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만 더...[천국에서 온 첫번째 전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면...이 아니라 전화선이 연결된다면..
하늘에서 지상으로 연결된 저 은빛 선을 잡고 무슨 말부터 하고 싶은가?
[천국에서 온 첫번째 전화]

1870년대 초반 전화를 처음으로 발명했다고 하는 벨이 인간의 목소리를 이동시키는 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의 장인이 될 가디너는 비웃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군"
벨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차에 올라탔고 자신의 발명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으며
자신의 전화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세상의 삶은 달라졌다.
'헬로'라는 말을 처음 만든 토머스 에디슨은 '영혼의 전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해 세간의
관심을 샀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의 기이한 발명을 추적하고 있다.
"난 삶이 물질처럼 파괴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요."
"만일 또 다른 실존 속에 인격들이 있어서...우리와 연락하기를 바란다면...이 장치가
그들에게 기회를 줄 겁니다. "
에디슨의 말이 실현되기라도 한 것일까,
미시간 주 콜드워터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캐서린이라는 여인이 천국으로부터 걸려온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천국으로부터의 전화를 받은 것은 캐서린만이 아니었다.
4년 전에 죽은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은 테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죽은 아들 로비의
전화를 받은 콜드워터의 경찰서장 잭 셀러스...
특종의 냄새를 맡은 전국의 기자들은 곧 이 이야깃거리에 관심을 가졌고, 취재경쟁에는 불이
붙었다.
과연 천국에서의 전화는 실재하는 것인가?
천국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말에 이 마을의 교회에는 신도가 늘어났고, 전화를 받은
인물들에게는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콜드워터는 곧 가장 핫한 곳이 되어 여기에도 저기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 기회를 빌어 물건을 팔아치우려는 기회주의자들이 생겼고, 신문과 방송은 덩달아 이야기를
부추겼으며 사람들은 이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천국에서 온 전화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반기든지, 거부하든지.
선택받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전화할 때마다 치유의 빛을 느꼈지만 어떤 이는
더욱 커진 슬픔, 심지어 우울을 느꼈다.
"그만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해. "
계속 뒤로 끌려가는 느낌과 함께 또렷한 상실감을 느낀 한 여인은 천국이 마음속에만 있을 때
더 위로가 되었다며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여기, 이 미친 상황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서는 한 남자, 설리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없다며, 진짜 상실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실과 거짓구분하고자 나섰다.
과연 설리는 진실을 밝혀내고 이 소동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부터 최근작[도르와 함께 한 인생여행]까지 미치 앨봄의 책을
읽었지만, 이번 이야기가 가장 극적인 면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느닷없이 천국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설정은 황당했지만, 전화를 통해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에서는 왠지 모를 찡함이 느껴졌다.
법륜 스님은 [인생 수업]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딱 3일만 슬퍼하고 정을 끊어라"
어떤 이유로든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정을 딱 끊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건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을 놓아버려야 허우적거리지 않게된단다.
그를 위해서라도 가벼운마음으로 보내줘야 하고, 나를 위해서도 가볍게 떠나 보내줘야 하고,
남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아야 한다나...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 딱 잘라지는 게 아니지 않는가.
스님이 말씀을 내려주실 때 너무 단호하신 것이 아니었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적어도 자비의 불법을 실현한다는 분이 이렇게 냉정하다니...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스님의 말씀도 틀린 건 아니라는 걸 곧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어 황망한 마음을 다스리기에 어떤 방법이 좋을까?
천국은 없다, 아니면 천국은 있다?
종교인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법륜 스님의 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애도하는 마음"의 기간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한 번만 더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하고 싶다는 욕망.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차라리 그 욕망이 일어나지 않게 끝까지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선택할 것
같다.
다시 한 번만 더...에 모든 것을 걸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가까운 이를 잃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천국에서의 통화에 무척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나는...아직...가까운 사람을 잃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잃고 나서 커다란 상실감에 헤매일 때 이 책을 다시 읽어본다면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부디 냉정한 뇨자라고 몰아붙이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