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편의 내용으로서의 '모성' 정치와 엄마 구청장

   

3초의 시간

여기 한 후보가 있다. 그가 길가는 사람에게 얻어낼 수 시간을 3초라고 해보자. 이 3초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길어봤자 두 문장을 말할 수 있다. 인지도를 높이는 건 선거 후보들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므로, 첫 번째 문장에서는 우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야 한다. (“기호 〇번 아무개입니다.”) 자, 그럼 두 번째 문장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인지도·호감도가 합쳐져 지지율을 높인다고 했을 때 승패는 이 두 번째 문장에 달려 있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의 흥미를 끌고 호감을 얻기 위해서 보통 상대방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한다. 많은 후보들은 이 두 번째 문장에 가족관계를 지시하는 단어를 넣거나 정당 이름을 강조하며 자신의 소속을 소개한다. (“〇〇의 아들”, “☐☐가 낳은 장한 딸”, “대통령과 함께 경제 기적을”, “~처럼 일하겠습니다.”) 

 

 

2008년 종로구 국회의원 박진의 선거현수막 
 


종로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최현숙의 경우, 유권자를 직접 만나는 이 3초의 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두 문장이 늘 문제였다. 이전에 살던 지역에서 십 수 년간 활동하여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쌓았지만 이혼과 커밍아웃은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한 최현숙은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가족과 지역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다시피 했다. (최현숙은 그 때의 일을 두고 “뿌리 뽑혔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현숙의 출마는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정상’가족 중심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지역 정치가 과연 가능한가를 묻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기반이 허약한 한국 사회에서 최현숙이 ‘정상’가족과 정상가족 중심의 지역 공동체를 경유하지 않고 선거 과정에서 조금 더 오래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독신이라 해도 이성애자라면 언젠가는 가족에 편입되어 누군가의 사위이자 며느리가 될 수 있다고 상상이 되지만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가족 중심주의는 재현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현행 선거법에서 후보를 제외하고는 오직 가족만이 명함을 대신 돌릴 수 있는 것도 선거 제도의 가족 중심주의 중 하나이다. 
 

보통 ‘엄마’들의 대표

이렇듯 지역 사회에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일이 곧 지역 사회의 ‘보통’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의 빠른(어쩌면 유일한) 길일 때, ‘보통’ 여자들의 대표가 되기 위한 보편주의적 운동 방향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짐작대로, 바로 ‘엄마’였다.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은 1996년 3%, 2000년 5.9%에서 2004년 17대 국회부터 13%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7대 국회에는 총 299명의 의원 중 39명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었다(비례:30명, 지역:9명). 2008년 18대 국회의 여성 국회의원 수는 41명(비례:28명, 지역:13명)으로 전대에 비해 단 2명 증가하는데 그쳤지만,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여성들이 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2008년 당시 지역구 선거에 도전한 여성 후보는 2004년 66명에서 132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직 지역구에서 여성 정치인이 넘어야할 벽은 높다고 볼 수 있다. 정당 지지율을 바탕으로 하는 비례 대표는 성별, 지역, 장애 여부 등의 차이에 따라 비례 후보의 순위를 결정한다. 최대한 다양성을 확보하여 대표성의 외연을 넓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내 비례 명부를 통해 선출된 비례 후보는 정당 내 기여도와 인지도를 바탕으로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대변하고 있는 집단을 대표할 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직접 유권자의 표심을 통해 결정되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및 의원은 당내 정치적 역학을 견제할 수 있는 소위 대중의 힘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지역 사람들에게 표를 얻는 선거에서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구 선출직 의원에 도전하는 여성 정치인들은 차이에 기반을 둔 비례 후보의 대표성과는 달리, 여성으로서 얼마나 ‘보통’이라는 범주의 실천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가족의 새로운 대표로서의 엄마, 즉 ‘모성 정치’로 갈음된 이유였다.  

여기에서 ‘모성’(mothering)은 페미니즘에서 매우 논쟁적인 화두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는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성 역할을 생물학적인 운명으로 고착시키며 여성을 하나의 성 계급으로 만든다고 보고 ‘어머니 노릇’으로부터의 해방을 페미니즘의 주요 과제로 삼는다. 한편 문화적 페미니즘에서는 대안적 가치로서 모성의 의미를 강조한다. ‘모성’ 경험이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다시 해석될 필요가 있으며, ‘모성적 가치’가 사회 전체의 핵심 작동 원리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모성적 가치를 바탕으로 할 때 경쟁적이고 자율적인 남성 중심적인 자아관념이 해체되고 상보적이고 관계적인 자아관념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성’은 여성 특유의 경험이지만 인간 모두와 관계되었다는 점에서 여성 중심적인 새로운 보편의 가능성으로 제기될 수 있었다. ‘모성’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강조하고, ‘보통’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며, ‘모성적 가치’라는 차원의 대안적 여성 정치 내용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성적 보편을 구성하는 언어로 선택되었다. 
 

모성 정치와 ‘엄마 구청장’

돌봄, 상생, 살림을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가치로 강조하는 전략은 한국의 진보 여성운동 진영에서 끼워 넣기가 아니라 새 판짜기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2000년 이후부터 꾸준히 주장되었다. 또한 2005년 합계 출산율이 1.08이라는 통계청의 발표 이후 인구 감소와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가시화되었던 것도 ‘모성 정치’라는 슬로건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근거 중 하나였다. 이런 사회적 맥락 속에서 2006년의 지방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구 열린우리당)의 여성 조직과 진보 여성운동 진영의 합의 하에 ‘모성 정치 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1월 22일 한겨레신문은 “여성 정치인 리더십, ‘남성형’에서 ‘엄마형’으로”라는 표제를 단 기사를 발표하며 새로운 여성 리더십이 더 이상 남자 같은 여자가 아니라 부드럽게 보살피는 ‘엄마형’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모성 정치를 내세운 대표적 문구

 

그리고 급기야 2010년 지방 선거에서는 구청장 후보로 나선 여성후보들이 모성 정치를 다시 대중 언어로 풀어낸 ‘엄마 구청장’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나 육아부터 가사 노동, 간병에 이르기까지 사회 안전망의 대부분을 이미 어머니들의 너무 많은 돌봄 노동으로 해결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모성 정치’ 선언과 ‘엄마 구청장’이라는 구호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보다는 ‘엄마 노릇’의 피곤한 현실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선거 당시 내가 사는 지역에도 예비 후보로 ‘엄마 구청장’ 현수막이 걸렸는데, 이를 본 동네의 중년 여성들은 “아니 엄마가 얼마나 바쁜데 구청장 노릇 할 시간이 있어?”라며 ‘엄마’ 정치인의 등장에 실소를 보냈다. 사회적 맥락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선언만 존재한 모성 정치 선언이 정상가족 중심적이고 성별 분업을 지지하는 구시대적인 낡은 언어로 비춰진 셈이다.  

남성 중심적인 대의제 내에 여성들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정은 여성 대표가 더 청렴하고 도덕적이며 공동체에 헌신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기대는 여성이 가진 도덕성의 특징이나 본질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지속되어온 남성 엘리트집단 사이의 부당하고 불공정하고 부패한 정치 문화에 여성들이 비교적 덜 노출되어 있다는 경험적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모성 정치와 엄마 정치인이라는 수사를 통해 새로운 여성적 보편의 언어를 만들려고 한 시도들을 원래의 의도처럼 본질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공적 담론에 기입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성 연대(old boys network) 바깥에 있다는 것은 (기존의) 권력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성들이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상의 양적 변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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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중 잣대와 재현의 문제

   

이중 기준을 통과하기

여자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잣대는 이중적이다. 공적 영역에 도전하는 여성은 여성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과 싸우면서 동시에 여성에게 더 엄격하게 세워진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여성은 능숙하면서 동시에 호감 가는 인물로 보이기 어렵고, 리더로서의 자질을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이는 여자 대표와 남자 대표를 겨루는 평가 자체가 여성에게 이중 구속(double-bind)적이기 때문이다. 책임감 있고, 신중하며, 타인의 의견을 잘 듣는 것과 같은 자질에 대해 대중들은 남자 대표에게는 리더의 자질이 있고, 책임감 있다(take-charge)고 평가하는 반면, 여자 대표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저 조심스러운 (take-care) 행동으로 이해한다. (Catalyst, The Double-Bind Dilemma for Women in Leadership: Damned if You Do, Doomed if You Don’t, 2007 July, 7쪽)  


     


<The Double-Bind Dilemma for Women in Leadership>의 표지
이미지 출처: www.catalyst.org
 


또한 여자 정치인들은 위기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지 늘 의심받는다. 남자 정치인의 눈물은 인간적인 공감을 자아내지만 여자 정치인의 눈물은 유악함의 징표가 된다. 한편, 감정 통제를 잘 하는 여자 정치인들을 칭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여성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들은 남자보다 더 남자 같으며 여자로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철의 여인’들로 불린다. 여자 정치인에게 대중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철의 여인도 유약한 여자도 아니다. (어쩌란 말인가!)

2008년 예비 선거에서 힐러리는 “자신이 유권자의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 줄 수도 있는 사람인 동시에 이란의 핵무기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힐러리가 남자처럼 행동하건 여자처럼 행동하건 간에 유권자들은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했고, 솔직하지 않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이 힐러리에게 놓인 과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힐러리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 어떤 전형성에도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의 예외였다는 데 있다. 이중 기준에 지칠 대로 지친 힐러리는 거의 패색이 완연할 무렵 우연히 한 유권자 앞에서 눈물을 비추었다. 
눈동자에 맺힌 힐러리의 눈물을 포착한 미디어는 이 눈물로 인해 힐러리의 패배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뉴햄프셔의 여성 유권자들 중 절반이 힐러리의 눈물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눈물이 ‘약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읽혀졌던 것이다. 힐러리는 뉴햄프셔의 승리 연설에서 “(드디어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다”라고 말했다. (디디 마이어스, 윤미나 옮김, <우머노믹스>, 비즈니스맵, 2009, 68-73쪽 참고.) 
  

여성 재현의 문제

대표로서의 여성이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길은 험난하다. 징표적 대표에 머무를 수도 없고, 이중 구속도 통과해야 하며, 평범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평범한 보통 여성들을 대변해야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성 정치인 중 이러한 이중 구속에 곤란을 겪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강금실이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강금실은 최초의 법무부장관이라는 이력을 바탕으로 ‘따뜻한 카리스마’, ‘매혹의 카리스마’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상대편 진영에서는 강금실의 대항마로 오세훈을 선택했다. 오세훈은 ‘부드러운 남성’으로 이미지화되었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의 강금실 후보와 오세훈 후보
이미지 출처: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055&code=113
 

두 후보 모두 기존의 전형적인 젠더 표현과는 다른 이미지를 표방하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두 후보의 젠더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오세훈은 두 딸과 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키며 부드럽고 가정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여성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강금실 역시 ‘따뜻한 카리스마’라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자질을 표현했다. 하지만 오세훈이 부드러움을 강조하며 남성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여성 친화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성공한 것과 같은 방법이 강금실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다. 카리스마와 능력을 강조하면 남성적으로 보이고, 여성적 매력을 강조하면 다른 여성들과의 차이가 부각되었다.      

 

   
 

“평소 여성지에 소개될 때 오세훈 씨는 항상 부인, 두 딸과 함께 사진을 찍는데 굉장히 가정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저 사람이라면 여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겠구나, 저런 사위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반면에 강금실 후보는 남자들에겐 여성적인 매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여자들이 보기엔 남성적인 면이 강해요.” - (<뉴스메이커>, 2006년 6월 16일, 한 전문직 여성의 인터뷰 재인용)

 
   

 

인용한 전문직 여성의 말처럼, 오세훈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가부장제라는 사회에 대해 저항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에서 협상하는 여성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게 최적화된다. 반면 강금실은 여성들에게 ‘더 나은 이미지’를 가진 여성이기는 하나 협상하고 순응하는 여성들의 욕망과는 배치되는 존재이다. 이혼한 여성, 아이 없는 여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으로 성공한 여성으로서의 강금실은 20~30대 독신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존재이나,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경쟁의 대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잔나 D. 월터스는 “더 많은 여성, 더 나은 이미지가 우리의 문화적 지평을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가부장적 시각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그러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데 관여한 의미화 과정의 심층적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못한다”라고 지적한다. (수잔나 D. 윌터스, 김현미 옮김,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여성들>, 또하나의 문화, 1999, 67쪽) 
 

이미지 통제의 실패

강금실은 ‘더 나은 이미지’ 혹은 ‘다른 이미지’를 가진 것만으로는 오세훈의 이미지 정치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미 여성 자체가 성적 타자로서 문화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름’은 여자라는 문화적 관념 속에서 차이로서 인식된다.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다르게 살고 있는 여성들이 자기 이미지를 원하는 방식대로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용산 재개발 계획을 설명하는 강금실
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 


그 결과, 강금실의 선거 전략은 매우 극단적인 이중성을 띠게 되었다. 선거 초기에 보육·교육·문화·복지에 중점을 두고 ‘생활 정치’를 표방한 것은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경쟁적 담화와 선거라는 게임의 법칙에 익숙한 사람들은 생활 정치라는 의제(agenda)는 선거용이 아니라고까지 단언했다. 심지어 이런 정책들은 선거라는 경쟁적 상황에 익숙하지 않고 선출직 경험이 없는 강금실의 아마추어리즘을 대변한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선거용으로 적합하고, 표에 도움이 된다고 가정된 기준에 적합한 몇 가지 쟁점들이 다시 선택된다. 그것은 ‘중심적’이고, ‘거대하며’, ‘여성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규모 도시계획 프로젝트인 "역사문화도시 서울"과 "용산 플랜", "서울광장 조성" 등이었다. 이후 이 플랜은 상대 후보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여 선거가 끝날 때까지 용산 플랜의 구체적인 숫자를 검증해야 했다. 이후 강금실은 다시 “교육과 보육, 복지”로 정책의 핵심 쟁점을 재구성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를 놓친 터였다.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와 이미지 통제의 실패가 불러온 혼선이 빚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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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징표(scalp/stigma/token)적 대표성의 위험

   

유엔 성별권한척도(GED)에 따르면 한국은 2009년 전체 109개국 중 61위이다. (같은 해 GDP 순위는 15위다.) 경제 성장과 법 제도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성권한척도가 낮은 이유는 정치·경제의 상위 5% 집단에서 남성 중심성이 여전히 완고하기 때문이다. (각국의 여성 의원에 대한 현황은 다음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ipu.org/wmn-e/classif.htm)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시민들의 직접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의 경우 아예 대표성의 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명박 정부는 여성이 과소 대표되고 있다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정권의 임명직 여성 장관의 비율은 역대 어떤 ‘문민’ 정권보다도 더 낮다. 이 정권은 이미 치러진 선거의 법적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 대표성 자체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뽑혔다.  

 


  1932년 히틀러의 선거 포스터
이미지 출처: http://rexcurry.net/socialist-propaganda/posters1.html
 


대의제 선거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유일한 방책도, 민주주의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그릇도 아니다. 대의제 선거가 ‘민주주의’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대표성의 위기’에 대한 내적 긴장이 살아 있어야만 한다. 대의제 선거는 다수결의 승리가 아니라 언제나 국민 안에 소수자와 반대자의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정치적 형식이다. 따라서 대표성의 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동안 배제되어 있던 집단이 대표성의 문제를 제기하며 권력 배분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표성의 문제를 환기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충분히 대표되지 않았다는 선언과 주장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으로서 명백히 민주주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타자로서 배제되어온 집단이 처음으로 대표성을 획득하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상징적인 징표로서만 머물게 될 위험을 안게 된다. 
 

징표로서 타자화된 여성

특히, 성적 타자로서의 여성은 그 가시성으로 인해 언제나 징표가 되는 위험에 처한다. (단 한 명의 여성이 얼마나 눈에 잘 띄는 존재겠는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징표(scalp: 승리의 징표로 챙기는 머리 가죽 벗기기 풍습에서 유래된 말이다)가 된다는 것은 매개이자 전리품을 뜻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나눠가지는 반지, 산 정상에 올라가서 꽂는 깃발,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메달 같은 것이 이러한 종류의 징표다. 이때 징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사랑, 승리, 성취) 등을 눈에 보이는 사물(반지, 깃발, 메달)로 변환시켜 간직하도록 해주는 상징적 역할을 한다. 부족 간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성을 교환할 때 여성은 곧 평화를 상징하는 전리품, 즉 징표가 된다.

그러나 약속이 깨지는 순간 징표의 의미는 변한다. 자민족 여성의 비극적 죽음, 강간, 고난은 곧 깨진 약속의 증거로서 제시된다. 이때 여성은 희생자로 징표(stigma: 소나 말에게 불도장을 찍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더럽혀진 명예를 뜻한다)된다. 공동체의 타자였던 여성이 가장 숭고한 국민으로 통합되는 순간은 그녀가 명백히 외부에 의해 죽음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했을 때이다.
한편, 희생자로서의 징표(stigma)가 아니라 공동체를 직접 위기에서 구하는 징표적 대표로서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프랑스의 구국 영웅 잔 다르크나 3·1운동의 징표 유관순처럼 말이다.  


 

잔다르크
이미지 출처: http://www.biographyonline.net

유관순
이미지 출처: http://www.yugwansun.com
 


한명숙 여성 총리의 탄생 역시 참여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때 징표(token: 명목상의 표식, 화폐라고 ‘치는’ 것들,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있는 자리에 끼워 넣는 것 등을 의미한다)적 대표가 되는 것은 민족 혹은 국가의 대표로서의 상징적 표식이 되는 것이다. 국가와 공동체의 위기는 그동안 배제되었던 타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작동한다. 징표적 대표는 국가를 ‘대표한다고 치는’ 것, 위기의 순간이기 때문에 명목상 대표 자리를 넘기는 것, 혹은 성차별의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치기’ 위해 끼워 넣는 것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위기 순간이 지나면 다시 징표적 대표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스피박의 말대로, “하나의 <징표(token)>로서 비추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침묵당하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입장에 처해진다는 것은 지배권이 행하기 쉬운 동질화와 일맥상통하면서, 그 말하기를 듣고 있는 지배권의 청중들은 그 징표적 입장이 대변하고 있는 그룹의 관심사를 모두 포함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야트리 스피박, 태혜숙 옮김, 《다른 세상에서》, 여이연, 2003, 61쪽) 
 

최초의 여성, 최소한의 여성

어떤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징표(token)적 대표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 예외적인 인물들은 성차별주의가 “사라졌다고 치자”는 징표적 증거로서 제시된다. 지금까지 배제되어왔던 사람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성취되었다는 ‘징표’가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성취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지금까지 게임의 규칙이 불평등했다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등장인물이 민주주의의 성취에 대한 징표에 머물게 될 때, 이는 관용을 베푼 지배자의 알리바이로 작동하며 지배의 규칙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정치에서의 성차별이 사라졌다는 증거가 될 리 만무하다. 오히려 박근혜가 여성 대통령이 되는 순간, 오히려 여성이 정치에서 과소 대표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은 비판의 힘을 잃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여자가 대통령도 하는 시대인데, 뭘 더 바라냐?”) 이것이 여성이 징표적 대표에 머물게 되었을 때 전형적으로 생겨나는 위험 중 하나다.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
 


또한 최초의 여성은 자칫 최소한의 여성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레나토 로살도는 예전에 제외시켰던 범주의 사람들인 비유럽, 유색 인종, 여성과 같은 이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 이들에게 “들어와서 앉아, 단 너는 우리 규범을 준수한다는 조건으로 여기 있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이들에게 임시적으로 일회적인 영주권만을 발급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기존의 규칙에 따를 수 있는 위치 자체가 특권적이라는 점을 무시하며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급히 내보내는 회전문”에 불과하다. (레나토 로살도, 권숙인 옮김, 《문화와 진리》, 아카넷, 2000, 10쪽) 최초의 여성이 징표적 대표에 머물러 기존의 규칙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이 최초의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은 최소한도로 좁혀진다. 즉 성차만 제외하고는 모든 자격을 갖춘 여성들로 말이다. 지난 30년간 76명의 대법관의 98%는 남성들이었다. 75%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다. 2명의 여성 대법관 역시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이 여성들은 성차가 ‘아니었다면’ 정당하게 기용될 만한 인물들, 즉 성차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는 않는 자격을 갖춘 인물이다.

즉 성차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성차를 ‘없는 걸로 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여성들은 결코 성적 타자로서의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때문에 대표자로서의 여성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것이 여성 집단 전체의 권한이 강화되는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최초의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을 비롯하여, 최초의 여성 총리의 한명숙 등의 등장은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성별의 벽이 점차 깨어지고 있다는 상징으로 자주 인용되었지만, 과연 한국 여성들의 처지가 이 최초의 여성들이 유리 천장을 깬 이후에 더 나아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여성의 비정규직화는 더욱 가속되고 있고 빈곤은 여성화되고 있다. 몇 명의 여성들이 징표적 대표성을 가지는 것은 여성‘도’ 대표가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될지 몰라도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 중심적으로 분리된 ‘공적’ 영역에서 과연 여성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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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자는 여자로서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여자의 자격: 지우마와 힐러리의 젠더트러블

2010년 11월 브라질에서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전 8년간 집권했던 노동당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지우마의 탄탄한 공직 경력을 바탕으로 거둔 승리였다. 무엇보다도 지우마는 브라질에서 공화정을 도입한 이후 122년 만에 탄생한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지우마는 반대파로부터 두 가지 종류의 공격을 받았다. 하나는 그녀는 룰라의 꼭두각시라는 흑색선전이었다. (룰라가 부패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녀가 보여준 ‘의리’가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여성 문제였다. 브라질은 인구의 70% 이상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다. (주지하다시피 카톨릭은 낙태와 이혼 문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사회민주당(이 보수파라니 놀라운 일이지만)이 주축이 된 반대파에서는 지우마의 두 번의 이혼 경력을 문제 삼고 낙태에 대한 입장을 심문했다. 선거 초반 지우마는 낙태하는 여성을 처벌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반대편이 그녀에게 ‘죽음의 사도’라는 별칭을 붙이며 집중 공세를 펼치자 그녀는 낙태 반대로 입장을 선회한다. 또한 건장한 체격과 바지를 즐겨 입는 패션센스를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젠더 표현은 종종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20대에 무장 게릴라 활동으로 감옥에 가서 고문을 견뎌냈던 지우마에게 이런 조롱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의 36번째 대통령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가 겪은 젠더 갈등은 2008년 민주당의 대권 후보에 도전한 힐러리 클린턴에 비하면 약과였다. 지우마가 주로 카톨릭 교회와 손잡은 보수파 남성들로부터 공격받았다면, 힐러리를 가장 괴롭힌 건 반대파 여자들이었다. 힐러리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쿠키는 잘 못 굽지만 정치와 법 같은 다른 일은 잘해요”라고 한 말은 전업주부들의 분기를 일으켰다. 나중에 힐러리는 쿠키를 굽는 모습을 보이며 이들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한번 돌아선 남부의 여심은 좀처럼 힐러리에 대해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고,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늘 하마평에 올랐다.  

하지만 힐러리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 그룹 역시 여자들이었다. 모금부터 홍보, 조직에 이르기까지 힐러리를 돕는 탄탄한 여성 조직은 그녀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평가된다. (2008년 힐러리 대선 캠프의 총지휘자는 패티 솔리스 도일이었다. 그녀는 미 대선 캠프 총지휘자가 된 최초의 히스패닉 여성이기도 하다.) 힐러리의 삶은 그 자체로 여성의 사회 활동과 정치 참여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입장으로 비춰졌으므로 힐러리에 대한 지지/반대/유보 등을 결정하는 것은 곧 여성주의 이슈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힐러리에 대한 미국 여성들이 복잡한 심경에 대해서는 30여명의 여성 저널리스트와 작가, 페미니스트 등의 글을 모은 이 책을 추천한다. 수잔 모리슨 외, <힐러리 미스터리>, 유숙렬‧이선미 역, 미래인, 2008)

남자들이 힐러리에게 가진 반감은 무의식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거의 공포심에 가까운 형태로 드러났다. 2008년 오바마와의 민주당 대선 후보를 놓고 경쟁할 때 등장한 ‘힐러리 호두까기 인형’은 힐러리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상품화한 가장 재치 있는 농담 중 하나로 회자된다. (이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 인형의 바짓가랑이 사이에 호두를 넣으면 호두가 분쇄된다! 호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힐러리 호두까기 인형 (nutcracker)
 

 
이 대단한 여성들이 ‘보통’ 여자를 대표할 수 있을까

힐러리와 지우마 모두 미국의 민주당과 브라질의 노동당을 대표할 만한 자격을 갖춘 후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과연 이 남성 중심적인 엘리트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여성들이 ‘보통’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성과 대표성을 둘러싼 재현의 문제가 미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지만 우리는 그녀의 생물학적 성차가 정치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박근혜를 최초의 여자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잠시 나온 적도 있지만, 박근혜가 여성 문제에 대한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불명확하다. 박근혜는 여자지만, ‘여성 정치’인은 아니다. 물론 여성 문제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성 대표성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힐러리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여성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생각하며 환호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힐러리가 전업주부를 깎아내린다며 적대한다.

자유민주주의 선거제도에서의 ‘대표’(Representative)란 언제나 보편과 특수라는 이중적인 위치를 넘나드는 운동을 필요로 한다. 선출직 대표는 대중들의 대리인이라는 점에서 대중들 중 한 명으로 환원 가능한 ‘보통’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출직 대표는 그 자리의 유한성 때문에 그 자신의 특이성, 즉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차이를 강조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명박 정부가 선택한 인사들 대부분이 고소득 강남 부자이며 더구나 특정 교회 출신이라는 사실은 대표성의 위기를 불러일으켰지만,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통해 위기의 불꽃은 종종 진화되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중 한 명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당대 최고의 정치‧군사 엘리트였지만 ‘보통’ 사람이라는 수사로 당선되었다. 진짜 보통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 보통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대의민주제에서의 기대되는 대표성의 핵심이다.

대표에게 기대하는 대중들의 이중 심리는 혹자들이 말하듯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대의민주제에 내재된 모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자만이 대표성의 위기를 겪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대표성의 문제는 그동안 남성들에 의해 여성이 대표되어 왔으며 여성은 언제나 차이화된 기표로서 드러나 왔다는 점에서 더욱 심층적인 위기를 내포한다. 더구나 과소 대표되어 있는 소수의 여성 정치인들에게 과도한 징표적 상징성(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여성 총리 등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현실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차이를 끝없이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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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글을 열며

   

PC통신 시절부터 아고라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와 관련된 논쟁은 늘 동성애 자체에 대한 허용과 금지를 결정하는 판관들의 잔치였다. 가끔 용감하게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며 동성애를 두고 찬반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동성애를 극렬하게 싫어하는 몇몇 이들은 기어이 찬반의 문제로 이야기를 끌어가곤 했다.

그런데 2008년 레즈비언 최현숙이 종로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하고 선거 운동을 시작한 이후에 재미있는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최현숙의 커밍아웃과 출마 선언은 포털 사이트 <다음>의 실시간 검색어 2위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나는 최현숙의 선거 운동 본부에서 정책을 만드는 일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기사와 댓글, 게시판 등을 모니터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관련 기사의 댓글 분위기는 이전의 동성애 찬반 논쟁과는 좀 달랐다. 아주 극렬하게 혐오감을 표하는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동성애자와 같은 성소수자가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이 등장했다. 유사한 질문이 후보가 속해 있던 진보신당의 내부 게시판에서도 나왔다. 최현숙이 커밍아웃 하는 건 관계없지만 이제 막 탄생한 진보신당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이 동성애자인 건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만약 최현숙의 출마와 커밍아웃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동성애자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왜 굳이 커밍아웃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사적인 것으로 공직 후보의 자격과는 관계없는데 왜 굳이 밝히느냐며 의아해하는 이도 있었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2009> 감독: 홍지유, 한영희
이미지 출처: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rainbowact/
 


찬반 논쟁이 언제나 편 가르기와 증오만을 남기는 반면 이런 논쟁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민주주의 아닌가. 바우만은 민주주의는 결국 사적인 문제가 공적 문제로 변환되고 공공 안녕이 사적 기획과 과제로 변형되는 지속적인 번역 과정이 실행되는 것이며 이 과정이 실행되는 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빌려 “아고라”라고 칭한 바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최전선의 민주주의”, 권터 그라스 등저, 이승협 옮김,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평사리, 2005, 41쪽) 누가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대표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자본과 결탁한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냉소는 이러한 대표성에 대한 공적 논쟁의 장을 닫아버렸다. 심지어 통치자가 국민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특권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민주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능한 행위로 이해되었다. 민주주의는 점점 무기력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등장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대표 가능성에 대한 공적 논쟁의 장을 다시 열게 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는 시민들이 자유토론을 행하는 장소였다.
이미지 출처: http://www.greeklandscapes.com/greece/athens_agora.html
 


이 글은 2008년 4월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 실은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짧은 글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칼럼을 읽은 이들이 던져준 몇 개의 새로운 질문들과 당시 지면 관계상 미처 다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이어가보려고 한다. 칼럼의 제목이었던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는 동성애자의 대표 가능성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만약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면, 이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하는 것은 가능한가를 묻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이 제목은 ‘하위 주체(subaltern)’에 대한 유명한 논문 제목인, 가야트리 스피박의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를 변용한 것이었다. 스피박은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있다/없다의 진리 게임보다는 그 질문 자체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다만 한 가지, 하위 주체가 말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나 말할 수 없다는 쪽이나 모두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는 점은 공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자칫 ‘자격 여부’를 심문하게 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질문의 출처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하던 이들에게서 나왔더랬다.)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반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 통의 메일이었다. 자신을 40대 초반의 구의원이라고 밝힌 이는 칼럼을 읽고 “아이도 안 낳고 천륜을 거스르는 동성애자와 같은 돌연변이들이 감히 어떻게 국민을 대표하는 신성한 국회의원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느냐”라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다”고 글을 실은 언론매체까지 싸잡아서 꾸짖는 성난 익명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어떻게 해서 자신은 국민의 한 사람이 되고, 나는 돌연변이의 옹호자로서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이것이 “누가 국민을 대표하는가: 성적 타자의 대표 (불)가능성”이라는 제목이 탄생하게 된 과정이다.

성적 ‘타자’들이 공적인 장에서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타자’들이 ‘우리’에 대한 상상적 관념을 구성할 수 있는가. 누가 성적 타자의 자리에 있는가. 대표자의 자격 요건에 성 정체성이나 성별과 같은 차이들은 아예 고려되지 않아야 공정한가. 대표한다는 것은 개별자가 지니고 있는 모든 차이를 중화하고 자신을 가장 보편의 존재로 만드는 과정인가. 이렇게 구성된 보편의 모습은 어떠한가. 국민은 과연 누구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는가 등 대표성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던지고 답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여성은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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