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녀(婦女)들의 동성 서사: 글쓰기에의 충동

   

10년 전 ‘소녀’들은 분명 “팬픽도 문학이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라”라고 외쳤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자신의 문화적 수행을, 문학이라는 장르에 의탁하면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구호는 팬픽이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단은 물러서는 제스처이면서, 한편 표현의 자유에 근거한다면 동성의 이야기 역시 다룰 수 있다는 항변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1회에서 언급했듯 누나들의 은밀한 ‘문학’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이 어마어마한 양의 텍스트 파일들은 일단은 소설이었다. 이미 인터넷 소설 사이트에서 팬픽은 어색하지 않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팬픽은 여성 팬덤(fandom)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전 회에서 거칠게 일별한 이러한 이야기에의 탐닉은 분명 글쓰기에의 충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몇백 년 전 여자들은 좋아하는 이야기를 긴 밤 내내 베껴 쓰곤 했다. 그리고 감상을 적어두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이야기를 변형시켜냈다. 과연 지금의 여자들은 어떻게 이 팬픽이라는, 낯선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이번 회에서는 지금 여기 부녀(‘腐女’)들의 글쓰기에 대한 충동을 팬픽이 가지는 생산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팬픽은 분명 팬덤, 특히 스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스타를 가까이 느끼고 싶은 ‘팬심(fan-心)’의 잘못된 표출로, 곧 극복되어야 할 팬덤의 일종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러나 팬픽은 여성들의 욕망, 그리고 그들의 글쓰기 실천을 동시에 논의할 수 있는 적절한 사례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국에서 90년대 이후의 아이돌 문화와 강력히 접합되면서 야오이 등 소위 여성향(女性向)에의 정향을 유발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대중문화가 왜 이러한 의도치 않은 이상한 방향으로 길을 내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팬픽은 텔레비전 등 매체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창작 동성표현물보다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 기존 팬덤에 근거하기 때문에 다소 폐쇄적인 동인계보다 접근도가 높다. 또한 일정한 줄거리 및 분위기를 이미 알고 즐겨야 하는 야오이패러디텍스트보다는 훨씬 저맥락이다.

팬픽에만 존재하는 소위 ‘리얼(real)물’은 그러한 특징을 일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여타 동성표현물들과 달리, 팬픽은 자신의 스타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에서 비롯한다. “이게 진짜일까?”로 우선 사실에 대한 호기심에서 팬픽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곧 “진짜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라며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 시작한다. 이는 팬픽이 팬픽션과 달리 정해진 인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정해진 서사에도 고정되지 않기에 더욱 가능한 것이다. (보통 팬픽션(fanfiction)은 원본 텍스트, 즉 특정 완결된 서사에 기반을 두고 인물, 줄거리, 배경 등의 요소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원작에서 제외된 상황을 덧대여 쓰는 속편 쓰기적 특징을 가진다.) 보통 리얼물에서 시작한 팬픽은 신속하게 다른 유형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팬픽은 공포, 추리, 사극, SF, 무협, 환타지 등등 각종 소설을 구분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응한다. 그러나 빈번히 장르를 넘나들며 더욱 자극적인 설정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팬픽의 광범위한 파급이 일차적으로, 독자 역시 언제든 작가로 변모할 수 있는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보통 닥치는 대로 팬픽을 읽던 독자는 곧 좋아하는 작가의 뒤를 자신도 모르게 캐다가 작가계의 빈약함을 한탄하며 어느새 직접 쓰게 되는 것이다.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글을 써내는 것은 만화를 비롯한 다른 창작 형식에 비해 특정 자본 및 기술 없이도 가능하다. 여자들은 일상적으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왔고, 또 들은 이야기를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는 데 능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왕성하고도 성급한 욕망, 그리고 독자와 작가를 명확히 분리할 수 없는 탄력성은, 근대 이후 자본과 관련하여 전문화된 글쓰기 기술과는 차별된다.

이제까지 팬픽을 위시한 동성 서사작품들의 흥성은, 줄곧 대중문화의 저급성과 관련하여 이야기되어왔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의 비속어, 비표준어 사용 등 언어파괴의 문제와 직결되어, 팬픽은 ‘국어’ 정화를 위해 해소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어왔다. 그러나 팬픽 커뮤니티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대체로 ‘통신어체, 자음소리, 과도한 이모티콘’ 금지 등에 대해 꼼꼼히 정리해 놓은 공지사항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못 엄격한 태도는 인터넷에서 그간 형성된 글쓰기에 대한 기본 태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사항에 대한 합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수성의 문제다. 다시 말해 팬픽을 향유하는 데 따른 합당한 태도를 배양시키지 못했을 때, 그 집단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단적으로 동성 관계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에게 팬픽은 제공되지 않는다. 만일 부적절한 발언을 표출한다면 그 공간에의 접근조차 차단된다. 몇몇 팬픽 사이트가 까다로운 입회조건을 내걸거나 일정 간격으로 빈번한 회원정리를 실시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문제는 팬픽을 쓰는 창작 주체에게 보다 강하게 적용된다. 소위 작가라 불리는 이들은 시리즈의 형식으로 대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책임감 있게 팬픽을 연재한다. (팬픽 사이트는 주로 ‘작품’과 ‘감상’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을 게재하는 게시판은 크게는 현재 연재되고 있는 시리즈물을 올리는 곳과 보통 상~하, 혹은 1~3에서 끝나는 단편 및 중편을 게재하는 곳으로 나뉜다. 시리즈물은 대개 한편 당 원고지 25~30장 정도의 분량으로 20~25편까지 지속된다. 완결된 팬픽은 거의 장편소설 버금의 분량이 되어, 한 게시물 혹은 한 파일로 완결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별다른 이유 없이 연재를 중단하거나 누가 봐도 자명한 표절 시비에 걸렸을 때는 제명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공인된 팬픽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체로 몇 편 이상의 장편을 연재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 한 두 편 정도의 주목받은 작품을 가져야 한다. 팬픽 작가의 명성은 오로지 읽는 이들의 감상에 근거할 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받은 작가로서의 인정은 결코 얕지 않다. (‘감상’ 게시판은 팬픽 사이트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다. 보통 연재되는 글 아래 다는 짧은 댓글과 달리 여기에는 작품의 어떤 측면이 좋은지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다음에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혹은 늦은 연재를 독촉하는 말까지 담길 수 있다.) 특히 지속적 방문자를 확보하고 있는 개인 팬픽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이는 수요가 일정 정도에 다다르면 1인 수공업의 형식으로 출판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때 표지 등은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팬에 의해 헌정되기도 하는 등, 그 제작 과정에 작자뿐 아니라 독자가 함께 관계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마스터 인쇄의 불법성 및 안전장치 없는 거래에 대한 우려는, 청소년 성정체성 혼란과 관련한 동성애적 표현의 불법성 논의와 더불어 2000년 이후 언론이 팬픽을 다루었던 주요 방식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한 방송뉴스는 ‘문화 사각지대에 위치한’ 팬픽이 인터넷을 넘어 불법 마스터 인쇄로 실제로 유통되고 있다는 ‘폐해’를 보도하고 있다. 2008년 4월 8일 YTNstar뉴스 <(AD수첩) 아이돌 스타 A군 인터넷에선 동성애자?!> 참조.)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팬픽은 한국적 의미의 초고속인터넷이라는 환경과 결합하여 여타 제도의 배제에도 끄떡없이 번성했다. 이는 한편 금전이라는 대가 없이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같은 방식으로 흥성한 판타지 소설 등의 장르문학 및 귀여니 유의 인터넷 문학이 경계를 훌쩍 넘어 게임, 드라마, 영화와 접합하면서 점차 주류에 등장하기도 하는 것과 비교해, 팬픽은 여전히 그 어떤 제도적 영역에도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시 동성의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 그 저류에 흐르는 핵심적 요소에 근접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야오이패러디텍스트의 경우, 일본의 코미케(comic market)를 원형으로 하는 비전문적이지만 다소의 금전이 유통되는 구조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하던 간에, 이러한 동성 서사는 공식적인 시장을 가지기에는 한계를 가진다. 특히 팬픽의 경우 실존 인물의 차용 때문에 언제나 명예훼손의 위험성이 생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무리가 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어떠한 제도적 지원에도 닿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성도덕 및 이성애 섹슈얼리티 중심으로 설정된 금기를 위반할 수 있는 또 다른 역량을 형성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음 회에서는 이러한 ‘일반(straight)’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한 겹 장막만 무사히 통과하면 세계를 ‘이반(queer)’하는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그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과연 그 한 겹의 장막이 순간적으로 열릴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이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 향후 연재는 필자의 "팬픽: 동성(성)애 서사의 여성공간"(<여성문학연구>, 2008. 12)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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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분야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