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성적 차이를 정치화하기

   

‘성차’의 위치/지위 문제

해부학적 성차와 문화적 성차를 각각 섹스/젠더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페미니즘 비판 이후, 성차 논쟁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남성/여성이라는 근대적 주체 구성 과정에 성차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였다. 즉 성차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지가 문제였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는 어머니와의 ‘분리’, 어머니에 대한 애정의 ‘상실’, 그리고 거세 공포와 남근 선망이라는 상실의 ‘수용’이라는 도식으로 성차를 자아(self)의 세계 속에서 형상화해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차이로 공식화한다. 이 도식에서 상징화되는 것은 아버지의 법이며, 어머니의 질서는 추상화될 수도, 따라서 재현될 수도 없으나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성차의 상징적 위치는 ‘남근’의 기표를 둘러싸고 재현되며, 성차의 ‘정치적’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의 권리 투쟁으로 서술되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 작용의 바깥에서 여성들은 결코 자기 경험과 감각의 한계를 넘어선 추상적 개인의 하나로서 스스로 사고하지 못한다고 간주된다. 그래서 여성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대표하기는커녕 공동체의 일원으로 재현되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여성은 공동체의 아이러니이며, 스피노자의 표현대로라면 여성은 그 유혹적 나약함 때문에 공동체에 치명적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근원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공동체 안의 여성의 역설적 지위를 보여주는 안티고네.
Nikiforos Lytras, Antigone in front of the dead Polynices (1865),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Greece-Alexandros Soutzos Museum
 


버틀러는 라캉 이론의 용어에서 성차가 전복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예측과 개입은 불가능하며, 때로는 변화조차 보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장, 즉 역사적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없는 ‘실재’의 위치에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유년기의 성차 분석에 내포된 정신분석학의 성차별주의를 극복하려 한 재클린 로즈나 줄리엘 미췔과 같은 정신분석학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의 이론조차 “유년기 발달과정의 메타 내러티브의 안정성을 유지시키는 가운데 일관된 젠더를 만들어낸다“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성차를 지배하는 규칙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역사화하는 데 실패하면 모든 이해가능한 문화의 구체화된 토대로서의 성차를 필연적으로 제정하게 되며(Judith Butler, ‘Gender Trouble, Feminist Theory and Psychoanalytic discourse’, Feminism/Postmodernism, ed. Linda J. Nicholson, p324-340), 그 결과 성차가 역사 이전, 의미 이전, 정치 이전의 것으로 회귀하여 인식 불가능, 재현 불가능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사초월적 지위인가 형식적 위치인가

성차에 대한 라캉적 용법에 대한 이러한 집요한 비판에 대해 지젝은 “주어진 장의 포함/배제를 둘러싼 끝없는 정치적 투쟁과 바로 이 장을 지탱하는 보다 근본적인 배제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응답한다. 지젝은 포함/배제의 정치 투쟁이 ‘역사적’인 것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배제는 (심리적) 주체의 구성 과정에 내적으로 실재하는 결여에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것이라고 이 두 가지 층위를 구분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지젝이 주체의 결여와 연계되는 외상을 연결하는 라캉주의적 공식에서 거세의 장면과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인 구조로 설정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묻는다. 라캉주의적 공식은 “인간의 사회적 현실을 개시하고 정의하는 결여에 대해 쓰면서 사회적 현실에 초문화적 구조를 설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사회적 현실은 “허구적이고 이상화된 친족 위치-이성애 가족이 모든 인간에게 결정적인 사회적 유대를 구성한다고 가정하는-에 기초한 사회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주디스 버틀러‧어네스토 라클라우, 박미선 등 옮김, <헤게모니, 우연성, 보편성>, 도서출판 b, 2009, 199쪽) 
     

 

슬라보예 지젝‧주디스 버틀러‧어네스토 라클라우, 박미선 등 옮김,
<헤게모니, 우연성, 보편성>, 도서출판 b, 2009.
 


이것은 성차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차를 구성적 외부, 즉 내부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결코 내부가 될 수는 없는 ‘유사초월적’ 지위 혹은 제약을 부과하려는 시도이다. 버틀러는 계급과 민족에 대한 분석에서 노동자 계급과 피식민지인이라는 위치는 역사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이때 계급과 민족이라는 개념은 ‘차이’를 구성하는 포함/배제의 정치 투쟁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지 ‘추상적 인간의 분리 가능성’이라는 차원에 내재되어 있는 형식적 결여의 양식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답하면서 다시 묻는다. 오히려 계급과 민족이 환기하는 차이, 즉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인이라는 차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라는 차이는 ‘인간의 보편성’을 서구 중산층 백인 중심적으로 구성해내는 인식론적 폭력을 상기시키며 차이를 생성하는 권력 자체에 대한 저항과 변혁을 요구한다.

이렇게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범주로서 민족과 계급이 사고되는 것과는 달리, 성차는 계급과 민족과 같은 (정치적이고도 역사적인) 범주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 구성 과정의 ‘결여’라는 형식적 차원, 즉 유사-초월적이거나 근원적인 토대로서 인식된다. 여기에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은 어디에 있는가. 라클라우는 같은 책에서 라캉적 실재라는 개념 속에서 “텅빈 기표라는 개념이 산출되는 것이야말로 정치와 정치 변동의 조건”(같은 책, 255쪽)이라 했다. 그러나 “텅빈 기표”라는 개념이 “남근”으로서 상징적으로 산출되면서 여성의 육체는 결코 추상화될 수 없는 파편으로 남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때 성차는 정치와 정치 변동의 ‘조건’이 될 뿐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토대로서의 성차 문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앞서 언급한 프랑스의 ‘남녀동수’ 법과 관련된 논쟁의 양상이다. 1992년에 <여성들에게 권력을!>이라는 팜플렛과 함께 대중적으로 전개되었던 남녀동수 운동에서 ‘성차’는 이성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남녀동수’는 민주주의에서 차별되고 배제되었던 집단에 더 많은 기회와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려는 기획으로 이해되었고, ‘성차’는 그러한 정치적 차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보편적 상징이었다. 그러나 1995년 아가젠스키 등이 ‘남녀동수’를 남녀의 분리에 입각한 ‘혼성’으로 재정의하면서 차츰 성차 문제는 차별의 시정과 권력의 공유를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성차 자체의 보편적 ‘조건’을 증명하는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이후 동성 커플의 권리를 인정하는 시민연대 협약과 관련된 논쟁에서 ‘보편적 토대’로서의 성차는 명백하게 이성애적 상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성 커플들이 보편적 결혼 제도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동성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타자성(alterity)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추상적 자기초월 능력을 방해하는 욕정에 불과하다거나, 동성 커플들은 분리에 기반을 둔 상보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미를 생산할 수 없다거나 하는 여성주의 내부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던 동성애와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남녀동수’ 담론의 정당화 논리와 정확히 겹쳐졌다.

이는 성차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성차를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토대로 두는 형식, 즉 성차를 개체들의 고유성이 출몰하는 보편적인 형식적 조건으로 사고하는 것은 이성애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조건들의 보편화에 의존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남녀동수의 정치학이 보편적인 주체의 위치에 대한 이론이나 정치학을 정당화하려는 욕망과 연루되게 된 것은 남/녀 이원론을 보편적인 토대로서 전제하면서였다. 이원론에 들어맞지 않는 성적 타자들은 덜 진화한 자웅동체적이고 자기동일시적인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성원권 박탈의 위기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토대나 조건을 재확정 짓지 않으면서, 이미 구성적 권력의 일부로서 산출된 주체의 위치를 정당화시키려는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성적 타자‘들의 성적 권리는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소수에 대한 인정 혹은 관용이라는 휴머니즘적 수사를 넘어서 정치적인 장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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