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이성애주의
일전에 아는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참 충격적이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어떤 스터디 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스터디 멤버들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용기를 내어서 어느 날 멤버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라면 이해해줄 것 같다는 기대가 있기도 했지만 모두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고 무덤덤하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여주는 모습에 감사와 감동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다음 모임부터는 평소에 꾹 참았던 애인 이야기나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꺼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른 뒤, 결국 그는 스터디의 다른 구성원들을 대표해서 찾아온 한 사람으로부터 경고의 말을 들어야 했다. 스터디는 공적 모임이니 너무 사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에두른 충고였다. 그분이 내게 이 일을 털어놓으며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한 부분은 그 스터디에서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어제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왜 자신의 이야기만 공과 사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였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내가 하면 공적 영역에서 친목을 다지기 위한 허물없는 대화이고, 동성애자가 하면 공적 영역을 음란하게 만드는 시답잖은 사적 대화가 된다는 말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런 일은 비단 이 스터디 그룹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2000년 9월에 있었던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엔 그가 잘못한 것은 동성애자임을 밝힌 것이 아니라 그의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에서 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았다. 즉 그가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까지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하리수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모 인터넷 방송에서 “홍석천 씨는 커밍아웃 후 방송에서 쫓겨났는데, 하리수 씨는 오히려 성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 거 같으냐?”는 질문에 하리수는 “홍석천 씨는 커밍아웃 후 호주 마디그라에 가서 게이 축제에 참여하고, 애인과 팔짱끼고 찍은 사진까지 인터넷으로 보내왔어요. 자기 성향을 밝힌 것은 용기 있어 좋다 이거에요. 하지만 사적으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제가 성전환 수술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고 화면에 밝혔다고 생각해보세요. 오히려 역반응이 나왔을 거라고 보거든요”라고 답했다.
직장 컴퓨터의 배경 화면에 가족사진을 올려놓는다고 해서 공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비난은 받지는 않는다. 하리수의 지적처럼 ‘네가 동성애자인 것은 알겠지만 사적으로 무슨 연애를 하는지까지 알리지 말라’는 것은 이성애와 동성애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술 장면과 데이트 장면이 같은 수위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가 감히 시청자에게 혐오를 조장하는가라는 책임을 씌운다. 또 앞서 스터디의 멤버들처럼 네가 동성애자인 건 괜찮으나 아직 우리는 연애 이야기까지는 낯설고 버겁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을, 자신들의 편협함을 감추려 사생활을 드러냈다는 책임으로 떠넘긴다. 여기서 핵심은 ‘동성애자의 사생활’인 것 같지만, 이는 동성애자가 어떻게 공적 공간에서 재현될 것인가의 문제다.
이는 동성애를 성애적 행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조장’할지 모른다는 공포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두 동성 커플의 모습은 음란한 성애에 빠진 괴물처럼 비친다. 그래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동성애자 차별을 합리화하려는 이들은 끊임없이 이런 주장을 되풀이한다. 이성애 규범성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공사 영역을 구별해놓았기에 ‘성애’에 불과한 동성애는 결국 어디서 어떤 형태로 있든 재현되는 순간, 공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공사 영역이 구분되는 방식 자체가 동성애자를 결코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퀴어의 공간, 저항의 공간
사회지리학자인 질 발렌타인은 “공적 공간은 일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섹슈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간주되며, 공적 공간에서 레즈비언과 게이의 성적 정체성이 수행되면 거리를 이성애적 공간으로 생산하던 방식이 균열되어 드러나기 시작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성애 중심적 사회에 균열을 내기 위해 소위 ‘퀴어 정체성’이 드러나는 공적 공간들이 어디에 있을까.
대표적으로는 팔십여 개가 넘는 게이 바가 모여 있는 종로 낙원동 일대, 트랜스젠더 바와 게이 바가 외국인 관광특구 안에 녹아든 이태원, 예닐곱 개의 레즈비언 바들이 안착해 있는 홍대 주변 등을 떠올릴 수 있다.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 퀴어(queer)들이 깃발을 흔들고 행진하는 거리(2000년에 시작한 퀴어 퍼레이드는 그동안 대학로, 홍대 앞 사거리, 이태원, 종로 3가와 2가를 잇는 대로, 청계천 주변 도로 등에서 열렸다. 작년과 올해는 대구의 동성로에서도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퀴어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의 극장, 성적소수자 단체들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후원의 밤이나 토론회 등을 열기 위해 빌리는 공연장, 술집, 대학 강의실 등도 일시적으로 공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또 서울, 대구, 인천 등 10대 여성 동성애자들이 많이 모인다고 알려진 공원들과 10대 레즈비언들의 독특한 문화인 일일찻집(일차) 등이 열리는 공간도 상정할 수 있겠다.
사례를 좀 더 발굴해본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이슈를 담은 집회나 시위에 무지개 깃발을 들고 동참했던 장면들도 포함할 수 있다. 특히 2007년 말, 차별금지법안에서 법무부가 성적 지향 등 7개 항목을 삭제한 것에 항의하면서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벌였던 릴레이 1인 시위, 광화문 네거리 건널목에 무지개 플래카드를 내걸었던 건널목 기습 시위, 10대 동성애자들이 대학로에서 펼쳤던 플래시몹, 동성애자대학생연합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에서 펼쳤던 동성 간 키스 시위 등은 매우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펼쳐진 거리 활동이었다. 또 2008년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가 출마했던 선거구는 어떠했는가. 선거 기간 동안 골목골목을 누빈 거리 유세와 포스터의 전시, 유동 인구가 많은 곳마다 나부꼈던 플래카드 등을 통해 대대적인 가시화가 이루어졌다.
이 모든 저항과 실천들은 매우 감동적이다. 마치 투명 인간처럼 지냈던 동성애자들이 가시화되는 것은 기존의 공간이 이성애자들만의 세상이었음을 각성시킨다. 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보지 않으려 했던 것뿐임을, 이성애자는 아니지만 당신들과 다를 바 없는 같은 사람으로 우리가 여기에 있음을 외치는 것이다.
안전한 공간은 없다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재정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거리를 민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차이를 명백히 드러낼 수 있고, 특정 사회 집단의 권리를 ‘공중’의 일부로서 정당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라는 발렌타인의 분석은 적절하다. 그렇다면 사적 공간은 어떠할까. 대표적인 사적 공간은 집이다. ‘내 쉴 곳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처럼 집은 누구에게나 ‘스위트 홈’일 거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직장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갈 곳으로 여기는 남성과 끝없는 가사 노동과 호소할 곳 없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에게 집의 의미가 다르듯, 연령, 인종, 직업, 장애 등에 따라 그 맥락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흑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가 흑백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흑인 여성에게 집은 인종주의에 맞서는 돌봄과 양육의 장소이자 공동체의 기능도 있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같은 여성이라도 피부 색깔에 따라 완전히 달라짐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에겐 어떨까. 차별과 억압을 피해 숨어들 수 있는 안전한 나만의 사적 공간이 될까.
흑인의 경우 같은 피부색을 가진 가족이 모인다는 점에서 집은 인종주의가 횡행하는 집 밖의 공적 공간보다 안전하고, 또한 지지 집단이 존재하는 공동체와 같다. 그러나 동성애자에겐 집이든 직장이든, 다시 말해 사적 공간이든 공적 공간이든 동성애자임이 발각되어서도 드러나서도 소문나서도 안 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공간이다. 애인과 즐거운 데이트를 했던, 혹은 아픈 실연의 상처를 받았던 집 앞에서 ‘정체성의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야 한다.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기대하는 이성애자로서의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은 집에 있지만 집에 ‘속하지는’ 못한다. 가족들이 지지 집단이 되는 일은 드물며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서 공격하고 억압하는 이들이 되기 쉽다. 그나마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집은 독거를 하거나 애인 혹은 동성애자 친구들과 공동체를 꾸려 독립할 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전하지 않다. 이웃들뿐 아니라 심지어 매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경비실이나 집 근처 가게 주인들의 눈치까지 살펴야 한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결코 연인 사이임을 들켜서는 안 된다. 또 정수기 관리, 도시가스 검침 등 불시에 집안으로 들어오는 외부인들과 가족이나 지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비해 커플 사진 한 장 벽에 걸어두는 것조차 어렵다. 더욱 사소하게는 연인 사이임을 들킬 만한 대화의 내용이나 호칭 등이 이웃에게 들리지 않도록 검열해야 한다.
이 구구절절한 열거는 동성애자에게 있어 모든 공간이 얼마나 쉽게 억압과 배제의 공간이 되는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것이 곧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현실을 긍정적으로 뒤집어보면, 동성애자에게 있어 매일 매일 일상의 모든 공간이 효과적인 저항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낙관적 분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실천과 저항’이라는 멋진 말에 숨은 또 다른 복병까지 분석해야 한다. 이성애 중심적인 공간에 균열을 내보지만 그 균열은 금세 또 봉합되어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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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질 발렌타인, “도시에 대한 권리?: 젠더와 공적 공간의 생산”, 한국여성학회 제25차 춘계학술대회, 미간행, 2009.
질 발렌타인, <사회지리학>, 박경환 옮김, 논형, 2009.
한채윤, “퀴어의 거리, 공간의 정치”, 한국여성학회 제25차 춘계학술대회, 미간행, 2009.
송신상훈‧한채윤, “청소년 보호를 가장한 동성애자 차별”, <시티즌>, 200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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