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녀(婦女)들의 동성 서사: 글쓰기에의 충동

   

10년 전 ‘소녀’들은 분명 “팬픽도 문학이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라”라고 외쳤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자신의 문화적 수행을, 문학이라는 장르에 의탁하면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구호는 팬픽이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단은 물러서는 제스처이면서, 한편 표현의 자유에 근거한다면 동성의 이야기 역시 다룰 수 있다는 항변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1회에서 언급했듯 누나들의 은밀한 ‘문학’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이 어마어마한 양의 텍스트 파일들은 일단은 소설이었다. 이미 인터넷 소설 사이트에서 팬픽은 어색하지 않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팬픽은 여성 팬덤(fandom)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전 회에서 거칠게 일별한 이러한 이야기에의 탐닉은 분명 글쓰기에의 충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몇백 년 전 여자들은 좋아하는 이야기를 긴 밤 내내 베껴 쓰곤 했다. 그리고 감상을 적어두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이야기를 변형시켜냈다. 과연 지금의 여자들은 어떻게 이 팬픽이라는, 낯선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이번 회에서는 지금 여기 부녀(‘腐女’)들의 글쓰기에 대한 충동을 팬픽이 가지는 생산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팬픽은 분명 팬덤, 특히 스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스타를 가까이 느끼고 싶은 ‘팬심(fan-心)’의 잘못된 표출로, 곧 극복되어야 할 팬덤의 일종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러나 팬픽은 여성들의 욕망, 그리고 그들의 글쓰기 실천을 동시에 논의할 수 있는 적절한 사례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국에서 90년대 이후의 아이돌 문화와 강력히 접합되면서 야오이 등 소위 여성향(女性向)에의 정향을 유발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대중문화가 왜 이러한 의도치 않은 이상한 방향으로 길을 내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팬픽은 텔레비전 등 매체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창작 동성표현물보다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 기존 팬덤에 근거하기 때문에 다소 폐쇄적인 동인계보다 접근도가 높다. 또한 일정한 줄거리 및 분위기를 이미 알고 즐겨야 하는 야오이패러디텍스트보다는 훨씬 저맥락이다.

팬픽에만 존재하는 소위 ‘리얼(real)물’은 그러한 특징을 일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여타 동성표현물들과 달리, 팬픽은 자신의 스타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에서 비롯한다. “이게 진짜일까?”로 우선 사실에 대한 호기심에서 팬픽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곧 “진짜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라며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 시작한다. 이는 팬픽이 팬픽션과 달리 정해진 인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정해진 서사에도 고정되지 않기에 더욱 가능한 것이다. (보통 팬픽션(fanfiction)은 원본 텍스트, 즉 특정 완결된 서사에 기반을 두고 인물, 줄거리, 배경 등의 요소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원작에서 제외된 상황을 덧대여 쓰는 속편 쓰기적 특징을 가진다.) 보통 리얼물에서 시작한 팬픽은 신속하게 다른 유형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팬픽은 공포, 추리, 사극, SF, 무협, 환타지 등등 각종 소설을 구분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응한다. 그러나 빈번히 장르를 넘나들며 더욱 자극적인 설정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팬픽의 광범위한 파급이 일차적으로, 독자 역시 언제든 작가로 변모할 수 있는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보통 닥치는 대로 팬픽을 읽던 독자는 곧 좋아하는 작가의 뒤를 자신도 모르게 캐다가 작가계의 빈약함을 한탄하며 어느새 직접 쓰게 되는 것이다.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글을 써내는 것은 만화를 비롯한 다른 창작 형식에 비해 특정 자본 및 기술 없이도 가능하다. 여자들은 일상적으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왔고, 또 들은 이야기를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는 데 능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왕성하고도 성급한 욕망, 그리고 독자와 작가를 명확히 분리할 수 없는 탄력성은, 근대 이후 자본과 관련하여 전문화된 글쓰기 기술과는 차별된다.

이제까지 팬픽을 위시한 동성 서사작품들의 흥성은, 줄곧 대중문화의 저급성과 관련하여 이야기되어왔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의 비속어, 비표준어 사용 등 언어파괴의 문제와 직결되어, 팬픽은 ‘국어’ 정화를 위해 해소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어왔다. 그러나 팬픽 커뮤니티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대체로 ‘통신어체, 자음소리, 과도한 이모티콘’ 금지 등에 대해 꼼꼼히 정리해 놓은 공지사항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못 엄격한 태도는 인터넷에서 그간 형성된 글쓰기에 대한 기본 태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사항에 대한 합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수성의 문제다. 다시 말해 팬픽을 향유하는 데 따른 합당한 태도를 배양시키지 못했을 때, 그 집단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단적으로 동성 관계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에게 팬픽은 제공되지 않는다. 만일 부적절한 발언을 표출한다면 그 공간에의 접근조차 차단된다. 몇몇 팬픽 사이트가 까다로운 입회조건을 내걸거나 일정 간격으로 빈번한 회원정리를 실시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문제는 팬픽을 쓰는 창작 주체에게 보다 강하게 적용된다. 소위 작가라 불리는 이들은 시리즈의 형식으로 대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책임감 있게 팬픽을 연재한다. (팬픽 사이트는 주로 ‘작품’과 ‘감상’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을 게재하는 게시판은 크게는 현재 연재되고 있는 시리즈물을 올리는 곳과 보통 상~하, 혹은 1~3에서 끝나는 단편 및 중편을 게재하는 곳으로 나뉜다. 시리즈물은 대개 한편 당 원고지 25~30장 정도의 분량으로 20~25편까지 지속된다. 완결된 팬픽은 거의 장편소설 버금의 분량이 되어, 한 게시물 혹은 한 파일로 완결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별다른 이유 없이 연재를 중단하거나 누가 봐도 자명한 표절 시비에 걸렸을 때는 제명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공인된 팬픽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체로 몇 편 이상의 장편을 연재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 한 두 편 정도의 주목받은 작품을 가져야 한다. 팬픽 작가의 명성은 오로지 읽는 이들의 감상에 근거할 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받은 작가로서의 인정은 결코 얕지 않다. (‘감상’ 게시판은 팬픽 사이트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다. 보통 연재되는 글 아래 다는 짧은 댓글과 달리 여기에는 작품의 어떤 측면이 좋은지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다음에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혹은 늦은 연재를 독촉하는 말까지 담길 수 있다.) 특히 지속적 방문자를 확보하고 있는 개인 팬픽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이는 수요가 일정 정도에 다다르면 1인 수공업의 형식으로 출판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때 표지 등은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팬에 의해 헌정되기도 하는 등, 그 제작 과정에 작자뿐 아니라 독자가 함께 관계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마스터 인쇄의 불법성 및 안전장치 없는 거래에 대한 우려는, 청소년 성정체성 혼란과 관련한 동성애적 표현의 불법성 논의와 더불어 2000년 이후 언론이 팬픽을 다루었던 주요 방식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한 방송뉴스는 ‘문화 사각지대에 위치한’ 팬픽이 인터넷을 넘어 불법 마스터 인쇄로 실제로 유통되고 있다는 ‘폐해’를 보도하고 있다. 2008년 4월 8일 YTNstar뉴스 <(AD수첩) 아이돌 스타 A군 인터넷에선 동성애자?!> 참조.)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팬픽은 한국적 의미의 초고속인터넷이라는 환경과 결합하여 여타 제도의 배제에도 끄떡없이 번성했다. 이는 한편 금전이라는 대가 없이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같은 방식으로 흥성한 판타지 소설 등의 장르문학 및 귀여니 유의 인터넷 문학이 경계를 훌쩍 넘어 게임, 드라마, 영화와 접합하면서 점차 주류에 등장하기도 하는 것과 비교해, 팬픽은 여전히 그 어떤 제도적 영역에도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시 동성의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 그 저류에 흐르는 핵심적 요소에 근접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야오이패러디텍스트의 경우, 일본의 코미케(comic market)를 원형으로 하는 비전문적이지만 다소의 금전이 유통되는 구조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하던 간에, 이러한 동성 서사는 공식적인 시장을 가지기에는 한계를 가진다. 특히 팬픽의 경우 실존 인물의 차용 때문에 언제나 명예훼손의 위험성이 생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무리가 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어떠한 제도적 지원에도 닿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성도덕 및 이성애 섹슈얼리티 중심으로 설정된 금기를 위반할 수 있는 또 다른 역량을 형성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음 회에서는 이러한 ‘일반(straight)’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한 겹 장막만 무사히 통과하면 세계를 ‘이반(queer)’하는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그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과연 그 한 겹의 장막이 순간적으로 열릴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이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 향후 연재는 필자의 "팬픽: 동성(성)애 서사의 여성공간"(<여성문학연구>, 2008. 12)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5-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분야이군요.
 


4. 부녀(婦女)들의 언문소설: 이야기에의 탐닉

   

 

   
 

“조선에서는 부녀에게 언문만 가르치고, 문자한문을 말함을 그만두기 때문에, 음경 불사한 소설을 읽어 이것을 사실로 믿으니 개탄할 일이다. 조선에서 이러한 소설을 금하고 반드시 <효경>, <소학>, <여사서>를 가르쳐 정도(正道)를 알게 해야 한다.” ―홍계희(1703~1771)의 <매산잡지> 중

 
   

   

 

여자들의 이야기 읽기: <성균관 스캔들>에서
 


글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여성들은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처럼 남자형제들 사이도 아닌 어깨 너머로 학문을 익혔다. 허난설헌, 임윤지당, 강정일당 등이 이 견외견학(肩外見學)으로 역사에 문명(文名)을 남긴 드문 여성들이다. 물론 공식적인 교육은 부재했으나 사가에서는 속언, 경구, 노래 등을 통해 여공(女工)과 관련한 내용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때론 왕실에서 교화의 목적으로 <삼강행실도>, <내훈> 등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반포하는 일련의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를 둘러싼 여성들 스스로의 문화적 실천은 언제나 있어왔다. 특히 당시의 남성들이 진문(眞文)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의 고전문학은 여성에 의해, 혹은 여성적으로 구축되어 왔다고도 보인다. 다시 말해 대부분 작품의 작중 화자가 여성이고, 특히 걸출한 시 작가에 여성이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지게 이들이 주로 여성 독자들에 의해 향유되어 왔다는 것이다. (관련해서는 최연미, "조선시대 여성 편저자, 출판협력자, 독자의 역할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23, 서지학회, 2002, 참조.)

특히 ‘이야기’에 대한 여성들의 열광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로 네거티브(negative)한 진술이지만, 이는 오히려 모두(冒頭)에서 인용했듯 부덕(婦德)의 고취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욕망과 관련해서 더욱 흥미롭다. 예를 들어 이덕무(1741~1793)는 수신서 <사소절(士小節)>에서 부녀들이 소설을 읽느라 집안일을 내버려두거나 할 일을 게을리 한다고, 더 나아가 가산을 기울일 지경이라고 개탄했다. 채제공(1720~1799)은 부인 오씨의 <여사서(女四書)>에 서문(序)을 쓰면서 부녀들이 비녀나 팔찌를 팔고 때로는 빚을 얻어서까지 다투어 패설을 읽는 작태를 언급한다. 유만주(1755-1788)는 자신의 일기 <흠영(欽英)>에서 열 줄만 내리 읽어도 한꺼번에 뜻이 통하기가 어려운 한글소설을 부녀들은 한번 쭉 보아 이해했고, 또 줄줄 읽어 내려갈 정도라는 정황을 포착했다.

이러한 남성들의 경계하는 목소리는 18세기를 지나 한문과 관련 없는 이들, 특히 여성들이 언문으로 쓰여진 이야기와 맺는 관계의 저변이 폭발적으로 넓어지는 데 따른 반응으로 읽을 수 있다. 특히 19세기에 활황이었던 여성영웅소설들은 현실과 비껴난 여성들의 환상을 맘껏 펼쳐놓은 특출한 사례에 다름없다. <박씨전>, <숙향전>, <홍계월전>, <방한림전> 등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성균관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에 나가고, 국난을 극복하고, 결국 왕의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영웅적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도 ‘남장’이 공적 참여를 위한 핵심적 장치로 등장한다. 앞 회에서 지적한 바, 이로 인해 여성은 자신에게 놓여진 시련을 극복해내면서, 동시에 다시 일정한 젠더에 기반 한 질서를 위반할 수도 있었다. 이는 또 한편 임진, 병자 양란 이후 기존 사회질서가 동요하는 틈을 타서 새로운 젠더 의식이 싹튼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남장이라는 장치를 매개삼아 규범 자체를 통째로 흔드는 소설까지 나오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우선 지속적으로 경계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매혹이 어떻게 또 한편 유구하게 실천되고 있었는지를 통해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야기는 언제나 여성들의, 혹은 여성적인 것이었다. 여자들의 이야기에의 탐닉은 언제나 방탕, 방종, 방만, 방자, 방심 등등과 관련지어졌고, 이러한 자질은 다시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남성들이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자임하기 전, 소설은 여자들이나 읽는 이야기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리얼리즘 소설을 중심으로 근대 문학의 대종이 세워지자 여자들의 이야기들은 이것과 상관없는 허무맹랑한 어떤 것이 되었다. ‘패관소설’이 ‘소설문학’으로 전환한 데는, 여성의 자취가 사라지는 ‘소설’ 단어 자체의 젠더화가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미 그때부터 왕실이나, 반가의 여성 사이에서뿐 아니라, 일반에까지 언문을 통한 이야기에 대한 열광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한글소설이 방각본의 형태로 제작되어 더 많이 제공되었으며, 전문 세책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리고 길거리 수많은 사람들 앞에는 전기수(傳奇叟)가 눈앞에서 펼쳐지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사람들은 다투어 돈을 던졌다.

고단한 현실을 잊으며 이야기를 향해 달려드는 이 어리석은 청중들, 그리고 규방에 유리되어 밤낮 음란한 소설을 필사하던 여자들. 이 듣고-말하고, 읽고-쓰는 이야기들의 연쇄 속에서 환상은 조금씩 현실에 스며들어갔을 것이다. (천정환은 ‘서점에서 정해진 값을 지불하고, 활자로 인쇄된, 책을 사서, 집에서, 혼자, 눈으로 읽는’ 방식이 20세기 초 특정한 국면에서 형성된 역사적 양식이라고 했다. 이러한 근대적 독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 시기였던 1920~30년대에도 다수의 독자는 고전소설이나 구활자본 신소설 등을 여전히 즐기고 있었다. 관련해서는 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 푸른역사, 2003 참조.)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대한 탐닉, 그리고 글쓰기를 향한 동경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식 출판과 상관없이 확산되고 또 사라지는 팬픽 등속의 이야기들은, 지금-여기에서 ‘이야기-여성/대중-저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미숙한 작가와 분별없는 독자’를 재연하고 있다. 빌려보고, 돌려보고, 베껴보고, 함께 보고…… 때로 인쇄자본주의와 크게 관련을 맺지 않는 이러한 요상한 이야기들은 2010년에도 여전히 산포 중이다.

다음 회에는 다시 2000년 소녀들의 ‘팬픽도 문학이다!’라는 주장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 즉 동성 서사가 어떤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볼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부연해두고 싶은 것이, 이야기에 과도하게 몰두하여 사회적으로 우려를 끼치는 또 다른 부녀들이 전지구적 수준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순종, 순결 등 여성의 덕목을 제 역사의 시기마다 부단히 치켜세워왔던 동아시아 가부장제 사회에 ‘일본의 후죠시(腐女子)’뿐 아니라 중국의 ‘푸뉘족(腐女族)’, 그리고 한국의 ‘부녀자(腐女子)’가 동시기에 출몰하게 되었음은 무슨 징후일까. 이들은 다들 동성 서사를 쓰고 읽는 일군의 여자들을 지시하는 패러디적 명칭이다. 더 나아가 여성향(女性向)이라는 말도 있다. 이 단어는 세상 어느 사전에도 등재된 바 없다. 그러나 이를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라. 당장에 이것이 여성이 선호하는 제재, 주제, 장르 등등을 총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 여자들의 욕망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것이 주로 남성들 간의 사랑 이야기인 데에 놀라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동성 관계를 위주로 엮여지는 이 낯선 이야기들이 어 저변에서 발생하여, 어떻게 생성되는지, 그리고 무슨 충동을 구현하는지 두텁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회에 들어가기 전, 팬픽을 비롯한 지금의 동성 서사를 향유하는 여자들이 무엇보다 성애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이 흥미로운 사실을 기억해두도록 하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5-2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3. <성균관 스캔들>을 둘러싼, 여성들의 ‘올바르지(straight)’ 않은 욕망들 (2)

  

   
 

“남색이 추문입니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계율이나 삐뚤어진 잣대를 들어 추문이라 손가락질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성균관 스캔들> 14회 대사에서

 
   

 


 

 

 

 



<성균관 스캔들> 속 커플링: 위로부터 선준-윤식, 재신-윤희, 재신-용하, 초선-윤식, 효은-선준>
 


앞서 <성균관 스캔들>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주인공 윤희가 제기하는 사회적 입지의 비대칭을 문제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를 말할 때는 윤리보다 조금 더 나아간, 혹은 그로부터 살짝 비껴난 지점까지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오락을 추구할 뿐이라는 드라마에서 때로는 모랄, 그 이상이 생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성스 폐인’ 누나들의 또 다른 초점은 주인공 윤희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남자들, 즉 전술했던 ‘(오줌을 잘금잘금 지리게 할 정도라는) 잘금 4인방’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희를 “몸은 계집이나, 계집이어서는 안 되게” 했던 남장이라는 장치다. 남장은, 애초에 윤희가 글을 팔 수 있게 하는, 다시 말해 공적 영역으로 접근케 하는 최소한의 요건이었다. 그러나 거관수학(居館修學) 이후의 윤희는 여성이 아닌 남성의(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기존 남성 그 자체는 아닌) 정체성을 최대한 창출해야만 했다. 이때 남장은 일시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재조직하는 적극적 기제가 된다.

이 여화위남(女化爲男)의 장치는, 이제 공중파에서 일정한 계보를 형성할 만큼 낯설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남장여자는 시청률을 보증하는 수표가 된다. 또한 여배우들이 다른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선호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간 공중파에서만 해도 <커피프린스 1호점>(2007),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2009) 등등 그러한 사례로 꼽힐 수 있는 일련의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그런데 여장남자를 테마로 사용한 이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마찬가지로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에 젠더교차적 즐거움이 더불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이건 외계인이건 상관 안 해, 갈 데까지 가보자”(<커피프린스 1호점>)라거나, “사내 녀석인 니가 좋아졌다”(<성균관 스캔들>) 정도까지 상황이 진전될 때 반응은 더욱 열광적이었다. 요컨대 여성의 시련 극복 프로젝트에서 멈추지 않고, 동성 서사로의 우회로를 통해 이야기가 증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편적 이성애로의 전환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이 낯선 관계의 극적 긴장을 효과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결국 옷을 벗고 단지 ‘여자’로 돌아가지 않아야한다. 이는 젠더의 경계를 교란시키는 것은, 단지 양성‘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라는 구분 자체를 무화시킬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공중파에서 일어난 이 유사 동성애적 이야기의 성공을 두고 보통은 성별의 차원조차 넘어서는 지고지순한 이야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운운되어왔다. 그러나 오로지 ‘사랑-때문’이라는 설명은 종종, ‘비단 ~(종종 동성애)가 아닌’이 전제되는 신경증적 단언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오히려 이 남장여자 이야기의 즐거움은 남-녀라는 자질, 혹은 그 양성 관계를 넘어서는 가능한 변화를 다채롭게 드러내는 데 있다고 적극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다시 <성균관 스캔들>로 돌아가보자. 애초에 윤식이 윤희임을 알고 보는 시청자에게, 이 드라마는 능청을 떨고 다음의 커플링을 가능하게 제시한다. 즉 선준-윤식, 재신-윤희의 남남(원래는 남녀, 전자와 후자는 윤희의 존재를 아는지 여부에 있어 또 차이를 가지는) 커플 수행을 중심에 놓고, 여기에 우정의 범주를 넘는 모호한 재신-용하의 관계가 이야기를 더한다. (드라마에서 구용하는 호모포비아가 없는, 또 한편 양성적인 인물들이다. 재신-용하 커플은 원작에서는 키스조차 하는 훨씬 에로틱한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흥미롭게도 이 둘이 연말 시상식 베스트커플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도 들린다. 참고로 작년 모 방송사의 연말 베스트커플상은 <바람의 화원>의 윤복-정향, 즉 여여 커플이 수상했다.) 더불어 외곽에 선준-효은의 남녀 커플, 윤식-초선의 남녀(그러나 여여) 커플도 적절히 배치되고 있다. 이 커플링을 놓고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팬들이 제작하는 패러디 텍스트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향유된다. 여기에는 선준-재신, 선준-용하 등 주인공 급을 두고 벌이는 의외의 커플 짓기뿐 아니라, 장의-약용, 정조-약용 등 조연을 놓고 해보는 장외의 커플 조합도 가능하게 나타난다. 또한 <성균관 스캔들>이 흥행가도에 들어섰을 때, 여타의 드라마까지 불려나와 상호텍스트적인 패러디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바람의 성균관’이라는 편집 동영상에서, <바람의 화원>의 윤복은 윤희에 반해 성균관에 잠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독학으로 영상편집을 익혔다는 ‘적혈야화’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꽤 인지도 있는 드라마패러디제작자이다. 최근 <성균관 스캔들>을 중심으로 패러디영상물 상연회을 하겠다고 했으나, 참여인원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저작권 문제가 우려되어서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알렸다.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소위 ‘적혈’st이라는 것이, 팬픽을 둘러싼 여성들 사이의 문화적 양태 등을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장여자로부터 촉발된 이 이야기들은 추가적인 커플링 과정을 거쳐서 무한 증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녀의 경계는 무화되고, 젠더 위반은 더해진다.  

 

 



<성균관 스캔들>의 남색지사(男色之事) 에피소드  


사실 이와 관련해서, <성균관 스캔들> 자체가 이전의 남장여자 이야기와 달리 동성 서사적 정향을 보다 극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공중파에서 전면화하기 쉽지 않았을 14회 남색(男色) 소동 에피소드가 그러하다. 이 회에서 윤희는 부상을 입고 숨어든 홍벽서 재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때 왜 그곳에 둘만 있었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으되,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진다. 보통 이러한 소동은 남자가 아니라 남장일 뿐이야, ‘사실은 (동성애가) 아니잖아’로 합의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오히려 폭력적으로 형성되는 호모포비아적 상황을 대담히 구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윤희에게 던져지는 ‘더러운 자식’이라는 비난은, 동성애 정체성이 오염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재신이 무작위로 유생을 덮쳐 안고 이렇게 되면 너도 남색이냐며 응수하는 것은, 그 동성 지향이 쉬이 전염된다고 여겨지는 것과 연결된다. (임옥희는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주디스 버틀러 읽기>(여이연, 2006)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간주되면 남성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동성애자’라는 자기규정 발화가 외설적이고 전염적인 행위가 되는 까닭은 동성애 금지가 오히려 욕망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강도가 높을수록 전이성이 활성화된다고 편집증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모두(冒頭)에 인용한 대사처럼 벗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 즉 인(仁)을 전유하여 ”그렇다면 나도 남색이다“라는 선언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즉 남색지사를 비난한 그들에게, 도와 법도를 아는 유생이라면 당연히 행해야 할 인의예지신을 저버렸다면서 비난의 화살을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젠더 전복에 뒤이은 동성 서사 정향은, 사실 버틀러식으로 다음처럼 함께 이해할 만하다. “보편성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명료화에 담겨 있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보편성 자체의 관념을 확대하고 실질적으로 만들려는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주디스 버틀러, “문화의 보편성”,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삼인, 2003, 79쪽 참조.)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가 되고, 이 여자 아닌 자가 또 남자를 사랑하는 행위들은 보편의 확장을 시도하는 ‘수행적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라는 측면에서 동궤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으로서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또 한편 동성 서사로의 편향과 관련되어가는 과정에, 여성의 공간은 어디에 마련되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성균관 스캔들>에서 주인공 윤희를 제외한 초선, 효은 등 여성 인물들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특히 고전판 F4, 잘금 4인방에 대한 호응이 높아질수록 아웃포커싱 되어갔다. 이는 전면적인 여성 인물의 부재화라는 남성 동성 서사의 구조적 특징과 오버랩될 수 있다. 전 회에서는 후경화된 효은의 존재가 오히려 여성 로망스에 대한 충동이 은밀히 여겨지는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이 물러섬의 이면에, 가늠되지 않는 저변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음 회에서는 팬픽을 중심으로 지금-여기의 동성 서사 생산과 소비의 실천적 의미를 짚어보기 전에 그러한 이야기를 둘러싼 여성들의 문화적 토대를 일별해볼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5-2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 <성균관 스캔들>을 둘러싼, 여성들의 '올바르지(straight)’ 않은 욕망들 (1) 

 

       

   
 

“계집에겐, 관헌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헌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10회 대사 중

 
   

  

 

  

남자들의 세상: (위)남한의 국회 풍경, (아래) 북한의 당대표대회 모습
 


<성균관 스캔들>(KBS 2TV 월화 드라마, 2010년 8월 30일~11월 2일 방송)이 종영한 지 한 달 남짓이다. 이 드라마를 둘러싼 열기는 아직 식지 않고 있다. 모 인터넷 검색 엔진에서 2010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아본 드라마로 발표했고(<Google> Zeitgeist), 모 TV 웹진에서는 하반기를 대표하는 드라마로 꼽히기도 했다.(<10asia> 2010텐어워즈) 꾸준히 상승일로였기는 하나, 시청률이 평균 10% 안팎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은 의아하기조차 하다. 혹자는 인터넷, VOD, DMB, 스마트폰 등등을 합쳐야만 이 드라마가 가지는 파급력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TV 중심성을 벗어난 열풍이 바로 뉴미디어 시대에 새로운 기준이 필요함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글은 무엇보다 <성균관 스캔들>이 여성텍스트라는 데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우선은 드라마 주 시청층에 있어서 성별적으로 특이한 점은 유독 여성들의, 그것도 세대를 아우르는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성 내부의 연령별 분석은 다양하게 제출되고 있다. 대략 종합하면 애초 10대를 주 타깃으로 제작되었지만, 초반을 넘어서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2,30대가 열광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여기서 한 시청률조사기관은 40대 여성이 가장 높은 시청점유율을 보였다고도 발표할 만치 다른 연령대 역시 만만치 않게 가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스 폐인’ 누나들은 과연 무엇에 열광했는가. 주지하듯 이 이야기는 몰락 남인 양반 김윤희가 몸이 좋지 않은 남동생 윤식을 대신해, 생계를 이유로 남장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간 후 일어나는 일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원칙적 보수주의자 이선준, 혁명적 로맨티스트 문재신, 세속적 실용주의자 구용하가 윤희를 포함 ‘잘금 4인방’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노론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에 맞서, 임금으로 대표되는 중앙 권력을 공고히 하는 개혁에 주춧돌이 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임금의 계보, 그 대종을 잇는 금등지사 찾기의 과업을 함께 이루어야 했다. 그런데 이 계획은 마지막 2회에서 결국 드러나게 된 윤식이 윤희, 즉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좌절되는 것으로 그려졌다. 임금은 강상(綱常)의 법도를 스스로 파기하고 패주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신하 위의 임금이라는 원칙조차 부인하게 될 것이기에 그러했다. 시간에 쫓겼기 때문인지 석연치 않았던 이 같은 결말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스캔들>은 비판보다 격려 위주의 의미를 부여받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인공 윤식-남성을 수행하는 윤희-이 여성이 제기하는 남녀의 사회적 관계의 비대칭을 무리 없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똘망똘망한 여주인공은 자신이 여성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여성으로서의 처지를 내내 자각하고 있다. 필자는 특히 정약용과 윤희가 대면할 때마다 숨을 죽였다. 정약용은 윤희가 성균관에서 여성으로서 만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매번 윤희가 사실은 계집이라는 것을, 그래서 성균관에 가당치 않다는 것을 직시케 했다. 모두(冒頭)에서 언급했던 이 ‘스승’과 ‘계집’의 대화는, 공적 영역의 한계를 놓고 벌이는 성 대결의 일종으로 볼만하다. 그리고 이때 윤희가 쏟아내는 말, 예를 들어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라는 말은 그 자체로 글을 향한 여성들의 투쟁과 다름없다. 윤희는 드라마 전개 초반에 “빈부귀천, 노론남인, 당색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실력만 있다면 등과하여 벼슬을 할 수 있다”라고 한 이선준, 그러니까 소위 ‘먹물’ 남성에게 “조선이 그렇게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 안 해”라며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적대의 지점은 원작보다 드라마에서 추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약용은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고, 이선준에 대한 윤희의 감정도 원작에서는 시종 호의적이다.) 이선준은 남자인 양 성균관에 들어온 것, 남자들처럼 활을 쏘지 못한 것 등에 대해 “살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는 윤희에게 정약용과 똑같이 “변명과 핑계일 뿐”이라고 훈계했던 참이었다. 이에 윤희는 “변명이라고 핑계라고 쉽게 말하지 마. 나한텐 너무 절실했으니까…… 넌 니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세상이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는 귀하신 도련님 주제에…… 너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그 기회가, 나한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구쳐도 불가능한, 기적, 기적이란 말이야!”라고 울분을 토한다.

그러니까 도련님들, 즉 ‘정상적인’ 남자들은 차라리 기적이 필요한 세상 질서의 잔혹함에 무지하다. 혹은 그 불합리에 대해서 인지한다고 해도, 그 밖의 현실이 실지로 어떻게 운영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그들에게 여성은 돌봐야 할 백성이지, 함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젠더 범주의 결락은 재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는 한문(眞門)으로 홍벽서를 뿌렸기 때문이다. 자고로 삐라는 원래 한글(諺文)로 적어야 하는 법이다. 윤희는 이에 대해 걸오에게 “글을 모르는 저자의 백성이나 언문이나 쓰고 사는 아녀자들은 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누구를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건지, 그런 정신머리로 세상은 또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라고 일갈했다. “서학은 학문일 뿐, 주군은 오직 전하”라는 모순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존귀하다는 배움에도 계집은 관헌이 될 수 없다고 여긴 정약용도 윤희로부터 “삶과 학문이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이들은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킬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으니까요”라는 윤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본다.

그런데 <성균관 스캔들>에는 윤희가 진입하고자 고투를 벌이는 유생들의 글-학문의 세계뿐 아니라 원래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던 이야기-, 언문의 세계에도 얼핏 드러나 있다. 이선준을 두고 윤희의 경쟁자로 낙점되었던 효은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이야기책에 나오는 인간들은 어디서 자빠져 자고 있는 거야”라고 하더니 이선준을 만나 “있군요, 이야기책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세책방을 드나들며 들춰대는 것은 “장안을 눈물바다로 만든 연예패설” 류의 소설, “첫날 밤 이렇게 하면 나도 황진이” 류의 자기계발서, “1등 신랑감 명부” 류의 실용서 등등이다. (이것은 물론 2010년까지 당대의 실질적 베스트셀러 명목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널리 읽히는 이야기들이 언제나 여성의 것, 혹은 여성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윤희에게 ‘관헌’의 글이 금지되었던 것처럼, 효은에게 허락되었던 이러한 ‘사가’의 독서 역시 언제나 과한 것은 아닌지 경계되었다. 왜냐하면 남자들의 세상은 글-이성-논리에 의해 구축되는 바, 여자들은 윤희처럼 여성이면서 글을 알고, 그로 인해 남녀유별의 법칙을 깨트리기도 할 것이지만, 또 한편 효은처럼 글들보다 미달태인 온갖 이야기들을 이성과는 상관없이 향유하면서 그 체제를 밖에서 흔들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실 윤희는 여성의 몸으로 성균관 박사가 되지만, 결국 여성으로서 선준과 결혼생활을 꾸리며 ‘양성평등’을 이루는데 머문다. 이것이 또 한편 <성균관 스캔들>이 흥행과 더불어 ‘공영’ 방송의 드라마로 안착할 수 있었던 지점일 터이다. 그렇다면 효은은? 드라마 종영 시 연출자는 드라마 구성상 효은의 분량이 많이 잘려나가 가장 미안했다고 밝혔다. 원래 효은은 4인방과 마찬가지로 자아성장을 이루며, 결국 ‘패설 작가’로 성장할 예정이었다고 전했다. 
  

 

  


여자들의 세계: (위) 글-학문에의 분투, (아래) 언문-이야기에의 탐닉
 


필자는 이 흐려진 효은의 위치가 이야기에 대한 여성의 탐닉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윤희와 효은은 쌍생아처럼, 글-학문에 분투하는 한편 언문-이야기에 탐닉하는, 언어와 여성이 맺어온 관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전자는 전경화되고 후자는 후경화된다. 사실 원작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정은궐 저, 파란미디어, 2009)은 공중파의 드라마가 구현했던 이야기보다 훨씬 로맨스의 문법에 충실하고 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재자가인(才子佳人)이며, 이들의 농염한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다른 캐릭터들 역시 ‘아버지, 형의 유산’에 자못 진지하게 몰두하기보다는 더욱 발랄하고 거침없이 자신들의 청춘과 우정의 나날들을 즐기고 있다. 몇만 부를 계획했을 뿐인 이 책은 50만 부를 훌쩍 넘어 팔렸고, 드라마 종영 이후 100만 부를 넘긴 메가 히트작이 되었다. 독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 매혹적인 이야기의 창작자는 마치 뒤로 물러선 효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출판사는 작가를 대신해 “사생활과 글쓰기를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 이는 로맨스라는 여성화된 장르 자체가 가지는 그림자적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 즉 환상을 실제와 관련시키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탐닉하는 여성적 독서, 그럼에도 생겨나는 이야기에 대한 동경 등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 여성의 몸으로 성균관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갓집 규수가 패설 작가가 되는 것 역시 경천동지할 일이다.

만일 그녀가 2010년에 환생한다면? 오매불망 이선준에게 구앨랑은 집어치우고, 어느 팬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그를 두고 팬픽이라도 쓰면서 현대판 패설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회에서는 이러한 ‘현대판 효은’들이 어떻게 <성균관 스캔들>을 즐길 수 있었는지, 이를 수행적 젠더라는 측면에서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윤희 어머니의 말마따나 “글이 재주가 되고 밥이 되는 계집은 기생년들 뿐”이었지만, “여자의 글재주는 독”이라는 유구한 언설에도 불구, 이야기에 탐닉하고, 글쓰기를 동경하는 여자들이 언제나 있었음을, 그 자취를 확인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환상 역시 종시 현실과 관련을 맺고 서로 습합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여성들의 집단적 투신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그 동성 서사로의 정향에 대해서도 고민의 끈을 놓지 말도록 하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5-2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현대에는 자식 교육을 어미들에게 맡겼지요. 그래도 여전합니다. 아이를 누가 길러야 훌륭한 인간이 될까요?
 


1. '인트로(intro) - 누나의 은밀한 '문학' 폴더

 

인터넷을 떠도는 캡처가 있다. 이름 하야 ‘남매의 은밀한 폴더’. 정황은 이러하다. 남동생과 누나가 각기 상대의 낯선 폴더를 열고 깜작 놀란다. 그리고 곧 파일명을 바꾸는 것으로 서로에게 메시지를 남기는데…… “동생, 이런 거 너무 자주 보지 마. 동영상 강의를 보렴. 간호사가 주사 놓을 때 느끼지 마”라는 누나의 말에 동생이 남긴 메시지 내용은? “누나, 이런 거 너무 자주 보지 마. 동방신기는 연인이 아니라 가수라고. 차라리 남친을 만들어”였다.   

 


 

<남매의 은밀한 폴더: (위) 동생의 ‘야동’ 폴더, (아래) 누나의 ‘B․L’ 폴더>
 


“자, 그럼 이제 폴더를 닫도록 해봐”라고 권하며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는 보통 유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리얼리티는 결코 얕지 않다. 남학생의 ‘야동’ 폴더야 청소년기 혈기방장함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이에 반해 20대 누나들이 컴퓨터 앞에서 하악 대고 있는 모습은? 두렵기조차 하다. 화창한 날씨에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미팅이나 데이트를 할 것이라 기대되는 그녀들이 나날이 다크 서클이 짙어져가며 보고 있는 이 ‘B․L’ 등속은 과연 무엇일까? 누나의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이 텍스트 파일들은 한마디로 소설이다. 그런데 남자들만의 사랑을 다룬다. 물론 때로 강도 높은 성애 장면도 포함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왜 여자들은 이러한 동성(同性) 서사를 욕망하는가. 다시 말해 ‘누나들의 문학’은 왜 ‘꽃미남 간의 동성애’에 대한 것인가. 왜 이런 주체와 대상 간의 젠더 간극이 생긴 것일까. 대체 여자들이 스스로가 완전히 소거된 이야기를 만들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들이 왜 이러한 동성 서사를 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팬픽(fanfic)을 중심으로 몇 가지 갈래의 논의들이 제출된 바 있다. [혼란을 막기 위해, 이 글에서는 전반적인 패러디 창작은 팬픽션(fanfiction)으로, 아이돌 그룹을 위시한 연예인을 모델로 동성 서사를 만들어내는 실천은 팬픽으로 규정함을 밝혀둔다.] 간략히 정리하면, 하나는 무성적으로 여겨지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때 동성 서사 충동은 스스로의 동성 지향성을 발견하는 특정 계기로 위치된다. 또 하나는 한국적 아이돌 팬덤과 결합하여 ‘하필 동성애?’로 발흥된 여성들의 과도기적 징후, 따라서 곧 건전한 방향으로 수렴될 패러디 창작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에서는 ‘서사’가, 후자에서는 ‘동성’이라는 측면이 왜소화되면서 왜 여성이 동성 서사 욕망, 특히 남성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는 전면화되지 못했다.

최근 10대뿐 아니라 20~30대 여성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분석한 논의들에 따르면, 이를 인터넷이라는 매체 환경에서 여성들이 환상성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정체성을 시험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김민정, “팬픽의 환타지와 성정체성”, <여/성이론> 17,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3, 1; 박세정,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능력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6; 한유림, “2․30대 여성의 아이돌 팬픽 문화를 통해 본 젠더 트러블”, 서울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8 등의 야오이, 팬픽 관련 분석을 대표적으로 참조할 수 있다.)

이 글은 여성들의 동성 서사 욕망의 저변을 역사적으로, 또 한편 이론적으로 확인해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니까 여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 글쓰기를 향한 동경 등이 왜 하필 동성 서사에 살포시 자리하게 된 것일까. 여성이 지워진 연애 서사에서 여성 자신이 출몰하는 공간 혹은 그 방식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 숨 가쁘게 쓰이고 읽혔던 이 이야기들이 과연 세상의 질서, 혹은 기존 성 규범과 맺는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필자의 머리에 내내 떠돌고 있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0년 8월, 인터넷정보등급제 실행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발표되었다. 그러자 ‘인터넷 국가검열 반대를 위한 공통대책위’ 사이트에 난데없이 ‘소녀’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정보통신부를 비롯한 관련 홈페이지 게시판을 항의 글로 도배하다시피하고 ‘검열 반대를 위한 네티즌 대회’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10대 여학생을 행동하게 만든 것,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팬픽이었다. 왜냐하면 이 낯선 소녀들의 창작물은 대부분 아이돌 그룹을 위시한 연예인들 사이, 그중 동성 관계를 제재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사회 통념상 허용될 수 없는 성관계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당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제7조항이 청소년유해매체 지정의 근거가 된 것이 문제였다.
(오랜 논란과 투쟁 끝에 동성애 조항은 2004년이 되어서야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서 제거되었다. 이를 고지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중 개정령안 ‘다’항은 다음과 같다. “현행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 기준에 있는 ‘동성애’가 동성애자에 대한 인권 침해의 우려가 있어 삭제하여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등에 따라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 기준에서 ‘동성애’를 삭제함.”)

그렇다면 소녀들이 그토록 읽고 쓰고 싶어 하는 팬픽을, 그들이 좋아 마지않는 스타와 나 사이의 ‘올바른(straight)’ 이성애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될 게 아닌가! 그렇지만 이 소녀들은 깜찍하게도 “팬픽도 문학이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라!”라고 외쳤다. 이 구호는 팬픽이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 걸음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편 표현의 자유에 근거한다면 동성의 이야기 역시 다룰 수 있다는 항변이기도 하다. 후술하겠으나 소녀들이 폭발적으로 그러한 문화적 능력을 세력화하게 된, 혹은 팬픽이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동성 서사 자체에 힘입음이 크다고 생각한다. 촛불 때 그 진가를 드러냈던 대한민국 유수한 대표 여성 커뮤니티에는 이 “팬픽만 몇 기가”라는 자조 혹은 자탄의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촛불 소녀들과 사생팬들은 단체적 기동성 등에서 꽤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기실 이들은 완전 다른 존재들이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팬클럽 등에서의 활동 및 운영에의 참여라는 일정 경험이 축적되어 촛불 소녀들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팬픽은 그 자체만으로도 ‘탈출구가 없는 10대 중‧고등학생’부터 ‘90년대 대중문화 키드의 귀환’으로 가세한 20~30대까지 아우를 정도의 광범위한 향유층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의 동성 서사 선호 실천은 보다 복잡하게 뻗어가고 있다. 일본발 B․L 표현물 및 야오이 패러디 텍스트에 대한 취향이 함께 시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부연하자면 야오이는 절정 없고[ヤマなし;야마나시], 완결 없고[落ちなし;오치나시], 의미 없다[意味なし;이미나시]의 첫 음절을 따서 여성 스스로 자조하듯 만들어진 말로 보통 남성 동성 표현물을 총칭한다. 야오이 패러디 텍스트는 모험이 중심인 소년 만화를 남자 캐릭터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것을 말한다. 보통 ‘야오이 혹은 야오녀’와 중첩되어 쓰이는 ‘동인계 또는 동인녀’는 이러한 아마추어 작가들의 커뮤니티적 창작 실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B․L은 Boys Love의 약자로 남성 동성 관계를 그리고 있는 야오이 중에서 미소년이 주축인 이야기들을 지칭한다. 여기에 장미물이라고도 하는 남남 관계 서사물에 대비해 여여 관계 서사물을 지칭하는 백합물, 그리고 B․L에 대응하는 G․L(Girls Love) 등에서 보듯, 동성 서사 관련 장르 명칭은 지금도 생성 중이다.

고백은 아니지만, 필자 역시 10대 소녀도 아닌 뒤늦은 나이에 모 그룹들의 정보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팬픽에 접근하게 되었다. 문청(文靑)은 아니었으나, 나름 문학 및 그를 둘러싼 구조들을 더듬어왔던 세월은 순식간에 이 정신없는 이야기의 격류에 휩쓸려갔다. 분석하는 이성은 탐닉하는 주체 앞에 허둥거렸다. 그리고 이제 소녀들은 누나가 되었다. 공책에 써서 돌려 읽던 팬픽이 인터넷에 올려지고, 이제는 핸드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많은 여자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는 젠더를 교란, 교차하는 이야기가 잠깐 스쳐가는 열풍에 의한 것이 아니고, 무려 몇백 년에 걸쳐 형성된 욕망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여성-’, 혹은 ‘남성-’이라 일정하게 주조되었던 특정 젠더형을 비트는 시도는 언제나 있어왔고,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zippo 2010-12-2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미 익히 재미있고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로 가득찼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참으로 냉철한 비판이며 관찰력입니다. 부럽습니다. 자주 찾아 와 읽겠습니다. ^^

비로그인 2011-05-2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