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에서 필자는 컨셉 위주의 절편화된 영상 포르노와 팬픽 등속의 서사가 중심이 되는 동성 관계 표현물의 효과가 반드시 같지만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는 이야기를 쌍방향적으로 엮어가는 과정에서 주체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성별과 다른 정체성을 시험하는 구체화된 실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이성애의 범위를 넘어선 관계를 상상하는 힘은 이제 각종 대중매체에까지 흘러들어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동성 관계 테마의 서사물이 영화, 드라마 등에서 흥행 가도를 달렸다. 대중매체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간 유사 사생활 노출로 소위 ‘팬픽’ 효과를 노리는 마케팅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문화적 흐름이 여성 주체 스스로의 현실과 어떤 실제적 관계를 맺는지는 세심히 접근될 필요가 있다. 물론 동성 서사에 대한 여성의 욕망을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놓는 것은, 뭔가 안심되는 측면을 위한 것이기는 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야오녀들이 실제 동성애자는 아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러하다. (전술했던 사이토 다마키 역시 폐인 및 동인녀의 환상이 실제와 관련을 맺지 않음을, 특히 후자의 경우에 초점을 맞추어 상당 분량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뒤집어 이해하면 동성 서사물이 B․L을 포함한 야오이창작물, 혹은 야오이패러디물뿐 아니라 일정 스타가 중심인 팬픽까지를 포함할 정도로, 여성들 사이에 넓은 저변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팬픽에는 탈성애적 이성애물의 범주 역시 존재한다. 양적으로 이성애물과 동성애물을 계산,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여기서는 논점을 흐릴 수 있다. 팬픽이 여성의 집단적인 문제로, 사회적으로 가시화한 것이 바로 이성애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수행 때문이었음은 이 글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실제 동성애자들이 모두 이러한 동성 서사 표현물을 향유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팬픽을 둘러싸고 이미 출몰한 여러 문화적 실천을 다시 시야에 넣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방향에서 이러한 텍스트와 주체 간 상호 침투 효과를 더듬어보는 것은 어떨까. 역효과에 대한 즉각적인 고발만이 만연했던 지금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말이다. 다시 말해 남성 동성 서사를 즐기는 여성이 실제 그 표현물을 통해 직접, 그 재현된 남성과 같은 존재를 억압할 수 있는 시선에 공모했던가? 혹은 구체적인 액션으로 나아갔던가? 이 질문은 팬픽을 둘러싼 창작과 소비의 10여년의 세월을 돌이켜 보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으로 대답이 되지 않을까. 다른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팬픽을 읽고 쓰면서 관련 동성 서사에 접근하게 되면서 여성들은 금기로서의 동성애를 보다 가능한 현실적 상황으로 이해한다. 동성애를 중심에 놓고 제작된 여러 장르의 작품이 누구보다도 여성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지받았음을 상기하자. 더 나아가 이들은 단지 이야기 속 동성 간의 사랑을 지지할 뿐 아니라, 그를 금지하는 동성애 혐오를 비판적으로 보는 감수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를 동성애 억압의 뒷면을 가진 남성 동성사회 전반을 향한 여성들의 게이한 복수라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gay는 ‘동성애자’라는 통상적인 뜻과 더불어 ‘즐거운’, ‘쾌활한’이라는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 여성들의 집단적 문화 실천이 어떻게 기존 성규범을 변화시키는지, 우선 이들이 스스로를 이후 어떻게 달리 위치시키게 되었는지를 통해 살펴보자. 연재 첫 회에서 언급했던 2000년 당시 ‘소녀’들의 팬픽 ‘문학’ 주장은 사실 텍스트와 주체 간 침투되는 서사적 효과를 강력히 증빙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미 팬픽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변용을 만들어내었던 정황이 포착되고 있었다. 환상에 대한 욕망은 종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충동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유해물 등급 논란 속에서 팬픽은, 순수한 딸들을 오염시켜서 ‘그녀’들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기에 기성세대를 경악시켰던 것이었다. 바로 ‘팬픽 이반’이 그러한 우려를 현실화했던 존재들로, 이들은 말 그대로 팬픽을 읽음과 동시에 남성아이돌 그룹을 모방하면서 자신을 일반적 이성애자가 아닌 이반(異般)이라 칭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동성 여성과의 스킨십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이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소위 ‘여성 간 연애는 어릴 때의 성장통쯤’이라는 통념과 달리 너그럽지 못했다.
당시 학교라는 공교육 장에서는 이렇듯 이반(離反)하는 학생을 계도하기 위한 통신문이 배포될 정도였다. 그에 따르면 ‘주로 동성애를 다루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서 시작하여’ 곧 ‘이반을 테마로 채팅 등을 하다가 쪽지를 주고받고, 급기야 우연히 만나 사귀기도 하는’ 행동에 주의를 주면 줄수록, 이 여학생들은 더욱 우쭐해졌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유행처럼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학교 발 통신은, 가히 팬픽의 서사적 효과가 여성들의 ‘똑바르지(straight)’ 않은 수행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포함하여 이성애에 기반을 둔 사회를 거스르는 수행 전반을 가리키는 퀴어(queer)라는 용어에 대응하여, 이 글에서 스트레잇(straight)하다는 것은 지배적 이성애 실천을 다시 비관적으로 지칭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급속하게 가시화되었던 이러한 실천에 대한 우려는 남성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이 어떻게 스스로 그러한 탈규범적 실천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무분별한 팬덤 문화라는 비판 속에서 흐려진 이 팬픽 이반이라는 단어는 동성 서사라는 양식이 결국 여성들의 문화적 수행이 젠더 및 섹슈얼리티를 재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그 급진적 사례의 하나로 예증될 만하다. (동성애 커뮤니티에서는 소위 ‘순수 이반’ 논쟁 과정에서 팬픽이반포비아라는 조어까지 생성되었다고 한다. 정체성을 둘러싼 보다 직접적인 갈등 및 그와 관련된 쟁점은 고를 달리한 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팬픽의 동일시와 대상화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젠더크로스 현상에 대한 착목 없이 팬픽 이반을 비롯한 일련의 현상은 그저 돌출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젠더트러블한 상황은 환상을 넘어 현실계에 간단없이 출몰하고 있다.
가령 ‘멤버놀이’ 같은 것은, 연예인 선망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나아가 가상의 정체성을 실험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여성은 남성 아이돌 그룹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부치성을 발견하기도 할 터이다. (부치는 펨과 더불어 여성동성애자 사이의 역할 구분의 표징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여성이 실험하는 새로운 남성성을 확장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관련해서는 여성주의 웹사이트 <언니넷>의 채널넷, 최근 117호 “키워드 2010의 부치-우리가 붙이고 찾아낸 이름” 항목 및 84호 “우리는 피부치” 부분을 찾아보라.) 더 나아가 팬코스(fancos: 팬코스프레의 줄임말)라는 여성들이 전문적으로 아이돌 그룹을 모방하여 마치 스타처럼 공개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활동 역시 수면 위로 부상한 바 있다. 이러한 실천들을 남성 동성사회와 그에 대한 여성들의 공동 대항으로 보다 적극화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대중문화의 변태적 현상으로 부각된 팬픽, 그리고 여성들의 동성 서사에의 정향이 사실 사회적 변형을 이끌어내는 적극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여성은 자아를 연기하고 그를 심문하고 다시 구축하는데 능한 존재였다. 정사(正史)와 동궤에 반드시 있지만은 않은 수다한 여성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저류에 흘러왔다. 공고한 이성애적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도 이반의 여성들은 언제나 있었다.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호모포비아와도 정정당당히 싸워나갈 것, 우리의 주된 활동 무대가 밤의 음지이기는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4차원이 아니라 현실이니까”라는 어느 누군가의 촉구는 바로 그러한 환상 -이야기들이 현실- 역사와 기어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통찰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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