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누가 국민을 대표하는가 - '우리'는 누구인가

   

드라마 <시크릿 가든> - 사라진 두 사람

마지막으로 드라마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2011년 초에 종영된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현빈 분)은 길라임(하지원 분)에게 나 같은 남자가 왜 당신 같이 가난한 여자한테 끌리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며 “인어공주처럼 옆에 있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라”고 주문한다. 어린 시절 나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읽으며 대체 인어공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게 한 그 사랑이라는 것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궁금했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동안 정들었던 가족, 친구, 환경을 모두 떠나기로 결심한다. 심지어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마녀를 찾아가 물고기 다리를 인간의 다리로 바꿔달라고 청하고 그 대가로 목소리를 잃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왕자에게 인어공주는 그저 말 못하는 낯선 여인일 뿐이다. 인어공주는 바다 속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꼬리 덕분에 물에 빠진 왕자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었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는데 이 꼬리는 비정상적인 몸을 의미할 뿐이다. 더구나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왕자에게 자신이 바로 당신을 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릴 방도가 없다. 결국 언어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왕자가 다른 나라의 인간 공주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며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Edmund Dulac / The Mermaid, The Prince
이미지 출처 : Gutenberg.org: Stories from Hans Andersen, with illustrations by Edmund Dulac, London, Hodder & Stoughton, Ltd., 1911.
 

<시크릿 가든>의 남자주인공 김주원이 하층 계급 출신의 길라임을 인어공주로 보는 설정은 계급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몸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지고 있는 사회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반전은 몸을 바꾸는 게 인어공주가 아닌 왕자라는 데 있다. 김주원은 자신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길라임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자 스스로 자신을 인어공주로의 위치에 놓고 자신의 몸과 길라임의 몸을 바꾼다. 그는 길라임에게 남긴 유서에다 자기 몸으로 행복하게 살라고까지 얘기한다. 결국 김주원의 자기희생은 기적적인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길라임의 몸으로는 결코 불가능했을 해피엔딩이다.

비정상적인 몸, 타자화된 계급/젠더 위치를 가진 이들이 정상성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변형하게 되면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를 잃는다. 정상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은 비정상성을 가진 이들이 정상성의 기준에 통과하는 형태가 아니라 정상성과 보편성의 지위를 가진 이들이 스스로 특권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는 사.랑.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그렇게 오직 정상성을 가진 이들이 정상성의 특권을 스스로 버릴 때만 해피엔딩이 가능하다면 타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특권화된 위치를 욕망하지 않고,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정치의 실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정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지어 이 저출산 사회에 아이를 세 명이나 낳아 보건복지부의 출산홍보대사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행복한 두 주인공의 모습 뒤로 거품처럼 사라진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인어공주도, 인어공주로 몸을 바꾼 왕자도 아니었다. 거품처럼 사라진 인물은 다름 아닌 게이로 나온 ‘썬’(이종석 분)이었다. 드라마에서 썬은 심지어 오스카를 사랑하거나 좋아한다고 말하지조차 못한다. 그저 그는 오스카에게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할 뿐이다. 오스카는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썬을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대신 게이라는 사실 자체를 ‘무시’하고 그저 뛰어난 음악가로 대한다. 썬은 결코 오스카를 유혹하지 않고 오직 위기에 빠진 오스카를 구해주는 역할만을 하다가 윤슬(김사랑 분)과 오스카가 사랑을 확인하자 쿨하게 자리를 떠난다. 말 한마디 못하고 극중에서 사라진 그의 커밍아웃은 아무런 성적 긴장과 가능성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떠나는 썬에게 윤슬은 “그냥 지금처럼 잘 지내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썬은 “아줌마는 오스카랑 연애하고 나는 친구하라고? 됐어”라며 마음을 드러내고, 그러자마자 극중에서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성적 타자들의 성의 정치가 있는 그대로의 ‘인정’을 넘어서 매우 구체적인 ‘관계’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지점이 제대로 재현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생활을 ‘넘어서’ 우리로서 함께 살 권리

윤슬은 썬에게 ‘지금처럼 잘 지내자’고 제안했지만, 썬에게 지금은 잘 지내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 괴로운 상태다. 윤슬은 승리자로서 썬을 포용할 수 있지만 썬이 경쟁자로 남는 것은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의 제안은 포용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썬이 가진 마음을 완전히 부인해야만 가능한 태도다. 당연하게도 썬은 괴로운 채로 옆에 있거나,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만약 썬이 떠나지 않고 윤슬과 앞으로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되면 길라임이 김주원의 몸으로 오스카와 엉겁결에 키스를 하게 되었던 장면은 이 드라마의 서사에서 하나의 불연속적인 에피소드 정도의 위치 이상으로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오스카의 바람둥이 기질이 좀 더 성적으로 진보적인(?) 태도로 묘사되었다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흥미로웠을 거라 생각했다. (윤상현이 연기한 오스카는 누구랑 있어도 성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무술 감독으로 분한 최필립과 서 있을 때 가장 ‘케미가 돋았다’고 생각한다.)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온 ‘썬’
이미지 출처: http://tv.sbs.co.kr/secretgarden/
 


앞서 나는 대표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적 개인과 사생활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고 썼다. 사생활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사생활로 특별히 구분되는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성적 타자들의 대표 가능성은 사생활만을 가진 존재로 규정당하지 않는 동시에 성과 사랑과 관계 맺기에 대한 그들만의 다른 방식에 대해 공적 공간이 얼마나 개방되어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누가 ‘우리’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따라 대표 가능성이라는 보편성의 헤게모니로 진입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라는 말을 다양한 경험들의 연쇄를 통해 나타나는 우연한 조합,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책임의 윤리와 환대의 정치 등 스피박, 데리다, 레비나스 등이 공유하는 말로서 사용하고자 한다.)

사생활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서로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때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관계들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경험들을 해왔는지에 대해 듣고 싶어 한다. 이런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타인들은 낯선 타자에서 나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변화한다. 이주노동자가 본국에 두고 온 가족 얘기를 할 때, ‘우리’는 낯선 타자로서의 그들이 우리와 유사한 이웃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불행한 어린 시절 얘기를 할 때 ‘우리’는 그가 겪은 불행이 곧 우리 사회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아픈 순간에도 수술 동의서조차 작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인간적 연민과 우정어린 공감을 느낀다.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익숙한 이웃들이 순식간에 낯선 타자가 되기도 하며 낯선 타자들의 이질성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타자들이 타자로서 자신을 대변하면서 또한 ‘우리’를 만들어내는 길을 또 얼마나 멀고도 험한가. 앞서 여성 대표들에게 놓인 곤경을 설명하면서 쓴 것처럼, 성적 타자로서의 여성들은 타자로서의 위치가 변화하지 않고 징표적 존재로 정박되거나,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혼자 예외적인 존재로서 부각될 위험에 처한다. 타자화에 놓인 재현의 위기는 고스란히 타자의 몫으로 떨어지며, 여성이 과소 대표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매우 간명하고도 명확한 문제 제기는 성차에 대한 해묵은 정치철학적 논쟁을 경유하며 매우 복잡하고도 해결 불가능한 근본적 문제로 변형된다. 여성들이 내용, 형식, 조건이라는 차원에서 대표 가능성의 문을 계속 두드린 결과, 모성과 이성애라는 경험을 성차가 발생하는 불변의 토대로 특권화하면서 보편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혼성의 민주주의는 여성/남성이 커플로서 인간 전체를 대표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산출된 성적 차이를 대칭적이며 평등한 차이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때 이성애적 토대를 공유하지 않는 성적 타자들은 보편성의 조건 바깥으로 완전히 퇴출되었다. 성차의 지위가 이성애를 기반으로 강화되고 보편화되면서 성적 타자들은 소수자의 존재로서만 인정될 뿐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예외의 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타자로서의 여성을 스스로 대표하지 못한다. 최근 선출된 북유럽 국가의 여성 대표들은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성 과소 대표성의 위기를 벗어난 스웨덴에서 다시 페미니스트 정당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모성 정치를 둘러싼 담론과 남녀동수 운동에서 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변형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 만들기의 과정에서 정상 가족에 기반을 둔 특정한 문화적 전형들이 반복되곤 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나의 실례를 살펴보자. 2011년 초, 홍익대의 청소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을 결성했다가 학교 측으로부터 전원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알려졌다. 청소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분노하며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몇몇 이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우리 어머니, 할머니”라는 수사를 사용했다. 실제로 이 호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가족이라는 익숙한 문화적 전형성으로 보편적 ‘우리’를 만들려고 할 때 공적 공간에서의 정치적 논의가 실종되기 쉽다는 데 있다.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우리’ 중 하나가 되길 원했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시 어머니나 할머니가 되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였다. (“홍대 청소 노동자, 우릴 자꾸 할머니라고 부르지 마, 우린 청소 노동자야”, 경향신문 2011년 1월 27일자, 하종강 사설) 때문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전체주의적으로 변질될 우려, 가족주의적 보수성을 강화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만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냉소적 태도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타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거나,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가끔 극단적인 폭력을 낳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지는 폭력이 바로 무관심이라는 형태이다. 레즈비언이든 아니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내 앞에서 말은 하지 말라거나, 동성끼리 좋아하는 것을 인정할 테니 동성애를 싫어하는 마음도 존중하라(!?)는 식의 태도는 민주주의의 수사를 차용한 자유주의적 태도로 보이지만 더불어 살 권리에 대한 가장 특권화된 방식의 거부이다. 이때 보편적인 것과 대표 가능성의 영역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고, 나와 관계된 ‘우리’를 다시 재구성하자고 요청하는 보편주의적 요구 자체가 거품처럼 사라져버린다. 나는 보편성을 둘러싼 투쟁은 정상성과 보편성을 독점하는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운동이자, 차이들을 사생활의 권리로서 수렴하는 자유주의적 보수 정치와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사생활을 존중받을 자격에 대한 투쟁은 소수자라는 지위를 넘어서, 우리가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될 권리에 대한 투쟁이다. 그러므로 강조하건대 성적 타자의 성의 정치란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넘어서’ 이웃과 가족의 일부이자 동료의 일원으로 사생활을 공유하면서 더불어 살 권리에 대한 요구이며, 그런 의미에서 대표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단지 현실 정치에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을 공정하게 분배받겠다는 자유주의적 요구를 ‘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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