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녀(婦女)들의 언문소설: 이야기에의 탐닉

   

 

   
 

“조선에서는 부녀에게 언문만 가르치고, 문자한문을 말함을 그만두기 때문에, 음경 불사한 소설을 읽어 이것을 사실로 믿으니 개탄할 일이다. 조선에서 이러한 소설을 금하고 반드시 <효경>, <소학>, <여사서>를 가르쳐 정도(正道)를 알게 해야 한다.” ―홍계희(1703~1771)의 <매산잡지> 중

 
   

   

 

여자들의 이야기 읽기: <성균관 스캔들>에서
 


글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여성들은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처럼 남자형제들 사이도 아닌 어깨 너머로 학문을 익혔다. 허난설헌, 임윤지당, 강정일당 등이 이 견외견학(肩外見學)으로 역사에 문명(文名)을 남긴 드문 여성들이다. 물론 공식적인 교육은 부재했으나 사가에서는 속언, 경구, 노래 등을 통해 여공(女工)과 관련한 내용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때론 왕실에서 교화의 목적으로 <삼강행실도>, <내훈> 등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반포하는 일련의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를 둘러싼 여성들 스스로의 문화적 실천은 언제나 있어왔다. 특히 당시의 남성들이 진문(眞文)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의 고전문학은 여성에 의해, 혹은 여성적으로 구축되어 왔다고도 보인다. 다시 말해 대부분 작품의 작중 화자가 여성이고, 특히 걸출한 시 작가에 여성이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지게 이들이 주로 여성 독자들에 의해 향유되어 왔다는 것이다. (관련해서는 최연미, "조선시대 여성 편저자, 출판협력자, 독자의 역할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23, 서지학회, 2002, 참조.)

특히 ‘이야기’에 대한 여성들의 열광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로 네거티브(negative)한 진술이지만, 이는 오히려 모두(冒頭)에서 인용했듯 부덕(婦德)의 고취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욕망과 관련해서 더욱 흥미롭다. 예를 들어 이덕무(1741~1793)는 수신서 <사소절(士小節)>에서 부녀들이 소설을 읽느라 집안일을 내버려두거나 할 일을 게을리 한다고, 더 나아가 가산을 기울일 지경이라고 개탄했다. 채제공(1720~1799)은 부인 오씨의 <여사서(女四書)>에 서문(序)을 쓰면서 부녀들이 비녀나 팔찌를 팔고 때로는 빚을 얻어서까지 다투어 패설을 읽는 작태를 언급한다. 유만주(1755-1788)는 자신의 일기 <흠영(欽英)>에서 열 줄만 내리 읽어도 한꺼번에 뜻이 통하기가 어려운 한글소설을 부녀들은 한번 쭉 보아 이해했고, 또 줄줄 읽어 내려갈 정도라는 정황을 포착했다.

이러한 남성들의 경계하는 목소리는 18세기를 지나 한문과 관련 없는 이들, 특히 여성들이 언문으로 쓰여진 이야기와 맺는 관계의 저변이 폭발적으로 넓어지는 데 따른 반응으로 읽을 수 있다. 특히 19세기에 활황이었던 여성영웅소설들은 현실과 비껴난 여성들의 환상을 맘껏 펼쳐놓은 특출한 사례에 다름없다. <박씨전>, <숙향전>, <홍계월전>, <방한림전> 등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성균관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에 나가고, 국난을 극복하고, 결국 왕의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영웅적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도 ‘남장’이 공적 참여를 위한 핵심적 장치로 등장한다. 앞 회에서 지적한 바, 이로 인해 여성은 자신에게 놓여진 시련을 극복해내면서, 동시에 다시 일정한 젠더에 기반 한 질서를 위반할 수도 있었다. 이는 또 한편 임진, 병자 양란 이후 기존 사회질서가 동요하는 틈을 타서 새로운 젠더 의식이 싹튼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남장이라는 장치를 매개삼아 규범 자체를 통째로 흔드는 소설까지 나오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우선 지속적으로 경계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매혹이 어떻게 또 한편 유구하게 실천되고 있었는지를 통해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야기는 언제나 여성들의, 혹은 여성적인 것이었다. 여자들의 이야기에의 탐닉은 언제나 방탕, 방종, 방만, 방자, 방심 등등과 관련지어졌고, 이러한 자질은 다시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남성들이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자임하기 전, 소설은 여자들이나 읽는 이야기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리얼리즘 소설을 중심으로 근대 문학의 대종이 세워지자 여자들의 이야기들은 이것과 상관없는 허무맹랑한 어떤 것이 되었다. ‘패관소설’이 ‘소설문학’으로 전환한 데는, 여성의 자취가 사라지는 ‘소설’ 단어 자체의 젠더화가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미 그때부터 왕실이나, 반가의 여성 사이에서뿐 아니라, 일반에까지 언문을 통한 이야기에 대한 열광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한글소설이 방각본의 형태로 제작되어 더 많이 제공되었으며, 전문 세책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리고 길거리 수많은 사람들 앞에는 전기수(傳奇叟)가 눈앞에서 펼쳐지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사람들은 다투어 돈을 던졌다.

고단한 현실을 잊으며 이야기를 향해 달려드는 이 어리석은 청중들, 그리고 규방에 유리되어 밤낮 음란한 소설을 필사하던 여자들. 이 듣고-말하고, 읽고-쓰는 이야기들의 연쇄 속에서 환상은 조금씩 현실에 스며들어갔을 것이다. (천정환은 ‘서점에서 정해진 값을 지불하고, 활자로 인쇄된, 책을 사서, 집에서, 혼자, 눈으로 읽는’ 방식이 20세기 초 특정한 국면에서 형성된 역사적 양식이라고 했다. 이러한 근대적 독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 시기였던 1920~30년대에도 다수의 독자는 고전소설이나 구활자본 신소설 등을 여전히 즐기고 있었다. 관련해서는 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 푸른역사, 2003 참조.)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대한 탐닉, 그리고 글쓰기를 향한 동경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식 출판과 상관없이 확산되고 또 사라지는 팬픽 등속의 이야기들은, 지금-여기에서 ‘이야기-여성/대중-저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미숙한 작가와 분별없는 독자’를 재연하고 있다. 빌려보고, 돌려보고, 베껴보고, 함께 보고…… 때로 인쇄자본주의와 크게 관련을 맺지 않는 이러한 요상한 이야기들은 2010년에도 여전히 산포 중이다.

다음 회에는 다시 2000년 소녀들의 ‘팬픽도 문학이다!’라는 주장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 즉 동성 서사가 어떤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볼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부연해두고 싶은 것이, 이야기에 과도하게 몰두하여 사회적으로 우려를 끼치는 또 다른 부녀들이 전지구적 수준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순종, 순결 등 여성의 덕목을 제 역사의 시기마다 부단히 치켜세워왔던 동아시아 가부장제 사회에 ‘일본의 후죠시(腐女子)’뿐 아니라 중국의 ‘푸뉘족(腐女族)’, 그리고 한국의 ‘부녀자(腐女子)’가 동시기에 출몰하게 되었음은 무슨 징후일까. 이들은 다들 동성 서사를 쓰고 읽는 일군의 여자들을 지시하는 패러디적 명칭이다. 더 나아가 여성향(女性向)이라는 말도 있다. 이 단어는 세상 어느 사전에도 등재된 바 없다. 그러나 이를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라. 당장에 이것이 여성이 선호하는 제재, 주제, 장르 등등을 총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 여자들의 욕망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것이 주로 남성들 간의 사랑 이야기인 데에 놀라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동성 관계를 위주로 엮여지는 이 낯선 이야기들이 어 저변에서 발생하여, 어떻게 생성되는지, 그리고 무슨 충동을 구현하는지 두텁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회에 들어가기 전, 팬픽을 비롯한 지금의 동성 서사를 향유하는 여자들이 무엇보다 성애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이 흥미로운 사실을 기억해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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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