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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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하게 흐르는 경관 삼 대의 긍지 [경관의 피]

 

쇼와 **년 , 식의 연호가 붙은 연대는 언제 읽어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연호를 읽을 때만큼 일본소설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때도 없다.

너무나 이질적인 전통이지만 일본의 과거를 되살리기 위한 필수요소인 연호를, 강요 아닌 강요로 읽어내며 [경관의 피] 첫 장을 시작하게 된다.

 

화염은 이미 탑의 꼭대기 층가지 휘감고 있었다.

백육십 년 전에 지은 오층탑은 열기에 바들바들 떨기라도 하듯 몸을 움츠렸다.(...)

쇼와 32년 (1957) 7월, 바야흐로 장마가 개려는 시기의, 새벽녘의 일이었다. -6

 

덴노지 주재소 인근의 탑에서 발생한 화재 장면이 프롤로그로 제시된다.

이 프롤로그는 안조 세이지, 안조 다미오, 안조 가즈야 삼대에 걸친 경관 이야기를 이어주는 중요한 장면이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변변한 일거리조차 없던 시절 공사현장 날품팔이를 하던 안조 세이지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려 한다. 경시청이 대대적으로 순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고 순사에 지원한 그는 경찰에 채용되고 경찰 훈련소에 들어가서 세 명의 친구를 만난다.

하야세 유조, 가토리 모이치, 구보타 가쓰토시. 이 셋은 그 후로도 안조 집안과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융통성 없는 옹고집에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고 남이 나쁜 짓을 할 때 잠자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을 보면 안조 세이지는 경찰관이 되기에 꽤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동기생 중에서 가토리는 출세해서 경찰서장이 되고 싶다고 했고, 구보타는 현장에 먼저 뛰어들고 싶다고 했으며 하야세는 단호하게 사복형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후에 얼추 비슷하게 이들의 꿈은 이루어진다.

마을의 경찰 아저씨를 꿈꾸던 세이지의 꿈은 아내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주재소에 상주하며 지역 경찰 업무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주재소가 없다고 하지만 "막걸리 순사" 라는 한직이 있는 모양이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소한 시비를 다루고, 시간 나면 들에 나가 일하는 이들과 막걸리를 기울이며 거나하게 흥취를 돋우는 경찰 아저씨.

격무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시골로 가서 "막걸리 순사"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남편이 있어서 "주재소"의 풍경이 꽤나 가깝게 그려진다.

그렇다면, 나도 "막걸리 순사"의 아내로 시골에 제대로 정착해서 살 수 있을까.

나는 뜬금없이 이마에 지렁이 몇 마리가 그어진 노후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세이지가 덴노지 주재 경관이 된 후 인사를 돌면서 전임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녀석한테는 아들이 셋 있었지. 다들 어른이 되었는데 그중 한 놈도 경관이 되질 않았어."

경찰로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경관은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을 그르쳤다는 소리다, 라는 구절에서 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이 잡혔다. 경관 삼 대 이야기라니,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여주고 그것을 보고 자란 이들의 반듯한 이야기겠구나. 기대했다.

하지만 너무 바른 길로만 뻗어가는 길은 심심하고 재미가 없다.

어딘가, 삐뚤어질테다!! 하는 녀석 하나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어디서 어떻게 휘이~ 비튼 이야기를 보여 줄까, 궁금해졌다.

 

주재 경관이 되었다고 수사원 흉내는 내지 말라던 선배의 충고가 있었지만 두 건의 살인사건을 연계시켜 의문을 품게 된 세이지는 결국 덴노지 오층 탑이 불타던 날, 그 장소를 지키지 않고 이탈했다가 다른 곳에서 사고사하고 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순직으로 처리되지 못했다.

 

세이지의 두 아들 중, 장남이었던 다미오는 아버지의 동기생이었던 삼촌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마치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진학도 할 수 있었지만 경찰에 입문한다.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일반 경찰이었지만 실상은 경시청 공안부 스파이로 활동한 것이었다. 공안 스파이로 일하는 동안 심각한 정신적 외상 장애를 입게 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가 근무했던 바로 그 주재소에 돌아오면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 세이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겠다는 열의가 지나쳐서였을까...이 대째인 경관 다미오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록 순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으로 위안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경관 이 대의 죽음에는 분명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경관은 되지 말라는 작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안조 가즈야는 대졸 경찰관으로 채용된다.

삼대 경시청 경찰관.

삼 대째에 이르면 세월은 꽤 흐르고 흘러 2000년대에 가까워지게 된다. 경찰학교를 졸업한 가즈야는 경관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내부고발자 역할을 떠맡아야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가, 염려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경관의 피가 그냥 이어져 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지능적으로 진화한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도 당하고,저렇게도 당했던 그 울분을 삼 대째에는 씻어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즈야의 활약은 앞선 이 대보다 월등히 탁월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경찰소설임에도 경찰소설이 지녀야 할 덕목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연호가 사용되던 시절은 약간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그 부분을 지나고 나면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세이지 대의 이야기가 손자 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끊이지 않고 물흐르듯 연결되는 것을 지켜보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그야말로 유장한 대서사시다.

한 집안, 그것도 경관 삼 대로 이어져 오는 집안의 비밀이 끝내 밝혀지고야 마는데...

그 비밀이라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전쟁이라는 큰 상처가 많은 이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시킨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한 집안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크게 도드라지게 하여 보니 그 상처가 아물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장난 삼아 읽었던 만화 <시티헌터>도 생각나고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 도 생각난다.

하나는 타락한 듯 보이는 전쟁영웅이자 탐정 이야기지만 [경관의 피] 이면에 흐르는 내용과 상통하고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경찰소설의 이야기라 표면적으로 비슷해보인다.

 

어찌 되었건 삼 대를 이어 경관을 지낸 집안의 비밀이 그렇게 교훈적이거나 모범적인 내용이 아니었지만 마무리의 찐한 감동은 더할 나위 없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식으로 오리무중 암담한 시기에 빠져 있을 때, 자네의 부친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경관은 아니었다네. 라는 말에 현혹당해 잠시 아버지를 의심했던 아들은 곧  눈부신 경외감을 되찾았다.

경찰 이야기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가족의 이야기가 아닐까, 했던 번역자 의 말에 진정 공감한다.

일이 늦어지면 사실상 주말 외에는 같이 식사할 시간도 내기 어려운 요즘의 아버지들.

아이들에게 늘상 뒷모습만 보여주기 일쑤고, 같이 부대껴 놀아야 할 주말에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 코스프레를 하느라 근엄한 표정만을 짓고 있는 아버지.

우리 아이들은 그래도, 아빠의 부드러운 속마음을 눈치 채 주고 있기를 바란다.

훗날, 쑥스럽게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들어와서 아이들 앞에 짠! 내놓는 아빠를 찰칵!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잠자는 자기들 엉덩이를 툭툭 쳐주고 조금만 건드리면 반사적으로 쭉 뻗어내는 다리를 쭉쭉이로 펴주는 아빠의 울퉁불퉁한 손길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경찰이 되면 안 된다. 다른 많은 직업들이 있으니까~ 좋은 걸로 골라 잡아!!" 라는 남편의 말 너머에는 내 뒤를 이어 경찰이 되어라~ 하는 당부의 뜻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훗날 막걸리 순사의 아내도 되고, 또다른 경찰의 어미도 되는 것이야?

이렇게 김칫국물을 훌훌 ~ 들이마셔 본다.

도도하게 흐르는 경관 삼 대의 긍지.

우리 집안에도 흐르지 말라는 법 없다!!

 

가즈야의 활약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면, 근간인 [경관의 조건]을 기대하시길!!

나도 얼른 읽고 싶다. [경관의 피] 를 읽고 느낀 감동이 사그라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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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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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가 초대하는 이상한 나라 [불연속 세계]

 

온다 리쿠는 맥주 애호가. 나는 온다 리쿠 애호가.

 

온다 리쿠가 그려내는 세계는 분명 현실이지만 꿈과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만나는 이상한 세계를 어른이 되어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책의 표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모자를 눌러 쓰고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저 시커먼 사내는 앨리스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체셔고양이나 험프티 덤프티를 연상시킨다.

나무 위나 담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 그렇고 평범한 감각으로 느끼기에 "이상"하다는 것이 그렇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좀 더 짙다는 것이 다를까.

온다 리쿠가 펼쳐보이는 이야기를 액자라 한다면 꼭 저 표지와 같이 액자의 위 쪽에 저 음습한 사내가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책 이전에 [달의 뒷면]을 읽은 것이 올바른 수순이었을까.

[달의 뒷면]에는 물의 도시 야나쿠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의문의 실종사건을 풀기 위해 꿈같이 이어지는 수로의 마을에 초대된 쓰카자키 다몬이 등장하는데...

다몬이 등장하는 중편만을 따로 묶은  것이 이 책이다.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의 다몬.

현실 속에서 분명 대형 음반사 프로듀서로 일을 하고 살고 있음에도 그의 정신은 어디 다른 불연속 세계와 잇닿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평범하지 않는 것에 묘하게 잘 공감하는 사람.

 

 

첫 번째 이야기 <나무 지킴이 사내>는 온다 리쿠가 늘 산책하곤 하는 천변에 있던 집을 모델로 쓴 이야기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꿈도 작가가 직접 꾸었던 꿈이라고.

온다 리쿠의 머릿속이 갑자기 궁금해졌으나, 내가 그런 꿈을 꾼다 한들, 이렇게 몽환적인 소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현실에 닿아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세계로 훅~ 빠져들어버리게 될 것만 같은, 온다 리쿠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온다 리쿠를 놓을 수 없다.

 

그 순간 다몬은 공기가 물렁하게 일그러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노인이 느닷없이 히죽 웃었다. 지금까지의 품위 있는 얼굴이 거짓인 양, 그야말로 입이 쭉 찢어진 것 같은 불길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굴이 해골처럼 칙칙한 색으로 변하고 움푹 꺼진 안와가 보인 듯했다.

-63

 

바로 이런 놀랄만한 장면의 전환이 그야말로 물흐르듯이 전개되기에 이상한 나라를 그려내는 온다 리쿠의 능력은 특출나고 또 그만큼 탁월하다.

 

이 작품집의 첫머리에서 만난 나무지킴이 사내의 이미지가 끈질기에 뇌리에 들러붙어 있어서 이 책을 다 읽는 동안, 다몬이 만나게 되는 이야기마다에는 그 남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는 <글루미 선데이>처럼 음악을 들으면 죽고 싶어지는 저주받은 노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세이렌"을 찾아나서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꽃이 아름다운 절들을 돌면서 세이렌이 불렀다는 <산 소리>를 듣고 가사에 의문을 품은 다몬. <산 소리>가 죽음의 상징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춰 세이렌의 정체를 찾아나선 다몬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신은 세간에 속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요." 그 사람은 다몬을 믿고 이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글쎄 어째 다몬을 이렇게 꿰뚫어 본 그 사람의 말 덕에 다몬의 존재가 더 으스스해진다.

 

<환영 시네마>는 영화 촬영 장면을 보고 나면 꼭 주위에서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빨간 개, 8밀리 필름, 낫을 든 아이. 세 사람의 상처. 드문드문 드러나는 과거의 편린들을 주워 모으다 보면 꽤 오싹한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짧은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좋을 것 같다. 아주, 뒷부분의 반전이 끝내준다.

 

마지막 <새벽의 가스파르>를 읽으면 검은 사내의 감시를 받는 듯한 상황 속에서 내내 다몬이 펼치는 이야기를 읽다 문득 궁금해지곤 하는,,,다몬은 어떤 사내인가? 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밤의 열차 차창에 데스마스크처럼 떠오르는 얼굴을 쳐다보며 인생을  열차의 궤적과 오버랩시키는 다몬.  다몬과  친구들은 내일 아침 도착할 다카마쓰에 사누키 우동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자판기 에서 맥주를 한가득 뽑아서 밤을 샐 예정이다. 야간열차 객실에서 연필을 굴려 제비뽑기를 한다. 그들은 순서대로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꽤나 운치 있는 여행인 것 같아 언젠가 따라 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포인트는 "무서운 이야기."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그들이 했던 이야기보다 진짜 무서운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새벽의 가스파르>를 읽으면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다몬을 알고 싶어 책에 바짝 다가들었는데, 진짜 다몬은 맨 마지막에 나오니 말이다.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맥주를 홀짝이며 이 책을 읽으면 맥주의 차가움보다 더 서늘하고 오싹한 기운을 한껏 느낄 수 있을 텐데.

현재 선라이즈 세토와 선라이즈 이즈모의 자판기에는 소프트드링크밖에 없으니 애주가 독자들은 승차하기 전에 술을 사둘 것을 권한다는 온다 리쿠의 조언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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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 다이어리
에마 치체스터 클락 지음, 이정지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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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점 플럼's 라이프 [플럼 다이어리]

 

 

 

참고로 나는 요즘 TV자막에 나오는 문구에 PD들이 "개섭섭"이라든지 "개재미" 같은 말을 넣는 것을 무지 싫어한다.

PD의 권력이라면 권력이랄 수 있는 자막 에디톨로지가 , 아무리 '예능'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 이런 식으로 재미만을 위해 오염된 언어 전파에 이용되어야 하느냐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리뷰 제목에 "개성만점"이란 말을 썼다 하여, 자막의 "개~~"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당연히 이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에마이지만, 에마의 애견 플럼은 위와 같이 말했다.

글은 전부 자기가 쓴 거라고.

이 말을 당당하게 하는 플럼은 그리하여 "개성만점"인 강아지로 비춰진다.

달리 말하면 에마와 플럼의 관계가 상상 이상으로 친근하다는 뜻이 되겠다.

반려동물과의 생활을 그리는 만화 들을 보면 강아지나 고양이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아예 그들이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일본만화 [오늘의 네코무라]씨에서는 고양이가 가정부로 일하면서 주인집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기도 한다. 

비채에서 나온 [콩고양이]도 애묘인 부부 일러스트레이터의 손을 빌어 탄생한 귀염 작렬 콩알이, 팥알이가 주인가족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플럼은 에마와 어떤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까?

플럼의 Life는 앞의 동물들이 등장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자신이 이 일기들을 썼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애당초 에마가 주인이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정도이니 말이다.

 

 

뉴욕에서 온 에마의 친구 앤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플럼을 보며 분명 에마가 그린 그림일 테지만, 지금 현재 플럼은 머릿속에서 자기랑 닮은 매력적인 업스타일 머리의 앤을 보며 기발한 발상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앤의 업스타일은 뉴욕의 빌딩숲을 닮은 것 같다. 이곳 런던에는 높은 빌딩이 없어서 그런지 사람들도 하나같이 납작하고 지루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분명 에마의 다이어리지만, 죄다 플럼의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라서 좀 읽다가는 플럼이 주인이고 에마는 그저 동거인일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에마가 의도한 것이라면, 그래 , 나는 그냥 퐁당, 플럼의 세상에 확실히 빠져 들었다.

 

 

물을 특히나 좋아하는 플럼은 일기 속에서 여러 번 물에 퐁당퐁당 빠진다. 작은 웅덩이나 개울에 빠지는 것도 좋아하지만 커다란 수영장에 홀로 "풍덩" 하거나 엠마와 함께 빗속에서 춤추는 것도 좋아한다.

위 두 컷은 내가 이 일기를 읽으며 가장 좋아하게 된 그림이다.

환상인듯, 현실인 듯.

비가 내리고 있어도 유쾌해지는 그림이다.

그 뿐인가,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달려 바닷가에 도착한 플럼은 "내 생을 통틀어 이렇게 신나고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소감을 말했다. 아마도..."멍, 멍?"^^

 

플럼은 올림픽에 내보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멋진 다이빙 실력을 선보이는가 하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를 보며 철학자같은 관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스코틀랜드에서였던가, 친구 샐리의 카누의 앞쪽을 차지하고 앉아 바람에 털을 휘날리는 플럼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에마 때문에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적도 있지만 플럼은 여행도 꽤 많이 다녔다.

일기가 시작된 첫 날, 패딩턴 역에 에마의 친구를 만나러 간 것을 그린 건, 아마도 많은 경험을 하게 될 거라는 암시이지 않았을까.

 

공원에 나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호불호가 확실한 플럼은 족보를 얘기하는 아름다운 개 "밀리"와 심드렁한 대화를 나눈 후에 "족보"가 뭔지 궁금해하면서 혈통을 따지는 개에 대해 편치 않은 마음을 드러낸다. 나는 잭러셀과 푸들이 섞인 휘핏의 잡종이거든!

하지만 족보 있는 강아지이든 잡종이든 모두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지.

온통 검은 색으로 뒤덮인 까닭에 손틉을 깎을 때에는 가끔 "꽥!" 하고 소리를 질러 에마를 깜짝 놀라게 하고는 간식을 얻어내기도 하는 영리한 강아지다.

 

"우리는 달릴 수 있을 때 절대 걷지 않고

수영할 수 있을 때는 절대 달리지 않는다."

 

플럼의 라이프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여왕"같은 도도함을 지녔으며 주변 환경에 따라 처신할 수 있는 사리분별력을 갖춘 이 녀석이 정말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플럼이 이런 다이어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플럼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일 때문에 혹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에미의 따스함 마음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를 닮았지만 마음만은 환한 햇살처럼 반짝이고, 다른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신한 매력을 가진, 개성만점의 플럼!

만나게 되어 기뻤다!!

너도 부럽고 에마도 부럽구나~~

우리 집 고슴도치들은 제발, 내가 주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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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세상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고은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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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다음은 "이것"을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또 다시 멍해진다.

 

산다는 건..그런 게 아닌가?

"그냥" 자연스레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하루도 보내고 저런 하루도 보내며 매일매일을 이어간다.

나의 매일매일이 이어져서 나만의 역사가 된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나는 나만의 역사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인문학에서 관심을 두는 세 가지 질문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세 가지 질문은 첫 번째가 나는 누구인가? 다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고, 마지막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이다.

나 혼자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과정은 단조롭고 단순하다.

내가 둘러쳐놓은 테두리 안에서만 정답을 모색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우리 시대의 석학들이 이 인문학적 질문에 다가가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12개의 등불을 기꺼이 밝혀주었다.

시인, 철학과 교수, 사회운동가, 행복마을 이사장, 문학평론가, 명상프로그램 개발자 등 다양한 분야에 몸 담고 있는 분들의 지혜는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암중모색"을 하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 지팡이가 되어준다.

 

한자리에서 12명의 말을 얻어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행운이려니와 해답을 얻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또다른 질문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중요한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냥" 산다고 말한 나를 확 꼬집고 비틀어 깨우는 말이다.

'어떤 것이 훌륭하게 사는 것이냐' 라는 질문을 낳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조언들이 들어 있는데 어떤 이는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징비록>을 거울 삼아 우리 내부를 통합하고 그 통합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량을 키우라고 말한다.

잘 살려면 책을 읽는 것이 좋고 특히 시를 읽으면 말귀가 밝아지고 관용이 생긴다고 한다.

소월이 쓰다 만 것을 쓰고, 윤동주와 이상 등 요절한 많은 시인들과 작가들이 살다 만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시인이 되었다는 고은 선생은 세월호를 거울삼아 필연적인 결실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필연보다 우연의 황홀경을 내 시의 행방에서 체험합니다."-157

뭔지 모르지만 꽤 멋있어서 당장 시를 몇 수 읽어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되겠다거나 나는 누구여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우리는 무엇이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거나 행복하려면 먼저 이것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 그냥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고 살다가 문득 고개 돌려 뒤를 바라본 순간, 지금까지의 인생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세상에 절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131

 

이상은 시와 타자의 목소리를 이야기한 황현산 선생의 말씀인데, 바로 이 부분에서 가슴 속 답답하게 꽉 막혀 있던 뭔가가 툭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아~ 시원하다."

그래, 바로 이런 위무의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와 비교하며, 비교당하며 사는 것에 시달리던 내 인생은, 아마도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시적자유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뭔가를 읊조리는 시인의 내면세계와 같이 억압하는 바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여러 석학들의 견해를 듣다 보니, "그냥"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이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맙게도 구체적인 목록으로 제시해준 분도 계셨다.

준비하는 삶, 실행하는 삶, 주인공이 되는 삶,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는 삶, 마지막 만남을 소중히 하는 삶.

 

매일 아침 똑같은 태양을 마주하지만 마음가짐에 따라 그날 하루가 "그냥" 그 날이 아닐 수 있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았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순서다.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는 그 날까지 나만의 해답을 찾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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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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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다 지워도 가슴에 남는 시 [시인 동주]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는 것인가.

추억도 추억 나름이지,

주권 잃은 나라에서 숨쉬는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기억 속에 아로새긴 참담한 풍경들을

그는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부끄럽다 참회 하며 썼다 지우고 썼다 지웠을 수많은 시들.

무엇을 그리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한숨 지었을지...

그가 남긴 시들은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갔지만 그의 시들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말간 표정과 맑은 마음으로 시를 적어내려가던

해사한 용모의 동주는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그를 기억하던 벗들에게도 동주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동갑내기 사촌지간이었던 몽규와 함께 경성에 첫발은 딛은 동주는 잘 알려진 것처럼 연희전문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늘 단짝으로 붙어다니던 동주와 몽규는 간도 용정 사투리를 쓰는 것이 비슷했지, 다른 면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활달하고 언변이 뛰어난 몽규, 조용하고 말이 없던 동주.

중앙 일간지 신춘 문예에 몽규가 떡하니 당선된 것에 자극을 받아서였을까,습작노트를 본격적으로 쓰게 된 동주는 계속 시를 썼지만 몽규는 임시 정부 군관 학교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아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힘 없는 나라의 지식인으로서 문학의 본질, 문학의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고민하던 동주는 시에 있어서도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절망의 끝에 결국 동주는 닿아 본 것일까. 끝없이 빠져드는 깊은 늪 속을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거짓말처럼 고요히 몸을 떠오르게 하는 부력의 그 순간을 느낀 것일까. 동주의 새로운 시는 맑고도 담담했다. -161

 

연희 전문을 다니며 엷은 연정을 느끼기도 하고, 꽤 긴 산책을 즐기기도 했던 동주의 인간적인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는 가운데, 휘파람으로 곡조를 흥얼거리거나 부드러운 테너로 노래를 부르던 동주가 떠올랐다. 예술에 관심이 많고 음악을 좋아했던 하숙집 주인 덕에 북국의 침엽수림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 소리를 머금은 러시아 음악가의 레코드판을 듣던 동주에게도 그렇게 빛나던 찰나의 순간이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눈웃음과도 같은 젊은 날의 한순간이 있었다.

 

동주는 그동안 쓴 시를 모아 열 여덟 편의 시를 묶었다. 졸업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 했으나 서문을 대신해 쓴 짧은 글이 한 편의 시 같기도 하여 오늘날 "서시"로 불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동주는 몽규와 자주 어울려 다니다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바닷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혀 시도 빼앗기고 모국어도 빼앗긴 동주는 하루종일 노역에 시달리면서 점점 멍한 눈빛이 되어 갔다. 감옥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은 후로부터 점점 기력이 쇠한 그는 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꽃다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해방 이후, 동주의 벗 처중 등은 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다.

일본에 붙어 호가호위하던 사람들이 판을 치는 문학계에 동주의 시집은 묵직한 울림을 던져주었을 것이다.

우리말로 된 우리 시.

가슴 속에 울분과 처량함을 담고 살았을 사람들에게 맑은 의지를 심어주었던 시.

스스로는 부끄럽다 하였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고 되뇌어 보면 슬프고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시인 동주는 떠났다.

하지만 동주는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

썼다 지워도 가슴에 남는 시를 썼던 시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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