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안느 아가젠스키, 유정애 역, <성의 정치>, 일신사, 2004
아가젠스키는 인간성의 단일 모델론이 깨지지 않는 이상 여성이 정당하게 인간성의 한 형식으로 결코 인정받을 수 없으며, 인간은 여자와 남자 두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아가젠스키는 성차의 지위를 민족, 인종, 계급 등과 같은 다른 차이들과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실재하는 모든 차이에 대한 공리(axiom)로 끌어올린다. 세포의 분화 과정이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갈라지면서 이루어진 것처럼 인간의 생명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해 의존하며, 이 차이의 분화와 반복의 과정에서 개체로서의 한 인간이 고유하고도 특수한 존재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반드시 하나가 둘로 이어져야 한다. ‘둘’은 복수로, 수천으로, 수만으로 열린 길이다. 말하자면 둘은 첫 번째의 복수이며, 열림이며, 탄생”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46쪽) 이때 성차의 이원적 구성, 즉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단순히 생물학적 성차의 문화적 규범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시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분리는 보편적이다. 인간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둘로서 하나’라는 것이다.
분리의 보편성과 성차의 지위
아가젠스키의 ‘혼성’ 개념은 성차의 이원성(duality)이라는 ’실재‘로서 다룰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남녀의 이원론(dualism)과는 구분된다. ’인간을 지탱하는 두 다리‘는 서로 환원/대체 불가능하며, 오직 다리가 둘로 분화되어 있을 때만 하나의 인간을 (상상적으로) 형성한다. 이때 성차는 추상적 개인의 구체적 ’실재‘의 자리에 놓여 있으며 어떤 인간의 조건도 이러한 성차의 실재성을 반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아가젠스키는 ’혼성‘ 개념을 통해 이성애적 커플의 상보성에 기반을 둔, 여성/남성 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인간이 탄생해 왔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아가젠스키는 ‘남녀동수’가 하나의 프랑스를 둘로 분리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공화주의자들은 사실상 남성에 의해 국민이 대표되고 있는 현실에는 침묵을 지킨다며, 1867년 왕정복고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인 쥘르 시몽의 예를 든다. 그는 여성의 투표권에 대해 “가족은 하나의 투표권을 갖는다. 한 가족이 두 개의 투표권을 가질 경우, 가족은 분리되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정치가 부부를 분리시킬 것이라는 불안이 여성의 투표권을 금지시켰다면, 성차가 국가를 분리시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여성의 과소대표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아가젠스키는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해서 가족이 파괴된 것은 아니며, 소멸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와 남편이 아내와 자식에게 행사했던 권력 그 자체이지 않았냐며 공화주의의 비판에 응수했다. 아가젠스키의 주장처럼 ‘남녀동수’가 국가를 분열시킬 것이라는 걱정은 남성 정치집단과 국가를 동일시하기 때문이었다.
쥬느비에프 프레스 사진
엠블렘
이렇게 해서 ‘남녀동수’에 대한 주장은 지금까지의 ‘추상적 개인’이 사실상 특정 계층의 ‘남성’으로 대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 남녀동수주의의 주창자 중 하나인 쥬느비에프 프레스는 혼성에 대한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남녀동수’ 운동의 과정에서 벌어진 논쟁들로 인해 지금까지 명백하게 추상적 개인이 남성으로 대표되어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제 그러한 추상적 개인은 마땅히 달라져야 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만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가젠스키는 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리의 보편성’만을 설명했을 뿐 ‘차이화된 성차의 추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시 총체적 보편성이라는 문제로밖에 답하지 못한다. ‘혼성’의 개념에서는 성차로 분리된 여자와 남자를 추상적 개인이라는 하나의 기표 작용을 하는 총체성으로 수렴하기 위해 이성애적 결합이 문화적으로 보편적이며 생명 탄생에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혼성’은 결코 새로운 보편주의적 주장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혼성은 모든 것을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환원론이나 성차의 본질주의에 기반을 둔 이원론과는 구분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성애적 커플의 상보성‘의 문화적 편재(遍在)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각인시키면서 스스로 성차의 추상 가능성/상징화 가능성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적 커플에 기반을 둔 ’혼성‘의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은 성차를 문화적으로 편재하며,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추상화될 수 없는 ’실재적‘ 지위로 재각인하도록 하는, 즉 근대적 핵가족의 이성애 중심성을 보편화의 계기로 끌어들이면서 가족 중심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재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다.
특권화된 성차
‘남녀동수’ 법과 관련된 논쟁은 분리된 성차(sexual difference)의 보편적 지위와 관련된 투쟁이었다. 이 논쟁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성차가 정치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에서 성차는 언제나 정치적인 이슈였지만 이를 정치적인 장에서 토론하는 것은 성차를 탈정치화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들로 인해 저항에 부딪히고는 했다. 생물학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성차 문제는 정치 외부로 축출되었고, 자유주의적 원칙에서 성차는 언제나 특수성의 영역에서 임시적이고 임의적인 정책과 관련된 ‘문제’로 취급되었다.
한편 성차에 대한 문화 분석과 정치 이론에서 성차는 있다/없다, 성관계는 있다/없다, 여성은 있다/없다 등을 반복하는 성차의 허구와 실재에 대한 숨바꼭질 놀이로 이어지거나, 성차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권력을 심문할 것인가 아니면 성차 자체를 해체할 것인가 아니면 성차라는 범주를 문화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맥락적인 것으로 다시 사고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합 사이에서 교착되었다. 또한 페미니즘에서 성차 문제는 무엇보다 여성 주체성의 전략적이고 저항적인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작전 회의처럼 논의되고는 했는데, 남성 중심 사회에서 타자로서 범주화된 ‘여성’이라는 오염된 이름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타자성을 중심으로 여성성을 대안적으로 구축할 것인가 등이 이 작전 회의의 내용이었고, 종종 이 회의는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 버린다’라는 모성의 죄책감을 환기시키는 질 나쁜 경구를 반복하는 효과마저 생산해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남녀동수 논쟁은 여성을 여성으로서 호명하는 특수주의적 호명에 기대어 성차를 보편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성차를 정치화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가젠스키의 ’혼성‘ 개념과 남성 정치인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2000년 6월 ’남녀동수‘ 법이 통과되면서 이 법은 추상적 개인으로서 여성의 대표성을 획득하려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보호주의적 ’할당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즉, 배제의 근원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배제라는 현재의 차별적 사실에 입각해서 단순하게 여성들을 더 포함하는 형태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앤 W. 스콧, 239쪽) 아가젠스키가 점점 더 ’남녀동수‘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가시화되면서 초기 ’남녀동수‘ 운동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진 ’성차‘는 곧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적 결합을 의미하는 ’커플‘이라는 개념으로 굳어져가기 시작했다. 이 개념 하에서 성차의 지위는 다른 차이들과 다른 위치로 특권화되었고, 이 특권은 명백히 이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동성 간의 시민 협약을 승인하는 시민 결합법[Pacs(팍스)]이 ’사생활‘에 대한 권리로 축소되고, 종교·민족·인종 등과 같은 차이에 기반을 둔 권리는 오직 그 차이와 관련해서만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어간 것은 성차의 보편화 과정에서 이성애적 특권을 전제로 사용하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