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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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주영’님이 전하는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현기영님의 <바다와 술잔>이 검푸른 바다색의 소년기였고,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어진 샛노란 색 소녀기였다면 이번에 읽는 김주영님의 유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직 김주영님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쉬 점칠 수는 없지만 책표지를 장식하는 ‘느낌표’라는 붉은 스티커로 봐선 ‘과거’가 지니는 공공의 정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소설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거울 위의 여행>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신기하리마치 잘 쫓아하던 ‘거울’과의 첫 만남처럼 김주영님의 글에 반사된 어린 날의 일화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특히 고집스런 울보면서도 든든한 놀이상대가 되곤 했던 동생의 모습이라든가 날품팔이 현장에서 맞닥뜨린 어머니와의 씁쓸한 대면이 인상 깊다. 남의 집 아들을 더 많이 업어야했던 어머니의 눈물 훔치던 모습이 그 시절(50년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땟국>에 등장하는 자물쇠 채워진 다락방은 아이들에겐 그저 금기시되어온 미지의 세계였지만 어머니 몰래 올라간 다락방에는 조금씩 모아둔 곡식 항아리가 전부였다. 어쨌든 그 항아리의 존재 덕분에 가난했지만 왠지 모를 자부심으로 포만해했던 유년기를 회상한다.
마치 나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우리 집 다락방을 오르는 것 같았다. 아마 그 때 발견한 것은 조그맣게 만들어진 수많은 산타클로스 모형이었는데 그것이 왜 우리 다락방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아무튼 그 새로운 장난감과 주변의 여러 가전집기를 들척이면서 느꼈던 신기함으로 순간이나마 소설속의 주인공이 된 듯 했다.

<괘종시계>에서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시계포 주인 최씨와 이에 상극처럼 우격다짐으로 맞서는 삼손(장석도)을 통해 표현된다. 화가 난 삼손이 시계포로 들어가 괘종시계를 박살내 버렸던 것처럼 유년의 시간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한 허전함도 든다.
문득 마루 중앙을 위치했던 괘종시계에 무슨 큰 규칙이라도 있는 양 매일같이 밥(태엽)을 주던 기억이 난다. 그 부옇게 빛바랜 괘종소리는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선 5,60년대를 휘감은 ‘빨갱이’라는 색깔론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삼손과 어머니가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고 결국 삼손은 삶을 터전이 되어왔던, 반편이라 놀리던 이웃을 뒤로하고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떠나가 버리고 나자, 그 떠나간 자리의 공허는 너무나 크게 남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두 번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란 심증을 굳히고부터 그가 비우고 가버린 공간의 허탈은 더욱 컸다.”
마치 이문열님의 <아가>에서 언제나 성가신 애물단지지만 막상 없으면 허전한 당편이처럼 우리 유년시절의 한 귀퉁이를 채우고 있는 사람, 마치 쉬 꺾여버릴 것 같은 갈대 같은 사람들을 연상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순히 가십거리로만 무시했었던 건 아닌지...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설처럼 조금은 정형화된 결말이었지만 김주영님의 글을 통해 오늘 하루를 먼지 낀 옛 사진을 정리하는 듯한 아련함에 젖을 수 있었다.
마당 한 편에서 아이스크림을 움켜진 체 어색하게 웃던 옛 사진속의 장면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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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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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지인의 극찬을 통해 알게 된 <장미의 이름>, 하지만 그 삼엄한 분위기와 함께 일천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쉬 들지 못했던 책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책장속의 소품으로 놓아두기에는 ‘에코’라는 대작가를 너무 홀대하는 일인지라 이번 연휴를 맞이해서 책을 들었다.
따뜻한 방바닥, 스탠드 불빛아래 이불을 펴고 가장 편한 자세로 엎드린 체 오랜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 장미의 수도원으로 향한다.

수도원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 실낱같은 흔적을 뒤쫓는다. 낙숫물이 떨어지는 수도원의 지하통로를 지나는 것처럼 끝을 알 수 없는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마치 셜록홈즈가 되어 사건을 추리하는가 하면 제갈공명이 되어 범인을 추적할 전략을 듣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서관을 탐험할 때는 마치 영화 <큐브>를 연상하게 된다. 큐브(정육면체의 방)의 각 면에 접한 방은 탈출구인 동시에 생명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함정이었던 것처럼, 화학약품과 특수 장치를 이용해 외부인의 접근을 막아온 장서관의 각 방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비밀공간처럼 다가온다.
결국 수도원과 장서관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번의 나팔소리처럼 인간의 집착과 교회속의 모순을 하나씩 태워 버린다. 책장의 한 귀퉁이가 시커멓게 타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로 맹렬하게 타오른다.

이야기의 구성도 치밀하지만 무엇보다 그 사건을 풀어가는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가 돋보인다.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결말을 얻기까지의 가설과 추론의 미묘한 심리가 제자(아드소)와의 대화에서 슬쩍 비쳐진다. 그래서 오락영화의 ‘만능주인공’ 같은 진부함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 같다.
거기다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과정에서 보이는 저자, 에코의 박식함에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인문학적인 지식은 물론 철학과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해 다양한 설명과 논리들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어 책의 날개지에 장식된 “저명한 기호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볼로냐 대학의 교수”라는 말이 헛것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하지만 초반부(상권)의 지나치게 장황하고 치밀한 종교적 설명 때문에 로마교회와 기독교, 성서와 요한계시록 등의 기본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화려한 액션장면 전의 지루한 상황설명이나 이어폰 밖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잡음처럼 건성으로 넘긴 부분도 꽤 많았다. 굵직한 사건의 사이마다 자꾸 책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움베르토 에코’는 내게 너무 어려운 존재인가?
책 뒤표지의 “스트레가 상, 메디치 상 수상작”이라는 문구를 보자 이 책의 진정한 깊이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하는 부끄러움도 들지만 우선은 이것으로 만족하자! 언제고 기독교와 성서에 더 많은 관심과 지식이 있을 때 다시 정독해 보리라 생각하며 다음 책을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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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2006-06-19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에 나오는 중세 기독교의 이단과 정통에 관한 풍부한 역사적 사실은 주석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어, 꼼꼼히 따라가기만 한다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많이 어려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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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

텔레비전을 켜자 상대성이론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한창이다. 에너지와 질량, 빛의 속도와 이에 관련된 실험들. 그리고 우주와 중력에 이르기까지 조금은 난해한 내용이지만 쉬 눈을 땔 수가 없다.

나는 방송이 끝난 뒤에도 한참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머릿속에 떠도는 상대성이론을 정리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여전히 남는 ‘2%’의 부족함을 어찌할 수가 없다.
다음날, 인터넷 서점에서 E=MC2에 대한 책을 주문한다. 오래전에 눈도장을 찍어놓고 차일피일 미루어 온 책을 주문한다.


2. 현재

부스스한 머리를 한 촌부의 모습이나 카메라를 보며 장난스럽게 혀를 내뱉은 익살스런 모습의 과학자, 아인슈타인.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이 되어버린 E=mc2.
오늘아침, 11000Kg의 무게로 65Km/h로 돌진하는 버스 안에서 아인슈타인에 의해 재조명된 에너지의 이야기를 펼쳐든다.

마치 E=MC2라는 뿌리에서 뻗어져 나온 거대한 ‘트리’(나뭇가지형상의 그려진 그림)를 보는 것 같다. 단세포생물에서 유인원을 거쳐 오늘날의 인류로 진화된 것처럼, 단순해 보이는 공식에서 빛과 에너지, 지구와 우주로 그 응용범위를 넓혀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물론 과학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한 ‘에너지’의 혁명은 수많은 과학자와 냉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결국 원자폭탄으로 실현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과학은 다시 그 순수한 정신을 찾아 스스로의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2.5. 시간과 공간

쉽게 설명한 상대성이론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다양한 학설과 이론으로 진화해 온 E=mc2(상대성이론)은 과학적 기초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 보기에는 조금 벅찬 것도 사실이다.
책의 초반부에 상대성이론의 기초지식으로 설명한 E(에너지), =(등호), m(질량), c(빛의 속도), 2(제곱) 부분은 수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쉽게 읽혀지지만 좀더 전문적인 내용(실험이라든가 발명)에서는 책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더욱이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과학적 연구와 실험에서는 일부 단락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차대전 중, E=mc2을 이용하여 원자폭탄을 만들려는 독일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국의 작전은 영화속 장면처럼 흥미진진했다. 또한 히로시마 상공에서 투하되는 원자폭탄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생생한 묘사도 기억에 남는다.


3. 미래

책표지 뒷면에는 70회 생일을 맞은 아인슈타인과 이때 모인 과학자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양손을 모으고 겸손하게 서있는 모습이 인상 깊다.
어쩌면 과학도 이런 겸손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되어야할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미래의 첫 단추를 끼운다는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연구하고 활용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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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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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
오래전에 잊혀진 옛사랑의 추억이라 밀쳐버렸지만
사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쥰세이와 아오이.
쥰세이는 밀라노에서, 아오이는 피렌체에서
서로를 잊었다고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서로의 기억은
두 사람의 시간과 거리를 넘어 공존한다.

냉정한 현실에 가려진 과거의 열정을 찾아내는,
명화의 원색을 복원하는 쥰세이의 작업처럼
그들의 묵은 마음도 서서히 세정되어 간다.

하지만,
열정 속에 잠재되어 있는 냉정의 씨앗처럼
새로운 만남은 늘 현재의 이별 위에서 자라나고,
시리고 아픈 가슴을 달래듯이 아오이는 목욕을 한다.
또 한번의 이별을 감수하며 서로의 공간을 확인한다.

파란 표지에 담겨진 쥰세이의 이야기,
빨간 표지에 담겨진 아오이의 이야기.
두 연인을 오가며,
두 책을 오가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창가에 부서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나는 쥰세이가 되어 아오이에게 글을 쓴다.

"혹, 우리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오가더라도
 나, 쥰세이는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어.
 당신에 대한 믿음,
 그 하나만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사랑해, 아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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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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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몰랐기에 쉬 손에 잡히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 독서토론회를 한다는 광고와 이 책을 설명해놓은 문구에 호기심이 동해 진열된 책을 골라들었다.

소외된 이웃들의 이야기를 연작형식으로 담아놓았다.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펼쳐지는 비주류계층의 인생이랄까...
하지만 각 단편들은 ‘연작을 위한 연작’들처럼 억지스러워 보인다. 연작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한 급조된 듯한 우연이나 소설가의 작위적 설정 등이 소설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다. 이런 진솔한 이야기를 다루는 데는 지나치게 도식적인 형식은 아닐는지.
그래서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아픔이나 삶의 애환이 잘 표현되지 못하고 겉도는 듯 보인다. 인물설정과 배경묘사가 특정 형식을 그대로 답습해놓은 정형화된 단막극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그들의 입장에 서보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나만의 이질감인가? 책을 소개한 문구에서 봤던 “겪어보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그들을 잘 그려놓은”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소설’ 이상의 의미로는 와 닿지 않는다.
어쩌면, 난 그들의 색다른 경험과 이야기에 웃고 우는 일회성의 관객은 아닐는지. 막이 내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유랑을 떠날 것이고, 무심한 관객이었던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대로 살아갈 것처럼...

난, 번잡한 일상에서 타인의 일상까지 보듬을 여유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현실의 수레바퀴에 갇혀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는 걸까. 무감각하게 책을 읽는 내 모습과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 사이에서 설명하기 힘든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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