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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무리하며

 

이번의 글로 연재는 마무리된다. 성적시민권이란 화두를 잡고 참 많은 곳을 쏘다니다 돌아온 느낌이다. 한국에서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역사도 이제 스무 해 가까이를 채워가지만, 동성애의 정상성 여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거리이고 동성애자 인권의 사회적 수용 여부를 둘러싼 의견 역시 분분하다. 이런 현실에 일일이 맞대꾸할 수도, 그렇다고 깡그리 무시한 채 발목 잡히지 않게 앞으로만 저벅거리며 갈 수도 없기에 대범하지 못한 필자가 중언부언 논의를 펼친 건 아니었나 하는 걱정도 이제야 슬그머니 든다. 하지만 성적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지금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는 ‘시민됨’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이 신선한 자극에 고무된 수많은 질문들을 터트려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이 글은 한 명의 동성애자가 시민이 될 수는 있지만, 한 명의 시민이 동성애자로 사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었다. 동성애자가 시민으로 사는 것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하는 ‘간주(regard)’의 힘이다. 그 덕에 집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그리고 길거리에서든 사람들이 일단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부터 밝히라는 질문을 불쑥 던지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이성애자인 척하기란 너무 쉬운데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연기가 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동성애자는 이성애자가 아니어도 안전하게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안전 보장의 유일한 계약 조건만 지킨다면 지속 가능하다. 절대 동성애자임을 들키지 말 것.

동거하는 두 명의 여성이나 남성의 관계가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형제, 자매나 친척 간 혹은 친구 사이도 아니라면 통상 사람들이 머릿속에 남는 가능성은 한 가지, ‘섹스하는 사이’뿐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는 항상 이성애자에 비해 더 ‘성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이제 이야기는 인간의 욕심이 화를 부르는 것처럼 동성애자의 과잉된 성욕 역시 불행을 자초할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지고, 이것이 인간의 비뚤어진 마음, 나약한 정신, 기능이 고장 난 몸에 의한 것이라면 엄격한 교육과 처벌, 그리고 세심한 치료로 회복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변경이 불가능한 피부색에 기반을 둔 인종 혐오와는 달리 동성애 혐오는 바로 이러한 치료 가능성의 기대 때문에 새로운 비극을 빚는다. 이제 사회는 아프거나 다칠 위험이 있는 것처럼 동성애에 빠질 위험을 제시하고, 마약 중독처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전염병처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각심에 도취된다. 그래서 반드시 이들을 찾아내 의사에 데려가는 것이 위엄 있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 이 논의는 근대와 함께 등장한 시민권과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엮이는지를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에서 없었던 사랑도, 섹스도 아니었건만,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에 새삼스레 만들어졌다. 용감한 여성학자들이 밝혀냈듯이 남성을 중심에 세우기 위해 남성이 되지 못한 존재로서 여성을 정의하고, 남성다움을 칭송하기위해 남성성이 결핍된 결과로서 여성스러움을 위치하게 하는 숨겨진 과정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결코 없어질 수 없(어야 하)는 성차를 지키기 위해 이성애라는 신화를 원했고, 동성애 혐오라는 자기 검열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왕과 귀족, 노예와 같은 신분제가 없어지고 천부 인권을 부여받은 독립적인 ‘개인’이 시민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약속하는 국가와 계약을 맺는 것이 시민권의 시작이라 배우지만, 아무리 둘러보고 재차 심사숙고해보아도 ‘누구’여도 상관없는 세상이 아니라 여전히 ‘누구’여야만 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만약 정말 내가 누구여도 상관없는 세상이 되려면, 내가 누구여도 전혀 개의치 않고 평등하게 대할 기회를 상대에게 주려면 동성애자는 가장 먼저 커밍아웃부터 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상관치 않음도 성립할 것이다. 그러니 생각할수록 이건 사기극이다! 차별의 해결책으로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구호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는 소수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기극의 화려한 허울이 된다.

만약 누군가 고양이를 붙잡고 “나는 너와 나의 차이를 존중해. 그러니 고양이 너는 너의 모습대로 살아도 좋아”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면 필시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이제 ‘고양이인 채로 살아도 좋다’라는 그 말 자리에 흑인이나 장애인, 이주노동자, 그리고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 흔히 관용의 대상으로 곧잘 일컫는 소수자들의 명단을 넣어보라. 존재 자체에 그런 식의 관용은 베풀 수 없다. 다른 이의 반대나 찬성, 또는 승인과 불허의 여부에 따라 존재가 있었다가 사라졌다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존재는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모두가 똑같이 존재하고 있음에서 출발한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이성애자로 살아도 좋다’라는 관용을 베풀 수 없는 것은 동성애자가 속이 좁아서가 아니라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같은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의 구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고 정체성을 본질화하면서, 이성애자들이 사회적 다수인 만큼 관용을 베풀어 소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자고 외치는 외침 따위는 결론적으로 차별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묵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마도 차이가 없어질까 봐, 구분선이 없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차이의 존중은 차이를 유지하는 교묘함을 낳는다.

관용과 차이의 존중을 이렇게 나쁜 것인 양 몰아붙이면 오해받기 쉽겠지만, 이 글의 당부는 동성애자를 관용하지 말라거나 차이를 그대로 두라는 뜻이 아니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자체가 차별을 일으키는 원인은 아니다. 즉 동성을 좋아하고 이성을 좋아하는 차이가 아니라 누구를 좋아하느냐로 우열과 귀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그 차이가 바로 원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만들어진 차이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타자와 맺는 관계에 항상 위치성이 동반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작 의도했던 관용도, 존중도, 평등도 실천할 수 없다. 이에 동의가 된다면 그동안 섹슈얼리티를 배제했던 시민권의 변화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펠란은 “노동과 섹스가 혼합된 일의 지위에 대해 성노동자(sex-worker)라는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혼란을 생각해보라. 이주노동자는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표현해 시민권에 가까운 존재로 인정되고자 한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의 표현은 오히려 성원권에 대한 자격 박탈로 고려된다”라고 지적했다. 성매매의 경험,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등 어떤 섹슈얼리티인가에 따라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따진다. 성노동자라는 말로 노동자 정체성을 강조해 시민권을 인정받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적 차이’에 대한 억압이 강함을 반증하는 셈이다. ‘비정상적 섹슈얼리티’를 포기하고 부인하게 하는 시민권은 결코 모든 것을 완전히 지워주지는 않는다. 탈성매매를 증명하면 받는 혜택이 있지만, 여전히 ‘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으로의 낙인은 남는다는 점에서 결코 이등 시민의 꼬리표를 뗄 수 없다. 시민권의 개념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역시 한계에 갇힌다.

성적시민권은 이런 시민이 되는 자격의 범주를 다시 설정한다. 기존의 시민권을 성적시민권으로 재설정하는 것은 바로 ‘성적 차이’ 때문에 사회 밖으로 밀려나고 배제된 삶의 복권이다. 이제 ‘성적시민권이 동성애자를 시민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다. 동성애자가 이미 시민이었다는 점에서 시민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적시민권이 동성애자들에게 시민으로의 삶을 새롭게 기획하게 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글의 이해를 위해 밝혀두는 것은 이 글에서는 일부러 성적소수자, 퀴어라는 표현을 자제하고 트랜스젠더의 시민권 분석까지 포함하지 않았다. 또한 게이와 레즈비언의 차이도 세세히 고려하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성적시민권 논의의 그 두께가 두텁지 않은데다, 이를 포함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더 많은 지면 그리고 더 많은 시간과 공부가 필요하기에 논의 지점의 확장보다는 동성애자/이성애자로만 집중하려 했다. 다만 앞서 게시된 김주희의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성노동자인가’라는 글도 성적시민권의 관점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을 것이고, 다음 연재에서 루인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분석이 더해질 것에 이 글의 부족함이 조금은 덮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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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Shane Phelan, “Bodies, Passions and Citizenship,” Critical Review of International social and Political, Philosohy,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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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npa 2010-11-0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정성이 담긴 좋은 연재물이었습니다. 마지막회, 너무 아쉽습니다.ㅠㅠ 다른 매체, 다른 지면을 통해서도 계속 의미 있는 이야기들 들려주셔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로그인 2011-05-2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나다로 이민을 오고 나서야 동거,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나와 함께 일하면서, 직장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뒤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아무렇지도 않더군요. 먼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사정을 알게되면 그런건 그 사람의 개인사일 뿐인데...
 


9. 차별금지법과 성적시민권

 

신도 상상하시지 못할 동성애 혐오의 논리

2010년 5월 27일자 신문에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 말이냐!”라는 지면 광고가 실렸다. 동성애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무너뜨린다는 경고와 함께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있다며 시청 거부 운동과 광고 안내기 운동을 시작하자는 내용이었다. 동성애를 비하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신문 기사와 칼럼은 그동안 여러 번 실린 적이 있었지만 광고가 실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 9월엔 다시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가 책임져라”라는 타이틀로, 10월엔 “교회가 침묵하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통과됩니다”라는 내용의 광고가 연이어 실렸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군형법에서 ‘계간’을 형사 처벌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두고 마치 군대 내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으로 오도하며 “동성애 군대, 내 아들 안 보낸다”로 대응하고 있다. 이런 광고를 내는 주최 단체는 ‘동성애 허용법안 반대 국민연합’이나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연합’, ‘참교육 어머니 전국 모임’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동성애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허용’이란 학교나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훈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교육과 설교를 통해 동성애를 금지하지 않으면 동성애자가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AIDS가 창궐하며, 가뜩이나 바닥인 출산율은 더욱 떨어져 국가 노동력이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죄라고 금한 동성애자 목사가 교회로 들어올 것이고, 위기의식이 높아지며, 심지어는 남한이 동성애로 타락하면 북한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라고까지 목청을 높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 관계도 맞지 않을뿐더러 논리의 비약도 지나치게 심하다.  

예를 들어 그들이 말하는 법이란 2007년도에 정부가 인권 선진국이라는 위상을 갖기 위해 성별, 인종, 나이, 장애 등의 모든 차별을 아울러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제정하려 한 것일 뿐, 이 법의 시행이 동성애를 특별히 권장한다고 할 수는 없다. 법안에 명시된 정확한 차별 금지 사유는 ‘성적 지향’인데, 만약 이를 두고 동성애를 권장한다고 한다면 장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장애를 권장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 동성애는 불법이 아니므로, 이로 인해 동성애가 새삼스레 허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동성애가 나쁘다고 말만 해도 벌금을 물거나 처벌을 받을 것이라며 잔뜩 겁을 주지만, 아쉽게도 정부가 만들려는 차별금지법은 차별 억제의 실효를 위해 있어야 할 시정명령권이나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은 규정조차 없는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법안에 불과할 뿐이다. 위의 단체들이 여당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쟁쟁한 정치인들, 변호사들과 목사님, 교수 등이 지도자로 있는 연합 단체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것을 모르고 광고를 냈다고 보기엔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알고도 그런 것이라면 이 활동의 목표가 국민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해 동성애자를 다 없애버리고 싶어서인 셈이니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전에 어느 교회에서 했던 강의가 생각난다. 그날 나는 강의 도중 한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만약 신께서 내일 오전 10시에 이 세상의 동성애자들을 모두 없애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내일 10시에 사라질 사람들은 누구일까요?”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신께서 그런 약속을 하신다면 동성애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나는 당연히 없어지고 말 것이다. 또 누가 해당될까? 10년 동안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남몰래 동성의 선배를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사라질까, 아니면 동성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는 조숙한 초등학생이 사라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한때는 동성의 애인도 있었지만 지금은 싱글이 되어 금욕 생활을 한 지 8년이 넘는 이도 사라져야 할까,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시기까지는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봐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럼 몇 살을 기준으로 잡아야 할까. 이러한 이유로 이 아이들을 없애지 않았는데, 이들이 끝까지 동성을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때 다시 추가로 동성애자를 없애는 작업을 하셔야 할 텐데 그런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모두 없애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동성애자가 될 갓난아기도 가려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 아기의 어미는 신에게 묻고 싶지 않을까? 없애실 거라면 왜 처음부터 동성애자를 만드셨냐고…….

이렇게 내가 마땅히 사라져야 할 동성애자를 골라낼 질문들을 꼼꼼히 이어 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한 교인이 마침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건 신도 못하실 일이에요.” 그 말에 나 역시 비로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렇죠. 그런데 신도 하시지 못할 일을, 신도 하시지 않을 일을 왜 인간들이 하려고 이리도 애쓰는 걸까요?”


한국 성적시민권의 시험대, 차별금지법

시민이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국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바깥쪽, 그러니까 비시민/이등 시민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조지 모스는 <내셔널리즘과 섹슈얼리티>에서 국가가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통치 전략으로 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나치의 민족주의를 언급한다. 주지하다시피, 나치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우생학으로 묶어내기 위해 흑인, 유대인, 동성애자 등에 대한 혐오를 활용했다. 특히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할 남성성을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쓰였다. 이것이 독일의 상황이라면 한국은 어떨까. 김동춘 교수는 한국의 시민권 역사를 분석하며 내전을 겪은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반공주의 국가에 대한 충성 여부로 시민과 비시민을 구별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쉽게 증명된다. 생각의 차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누구든 걸면 걸린다는 국가보안법은 범죄자라는 명목으로 어떤 시민이든 일순간에 그 지위와 자유, 그리고 생명권까지 박탈할 수 있었다. 집행의 정당성은 국가의 안위라는 명분 앞에서 더 이상 질문될 수 없었다. 시민들은 국가 앞에서 주체적 존재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받을 뿐이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부추김에 정신이 팔리면 우리는 정작 토론해야 할 ‘시민으로서의 권리’라는 주제를 놓친다. 2007년에 법무부는 차별 금지 사유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라는 일부 보수 기독교와 시민 단체의 반대에 굴복해 ‘성적 지향’ 항목을 없앴다. 학력, 병력(病歷),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출신 국가 등 다른 여섯 가지 사유도 함께 법안에서 사라졌다. 총 스무 개의 차별 사유 중에 왜 이 일곱 가지만 삭제 대상이 되었을까. 일곱 가지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필요한 권리인 것은 결코 우연이 일치가 아닐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2007년에는 17대 국회회기의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고, 이후 3년째 법무부가 곧 입법 예고를 한다는 소문만 돌고 있다. 언젠가 다시 내놓을 법안에는 과연 삭제되었던 일곱 개 항목이 복원되어 있을까. 이젠 법의 제정 여부보다 법의 논리가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포함시키는지, 우리 사회가 차이와 차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물론 신문 광고를 낸 이들도 “동성애자의 인권은 존중한다”라고 말한다. 다만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과 우리 사회의 상식이 지켜지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의 인권도 소중하므로 동성애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할 뿐이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동성애 혐오가 학습된 결과라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을 앞세워 신의 뜻으로 포장하고 상식을 들먹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사적인 의견이며 그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 논리의 역은 성립하는가. 이성애에 대한 호불호 역시 개인의 몫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동성애자를 싫어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설명이 아니고서야 이는 완전히 사적 영역의 일이 될 수 없다. 동성애자라는 단어를 듣고 배우지 않고도 동성애를 입에 올리거나 머리에 떠올릴 재간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관계 맺어지는 타인에 대한 그 어떤 호불호도 사회적 학습의 과정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혐오를 조장하며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로서 동성애자를 각인시키려는 시도는 다름 아닌 시민권을 박탈하려는 과정이다.

이제 시민들 간의 차이, 우리 안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묻자. 그러나 그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 만들어진 차이인가를 물어야 한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차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 혹은 이성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는 이성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지만 이성애자는 동성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일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동성애자는 비이성애자로서 이등 시민으로 밀려난 것이며,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 맞는 정치적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변형을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것이라는 주문이다. 애당초 동성애와 이성애가 얼마나 같은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얻어질 평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과정에서 배제되어온 집단이 시민권을 요구하려면 기존의 제도 안에서 추가되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시민권 자체의 해체와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도전을 할 수밖에 없다.
(정상성의 획득이 아니라 정상성의 울타리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추가의 멤버십을 주거나 허용되는 예외의 자리를 받는 것으로는 정상성을 약화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더욱 강력해지기 마련이다.)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서의 성원권과 평등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이성애만이 유일한 정상이 아니라 이성애 역시 인간의 여러 성적 지향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헤게모니를 뺏기지 않으려는 방어와 공격이 있겠지만 그 싸움 이후에는 분명 변화가 들어설 자리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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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조지 모스, <내셔널리즘과 섹슈얼리티: 근대 유럽에서의 고결함과 비정상적 섹슈얼리티>, 서강여성문학연구회 역, 소명출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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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10-11-07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논리가 시원시원하시네요, 좋은 글 잘 읽고가요(-얼마전입주한버디마을주민ㅋㅋ)
항상 애쓰시는모습 감사하고 응원합니다^^

모스 2010-11-09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 화이팅 !!!

사용이는고양이 2010-11-1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포비아들은 보려고도 안한다는게 문제,
본다고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는게 문제,
ㅠㅠ오늘도 트윗에 올라온 포비아들의 이야기로 맘 상해서 넋두리 남기게 됩니다.
언제쯤 이 세상은 바뀔까요...나부터 바꾸자 애쓰고 살지만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내미는 날 입니다.

미래소년 2010-11-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저 책들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태영 2010-11-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차별금지법 재정건으로 한참 활동할 당시가 떠오르네요..일반인에게 동성애자가 되라고 강요할수 없듯이 동성애자에게 일반인이 되라고 하는건 더더욱 말이 안되는 말인데요..법으로 재정되어진다고 하루아침에 무언가 확 바뀌는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뭔가가 조금은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다니던 외국인이 대학에서 쫓겨나는 일 같은것은 더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잘 읽었습니다..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5-21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시족, 히피족... 사람은 언제나 소수그룹의 사람들을 차별하며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8. 동성 결혼과 성적시민권

 

당신은 네 번이나 하고 왜 나는 못하게 합니까

독일에서 ‘동성 커플 파트너십 등록법’이 제정되기 전인 1999년 6월 26일에 열린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적소수자들의 자긍심 퍼레이드에서 한 참가자는 게하르드 쉬로더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새겨진 피켓을 들고 나왔었다.

‘쉬로더씨, 당신은 네 번이나 결혼하고서 왜 나는 못하게 합니까?’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다음의 소송에서 동성 간의 관계에 대한 법적 해석을 살펴볼 수 있다. 엑스존 소송이 진행되던 2003년 3월 17일, 20여 년을 애정으로 함께 살았으나 계속되는 파트너의 폭력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결별을 선택하게 된 한 40대 동성애자가 법원에 ‘사실혼 관계 해소로 인한 재산 분할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모든 재산상의 명의가 상대편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 재산 분할을 받지 못하면 20년간의 노동과 헌신이 빈털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해 6월 22일, 서울고등법원은 겨우 7,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은 내렸다. 두 사람이 21년간 모은 재산이 10억 원이 넘는 점을 감안할 때, 7,000만 원이란 배상금은 너무도 터무니없었다. 이는 법원이 두 사람을 ‘동반자 관계’로 해석한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다음 해인 2004년 7월 27일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아예 판결문에 “우리 사회의 혼인이라 함은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는 남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을 의미한다”라며 “동성 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더라도 사회 관념상이나 가족 질서 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소송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당시 이 판결은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인권 단체들의 비판 성명서가 발표되는 등 사회적으로 꽤 큰 논란을 일으켰다.

법원 판결의 근거는 우리나라 헌법 제36조 1항이었다. 이 조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는 내용인데, 이때 ‘양성’을 남자와 여자로 해석한 것이다. 판결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설사 틀림없는 ‘동성 간 사실혼 관계’였다고 해도 동성 간에는 혼인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사실혼으로도 ‘법’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는 동성 결혼이 시민권 논의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결혼을 중심으로 많은 사회적, 경제적, 법적 혜택이 편성되어 있는 사회에서 부부와 같은 연을 맺은 동성 간의 관계가 우정 이상의 관계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즉 친하긴 하나 결코 가족은 아닌 단지 ‘타인’으로서만 그 위치가 해석될 때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아왔더라도 그의 삶의 근거가,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일순간에 박탈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가

대체 결혼이란 무엇일까. 왜 법은 그 관계의 의미(사실상의 혼인 관계라는 점)를 파악하면서도 혼인이 아니라며 관계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법적으로 부과하기를 회피하는 것일까. 그저 ‘성별’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의해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부여받는 사회의 본연적인 질서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접근 불가의 영역이 되는 것은 모순이지 않나.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독점’이다. 우리는 결혼을 남녀 간의 결합으로만 남겨두려는 이 지독한 독점욕이 과거 백인과 흑인의 결혼을 막기 위한 ‘인종 간 결혼 금지법’으로도 발휘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은 1948년도에 결혼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권리’임을 밝히며, 미국에서 최초로 인종 간 결혼 금지를 철폐했던 과거 전례를 언급하며, 그로부터 60년 후인 2008년 5월에 역시 동성 간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주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판결은 그 해 11월 캘리포니아 주 헌법을 ‘결혼은 오로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조항으로 개정하자는 ‘주민발의안 8호’가 주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 통과됨에 따라 다시 뒤집어졌다. 이로써 동성 결혼 관련 업무들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2010년 8월 4일, 이번에는 연방지방법원이 ‘주민발의안 8호’가 미국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며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동성 간 결혼을 반대하는 이들 역시 이번 판결에 항의를 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인종 간 결혼 금지가 그러했듯이 이 논쟁도 결국 연방대법원에 가서야 결론이 나게 될 것이다.

앞서 연방지방법원의 반 워커(Vaughn R. Walker) 판사가 "주민발의안 8호는 동성 간의 결혼은 이성 간의 결혼보다 열등하다는 사적인 윤리 판단 기준에 기반했다”라고 지적하며, 이런 발의안은 “결국 동성 간에는 결혼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라고 판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동성 결혼을 싫어하거나 도덕적이지 않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적 판단이나 감정이 헌법에 명시된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쟁의 핵심이 무엇을 더 허용할 것인가가 아닌, 과연 무엇을 금지해도 괜찮은가에 놓여 있음을, 그것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권리

‘동성 결혼 합법화’는 단순히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똑같이 모든 걸 누리고 싶다’는 차원의 요구가 아니다. 누구의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어떤 사람과 결혼할 수 없게 하는가’로 바꾸어 질문을 던지면, 사회가 어디까지 인내심을 발휘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시민의 권리를 얼마만큼 잘 보호하려고 애써야 하는가의 문제임을 다시 볼 수 있다.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회의 한 구성원에 대한 차별임이 명백하기에, 유럽 등 서구 국가들은 고육지책으로 동성 간 파트너십을 등록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결혼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과 유사한 제도를 스스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Civil Unions,Registered Partnership Act, PaCS 등 나라마다 그 이름과 내용이 다르다). 가장 간단하게 기존의 결혼이 동성에게도 적용됨을 인정하고 결혼 제도를 개방하면 될 텐데, 왜 이리 굳이 복잡하게 새로운 이름의 법을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동성 커플에게 허용할 법적 권리의 범위를 세심하게 제한하기 위해서다. 결코 이성 커플과 동일한 지위, 설사 거의 유사한 권리를 준다고 해도 ‘결혼’이라는 그 상징적 지위만큼은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한 주장이 가족 구성의 욕망을 모두 결혼으로 환원해버리고 썩어빠진 결혼 제도를 강화시킬 뿐이라는 지적도 물론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가족 구성의 욕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친밀함의 관계는 훨씬 더 다양하지만 결혼이 지나치게 많은 특권을 움켜쥐고 친밀함을 기혼과 미혼으로만 양분해온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경제적인 특권은 유혹적이며 또한 유용하다. 유산상속권, 연금과 보험, 가족수당 등의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수급권, 주택임대차 승계권, 세금 감면, 일상적 가사 대리권 등은 행정적으로 결혼을 등록한 부부에게만 허용된다. 그리고 나아가 입양이나 인공 수정을 할 권리, 파트너가 아플 때 보호자가 될 권리, 파트너의 국적에 따라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인정받을 권리 등 가족으로서 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해나가는 데 필요한 많은 권리 역시 모두 기혼자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정부가 서민들을 위해서라며 소위 ‘생애 최초 주택 구입 자금’, 혹은 ‘근로자 서민 주택 구입 자금’ 등 영세민 전세 자금 대출 정책은 만들었지만, 자격 요건에서 정작 대출이 가장 필요할 35세 미만의 단독 세대주인 미혼 여성은 제외한 것처럼 말이다.

사랑에 빠진 두 이성은 결혼을 할 수 있지만 사랑에 빠진 두 동성은 결혼을 할 수 없다. 결혼을 선택할 권리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포함한다. 또 두 이성이 전혀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만 하면 기혼자로서의 모든 혜택을 누린다는 점에서 결혼이 친밀함을 바탕으로 하지 않음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가족의 구성 요건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와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나누는 개인 간의 약속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반드시 혈연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굴레만 벗으면, (동성 결혼 반대자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단위로서의 가족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회피하지 말자. 왜 사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권리를 결혼이 독점하고 있는가? 인간이 만든 사회적, 법적 제도로서의 가족과 결혼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 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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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Alma Soongi Beck, <사회, 문화, 시민권을 통해 본 캘리포니아의 동성 결혼 법적 투쟁>,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미간행, 2008.
http://cafe.naver.com/hopem/1158, 캘리포니아 연방법원, 동성 결혼 법적 인정 논란, 
검색일 2010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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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랍권의 두 아내 이상의 남자가 북미지역으로 이민을 올 때 아내와 아이를 동반할 수 있다. 이때 아내는 한 사람만 가능하지만 - 첫번째든,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든 남자의 선택 - 아이는 모두 데리고 올 수 있단다.
 


7. 정체성에 기반을 둔 공간 분할과 공간의 정체화

 

무지개 깃발 도난 사건의 전말

이것은 한 기이한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화여자대학교이며, 도난품은 한 장의 무지개 깃발이었다. 피해자는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이하 변날)>라는 ‘해학적’ 이름을 가진 레즈비언 인권운동 모임이다. 사건의 범인은 두 명이었다. 범행 동기를 제공한 것은 그들의 종교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의 범행은 CCTV에 의해 찍혔고 자백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명백한 도둑질임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범인들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변날’은 2003년부터 해마다 학내 동성애에 대한 인식 개선 및 교우들과의 소통을 위해 ‘레즈비언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거의 매해 섬뜩한 사건이 발생했다. 첫 해에는 동아리방에 두었던 문화제 자료집 수백 권이 사라진 채 기독교에서 쓰는 성유로 추측되는 액체가 뿌려져 있었고, 문화제를 홍보하기 위해 학교 내에 붙여둔 포스터도 모두 뜯어져 있었다. 세 번째 문화제가 열렸던 2005년에는 행사가 열리는 학생문화관에 걸어두었던 무지개 깃발을 밤사이에 도둑맞았고, 관련 대자보 17장이 모두 갈가리 찢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6가지 색깔의 무지개 깃발은 전 세계에 공통된 동성애자의 자긍심을 뜻하는 상징물로, 행사장에 무지개 깃발을 걸어두는 것은 다양성 존중과 인권 지지의 장으로 공간을 재창조하는 의미가 있다. 결국 사라진 무지개 깃발은 다음날 아침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후 레즈비언 문화제 기간이면 깃발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는 것이 ‘변날’의 관례가 되었다.  

그럼에도 3년 후인 2008년 문화제에서 또다시 무지개 깃발이 없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무지개 깃발을 가져가는 장면이 CCTV를 통해 찍혀 범인들이 교내 기독교 동아리의 회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변날’은 깃발의 반환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범인들은 반환은 할 수 없고 깃발 값만을 변상하겠다고 답했다. 이들은 물건을 훔친 것은 잘못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무지개 깃발이 “이화인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학생문화관의 전 방향에서 보이도록 걸려 있는 것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며 끝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이후 연일 대자보가 붙는 공방이 벌어졌다. 많은 이화여자대학생들이 학생문화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종교적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며,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 및 정치적 입장을 공적 공간에서 재현할 권리를 지지했다. 이 사건이 오랫동안 되풀이되어왔지만 조금도 시정되지 않은 편견과 폭력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가해자들이 반성이나 사과의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학교 당국의 태도는 기대 밖이었다. ‘변날’에서 가해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을 때, 학교 측은 도리어 ‘변날’ 회원들의 이름, 학과, 학번 등의 신상명단을 함께 내야만 사건 접수가 된다는 답변을 했다. 법원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분을 동일하게 파악하듯이 너희들도 신분을 밝히는 것이 공평하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는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상황을 이용해 아예 신고 자체를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2003년에도 학교는 같은 논리로 ‘변날’이 레즈비언 관련 행사를 열기 위해 강의실을 신청하자 대관을 불허한 적이 있다. “학내 기독교 단체의 레즈비언 활동 반대 행사를 불허했기 때문에 변날 행사를 허락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라는 중립 타령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애당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 중립이 되었을까. 

누구의 공간인가

내친 김에 하나의 사례를 더 살펴보자. 지난 6월, 미국 외교부 내 동성애자모임(GLIFAA)의 주한 미국대사관 지부가 동성애자 인권 행사를 열고 싶다며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에 연락을 해왔다. 자신들은 잘 모르니 활동가들을 좀 모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다 행사 이틀 전에 갑자기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연락을 해왔다. 사정을 들어보니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한국에서 동성애자 인권에 관해 논의하는 행사를 공공기관에서 여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여 소마미술관 대관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동성애자를 비시민으로 보는 명백한 차별 행위가 아닐 수 없기에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항의했고, 소마미술관 앞에서 동성애자 차별반대 퍼포먼스를 펼치는 등 ‘공적 공간’이 가져야 할 역할의 의미를 묻는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소마미술관에 책임을 넘겼고, 소마미술관은 이런 발언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발뺌을 했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고자질하듯 국민체육진흥공단을 탓하던 미국 대사관 주최 측마저 일이 커지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차별 발언을 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비록 책임을 추궁하는 이도, 책임을 지는 이도 없어졌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소마미술관에서는 동성애자 인권 행사가 열리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동성애자의 상징물이 걸려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던 기독교 동아리 학생들의 이유와 공공기관에서는 동성애자 인권을 논할 수 없다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논리는 결국 동성애자들이 있어야 할 공간은 따로 있다는 주장이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당시 소마미술관에서 세계적인 팝아티스트이자 동성애자였던 키스 해링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는 점은 더욱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일견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국의 특정 동성애 문화는 기꺼이 향유하면서도 한국 동성애자들이 일상에서 누려야 할 실질적인 권리는 거부한다. 내 곁에 살고 있는 가까운 동성애자를 부정하는 이 심리적 거리감은 공적 ‘공간’에서 동성애자를 지우고 배제하려는 시도들을 낳는다.

우리는 여기서 두 단계의 차별 전략을 눈치챌 수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강력한 동성애 혐오와 오랜 인종 차별의 역사를 비교해볼 때, 흑백 인종 차별이 버스와 식당까지 따로 나누게 만들었던 것처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공간 분리’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없다. 왜일까? 그것은 성정체성이 피부 색깔처럼 한눈에 구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동성애자인지를 쉽게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성애자 전용 공간을 만들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차별 전략은 동성애자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드러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이성애 중심적인 공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억압의 절차는 ‘공간 분리’보다 색출을 먼저 시도하고, 이어 퇴출(처벌, 치료나 회개 강요) 감행의 위협을 가하는 순서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색출과 퇴출에 오히려 ‘커밍아웃’으로 저항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공간의 독점은 이제 ‘일시적인 공간 할애’라는 겉으로는 다소 유연하고 진일보해 보이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봉합을 거부하라

옛날처럼 게이 바에 앉아 있다고 경찰들이 들이닥쳐 잡아가지는 않는다. 대학 역시 동성애자들에게도 동아리방을 내어주고 있고, 특별히 교내 활동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따금씩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동성애자들의 거리 행진도 열린다. 하지만 게이 바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그는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성애자로 묻혀버린다. 동아리방 안에서 누리던 자유는 동아리 방 바깥으로 새나가지 못한다. 천여 명이 넘는 동성애자들이 모였던 ‘퀴어의 거리’도 행사를 마치는 순간 뒤돌아보면, 어느새 이성애자들의 평온한 일상의 거리로 둔갑해 있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 펼쳐지던 4차원 세계가 닫히고 현실 세계가 들어서듯.

질 발렌타인은 공적 공간이 이성애 중심적으로 구축되었음을 드러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동성애자의 실천을 ‘가시성의 증가, 공적 공간의 점유, 성적 시민권에 대한 주장, 자신감의 증가’로 설명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간의 할애와 동시에 균열은 재빠르게 다시 봉합된다. 할애된 공간 외에는 접근이 금지되거나 정체성의 표현에 있어서도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묘한 봉합질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거부 역시 필요하다. 이제 낯설지만 바짝 날이 선 질문, 즉 “공적 공간은 과연 누구의 공간인가?”라는 집요한 질문은 제한적으로 공적 영역의 확보만을 허용하면서 관용인 체하는 위선을, 편견과 혐오가 휘두르는 폭력에 눈감으면서 중립인 척하는 허세를 폭로하는 저항이 될 것이다. 아이리스 영의 말대로 공적 공간이 ‘차이’와 조우하는 공간이 되려면, 먼저 ‘차이’ 자체들이 통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체성에 기반을 둔 공간 분할이 아니라 공간의 새로운 정체화다. 공간을 할당받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공적 공간의 의미와 역할을 재구성하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이 한 가지 사실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균열을 일으키는 주체는 아닐 수 있지만, 어떤 균열이 일어났을 때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지 반드시 둘 중의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 균열을 봉합할 것인지, 그 틈을 더욱 벌릴 것인지…….



*


참조

이화 변태소녀 테러 사건, 2008.
레즈비언 문화제무지개 걸개 도난 사건, 변태소녀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사람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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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잡이는 처음 시어른을 만나 밥을 먹는 것도 불편하다. 우리는 정답을 하나로 정해놓고 답을 강요하기 때문에 다른 답은 오답으로 간주한다.
 


6. 퀴어 정체성과 공간의 분열

 

공간의 이성애주의

일전에 아는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참 충격적이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어떤 스터디 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스터디 멤버들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용기를 내어서 어느 날 멤버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라면 이해해줄 것 같다는 기대가 있기도 했지만 모두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고 무덤덤하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여주는 모습에 감사와 감동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다음 모임부터는 평소에 꾹 참았던 애인 이야기나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꺼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른 뒤, 결국 그는 스터디의 다른 구성원들을 대표해서 찾아온 한 사람으로부터 경고의 말을 들어야 했다. 스터디는 공적 모임이니 너무 사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에두른 충고였다. 그분이 내게 이 일을 털어놓으며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한 부분은 그 스터디에서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어제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왜 자신의 이야기만 공과 사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였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내가 하면 공적 영역에서 친목을 다지기 위한 허물없는 대화이고, 동성애자가 하면 공적 영역을 음란하게 만드는 시답잖은 사적 대화가 된다는 말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런 일은 비단 이 스터디 그룹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2000년 9월에 있었던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엔 그가 잘못한 것은 동성애자임을 밝힌 것이 아니라 그의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에서 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았다. 즉 그가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까지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하리수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모 인터넷 방송에서 “홍석천 씨는 커밍아웃 후 방송에서 쫓겨났는데, 하리수 씨는 오히려 성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 거 같으냐?”는 질문에 하리수는 “홍석천 씨는 커밍아웃 후 호주 마디그라에 가서 게이 축제에 참여하고, 애인과 팔짱끼고 찍은 사진까지 인터넷으로 보내왔어요. 자기 성향을 밝힌 것은 용기 있어 좋다 이거에요. 하지만 사적으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제가 성전환 수술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고 화면에 밝혔다고 생각해보세요. 오히려 역반응이 나왔을 거라고 보거든요”라고 답했다.

직장 컴퓨터의 배경 화면에 가족사진을 올려놓는다고 해서 공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비난은 받지는 않는다. 하리수의 지적처럼 ‘네가 동성애자인 것은 알겠지만 사적으로 무슨 연애를 하는지까지 알리지 말라’는 것은 이성애와 동성애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술 장면과 데이트 장면이 같은 수위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가 감히 시청자에게 혐오를 조장하는가라는 책임을 씌운다. 또 앞서 스터디의 멤버들처럼 네가 동성애자인 건 괜찮으나 아직 우리는 연애 이야기까지는 낯설고 버겁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을, 자신들의 편협함을 감추려 사생활을 드러냈다는 책임으로 떠넘긴다. 여기서 핵심은 ‘동성애자의 사생활’인 것 같지만, 이는 동성애자가 어떻게 공적 공간에서 재현될 것인가의 문제다.

이는 동성애를 성애적 행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조장’할지 모른다는 공포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두 동성 커플의 모습은 음란한 성애에 빠진 괴물처럼 비친다. 그래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동성애자 차별을 합리화하려는 이들은 끊임없이 이런 주장을 되풀이한다. 이성애 규범성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공사 영역을 구별해놓았기에 ‘성애’에 불과한 동성애는 결국 어디서 어떤 형태로 있든 재현되는 순간, 공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공사 영역이 구분되는 방식 자체가 동성애자를 결코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퀴어의 공간, 저항의 공간

사회지리학자인 질 발렌타인은 “공적 공간은 일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섹슈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간주되며, 공적 공간에서 레즈비언과 게이의 성적 정체성이 수행되면 거리를 이성애적 공간으로 생산하던 방식이 균열되어 드러나기 시작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성애 중심적 사회에 균열을 내기 위해 소위 ‘퀴어 정체성’이 드러나는 공적 공간들이 어디에 있을까.      

 

 

대표적으로는 팔십여 개가 넘는 게이 바가 모여 있는 종로 낙원동 일대, 트랜스젠더 바와 게이 바가 외국인 관광특구 안에 녹아든 이태원, 예닐곱 개의 레즈비언 바들이 안착해 있는 홍대 주변 등을 떠올릴 수 있다.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 퀴어(queer)들이 깃발을 흔들고 행진하는 거리(2000년에 시작한 퀴어 퍼레이드는 그동안 대학로, 홍대 앞 사거리, 이태원, 종로 3가와 2가를 잇는 대로, 청계천 주변 도로 등에서 열렸다. 작년과 올해는 대구의 동성로에서도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퀴어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의 극장, 성적소수자 단체들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후원의 밤이나 토론회 등을 열기 위해 빌리는 공연장, 술집, 대학 강의실 등도 일시적으로 공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또 서울, 대구, 인천 등 10대 여성 동성애자들이 많이 모인다고 알려진 공원들과 10대 레즈비언들의 독특한 문화인 일일찻집(일차) 등이 열리는 공간도 상정할 수 있겠다.

사례를 좀 더 발굴해본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이슈를 담은 집회나 시위에 무지개 깃발을 들고 동참했던 장면들도 포함할 수 있다. 특히 2007년 말, 차별금지법안에서 법무부가 성적 지향 등 7개 항목을 삭제한 것에 항의하면서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벌였던 릴레이 1인 시위, 광화문 네거리 건널목에 무지개 플래카드를 내걸었던 건널목 기습 시위, 10대 동성애자들이 대학로에서 펼쳤던 플래시몹, 동성애자대학생연합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에서 펼쳤던 동성 간 키스 시위 등은 매우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펼쳐진 거리 활동이었다. 또 2008년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가 출마했던 선거구는 어떠했는가. 선거 기간 동안 골목골목을 누빈 거리 유세와 포스터의 전시, 유동 인구가 많은 곳마다 나부꼈던 플래카드 등을 통해 대대적인 가시화가 이루어졌다.

이 모든 저항과 실천들은 매우 감동적이다. 마치 투명 인간처럼 지냈던 동성애자들이 가시화되는 것은 기존의 공간이 이성애자들만의 세상이었음을 각성시킨다. 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보지 않으려 했던 것뿐임을, 이성애자는 아니지만 당신들과 다를 바 없는 같은 사람으로 우리가 여기에 있음을 외치는 것이다.    

 

 

안전한 공간은 없다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재정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거리를 민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차이를 명백히 드러낼 수 있고, 특정 사회 집단의 권리를 ‘공중’의 일부로서 정당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라는 발렌타인의 분석은 적절하다. 그렇다면 사적 공간은 어떠할까. 대표적인 사적 공간은 집이다. ‘내 쉴 곳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처럼 집은 누구에게나 ‘스위트 홈’일 거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직장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갈 곳으로 여기는 남성과 끝없는 가사 노동과 호소할 곳 없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에게 집의 의미가 다르듯, 연령, 인종, 직업, 장애 등에 따라 그 맥락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흑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가 흑백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흑인 여성에게 집은 인종주의에 맞서는 돌봄과 양육의 장소이자 공동체의 기능도 있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같은 여성이라도 피부 색깔에 따라 완전히 달라짐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에겐 어떨까. 차별과 억압을 피해 숨어들 수 있는 안전한 나만의 사적 공간이 될까.

흑인의 경우 같은 피부색을 가진 가족이 모인다는 점에서 집은 인종주의가 횡행하는 집 밖의 공적 공간보다 안전하고, 또한 지지 집단이 존재하는 공동체와 같다. 그러나 동성애자에겐 집이든 직장이든, 다시 말해 사적 공간이든 공적 공간이든 동성애자임이 발각되어서도 드러나서도 소문나서도 안 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공간이다. 애인과 즐거운 데이트를 했던, 혹은 아픈 실연의 상처를 받았던 집 앞에서 ‘정체성의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야 한다.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기대하는 이성애자로서의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은 집에 있지만 집에 ‘속하지는’ 못한다. 가족들이 지지 집단이 되는 일은 드물며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서 공격하고 억압하는 이들이 되기 쉽다. 그나마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집은 독거를 하거나 애인 혹은 동성애자 친구들과 공동체를 꾸려 독립할 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전하지 않다. 이웃들뿐 아니라 심지어 매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경비실이나 집 근처 가게 주인들의 눈치까지 살펴야 한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결코 연인 사이임을 들켜서는 안 된다. 또 정수기 관리, 도시가스 검침 등 불시에 집안으로 들어오는 외부인들과 가족이나 지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비해 커플 사진 한 장 벽에 걸어두는 것조차 어렵다. 더욱 사소하게는 연인 사이임을 들킬 만한 대화의 내용이나 호칭 등이 이웃에게 들리지 않도록 검열해야 한다.

이 구구절절한 열거는 동성애자에게 있어 모든 공간이 얼마나 쉽게 억압과 배제의 공간이 되는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것이 곧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현실을 긍정적으로 뒤집어보면, 동성애자에게 있어 매일 매일 일상의 모든 공간이 효과적인 저항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낙관적 분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실천과 저항’이라는 멋진 말에 숨은 또 다른 복병까지 분석해야 한다. 이성애 중심적인 공간에 균열을 내보지만 그 균열은 금세 또 봉합되어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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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질 발렌타인, “도시에 대한 권리?: 젠더와 공적 공간의 생산”, 한국여성학회 제25차 춘계학술대회, 미간행, 2009.
질 발렌타인, <사회지리학>, 박경환 옮김, 논형, 2009.
한채윤, “퀴어의 거리, 공간의 정치”, 한국여성학회 제25차 춘계학술대회, 미간행, 2009.
송신상훈‧한채윤, “청소년 보호를 가장한 동성애자 차별”, <시티즌>, 200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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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애자의 가족또한 냉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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