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너의 심장 소리가 들려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믿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 빠지직 소리, 삐그덕, 쉿쉿, 구구 소리, 똑똑 떨어지는 소리, 콸콸 흐르는 소리, 짹짹 소리 사이로 틀림없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느릿하면서도 차분하고도 고른 소리, 왠지 모르게 세상의 모든 소리와 음조와 목소리의 근원 같았다. 그것은 강하면서 동시에 섬세했다.
(...)
그는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가슴 쪽으로 머리를 가만히 기울였다.
바로 거기였다.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였다.
-162
이 책은 꼭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가운데 읽어야만 한다.
그저 두근두근...하는 것만이 심장이 내는 소리인줄로만 알았는데, 무언가가 서로 연결된 사람에게서는 이렇게 특별한 심장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첫 눈에 반하는 이성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평소보다 좀 더 가쁜 호흡, 아니면 빠르게 뛰는 심장 정도의 표현이 다이겠거니
했는데...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에서처럼 눈은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것을 가리고 있다는 것에 동감하게 되었다.
눈이 안 보이는 소년 틴 윈이 특이한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을 때, 그 소리의 근원은 미밍이라는 소녀의 심장 박동이었다.
내 눈은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바로 이 구절 주위를 맴돌았다.
나로서는 느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통해서 심장 박동을 느끼는 특이한 소년 틴 윈이 너무나 놀라워서.
사람이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시각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게 없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독특하고도 놀라운 경험을 뭐라고 해야 하나.
[심장 박동을 듣는 기술]은 아주 아름답고 특별한 사랑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숨죽여 읽게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내가 소년 틴 윈이 가지지 못했던 시력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 것이
감사하게 생각되었으며, 동시에 나도 시각을 배제한 채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 번 해봤으면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일어나게 만드는
...여하튼 머릿속에서 평소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돌아다니게 만드는 책이었다.
"불길은 동시에 타올랐죠. 나무는 잘 말랐고, 불길은 삽시간에 장작을 집어삼켰어요. 그날 대기는 아주 잠잠했어요. 여기 기둥이 곧장 하늘로
올라갔죠."
(...)
아주 조용했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누구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죠. 심지어 불길에 휩싸인 장작도.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탔죠."-386
건조하면서도 맑은 그 날의 하늘을 떠올리면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왜 갑자기 서럽지도 않았는데, 설움이 북받치듯이 욱욱 거리는
소리가 베어나왔는지 모르갰다.
공교롭게도 그 때는 집안 식구들이 다 모여있는 일요일 오전이어서 그 먹먹한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안타깝다.
게으름쟁이 아이들은 TV앞에서 떠들고 심지어 남편은 나와 식탁에 마주앉아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이 아름다운 책의 막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느껴지는 뻐근한 슬픔 과 뭉클한 떨림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어둠 속에서, 완벽한 고요 속에서 둥글게 퍼지는 사랑의 기억을 곱씹어 보고 싶었다.
혹시나 둔한 내 남편이 "왜 우냐?"고 물으면, 어설픈 답을 생각하느라 이 소설의 여운이 주는 황홀한 감동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고개를
뒤로 돌리고 눈물을 쓰윽 닦아 내었다.
마음 속 들끓음이 잦아들 때까지 속으로 울음을 삭혔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될 이들에게는 다 잠든 시각, 혹은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에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읽어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책을 읽을 때보다 읽고 나서 더 흔들리는 마음.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가한 일요일 오전의 평범한 가정집 풍경 속, 그 시각에 오직 나만,
암막이 걷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영화관에 덩그러니 남아 하염없이 스크린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모습으로 덩그러니 떠
있었다.
"월 가의 유력한 변호사,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줄리아 윈이 법과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날 아침, 줄리아 윈의 아버지이자 월 가의 성공한 변호사였던 틴 윈이 사라졌다. 그리고 4년이 흐를
동안, 연락이 없었다. 줄리아의 어머니가 보내 준 소포 속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러브레터와 아마도 그 대상인 듯 싶은 미밍이라는 여자의 주소를
발견한 그녀는 미얀마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상황을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는 게 줄리아의 일상이었지만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에 관한 일에만큼은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미얀마에 도착해 무더위로 가득한 이국의 찻집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늙수그레하고 추레한 행색을 한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4년간
그녀를 기다렸다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우 바라고 했다.
딸인 줄리아조차 알지 못했던 아버지 틴 윈의 과거가 우 바의 입을 통해 밝혀지기 시작했다. 점성술을 믿었던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틴 윈은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로부터 저주의 씨앗이라며 버림받고 앞마저 볼 수 없게 된다. 그를 불쌍히 여긴 옆집 아줌마 수치는 그를 돌보아주다가
수도원에 보내는데...
틴 윈은 어느 날,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나 아름다고 기품 넘치며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미밍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단지
며칠 동안 미밍으로부터 연락이 끊겼을 뿐인데 혹시 헤어지게 된 건 아닌가 의심하는 동안 틴 윈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사랑의 열병을 앓을
정도로 미밍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토록 절절한 둘 사이가 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을까. 틴 윈은 업보를 갚으려는 부자 고모부에 의해
강제로 수도 양곤으로 소환되고, 그곳에서 눈을 뜨게 되나, 다시 뉴욕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되며 두 사람은 그 후 35년이란 시간을 헤어지게
되는데…….
"우 바, 난 독실한 사람이 아니네. 내가 진심으로 믿는 것은 단 하나, 사랑의 힘이지. "
당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14
왜 틴 윈이 공부를 마치고 곧바로 미밍에게 가지 않았는지, 왜 줄리아의 어머니와 결혼했는지...줄리아가 품었을 법한 의문이 내 머릿속에도
가득했지만, 틴 윈과 미밍을 추억하는 이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바치는 축제같은 제의를 읽는 동안 그 의문이 스르륵 흩어져버렸다.
여자들은 그릇과 바나나, 망고, 파파야가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도 균형을 잘 잡고 걸었다. 남자들은 초와 향, 꽃을 들고 있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롱기, 깨끗한 흰색 셔츠와 재킷이 저녁 햇살에 빛났다. (본문 중..)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라는 말 속에서 다시금 생명을 얻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동안 낯선 호텔에서 묵는 동안 줄리아에게 고요한 밤은 고역이었겠지만, 이 믿지 못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는
나는 고요한 밤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어떤 사랑이야기보다도 여운이 긴 이 이야기를 곱씹으며 나는 며칠 밤이고 꼬박 샐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