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평등 할당제의 도입
스웨덴의 정치학자 달럽은 1988년 여성이 상징적 존재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집단 내에 일정 정도 이상의 수(최소 30%)가 확보되어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임계 수치(critical mass)'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임계 수치‘가 확보되면 그때부터는 소수의 대표들이 상징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며, 남성 정치인들의 네트워크에 집중된 자원이 약화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자원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권력 관계가 실질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계 수치‘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성 평등 할당제(gender quota-system)이다.
<quotaproject.org>에서는
전 세계 국가들의 쿼터제 운영 현황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여성 대표성 제고를 위한 대표적 정책인 ‘성 평등 할당제’는 각 국의 역사와 정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세계 최초로 성 평등 할당제를 실시한 나라는 핀란드다. 핀란드의 할당제 정책은 놀랍게도 1907년 첫 민주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핀란드는 개혁 국회 이후 첫 선거부터 ”여성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여성“이라는 슬로건으로 10% 여성 의원 할당제를 실시하여 세계 최초의 여성 의원을 배출한다. 이후 점진적으로 여성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나던 차에, 1993년에는 40% 성 평등 할당제를 도입하였고, 2010년에는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공기업의 이사직에도 최소 40% 이상의 여성들이 배치되도록 법안이 개정되었다. (여성 할당제뿐만 아니라 무상 도서관, 무상 보육·교육, 무상에 가까운 공공임대주택 등 핀란드의 눈부신 복지 정책이 궁금하다면 다음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일까 따이팔레 저, 조정주 역, 《핀란드 경쟁력 100》, 비아북, 2010. 이 책은 2006년 유럽의회의장국이 된 기념으로 핀란드가 발간한 ‘홍보 책자’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사회 창안 아이디어들이 가득하다.)
스웨덴의 여성 할당제도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스웨덴의 여성 의원 비율은 할당제 도입 이전에도 30% 이상이었는데, 1993년 할당제의 도입 이후에는 40%대로 변화했다. 노르웨이도 1988년 할당제를 도입하여 한 성이 40%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북유럽 국가의 할당제가 여성 참정권 투쟁의 오랜 역사와 남녀고용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의 제정 등을 거쳐 사회적 합의가 잘 이루어진 편이라면, 미국의 할당제는 역차별이라는 논란 속에서 종종 사회적 갈등을 겪었고 정치적으로 이슈화되었다. 북유럽 및 아프리카 국가에서의 여성 할당제가 보편적 대표성에 대한 성별 고려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미국에서의 할당제는 유색 인종에 대한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1961년 케네디 정부에서 고안한 정책이었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은 차이를 가진 개인들의 집합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할당제는 이런 차이를 좀 더 잘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적극적 조치’는 미국식 다문화주의라는 이념으로 정당화되어왔는데, 이때 성적 차이는 인종, 민족, 계급, 지역, 성 정체성 등 다른 차이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공화국의 보편성과 ‘남녀동수’의 논리
그러나 2000년 6월 프랑스에서 입안된 ‘남녀동수(Parité : 빠리떼)'법에서 ’성차‘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여성 친화적인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 중 하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인정했으나, 여성들의 참정권은 유보했다. 1849년에는 잔느 드로앵이 여성의 투표권과 함께 입법부의 의석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1880년 위베르틴 오클레르는 도지사에게 “투표권이 없다면, 세금납부도 안하겠다”라는 도전적인 편지를 보내고 보통 선거 제도에 여성이 완전히 접근할 것을 요구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이후 1919년 1차 세계대전 후 잠시 하원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이 역시 부결되었다. 여성은 가족 내의 남편 혹은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독립적인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이른바 ‘혁명파’의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1944년 드골 정부에 의해서 가까스로 여성의 투표권이 허용되었지만, 프랑스의 여성 의원 비율은 1946년 6.8%, 1958년 1.5%, 1978년 3.7%, 1993넌 6%로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프랑스에서 “여성이 원하는 것은 여성이 안다”라는 핀란드식 슬로건이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공화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보편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남녀동수(Parité)’ 법안 제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도 역시 ’공화국‘으로서의 ’하나의 프랑스‘가 전제하는 보편주의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남녀동수’법과 관련된 논쟁은 다음 책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조앤 W. 스콧, 오미영·국미애·김신현경·나성은·유정미·이해응 역,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2009, 인간사랑)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책 표지
’남녀동수‘의 공화주의 비판자들은 성적 차이로 프랑스가 분리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미국식 소수집단 우대 정책이나 할당제와 같은 특수 집단을 ’특별 보호‘하는 권력 배분의 정치는 프랑스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적인 것은 곧 ’공화국‘(전 세계에서 자신의 나라를 습관적으로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로 부르는 나라는 딱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프랑스이고, 또 하나는 북한이다. 이 두 나라는 다른 나라 앞에서도 스스로를 ’공화국‘이라 칭한다.)으로서의 보편성과 추상성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남녀동수‘의 지지자들은 ’남녀동수‘가 남자와 여자가 각각 분리 통치하자는 아이디어거나 혹은 배제된 집단에 대한 미국식 우대 정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즉, ’남녀동수‘는 배제된 집단에 대한 과거의 차별을 교정하는 적극적 조치가 아니라, 성의 물질적 차이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에 기반해 인간에 대한 정의 방식을 일원론(인간-남성)에서 이원론(인간-여성/남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었다. 이전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같음과 다름‘의 논리에 몰두했다면, ’남녀동수‘ 운동은 젠더 정형이 점차 깨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적이 되려고 애쓰거나, 여성성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성차‘ 자체의 물질성, 즉 개인들이 남성과 여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으로 드러냄으로써, 대의제에 전제되어 있는 남성성이라는 성적 특성을 없애려 하는 보편성에 입각한 주장이었다.
추상적 개인의 문제
’남녀동수‘에 대한 주장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남녀동수‘가 해부학적 이원론을 재강화하는 본질주의의 수사가 될 것이라는 의심을 가졌다. 그러나 분리주의나 본질주의가 여성성을 남성성과 대체 불가능한 ’특수‘로 구성하고 특수성 자체의 의미를 고정시키고자 했다면, ’남녀동수‘는 성차의 특수성을 추상적 개인 속에 녹여 ’보편‘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남녀동수’의 지지자들은 ‘남녀동수’를 통해 뽑힌 “여성 지도자들이 과연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 자체가 ‘남녀동수’를 보편주의적 주장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여성은 여성만을 대표하지도, 여성의 이해관계를 대리하지도 않는다. ’남녀동수‘는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남성들만큼이나 여성들에게도 공동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로서 제기되었다. (조앤 W. 스콧, 144쪽) 프랑스 공화국을 대표한다는 것은 추상적 개인이 된다는 것이며, 이는 모든 차이에서 비롯된 특수주의적 이해를 버리는 걸 의미한다.
이런 견지에서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이 되어야 했다. ’남녀동수‘가 주장한 것은 추상적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하거나, 성차 자체를 없는 것처럼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남녀동수‘는 성차화된 개인들이 ’남녀동수‘로 후보에 진입하고 대표로 선출되며, 실제 통치 행위에서는 성적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 형태를 고안했다. 이는 결국 생물학적 성차의 문화적 구성을 재강화하지 않으면서, 현실적인 평등을 결과적으로 안겨줄 수 있는 실용적이고도 타협적인 방안이었지만, 특수성에 기반하되 특수로 환원되지 않는 성차화된 개인이라는 추상성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추상성이라는 것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것들 사이에 발견되는 전형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전형성이 곧 개체의 특수성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추상성은 언제나 이미 드러난 과거 시점의 전형성에 덧붙여 아직 오지 않은 잠재성을 포함하여 구성된다. 여성답거나 남성답다는 식의 젠더 전형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차의 보편적 지위를 주장하는 것은 다시 젠더 전형을 강화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할 수 있었다. ’남녀동수‘가 성차를 보편적 조건이자 추상적 개인에 내재된 잠재성으로 각기 다른 차원에서 다른 의미로 이중화시켜 사용하고자 한 것은 새로운 시도였고, 이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중화 과정의 긴장이 잘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혼성‘이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이 긴장이 와해되면서 성차는 차이의 ’특권화‘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