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디스트릭트 9' 혹은 구분하려면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괴물스러운 몸 자체는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괴물스러운 존재는 인간이라는 범주의 한계를 드러내고, 국민국가가 요청하는 규범적인 인간상을 위협할 뿐이다. 그래서 지배 규범은 약물이나 수술과 같은 의료 실천으로 ‘괴물’을 관리하려 든다. 물론 약물이나 수술로 통제해야 하는지, 통제할 수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성폭력 가해자 역시 약물로 ‘치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을 약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화학적 거세법은 비규범적인 존재를 의학적 실험 대상으로 삼는 행위가 적법하다는 선언일 뿐이다. 1832년 영국에서 ‘해부학법’을 제정하여 사형수와 빈민층을 외과 의학의 해부학 실습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화학적 거세법을 발의한 국회의원의 말처럼, 이 법은 그 자체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용한 많은 무기 중 하나다.    

 

   
 

◯ 박●식 위원: 이 법안은 절대로 유일무이한, 또 완전무결한 아동 성폭력 범죄를 근절시킬 수 있는 그런 ‘마스터 키’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동 성폭력 범죄가 횡행하는 우리 현실을 볼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가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여러 가지 좋은 무기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저는 이런 차원에서 이 법안을 발의했고 (……) (법제사법위원회 2009, 32)

 


 
이 ‘실험적인 무기’는 부작용이 발생할 때에야 ‘무기’일 수 있다. 사실 부작용은 과학이나 의학 실험에서 예측하는 결과 중 하나다. 실험 결과가 예측과 다르게 나오면 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작용이나 실패는 성공의 다른 판본이다. 만약 화학적 거세 조치를 시행한 성폭력 가해자에게 몸 변형이 발생하여 단박에 파악할 수 있는 몸이 된다면, 즉 부작용이 생긴다면 이는 ‘성공적’인 결과다. 인터넷으로 신상 명세를 조회할 필요도 없다. 프라이버시 침해를 운운할 필요도 없다. 화학적 거세법으로 가해자 몸에 ‘부작용’이 생긴다면, 언론은 이를 보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부작용과 언론 보도를 통해, 독자/관객은 가해자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몸이 모든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될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서둘러 호르몬을 투여하고 성전환수술을 해서, ‘모호한’ 젠더 상태에 머물지 않고 가급적 빨리 ‘여성’ 혹은 ‘남성’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거나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의료적 조치에 참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화학적 거세법은 성폭력 가해자 중 일부를 관리함으로써 의료적 조치를 바라는 mtf/트랜스젠더 여성 다수를 위협하고, ‘타고난 젠더’ 질서를 통제한다.

불행하게도 이 법과 이 법을 지지하는 담론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를 범죄화/병리화 하는 지점은 남성성이나 남성의 성충동/성욕이 아니라, 가해 대상이 아동이라는 점뿐이다. 조두순 사건, 김수철 사건 등이 발생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도, 성인 여성을 향한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경험자를 비난하는 언설은 여전하다.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자행하는 사건도 여전하다. 화학적 거세법은 성폭력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이 법이 문제 삼는 것은 아동은 순수하다는 신화를 훼손했고, 국민국가에서 재생산과 인구 관리라는 지상 과제를 위반했다는 점뿐이다. 그리하여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위반한 것은 아동을 무성적인 존재로 남겨야 하는 규범, 아동이야말로 순수하다는 신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규범이다. 이 신화와 규범이 아동 성폭력의 원인 중 하나임에도 이 지점은 은폐된다. 이 사회에서 성/폭력을 묵인하는 구조는 문제 삼지 않는다. 지배 규범적인 태도를 개인의 문제로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화학적 거세법을 통해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또 다른 의미에서 피해자가 된다. 젠더 이분법으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을 얘기하면 이에 대한 반론이랍시고, “남자도 힘들다”, “장남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라는 대답을 듣곤 한다. 이런 대답이 젠더 질서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 좋으련만, 대개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쓰인다. 마찬가지로 가해자는 과도한 남성성의 피해자가 될 뿐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라는 말은 곧 그 자신의 성충동/성욕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과시기도 하다. 가해자가 말한 “내 안의 괴물”은 자기도 주체 못할 정도로 강력한 성충동/강한 남성성을 지시한다. 지배 규범적인 성욕/남성성이 문제가 아니라, 성욕과 남성성이 강해질 때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폭로했다는 점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일으킨 문제인 셈이다. 결국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남성 성욕 신화의 한계를 폭로하는 동시에 그 ‘성욕’의 범위와 한계를 확장한다.

법안에서 거세라는 용어 사용을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거세라는 명칭을 고집한 이들은 거세까지 대책으로 가지고 있음을 공포(公布)해 (잠재적) 가해자를 위협하려 한다. 이는 거세와 남근/음경이 남성/남성성에 차지하는 비중을 암시한다. 남성/남성성에서 음경은 전부거나 거의 대부분이다. 화학적 거세로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과 거세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남성의 성욕 신화를 자연 질서/본질로 확인하는 노력이다. 따라서 ‘거세라는 말’이 주는 ‘수치심과 거부감’은 가해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거세라는 용어 대신 약물 처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거세라는 용어가 남성성에게 가하는 위협과 불안을 완화할 뿐이다.

사실,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거세의 대상이 아니다. 거세의 대상은 규범적인 남성상에 부합하는 존재에게나 해당하는 형벌이다. 거세는 규범적인 존재를 비규범적인 남성/존재로 만드는 행위다. 하지만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이미 비규범적인 괴물이기에 ‘남성’ 범주에 들지 않는다. 이럴 때 가해자는 ‘거세’의 대상일 수 없다. 약물치료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지만 지배 규범적이라고 불리는 남성을 보호할 수 있다. 화학적 거세법은 남성의 성욕/남성성이 아무리 강해도 국민국가의 지배 규범을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실천하는 존재만 남성일 수 있다는 선언이다.  
 

영화 <디스트릭트 9> 홍보 포스터 중 하나. 영화에서 지구인은 타자, 이방인, 괴물, 외계인 등 비규범적인 존재 “프론”을 특정 구역에 격리하며 이른바 규범적이라고 여기는 존재와 분리한다. 이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인터뷰 장면에서 한 인간/지구인은 “외국인도 아니고 외계인!”이라며 프론에게 이유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타자를 향한 혐오에도 위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위계가 아니라 비규범적인 존재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분리하고, 격리하려는 규범적인 욕망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traileraddict.com/poster/district-9/10 2010.11.21. 접근
 


사회는 언제나 규범이 아니라 비규범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제 토대를 형성했다. 프렉쇼가 그러했고, 정신병원이 그러했다. 프렉쇼는 무대 배우와 관객 사이의 구별 짓기를 통해 관객의 규범성을 획득했다. 하지만 관객이 규범적인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까? 무대의 배우와 ‘다른’ 몸이라고 해서 그것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정신병원은 앞서 설명했듯, 궁극적으로 유순하지만 여타의 구성원에 섞일 수 없는 몸을 만든다. 사회에 순응하되 다른 구성원과 변별점이 있는 몸이다. 이것은 정신병원을 비롯한 구금 시설이 훈육하는 몸의 기본 규율이다. 비규범적인 존재는 변별할 수 있도록 관리되어야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규범은 언제나 비규범적인 존재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변별점이 사회의 불안을 자극하고 가중한다. 사회는 비규범성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모종의 불안을 자극해야 한다. 이 자극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규범성을 지향하도록 하는 데 필수다.
 
자, 트랜스젠더인 나의 몸은 내가 범죄자란 증거다. 내 몸은 그 자체로 내가 정신병자이거나 비규범적인 존재, 괴물스러운 몸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다. 나의 언어는 정신병자의 헛소리다. 괴물스럽기에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몸은 피츠가 지적했듯, “불완전함, 통제 불능,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자기를 표현”(295)하는 것으로 소비된다. 이 글은 괴물스러운 나의 울부짖음이다.
 
신체표지형을 비판한다고 해서 구금 시설에 머문 역사를 숨기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프라이버시는 기본적으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이자 수단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범죄 가해자의 프라이버시 유지는 가해자의 ‘인권 보호’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미국의 경우, 트랜스젠더를 진단한 의사들은 트랜스젠더에게 과거를 숨기고 새로운 생애사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mtf라면 남성으로 통했던 역사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면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여성으로 통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의료 규범적 행동이었다. 성전환 수술의 역사를 은폐하도록 하는 ‘조언’은 의학에서 트랜스젠더를 위한다는 명목의 처방이었다. 그렇다면 이 처방은 트랜스젠더에게 긍정적이었을까? 이 처방의 궁극적인/실질적인 효과는 트랜스젠더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아니었다. 이 처방은 트랜스젠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엔 트랜스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를 은폐하고 삭제해야만, 사회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을 자연 질서로 유지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프라이버시라는 명목으로 사회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 것이다.

이는 퀴어 관련 기사에 달리는 댓글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퀴어 관련 기사마다 ‘너희끼리 조용히 숨어 살지 언론에 왜 자꾸 나오느냐, 짜증나고 구역질 난다’라는 식의 댓글이 빠지지 않는다. 이런 댓글은 퀴어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피상적인 표현 속에, 퀴어를 향한 지독한 혐오와 불쾌를 담고 있다. 즉 퀴어를 접하고 싶지 않는 ‘나’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보호받으려는 욕망을 반영한다. 사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나 프렉의 프라이버시는 보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관심 사항이 아니다. ‘알고 싶지 않음’을 적법한 것으로 만들려고 프라이버시를 운운하는 것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범죄력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보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범죄력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안전하며 문제가 없다는 믿음, 지배 규범에 순응한다면 삶에 문제가 없다는 환상, 범죄자는 매우 특수한 존재라는 망상을 재/생산하려는 것은 아닐는지. 원하지 않는데도 누군가의 과거를 일방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가 정말 보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당신이,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정보란 무엇일까? 어떤 의미에서 더 많은 것을 직면해야 함에도 이를 서둘러 은폐하고, 보호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괴물스러운 몸의 역사를 통해 화학적 거세법을 읽으며, 내가 묻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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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웃의 고등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여장을 하고 다닌다고 동네에서 쑤근거려 그의 가족들이 무척 괴로워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동네 소문 때문에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결국 아이를 집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안타깝더군요. 이 문제는 범죄와 정신병과 분명히 구분지어져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