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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치며

   

벌써 연재의 마지막이다. 허둥지둥 중언부언 달려온 길이라, 다시 처음의 질문 “도대체 여자들이 왜 남성만의 사랑이야기를 욕망하는지”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이 글의 뼈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팬픽을 위시하여 강한 성적 묘사를 포함하는 동성관계 표현물은 특히 ‘여성향(女性向)’이라고 불린다. 21세기의 부녀(腐女)들은 ‘썩은 눈을 가져서 미안해’라며 묘한 시선으로 낯선 이야기들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여기에서 이성애는 동성애로 대체되고, 모험은 애정으로 전환된다. 그 이유를 가부장적 남성 동성사회의 효과이자, 그 속에서 움트는 대항의 의미로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문화적 수행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그에 대한 전면적인 예측은 역시 무리이다. 시각의 형평을 위해 여성들 사이에서 은밀히 통용되는 동성관계 표현물의 해악(?)을 말하는 목소리에도, 물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만 필자는 이러한 표현물이 대체로 서사적 측면에 보다 힘을 싣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다시 말해 정전의 뒤안길에서 여자들이 이야기와 맺어온 관계에서, 이 욕망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2000년 이후 팬픽을 생산, 소비해대는 일군의 여성들이 표출했던 열정이, 대중문화의 주체로써 로망스를 선호해왔던, 종종 삼류 작가와 저급 독자로 지목받았던 여성의 문화적 위치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특별한 관계를 성취하는데 종종 모든 재능을 집중시켰던 여성에게 사랑은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다름 아닌 수난이 존재한다. 동성애는 그런 점에서 불굴의 사랑을 달성하게 하는 기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위치되었던 여성이, 여기에서는 이 이야기의 장 밖에 놓이고자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생성되는 맥락들이 함께 자리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 입장에서는, 현실과 다른 환상을 주재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1인칭 시점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긴다. 이러한 자발적 소거는 팬픽을 읽는 여성에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소위 그의 여자가 되는 상상과 꼭 맞지 않는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과 관련된다. 이러한 남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그를 둘러싼 일정한 감수성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이제까지의 남/녀 구분을 뛰어넘는 위치를 획득한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성/남성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지속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팬픽 등속 동성관계 표현물이 산출했던 효과는 “내 남자가 아닐 바에야 차라리 게이여라~”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플롯 기반의 서사물이 컨셉 위주의 영상물과 반드시 같지만은 않은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데 근거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반영하지는 안되, 또 한편 변화를 추동해내는 이러한 서사는 언제나 있어왔다는 것이다. 몇백 년 전부터 긴긴 밤, 어떤 여성들은 누군가로부터 빌려왔던 언문소설을 필사했고, 어떤 여성들은 할머니-어머니로부터 내려왔던 전설 및 설화 등 구연했다. 이러한 이야기의 연쇄 속에서 여성들이 일정한 도덕, 규범, 이성 등에 보다 다른 감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여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잘 휘둘린다는 비판은 아마 일말의 진실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금지가 욕망을 낳는다고 할 때, 여성은 그 사회적 위치로 보아 보다 많은 것을 소망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원하는 이 ‘죄 많은 텍스트’들은 대개 소설이었고, 이 끝없는 이야기의 어느 곳에서 그들은 각기 다시 현실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을 얻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지금-여기의 동성 서사들은 엄존하는 이성애적 규율을 가볍고도 쾌활하게 지나치고 있다.

가능한 이야기와 불가능한 이야기, 이야기되지 못한 현실과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상상은 언제나 그 경계를 달리해왔다. 이 글은 물론 여성들의 남성 동성 서사 지향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무리를 하는 이 시점에 있어서 또 다른 쪽의 포문 역시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남성아이돌 그룹 중심의 팬픽은 2011년 현재 여성아이돌 그룹을 대상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바야흐로 (남성)장미물과 (여성)백합물이 동시에 진전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전자가 여성을 중심으로 향유된다면, 후자는 당연 남성들이 선호하겠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산술적 증빙이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그러한 판단 역시 남/녀 구분에서 나온 전도된 판단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지금의 걸 그룹 홍수는 비단 ‘삼촌’팬들 때문만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인데 ○○○에 끌려요~”라는 고백이 심심찮다. 더불어 기존 남성그룹 팬픽을 향유하던 여성들이 여성그룹 팬픽의 생산 및 소비에 뛰어들고 있기도 하다.

물론 B․L과 더불어 G․L 역시 국경을 초월한 취향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까지 비교적 마이너였던 이 여성 동성관계 표현물의 저변이 최근 단박에 확장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까지 활약하고 있는 여성 9인조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는 애초에 “남자들, 당신이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든 이 범위에서 벗어날 순 없다”라는 식으로 등장했다. 서로 다른 여성성을 조밀하게 배치한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이 성공의 주요인이었다. 그런데 소위 ‘소․시’ 팬픽에서 이들 9인은 ‘소녀’를 벗어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을 놓고 난만하게 벌어지는 커플링 과정에서 천사와 같다고 일반에서 추앙받는 ‘소녀’는 ‘묘하게 잘 생겼다'고 평가되어 오히려 남성성을 수행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녀들의 관계를 성적으로 묘사했을 때 오히려 삼촌팬들이 질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제 팬픽을 위시한 동성 서사는 남-남 뿐 아니라 여-여 관계에서까지 전개되고 있고,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적 실천에 여성 뿐 아닌 남성까지도 가세하고 있다. (물론 남성들에 의한 ‘소녀’관계 표현물 소비는 성규범의 변화와 상관없이 접근되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논점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여성 동성 팬픽에 여성 뿐 아니라 남성이 양적으로 보다 의미 있게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할 만하다.)

각설하여, 필자는 이 연재를 진행하는 동안 우연히 모 채널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1979)을 다시 보았다. (주지하듯 이 이야기는 11살의 고아 앤이 독신 남매에게 입양된 후 일어나는 일들을 일대기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루스 모드 몽고메리 여사에 의해 1908년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으로 발표되어 전세계적으로 사상 최대 1억 부가 팔렸다고 한다.) 백여 년 세월을 통과한 이 이야기를 놓고 이번에 필자는 주인공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처음 들어가서 "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저에 관해 상상한 것을 들으시는 게 더 좋겠다"라고 말한 데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앤은 언제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하지만, 곧 자신의 특출한 상상력으로 그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는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이 현실과 이야기의 조응은 곧 앤이 상상으로만 가져봤던 ‘마음의 벗’ 다이아나를 실제로 사귀게 될 때 드러난다. 그녀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함께 읽으며, 또 상상으로 숲속에 자신들만의 집을 짓는다. 

 


<빨강머리 앤과 벗 다이아나>

 

이 일련의 과정을 분명 어렸을 때 필자는 여-여 사이의 당연한 우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본 앤과 다이애나는 "너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며 잠시의 이별을 놓고 사랑의 맹세까지 하는 등 꽤 달달해 보였다. 마무리에 와서 뜬금없이 이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두고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애초에 남-녀의 이야기였으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였더라도 분명 사랑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보다 구조화된 문화에 관한 이야기다. 케이블이기는 하나 국내 최초로 소개된 여성 동성애를 다룬 모 미국 드라마에서 한 매력적인 인물은 ‘섹슈얼리티는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광고처럼 그 물줄기가 콸콸콸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탈-이성애 중심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로 보다 촘촘하고 광범위한 망을 직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능치 않는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이야기는 나타나고, 낯선 상상에서 더 나은 현실이 움튼다. 이성애 매트릭스에서도 게이다(gay-rader)는 작동한다.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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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서 - 생성하는 이반(queer, 離反) 주체

   

전 회에서 필자는 컨셉 위주의 절편화된 영상 포르노와 팬픽 등속의 서사가 중심이 되는 동성 관계 표현물의 효과가 반드시 같지만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는 이야기를 쌍방향적으로 엮어가는 과정에서 주체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성별과 다른 정체성을 시험하는 구체화된 실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이성애의 범위를 넘어선 관계를 상상하는 힘은 이제 각종 대중매체에까지 흘러들어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동성 관계 테마의 서사물이 영화, 드라마 등에서 흥행 가도를 달렸다. 대중매체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간 유사 사생활 노출로 소위 ‘팬픽’ 효과를 노리는 마케팅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문화적 흐름이 여성 주체 스스로의 현실과 어떤 실제적 관계를 맺는지는 세심히 접근될 필요가 있다. 물론 동성 서사에 대한 여성의 욕망을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놓는 것은, 뭔가 안심되는 측면을 위한 것이기는 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야오녀들이 실제 동성애자는 아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러하다. (전술했던 사이토 다마키 역시 폐인 및 동인녀의 환상이 실제와 관련을 맺지 않음을, 특히 후자의 경우에 초점을 맞추어 상당 분량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뒤집어 이해하면 동성 서사물이 B․L을 포함한 야오이창작물, 혹은 야오이패러디물뿐 아니라 일정 스타가 중심인 팬픽까지를 포함할 정도로, 여성들 사이에 넓은 저변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팬픽에는 탈성애적 이성애물의 범주 역시 존재한다. 양적으로 이성애물과 동성애물을 계산,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여기서는 논점을 흐릴 수 있다. 팬픽이 여성의 집단적인 문제로, 사회적으로 가시화한 것이 바로 이성애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수행 때문이었음은 이 글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실제 동성애자들이 모두 이러한 동성 서사 표현물을 향유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팬픽을 둘러싸고 이미 출몰한 여러 문화적 실천을 다시 시야에 넣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방향에서 이러한 텍스트와 주체 간 상호 침투 효과를 더듬어보는 것은 어떨까. 역효과에 대한 즉각적인 고발만이 만연했던 지금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말이다. 다시 말해 남성 동성 서사를 즐기는 여성이 실제 그 표현물을 통해 직접, 그 재현된 남성과 같은 존재를 억압할 수 있는 시선에 공모했던가? 혹은 구체적인 액션으로 나아갔던가? 이 질문은 팬픽을 둘러싼 창작과 소비의 10여년의 세월을 돌이켜 보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으로 대답이 되지 않을까. 다른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팬픽을 읽고 쓰면서 관련 동성 서사에 접근하게 되면서 여성들은 금기로서의 동성애를 보다 가능한 현실적 상황으로 이해한다. 동성애를 중심에 놓고 제작된 여러 장르의 작품이 누구보다도 여성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지받았음을 상기하자. 더 나아가 이들은 단지 이야기 속 동성 간의 사랑을 지지할 뿐 아니라, 그를 금지하는 동성애 혐오를 비판적으로 보는 감수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를 동성애 억압의 뒷면을 가진 남성 동성사회 전반을 향한 여성들의 게이한 복수라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gay는 ‘동성애자’라는 통상적인 뜻과 더불어 ‘즐거운’, ‘쾌활한’이라는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 여성들의 집단적 문화 실천이 어떻게 기존 성규범을 변화시키는지, 우선 이들이 스스로를 이후 어떻게 달리 위치시키게 되었는지를 통해 살펴보자. 연재 첫 회에서 언급했던 2000년 당시 ‘소녀’들의 팬픽 ‘문학’ 주장은 사실 텍스트와 주체 간 침투되는 서사적 효과를 강력히 증빙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미 팬픽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변용을 만들어내었던 정황이 포착되고 있었다. 환상에 대한 욕망은 종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충동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유해물 등급 논란 속에서 팬픽은, 순수한 딸들을 오염시켜서 ‘그녀’들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기에 기성세대를 경악시켰던 것이었다. 바로 ‘팬픽 이반’이 그러한 우려를 현실화했던 존재들로, 이들은 말 그대로 팬픽을 읽음과 동시에 남성아이돌 그룹을 모방하면서 자신을 일반적 이성애자가 아닌 이반(異般)이라 칭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동성 여성과의 스킨십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이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소위 ‘여성 간 연애는 어릴 때의 성장통쯤’이라는 통념과 달리 너그럽지 못했다.

당시 학교라는 공교육 장에서는 이렇듯 이반(離反)하는 학생을 계도하기 위한 통신문이 배포될 정도였다. 그에 따르면 ‘주로 동성애를 다루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서 시작하여’ 곧 ‘이반을 테마로 채팅 등을 하다가 쪽지를 주고받고, 급기야 우연히 만나 사귀기도 하는’ 행동에 주의를 주면 줄수록, 이 여학생들은 더욱 우쭐해졌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유행처럼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학교 발 통신은, 가히 팬픽의 서사적 효과가 여성들의 ‘똑바르지(straight)’ 않은 수행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포함하여 이성애에 기반을 둔 사회를 거스르는 수행 전반을 가리키는 퀴어(queer)라는 용어에 대응하여, 이 글에서 스트레잇(straight)하다는 것은
지배적 이성애 실천을 다시 비관적으로 지칭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급속하게 가시화되었던 이러한 실천에 대한 우려는 남성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이 어떻게 스스로 그러한 탈규범적 실천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무분별한 팬덤 문화라는 비판 속에서 흐려진 이 팬픽 이반이라는 단어는 동성 서사라는 양식이 결국 여성들의 문화적 수행이 젠더 및 섹슈얼리티를 재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그 급진적 사례의 하나로 예증될 만하다. (동성애 커뮤니티에서는 소위 ‘순수 이반’ 논쟁 과정에서 팬픽이반포비아라는 조어까지 생성되었다고 한다. 정체성을 둘러싼 보다 직접적인 갈등 및 그와 관련된 쟁점은 고를 달리한 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팬픽의 동일시와 대상화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젠더크로스 현상에 대한 착목 없이 팬픽 이반을 비롯한 일련의 현상은 그저 돌출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젠더트러블한 상황은 환상을 넘어 현실계에 간단없이 출몰하고 있다.

가령 ‘멤버놀이’ 같은 것은, 연예인 선망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나아가 가상의 정체성을 실험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여성은 남성 아이돌 그룹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부치성을 발견하기도 할 터이다. (부치는 펨과 더불어 여성동성애자 사이의 역할 구분의 표징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여성이 실험하는 새로운 남성성을 확장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관련해서는 여성주의 웹사이트 <언니넷>의 채널넷, 최근 117호 “키워드 2010의 부치-우리가 붙이고 찾아낸 이름” 항목 및 84호 “우리는 피부치” 부분을 찾아보라.) 더 나아가 팬코스(fancos: 팬코스프레의 줄임말)라는 여성들이 전문적으로 아이돌 그룹을 모방하여 마치 스타처럼 공개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활동 역시 수면 위로 부상한 바 있다. 이러한 실천들을 남성 동성사회와 그에 대한 여성들의 공동 대항으로 보다 적극화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대중문화의 변태적 현상으로 부각된 팬픽, 그리고 여성들의 동성 서사에의 정향이 사실 사회적 변형을 이끌어내는 적극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여성은 자아를 연기하고 그를 심문하고 다시 구축하는데 능한 존재였다. 정사(正史)와 동궤에 반드시 있지만은 않은 수다한 여성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저류에 흘러왔다. 공고한 이성애적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도 이반의 여성들은 언제나 있었다.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호모포비아와도 정정당당히 싸워나갈 것, 우리의 주된 활동 무대가 밤의 음지이기는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4차원이 아니라 현실이니까”라는 어느 누군가의 촉구는 바로 그러한 환상 -이야기들이 현실- 역사와 기어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통찰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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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8. 남-남 동성 서사에서 여성은 어디에?

   

전 회에서 팬픽 등속의 동성서사를 ‘여성들의 포르노’라 지칭하는 것이, 그러한 이야기를 욕망하는 여성들의 정치적 올바름을 문제 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재현물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은 그 환상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근거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선, 팬픽에서 보이는 서사 중심적 성애적 표현이 기존 남성 중심적 포르노의 일회적이고 절편화된 욕망의 분출과 어떻게 다른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주지하듯 팬픽의 서사에는 소위 ‘씬’이라 불리는 높은 수위의 성관계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장치는 기존 영상 포르노에서 무한 반복되는 컨셉으로만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남-남 관계는 수치와 직결되거나 몰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팬픽의 ‘씬’은 직접적인 욕구의 충족이라기보다 본질적인 욕망을 유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이는 근접하지 않아야 할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두고 주인공은, 아니 ‘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다름없다.

필자는 이러한 포지션의 문제를, 서사를 통해 동성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춰 논의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포르노 영상은 삽입이라는 성행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팬픽은 사회 내의 인정, 혹은 스스로에 대한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를 취한다. 해피(happy) 혹은 새드(sad)로 서사의 엔딩을 구분하는 것은, 이 낯선 세계와의 만남에서 주체가 취할 수 있는 태도 및 그로 인한 사회적 결과들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함을 보여준다. 이성애적 성 도덕과 일치하지 않는 팬픽의 성애적 장면은 반드시 서사적 차원에서 녹록치 않은 상황 및 그에 따른 감정을 그려내기를 요구한다. 성적 지향이 이성애에 합당치 않은, 이 세계와 자아 사이에 놓이는 심각한 낙차를 어떻게 설득 가능하게 그려낼 것인가, 이것이 팬픽의 동성 서사가 목적하는 바이다. 작가에게 이 간극을 보다 로맨틱하게 메워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독자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서사가 중심인 쌍방향적인 팬픽의 창작 및 소비 과정은 기존 시각 영상들과는 다른 궤도를 그려낼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러한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다시 팬픽이 기본적으로 유명인을 매개로 한 욕망의 발현이라는 지적으로 돌아가자. 왜냐하면 이제까지 팬픽은 여성이 남성 스타를 소유하려는 환상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당연히 여성이 남성을 욕망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 팬픽 속 남성 인물, 특히 수는 남성적이지만은 않고, 공의 남성성 역시 사회적 남성으로 기능하는데 바쳐지고 있지 않다. 팬픽은 동성애 금기를 위반할 뿐 아니라 남성성조차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서사에서 여성만이 그 텍스트와 단지 여성으로만 관계한다고 읽을 필요가 있을까. 기본적으로 팬픽에서 여성은 소거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여성들의 시장, 혹은 인형조종술로 거칠게 일별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팬픽을 구체적으로 읽고 쓰는 순간, 그 경험의 상이한 맥락에 대해서는 보다 세심히 접근해야 한다.

여성의 동성애 선호에 관한 논의는 보통 ‘환상성(fantasy)’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원초적인 환상적 실천이 기본적으로 1인칭을 취할 수 없다면, 그 속에서 주체는 오히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위치를 수행하게 된다. 라플랑슈와 퐁탈리스는 “환상과 섹슈얼리티의 기원”에서 환상은 분명하고 변함없는 1인칭 시점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그 이야기들이 주체를 이동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또 조안 리비에르는 “가면무대회로서의 여성성”에서 성적 정체성이란 남/녀 양성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서 파생된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 끊임없이 미끄러져나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관련 논의는 임옥희, “환상, 그 위반의 시학”, <여/성이론> 2,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0, 82~86쪽 참조.)

그렇다면 여성이 기본적으로 남성 1인칭을 수행하는 팬픽은 어떨까. 서사의 공수 구도에서 여성이 자연적 특질의 유사성으로 수의 측에 위치한다는 가정은 여성으로서의 1인칭 시점에 대한 거부로, 스스로를 소거했던 애초의 의의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사이토 다마키는 소위 오타쿠의 성에 대한 태도에 있어 성별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남성은 우선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로 확립하여 시각적인 실현에 몰두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여성은 자신을 말소한 무대에서 연기되는 남성끼리의 관계성에 열광한다. 이때 전자는 대상을 ‘가지고 싶다’고, 후자는 대상 그 자체가 ‘되고 싶다’고 바란다. 이 소유와 수행의 차이는 중요하다. 관련 논의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김영진 역, 황금가지, 2005, 2장 오타쿠와 야오이의 섹슈얼리티 참고.) 

 

   

사이토 다마키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여성은 남성 스타의 가면을 쓰고, 공 혹은 수의 입장에서 팬픽을 쓰고 읽는다는 것이다. 팬픽을 즐기는 주체는 공과 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다양한 남성성을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 어떠한 위치에서 누구에게 동일시되고 또 누구를 대상화할 것인가. 이 이입되는 주체와 몰입하는 대상은 수시로 변화할 수 있다. 이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논하기는 용이치 않다. (그러나 팬픽을 읽고 쓰는 경험을 공과 수, 그리고 스타와 나 사이에 교차되는 수행적 관계라는 점에 착안하여 보다 단순한 구도로 다음처럼 이해해볼 필요도 있다. ① 스타를 공에 놓고 나도 공에 두기, ② 스타를 공에 두고 나는 수에 두기, ③ 스타를 수에 놓고 내가 공이 되기, ④ 스타를 수에 놓고 나도 수에 두기. 이때 스타와 나의 관계에서 ①과 ④에서는 동일시, ②와 ③에서는 대상화가 일어날 수 있으며, 성애적 측면에서 ①과 ③에서는 새디즘적 욕망이, ②와 ④에서는 마조히즘적 쾌락이 감지될 만하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기계적인 도식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유림은 특히 팬픽은 공수의 할당뿐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담당(맴버)’와의 관련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관련 논의는, 강유람, 앞의 글, 108~114쪽 참조.)

다시 말해 어떤 이야기에 열광하는 여성이 그 텍스트와 맺는 관계는 다층적이다. 그리고 종종은 젠더 교차적이기도 하다. 이는 앞서 분석했던 최근의 <성균관 스캔들>에 열광했던 다음 여성 A, B, C의 태도 및 위치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A는 여자 주인공 김윤희에 빙의되어 이선준과의 로맨스 성취와 더불어, 여성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남성 동성사회성의 혜택에 흐뭇해했던 것이다. 반면 B와 C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자 스스로가 남자 주인공 이선준에 이입되어 갔다. 그러면서 B는 모든 이에게 인정받는 중요 인물이 되고 싶은 동시에 여자 주인공과 어떤 관계를 이룰 수 있을지에 주목했고, 그에 반해 C는 이선준을 둘러싼 다른 남성 인물들 사이의 보다 진전된(?) 관계를 상상해보는 데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렇듯 일정한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공수의 관계가 그러했듯 남녀라는 양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동일시 혹은 대상화할 수 있는 인물이 한명이 아닌 두 명일 수 있고 또 아예 없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야기와 여성 주체가 맺는 관계는 더욱 다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팬픽을 즐기는 여성의 위치에 관해 다음의 당혹스러운 질문 역시 가능할 수 있다. 만일 여성이 공에 이입을 하고 수인 스타를 욕망하는 것과 공인 스타에 자신을 함께 얹고 수를 욕망하는 것 등등은 이 남성 동성애 구도 속에서 여성이 남성으로서 동성애적으로 개입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성으로서 이성애적으로 이입되는 것인가. 질문은 끝도 없이 만들어질 수 있다. 여성성, 남성성의 고착점을 팬픽의 스타와 나, 그리고 공과 수의 무한한 교차장에서 명확히 찾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 무수한 ‘정상’적 언설에도 불구하고, ‘이상’적 징후는 도처에 있다. 특정 젠더형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고 그에 적합지 않은 수행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마지막으로 이 동성 서사를 통한 여성들의 문화적 실천이 지난 10년간 어떠한 이슈를 만들어내었는지, 그 사회적 효과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는 여성들의 역능이 기존 이성애 기반의 성 규범을 균열내고 있었다는 주장에 맞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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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드라마에 아이돌스타를 썼었군요.
 


7. 팬픽을 즐기는 여성들은 왜? (2) ― 남성 권위를 쾌락으로 무화하기

   

팬픽은 기본적으로 연애 서사이다. 전술한 팬픽의 온갖 장르를 통어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서사는 그 지고의 가치를 체현하는데 바쳐진다. 이때 동성애는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수난이 된다. 이제까지 여성의 동성 서사 생산과 소비는, 억압적 이성애 연애 각본에 끌려들어가지 않을 객관적 거리의 확보, 그리고 남성을 매개로 한 여성 사이의 연맹 구축 때문이라고 간략히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분석 지점이 남아 있다. 그것은 왜 이 사랑이 굳이 육체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팬픽의 성애적 측면은 기존 여성 독자 연구의 중심이 되어왔던 로맨스 서사와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대체로 ‘안타까운 지켜주기’ 등 아름다운 묘사로 지탱되어왔던 사랑 이야기와 달리, 팬픽은 강도 높은 성 관계가 이야기에 핵심에 놓여 있다. 특히 에로틱한 장면을 별도로 지칭하는 ‘씬(scene)’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특질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씬의 유무는 팬픽 선정 시의 중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팬픽을 쓰거나 읽을 때 기준이 되는 구도는 공(攻)과 수(守)로 이루어져있다. 명백히 이성애적 남녀 역할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이 명명은, 종종 공수의 자질을 확정짓는 코드가 된다. 보통 공은 남성적이고 수는 여성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젠더의 구분이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이 명확한 듯 보이는 공수의 차이는 종종 서사의 진행 과정에서 보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변이된다. 공수 앞에 붙는 다음의 각종 수식어는 그러한 측면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공은 절대강공, 완(벽)공, 잔혹공, 냉정공, 집착공, 강공, 능글공, 야비공, 약(한)공, 꽃공, 바보공, 귀염공, 다정공, 비굴공, 은근공 등으로, 수는 꽃수, 완(벽)수, 비굴수, 천상수, 능동수, 강수, 앙탈수, 약수, 여왕수 등등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이 공과 수를 수식하는 각각의 자질은 그 자체로 ‘강’, ‘약’, ‘꽃’ 등에서 보이듯 공유될 때가 많다. 그리고 전천(후) 혹은 리버스(reverse; 전환)라는 용어에서 예상하듯 그 구분 자체를 넘나드는 캐릭터도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수의 구별은 팬픽을 쓰고, 읽는 주체의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코드로 작용하고 있다. 팬픽을 읽을 때 독자들은 제목 앞에 ‘○(공)×○(수)’ 혹은 ‘○공○수’로 표시된 공수를 드러내는 표제를 먼저 본다. 그리고 팬픽을 쓰는 작가들 역시 대체로 공수의 할당으로부터 캐릭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공수 구별은 남녀라는 젠더 구분을 체화한 상태에서 공유 가능한 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은 주인공 양측이 모두 남자라는 전제 때문에 더욱 강박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남-남 러브스토리에서 아무리 공수를 명확히 설정한다고 해도, 팬픽의 독자와 작가는 모두 이들에게서 남-녀 커플과 다른 지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여성적인 수라고 해도 그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 공으로부터 미묘한 엇갈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낯선 극적 긴장감은, 팬픽의 독자와 작가 모두가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이성애적 구도 속의 남자들과는 같지 않다고 느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팬픽의 공수 설정에 대한 선호 문제는 그들 각자의 성별적 전형성이 아닌 남-남 조합의 역동적 창출에 초점이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보통 ‘커플링(coupling)’이라고 하는 이 행위를 놓고 때로 격렬한 토론까지 이루어지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팬픽의 외설성 논란과 관련해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커플링이 여성다운 자질, 혹은 남성다운 태도에서 비롯하기는 하지만, 더 강력하게는 성관계에서의 역할에서 연유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간단히 공은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쪽이고 수는 흡입하는 쪽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할 때 팬픽을 통해 향유되는 쾌락은 기본적으로 이 남-남 커플의 사랑을 외부에서 육체적으로 관음하는 데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남성 포르노에 존재하는 여성 동성애물에는 남성 스스로가 두 여성 사이에 개입되어 있고, 남성이 그 컨셉의 중심이 되는 것과 다르다.)

필자는 이를 두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욕망을 형성하고 또 그를 실천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이 팔루스적 상징 권위를 물리적 페니스 자체로 유희하는 것으로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페니스를 가지지 않은 여성이 남성 페니스의 쾌락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한유림은 팬픽에서 삽입되지 못한 수의 페니스를 유희하는 장면을 특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삽입과 상관없이 드러난 페니스, 이 감각에 대한 상상이 팬픽이 설정하는 공수 구도와 유사 이성애적 관계로 포섭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는 삽입과 상관없는 잉여적 쾌락을 적극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관련 논의는 한유림, “2‧30대 여성의 아이돌 팬픽 문화를 통해 본 젠더 트러블”, 서울대 여성학 석사논문, 2008, 103쪽)  

이렇게 물리적으로 여성을 제거하고 남성을 바라보는 이 이상한 실천은, 팬픽을 쓰고 읽는 주체 역시도 결코 남-녀의 구도 속에서 자신을 놓는 것과 다른 경험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는 전술했던 여성의 성을 침범할 수 있다는 남성의 권위적 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말한다. 여성들의 남-남 관계를 둘러싸고 피어나는 에로티카(erotica)적 환상이 단지 여성으로서 임신 등의 문제로부터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라는 대답은, 그 의도는 호의적일지라도 결과적으로 대단히 착오적이다. 그러한 방어적인 해석은, 팬픽의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 그리고 그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증적 탐닉에 대해서는 회피하게 된다.

그러니까 팬픽은 ‘여성들의 포르노’라고 명명되어 왔던 것이다. 그 억압적 측면까지를 포괄해서 당연히 남성들의 것으로 여겨지던 포르노가, 어떻게 여성이라는 이름과 맞붙어 쓰일 수 있게 되었을까. 이렇게 불편하게 여겨지는 이 명명은, 당연히 그를 둘러싼 여성 주체들의 정치적 올바름까지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직접적인 성 행위, 그것도 공수에 근간한 남성들의 관계를 즐긴다는 것은, 현실의 동성애에 대한 태도 및 그 실제적 효과와 관련해서 더욱 우려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필자는 포르노라는 것은, 그 환상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 근거해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포르노에서의 특정 재현을 문제 삼는 것은, 그 환상이 어떠한 정치문화적 사회 맥락을 만나 실천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한마디로 “포르노는 에로틱한 표현물을 소비하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억압에 그 개인이 어떻게 자의 타의로 공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더욱 가깝다.” (관련 논의는 김현미, “디지털 포르노그래피: 폭력과 욕망 사이”, <인터넷과 아시아의 문화연구>, 연대출판부, 2007, 256~257쪽 참고.)   

 

 

<인터넷과 아시아의 문화연구>

 

그렇다면 이러한 남-남 동성 간 사랑이야기에 여성이 어떻게 등장하고 있는지를 일단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동성 서사에 여성은 그 자체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종종 팬픽에 등장하는, 이성애 문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오히려 그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동정은 할지언정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적대적이기조차 하다. 그러하기에 이 남-남 관계를 이성애적 여성이 아닌 위치에서,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실제로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에 관해서는 간단히 정리할 수가 없다. 물론 흥미롭게도 이러한 ‘변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탄은, ‘변태’ 남성이 성범죄적 측면에서 문제시되는 것과 달리, 연애-결혼-출산 등 자연화된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분노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이 재현물의 소비를 둘러싼 사회적 비판의 다른 양상은 팬픽을 위시한 남성 동성 서사의 효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이 ‘부녀자(腐女子)’들이 과연 그 재현 대상을 억압하는 데까지 나가게 되었던 것일까. 이 질문을 마음에 두고, 다음 회에서는 우선 이 동성 서사를 여성들이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그 쾌락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팬픽을 둘러싼 실천이 어떤 맥락에서 돌출되었던 것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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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6. 팬픽을 즐기는 여성들은 왜? ― 남성 동성사회에 대한 반발, 그리고 전유

   

앞서 거의 10여 년 동안 그 어떤 이야기보다 활발하게 생산, 공유되었던 팬픽이 제도 시장으로 결코 진입하지 못했던 핵심 이유가 스타를 매개로 한, 그래서 명예훼손이 상존하는 동성 서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남 스타의 이야기를 남-녀 일반의 것으로 바꾸고 일정 정도 서사를 조정한 이후 출판된 경우는 있다고 하는데, 이는 동성과 이성의 서사가 그 자체로는 별 차이가 없는 한편, 핵심은 또한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글은 줄곧 팬픽이 지금-여기에서 흥성하는 이유의 핵심 또한 동성 서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장에 남장여자를 비롯하여, 남-녀 육체교환 컨셉 등이 드라마에서 흥성하고,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흥행하는 등의 배후에 어떠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팬픽은 무엇보다 작가와 독자가 모두 여성이 절대 다수라는 점에서 순정만화만큼이나 남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나 순정만화가 이성애적 문법 속에서 여성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그려낸다는 데 반해, 팬픽이 동성애, 그것도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차이는, 그 장르를 둘러싼 주체의 위치 및 의미를 달리 물을 필요를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팬픽의 이중 젠더화, 즉 오로지 여성이 그 향유 주체라는 측면 뿐 아니라 그들이 주로 다루는 소재가 남성이라는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러한 대상과 주체의 확연한 구분, 특히 여성 스스로 자신을 자발적으로 소거하고 남성으로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극단적 실천은 무엇 때문일까. 

가장 평이하게 이유를 찾자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자신의 실제 상황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것이 용이하다는 식이 있다. 여성으로서 남성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능청스럽게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보편적인 전략에 다름없다. 다시 말해 이야기의 중심에 여성이 설정되어 있으면, 어떤 서사적 흐름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 상황 자체는 여성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 관련되어 이해하기 쉽다. 읽고 쓰는 주체라는 측면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 팬픽이라는 양식이 오히려 남성만을 가지고 서사를 구축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야기의 효율성 측면에서 이해 가능하다. 이를 여성들의 ‘인형 조종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는 초월적 입장에 선 작가가 작품 전반에 전면 개입하여 여성이라는 자연화된 동일시적 대상을 제거해두는 것을 말한다. 팬픽의 다수가 소위 ‘전지적 시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점에서 상통한다. (안선주의 조사는 팬픽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이 27건(35.1%)인데 반해 전지적 시점이 49건(63.6%)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련 내용은 “인기남성댄스그룹의 팬픽 현상에 대한 연구:‘g.o.d'와 ‘신화’를 중심으로”,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석사논문, 2003 참고.)

팬픽의 이러한 남성인물 선호는 내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여성의 ‘타고난 질투심’ 덕으로 돌려져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혹은 그렇다 해도 그 남자를 사이에 둔 여자들 관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선 남성 인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서사들이 여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읽혀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행위성과 관련해 보다 세심한 논의를 위해서 동성사회성이라는 개념에 주의부터 환기하고 싶다. 이 단어는 원래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들만의 구조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여성 행위성을 논한다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여성은 대개 상품으로 존재했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거개의 사회가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범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는 오직 여성의 교환으로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 지평 속에서 남성 동성사회를 지탱하는 최종심급인 여성 스스로 의미 있는 사회적 거래의 주체가 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여성을 교환하면서 남성이 주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팬픽 이야기 속의 여성 부재에 뒤집어 적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팬픽은 여성으로써 가능해지는 시장이 아닌, 여성들 스스로의 시장이 도래하는 양상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고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이리가라이가 말한 ‘여자들의 시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는 ‘비록 여자들과 남자들이 수적으로 같다 해도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욕망을 품을 수 없고 결정적으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여자들은 극히 소수이다’라는 전제 아래 여성의 교환으로 가능해진 친족의 구조를 설명하고자 한 ‘정직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를 조롱한다. 그러면서 ‘(만일) 여자들이 상품이라는 그들의 조건, 오로지 남성에 의한 생산 활동과 소비, 가치화, 유통에 굴복하는 데에서 벗어난다면, 그리고 그러한 교환 작업과 기능에 참여한다면 이 사회 질서는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까’라고 했던 것이다. (“여자들의 시장”, <하나이지 않은 성>, 이은민 역, 동문선, 2000 참고.)   


  

뤼스 이리가라이의 <하나이지 않은 성>
 


논의를 조금 더 밀어본다면, 팬픽의 여성 부재는 여성이 철저히 배제된 남성 동성사회(Homo-sociality)를 남성동성애, 그것도 성애적(Homo-eroticism) 모습으로 패러디한 결과이지 않을까. 이 관음적 쾌락은 기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권력을 재배열하는 데 잇닿게 된다. (박세정은 야오이패러디물을 중심으로 이에 관해서 심도 깊은 논의를 끌어내었다.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능력에 관한 연구”, 이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6 참고.)  

다음 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겠지만, 남성에게 침범당하기를 두려워할 것으로 위치되었던 여성은, 여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로서의 남성의 육체는 그를 둘러싼, 서사의 구조 바깥에서 그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대는 여성들에 의해, 그러니까 찬미됨과 동시에 침범되고, 또 한편 희롱되기조차 한다. 이 쾌락을 통해 권력을 재배치하는 능력으로 여성은, 실제 남성 동성애는 철저히 금지한 그 팔루스적 상징 법칙에 불응하는 이상한 주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여성 교환을 통해 성립한 남성 동성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남성 동성애이다. 반면 여성 동성애는 그에 비해 이성애로 가는 도중의 보다 미숙하고, 교정되어야 할 어떤 태도라고 여겨진다. 물론 이것이 남성 동성애자와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금지 및 차별 정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팬픽을 즐기는 여성은 족외혼에 입각한 남성 사회를 짊어질 강박에서는 한발 비껴나 있다. 이들은 오히려 남성들 간 쾌락에 몰입하면서, 남성 동성애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서사를 진정 향유하게 되기 어려운 남성들과 완전히 다른 위치를 가지게 된다. 여성향은 있어도 남성향이란 말은 없고, 야오녀과 달리 야오남은 희귀하다. 혹은 있더라도 남성은 여성보다 더욱, 자신이 그러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발화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취향 자체가 어쩌면 대사회적 커밍아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 동성애물인 백합(白合)의 독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 이 흥미로운 차이에 대해서는 고를 달리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팬픽을 읽고 쓰는 여자들은 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자를 매개로 여성으로서 스스로 그 유희적 교환의 주체가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여성들만의 관계가 가능한, 그 공감의 시장을 형성해간다고 볼만한, 이러한 팬픽의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어떻게 여성들이 구체적으로 팬픽을 즐기고 있는지의 의미가 남았다. 그 욕망의 내용을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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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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