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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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바는 거침이 없고 대담하고 섬세했으며 야성적이었고 원초적이었고 감성적이었으며 사려깊었다. 순박하지만 저돌적이었고 따뜻하지만 날카롭고 직설적이었다. 그를 닮은 요한이 이 소설을 이끈다. 탁월한 연애술사에다 철학적 면모를 겸비한, 어디에서도 거리낄것 없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나(주인공, 화자)와 그녀 사이를 연결해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금은 웅장하고 장대해 보이는 제목의 소설이다. 띠지를 보니 "프랑스의 작고가 모리스 라벨은 1899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에... 그럼 우선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해 알아보자.
  스페인 공주였던 그녀는 두 살이라는 나이에 오스트리아 왕자 레오폴트 1세와 약혼했지만 어린 나이 탓에 혼기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얼굴도 모르는 신부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스페인에서는 공주의 초상화를 오스트리아로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주가 성장해가면서 유전적으로 내려오던 주걱턱이 점점 흉해지기만 했다.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최대한 흉하지 않게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공주 나이 15살에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사는 듯 보였지만 네째아이를 출산하다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그 피아노곡도 들어봤다. 뭐랄까,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안개 낀 낙엽 길을 거니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파반느(파반, pavane)가 궁정무곡을 의미하는 말이니 다시 말하면 젊어서 죽은 마르가리타를 위한 궁정무곡 정도가 아닐까. 무거운 제목과는 달리 상당히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제 소설 속의 그녀를 살펴보자.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중략) 그때까지 꽤 많은 못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세기를 대표하는 미녀를 볼 때와 하나 차이 없이,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에게도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p82)
  비운의 여인 마르가리타의 주걱턱이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간다. 스페인 왕녀의 기구한 삶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연애담으로 태어난 것일까. 그녀와 백화점 지하에서 같이 일하게 된 그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던 특출한(?) 외모의 그녀에게 묘한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요한의 중재와 협조를 통해 사랑의 빛을 키워나간다.

  남자의 사랑에서, 아니 인간의 사랑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사실이다. 보다 예쁘고 잘생긴 이성에게 몸과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지사. 몇 해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인간의 이런 모습을 보다 적응력 좋은 종족을 생산하고 보존하려는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라고 설명했지만 미인이나 훈남 앞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인간의 욕구,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된 인간 욕구의 내면을 은근슬쩍 들춰놓는다. 지난날의 연애 기억들과 오버랩 되면서 나의, 우리의, 당신의 '생물학적인 선별과정'을 되짚어보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외모라는 사소한, 아니 절대적인 기준 위에 난도질당한 체 세상 밖으로 내팽겨졌다. 어디에서고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어둠 속에서의 삶이 바로 그녀 자체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서부터 지난날의 상처가 하나 둘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 바로 사랑이었다.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p185)

  은연중에 갖게 된 외모에 대한 편견, 설사 그것이 생물학적인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혐오스러워진다. 나 역시도 외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 사회의 일원이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줬을 가해자였는지 모르겠다. 경쾌하게 읽혀지는 소설을 통해 내 안에 숨어있는 가면을 들켜버린 느낌이다.

  소설은 이렇게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전구에 사랑의 전기를 넣어주던 그는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에 애기치 못한 사고가 당하는데... 과연 그들의 사랑, '얼굴'을 뛰어넘는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직접 읽어보시라. 잔잔함과 찌릿함을 동시에 불어넣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치 일반판 영화가 발매된 뒤에 재편집되어 발매된 감독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다양함이랄까.  


  박민규 소설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인 것 같다. 일단 재미가 있고 그 속을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사랑에다 추리적인 요소까지 곁들인 기막힌 결말까지 갖고 있다. 그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져 들었다.
  마치 수세기 전의 일 인양 잊어버리고 지냈던 내 유년시절의 풍경들이 젊은 날의 사랑과 추억, 아픔과 함께 되살아났다. 그땐 정말 미치도록 사랑했고, 보란 듯이 퍼 마셨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일상이라는 쳇바퀴에 매몰되어 버렸다. 가족과 직장, 명예와 돈이라는 굴레에 묶여 젊은 날의 '사랑'은 모두 잊어버렸다. 

  세상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왕녀', 그녀를 위한 궁정무곡이 들리는 것 같다. 어쩌면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선율인지도 모르겠다. 부드럽게 울리는 피아노 선율은 우리의 과거를 일깨우며 말라비틀어진 사랑의 불씨를 움트게 했다. 저 땅 속 깊숙하게 숨어 있은 미미한 희망을 되찾은 기분이다.


* 책에 CD형태로 포함된 머쉬룸(Mushroom)의 음악이 일품이다. 잔잔하면서 경쾌한 재즈풍의 선율이 소설 속의 아름다운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봐도 머쉬룸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더 많은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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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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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담담하다. 그래서 더 서글픈 것일까. 현대사의 질곡에 묻혀버린 인생들이 깨어났을 때 세상 속으로 두 팔 벌려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유에 대한 열망도 새로움에 대한 기대도 이미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책이 기억난다. 시집을 연상시키는 얇은 매수에 수상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 얼핏 봐서는 개의 죽음에 대해 읊어놓은 산문집 같았다. 하지만 내용을 읽다보면 그 속에 담겨진 상황이나 비유가 우리 인간사의 모든 내용을 함축해 놓은 명상서적 같았다. 모호한 듯 하면서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와 닿는 의미가 매력적이었다.
  이번에 읽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역시 이런 부류에 가깝지 싶다.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엉겁결에 러시아 수용소에 갇히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로 수용소 생활에서의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전쟁이나 사상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수형생활의 소소한 소재를 통해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인간을 객관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써내려간 작은 일상 속에는 삶과 죽음, 가족과 이웃, 행복과 불행과 같은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듯 했다. 이야기가 전쟁과 수용소 생활의 참담함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사는 오늘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걱정, 불안한 미래에 대한 근심,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밀러의 글 속에 녹아있었다.
  그러나 어둡다거나 무겁다는 느낌을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랄까. 마치 아름다운 한편의 시집을 보는 듯, 부드럽고 감미로운 언어 속으로 유영하는 것 같다. 몸은 수용소 안에 있지만 마음만은 푸른 잔디밭을 산보하는 것처럼 신선했다.
  그래서일까,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 이름 밑에 적힌 옮긴이, 박경희 님의 이름도 계속 눈여겨보게 된다. 번역서가 아닌 한국 여류작가의 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드럽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문장도 간혹 보이지만 나의 문학적 한계 때문인지 뮐러의 글 자체의 난해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번역도 엄연한 '작품'이라는 말에 적극 공감하게 된다. 
 
  <숨그네>는 이야기 전개에 상관없이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바로 읽어 나가도 되지 싶다. 잠자기 전이나 약속을 기다리는 거리에서, 혹은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깐씩 읽어도 충분한 여운을 남기지 싶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지만 따로 한권을 준비해 가까이 두고 읽고, 또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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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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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사람들은 멀쩡한 음식들을 미처 먹어치우지 못하고 묵히다가, 또는 너무 많이 먹다먹다 질려서 버려대고 있었다. 비닐 속에서 녹아 미끈거리는 얼렸던 밥덩이며, 물주머니 같은 비닐에 가득한 굴이며, 말라비틀어진 생선이며, 녹지 않은 고깃덩이들, 겉잎사귀만 벗겨내면 아직도 싱싱한 노란 양배추, 새벽 수산시장에서 버려진 엄청난 내장들과 생선의 대가리 꼬리 또는 팔다 남은 멀쩡한 것들, 그야말로 이런 때 며칠은 꽃섬 사람에게 밤마다 잔칫날이나 마찬가지였다." (p94)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며 생활하는 꽃섬 사람들. 추석 명절이 지나자 잔칫날 같은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다. 얼마 전에 엄마와 함께 이사온 딱부리도 이곳 생활에 적응해 추석의 '버려진 해택'을 맘껏 누렸다.
  그날 밤, 딱부리와 땜통(딱부리의 이복동생)은 메밀묵을 먹고 싶다는 김서방네 아이를 만난다. 사실 김서방네 가족은 오래전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혼백들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딱부리와 땜통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빼빼엄마와 함께 묵과 막걸리를 이들에게 대접한다.
  그에 대한 대가였는지 김서방네 아이는 땜통에게 금붙이와 돈뭉치가 묻혀있는 곳을 알려준다. 큰돈을 손에 쥐게 된 딱부리와 땜통. 도심을 배회하며 물질문명에 취해보는 것도 잠시, 이들의 행복은 검붉게 타오르는 화마와 함께 산산 조각나 버린다...
 
  황석영이 말하는 세상은 새 것이 헌 것으로 바뀌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이다. 오늘의 슬픔이나 내일의 즐거움 역시 서로의 인과관계를 따라 돌고 도는 것. 결국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수많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중심가까지의 집과 건물과 자동차들과 강변도로와 철교와 조명 불빛과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과 주정꾼이 토해낸 오물과 쓰레기장과 버려진 물건들과 머지와 연기와 썩는 냄새와 모든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사람 모두가 지어냈다는 것을. 하지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짙푸른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p228)

  낯익은 세상은 낯선 세상에 대한 설익은 농담처럼 모순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낯익은' 것에 대한 반감, 혹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은 무안함이랄까. 미처 우리가 담아내지 못했던 근현대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다. 그저 스토리를 따라가며 공감하는 정도에서 그칠 뿐 더 이상의 감정이입은 되지 않는다. 오래된 정원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오래전에 죽은 혼령이 등장한다. 아마 그 때문인지 이야기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유식하게 말하면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반복되는 일상에 치어 살다보니 나 역시도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린 걸까. 소설을 대할 때도 그 속의 감성을 잡으려하기 보다는 이성적인, 논리적인 구성에 자꾸 집착하게 된다.
머리를 식혀야할 때가 온 것일까? 산문집이나 수필집을 읽으면 좀 괜찮아질까. 낯익은 소설을 통해 낯선 나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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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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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라기 보다는 숲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산문집 같았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아침 수목원처럼 무겁고 눅눅했다. 솔가지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섬세하고 위태로웠다. 

  '나'는 민통선 내에 위치한 국립 수목원의 전속 세밀화가로 채용되었고 이혼한 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안실장 밑에서 나무와 꽃을 그렸다. 내가 강원도로 거처를 옮기자 홀로 계신 엄마에게선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는 뇌물죄로 교도소에 있었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그런 부재를 오히려 반기는 듯 했다.

  '존내논', 할아버지가 키웠다는 말의 우스운 이름이 이야기를 흐리는 것 같다. 커다란 생식기를 내밀었을 때 붙여진 이름은 존레논의 부드러운 음성과 겹치며 희극화 된다.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이 연상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 <노르웨이 숲>(상실의 시대)도 덩달아 떠오른다. 
  아마도 작가는 이 노래의 서정성을 염두에 넣고 글을 쓴 것 같다. 하지만 그 푸른 여운은 '존내논'의 일화를 만나면서 산산이 부서져버린 느낌이다. 상황을 무시한 지나친 위트가 글의 집중도를 떨어뜨린다고나 할까... 

  '나'는 수목원에 있는 동안 한국전쟁 때의 유해발굴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거기서 뼈 그림을 그리며 김중위를 알게 된다. 군인 같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현실에 동화되지 못한체 기름처럼 떠다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가석방 되었고 나는 안실장 아들(신우)의 미술지도를 맡게 된다.

  자폐증을 앓고 있던 신우처럼 서로 단절된 듯 이질적이다. 그 모순된 상황 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인간상들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룬다. 마치 아침 안개 속의 수목원을 걷는 느낌이랄까. 옷깃 사이로 느껴지는 이슬방울의 감촉이 신선하면서도 낯설었다. 베일 속에 가려진 듯 보일 듯 말듯 한 분위기,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미묘한 소설이다.

  숲에 가려진 인생 같다고나 할까. 알 수 없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과거 속의 메아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내 젊은 날의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
  나를 둘러싼 알 수 없는 미래와 모호한 현실이 적막하게 와 닿는다. 작가는 어쩌면 독자의 이런 혼란을 유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젊음은 어땠는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막막한 안개 속에서 나를 찾게 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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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프린트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수영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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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선가 이 책을 소개한 글을 봤던 기억이 있다. 인간복제 문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꼭 읽어봐야지 다짐해놓고는 한동안 잊고 지내온 책이다. 그러다 우연히 직장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에 빌려보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 뒤라 그럴까. 책의 서두에 해당하는 프롤로그만 읽었을 뿐인데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몇 마디의 오고가는 말로 사랑에 빠져버린 연인 같다고나 할까.

  "2주 전, 나의 쌍둥이 자매이면서 엄마이기도 한 이리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멘트로 시작되는 책은 유명 피아니스트인 이리스(엄마)가 시리(나)를 복제하게 된 과정을 회고하면서부터 전개된다. 
  다발경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으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이리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복제하게 되고 이를 스스로 임신함으로써 "쌍둥이 자매면서 엄마이기도 한" 시리를 낳게 된다. 하지만 엄마의 욕망에 의해 복제된 시리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시리는 엄마(이리스)의 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엄마의 집착이 강열해질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찾지 못한 체 '작은 이리스'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의 생명선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고 나의 생명선은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어요.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선 결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나 아니면 엄마, 엄마 아니면 내가 살아남을 테지요? 내가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우리 두 사람은 둘로 갈라졌어요. 내가 드디어 모든 사실을 파악하게 되고 불화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마침내 도래한 거예요." (p122)

  1인칭으로 시작되어 여러 시점을 넘나들며 자신과 타인의 심리를 오가는 모습은 '복제'라는 소재와 맞물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순응하고 갈등하는, 고민하고 저항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일인다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노련한 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넘나드는 감정의 변화는 암전 사이를 넘나드는 연극처럼 극적이었기에 책을 읽는 동안 캬를로테 케르너라는 작가의 이름을 계속해서 쳐다보게 되었다. 
  또한 매끄러운 번역이 일품이다. 마치 우리나라에 오래 살아온 토종 작가의 글처럼 군더더기가 없고 매끄럽다. 원문의 우수함도 있겠지만 역자의 부드러운 번역이 이 책을 더 빛내는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책이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책의 구성이나 내용을 볼 때 여러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몇 해 전 어느 신문에서 이미 인간복제가 성공했으며 그 중 일부는 일상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어느 과학자의 주장을 들은 기억이 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미 우리의 삶 속에도 복제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어로 자리 잡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복제문제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아직 낮은 것 같다. 단순히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막연함만 있을 뿐 이것이 갖고 올 우리사회의 영향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계기로 점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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