가능’하다고 전제된 대표 가능성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이 정치적 목표가 된다. 인간의 자율성을 추상적으로 믿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는 대체로 여기에 머문다. 문제는 보편성의 시기(B)에 더욱 심화된다. 이 시기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보통과 일반에 동일시할 수 있는 공인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건강한 가정”의 일원이자, 아이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처럼 정상성과 책임성의 상징적 모델들은 가족, 교육, 정신 건강, 법 제도의 구조들을 통해 일상적으로 드러난다. 이때 이러한 일상성 바깥에 있는 타자들은 보편성에의 동일화라는 헤게모니 투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완전히 고립되거나 스스로 숨기거나 이중의 삶을 살도록 암묵적으로 강제된다. (타자들의 보편성에서의 배제 구도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보편성 비판을 참고했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최원·서관모 역, 도서출판 b, 2007, 533쪽)
두 번째 시점에서, 배제된 집단들의 정치적 저항은 보편성과 정상성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앞서 설명했듯이 여성 운동에서는 여성이 소수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편에의 동일시를 모성 정치와 같은 방식으로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모성’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 한 정상성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한편 소수자들은 정상/비정상의 폭력적 범주 구분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통과 일반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의료적 진단 기준이라는 권력 장치에 의해서 ‘정상성’의 기준에 도달하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보통과 일반에 포함시켜주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정상성은 진단받거나 승인받는 것이 되며, ‘정상성’ 여부에 대한 응답은 의료적 진단과 문화적 관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정상성의 범주 자체에 대한 투쟁은 보편성에 대한 질문을 포함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이라는 시점에서 전개된 자유주의적인 포함과 배제의 정치학처럼 보이도록 변형된다. 누가 정상/비정상을 가늠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보편성의 기준에 대한 비판이 탈각되고) 정상성의 진단 기준만이 부각되면서 ‘보편성과 정상성’을 둘러싼 정치적 저항은, ‘차이를 정상성 안으로 포함되도록 하는 협소한 의미에서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주장으로 재현된다.
사생활을 ‘넘어서’
“우리는 비정상이 아니다”라는 슬로건, “우리는 행복한 동성애자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슬로건은 동성애자로서의 자기에 대한 확신과 승인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정체성 정치학의 문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동성애자로서의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대표적인 정체성의 정치로 언급되는 게이 퍼레이드(gay-pride parade)의 슬로건은 포함과 승인에 대한 요구로만 수렴되지는 않는다.
2004년 퀴어문화축제 홍보 엽서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
이미지 출처: http://www.kqcf.org/
한국의 퀴어문화축제 슬로건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2004년)”처럼 자기 동일시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에 호소하기도 하고, “퀴어 절정(2005년)”처럼 성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축제의 공식 언어로 채택함으로써 문화적 코드를 다시 만들기도 하며, “THIS IS QUEER(2007년)"처럼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묶음들로서 성적 타자들을 재배치하기도 했다. 정체성 정치는 여성, 민족, 소수자 등을 고유한 정체성으로 주장하는 집단을 고립시킬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을 받아왔지만, 정체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소수성/타자/탈식민/여성주의 정치학은 없다. 정체성은 부인하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체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정체성들은 적의 언어로 적과 싸우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의 정치적인 구성물이다. 또한 정체성은 저항과 적대가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위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정체성의 정치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문제를 심리적·육체적 자기 동일시의 (내재적이고도 초월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문화적 습관과 새로운 권력 장치로서의 심리적·의료적 지식 권력에 있다. 정체성 자체를 정치적인 구성물과 조건이 아니라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속성으로 이해하게 될 때 누가 차이를 만들어내는가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는 자유주의적 요구로 수렴되어버린다‘(B:5-1)+(B:5-2)=(A:5-1)’.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A:5-1)에서 개인들은 서로 대체 가능한 추상적 개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개인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체성‘ 문제는 자유주의 정치학의 관심사가 아니다. 자유주의 정치에서 정체성은 ‘내적/사적 속성’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정치적 변형들과 재배치들 과정에서 타자화된 정체성 문제는 타자들의 ‘사생활’ 보호와 존중이라는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쉽게 해결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타자들을 타자화하지 않으면서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은 가장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해법이다. 여성 대표의 사생활은 언제나 남성보다 더 쉽게 드러나고 더 취약한 고리가 되며, 소수자 집단의 (사적) 도덕성 문제는 기득권의 (공적) 부패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처벌된다.
사람들은 종종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 곧 동성애자로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일수록, 폭로의 위협은 증가한다. 모두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높아질수록 타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도 상승한다. 더구나 성적으로 타자화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분류당한 이들의 사생활은 그 자체로 지켜야 할 숭고한 무엇이 아니라 비밀과 음모, 타락이 숨어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가십성 기사에는 언제나 동성애자의 ‘진짜’ 현실을 폭로하는 이들, 성매매 업소에 대한 밀착취재 보도, 트랜스젠더의 사생활과 관련된 르포 등이 속출한다. 성적으로 타자화된다는 것은 단지 ‘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오직 사생활만으로 구성된 존재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수자의 사생활권은 (이른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모델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공사 영역의 구분을 통해 분리해놓은) 프라이버시권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층위에 놓인다. 사생활만을 가진 이들에게 사생활을 보호해준다는 것은 곧 사생활만을 향유하라는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사생활을 ‘넘어설’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타자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들은 결코 제거되지 못한다.
2008년 종로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최현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국회의원으로 일만 잘하면 (레즈비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라고 답했다. 이 답은 (성 정체성과 같은) ‘사생활 문제’를 공적인 국회의원 선거에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관없다, 왜 굳이 커밍아웃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은 사생활 외에 아무것으로도 재현될 수 없는 성적 타자들이 사생활을 숨겨야만 이 경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공표하는 것이다. 이 규칙에 따르면 성적 타자들은 대표의 자격을 둘러싼 세 번째 차원(C)의 정치, 즉 “누가 국민을 가장 잘 대표할 만한 사람”(C-2)인지를 둘러싼 대표 가능성에 ‘타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생활 문제를 접근하는 자유주의적인 방식을 넘어선 급진적 성 정치가 필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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