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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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하게 흐르는 경관 삼 대의 긍지 [경관의 피]

 

쇼와 **년 , 식의 연호가 붙은 연대는 언제 읽어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연호를 읽을 때만큼 일본소설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때도 없다.

너무나 이질적인 전통이지만 일본의 과거를 되살리기 위한 필수요소인 연호를, 강요 아닌 강요로 읽어내며 [경관의 피] 첫 장을 시작하게 된다.

 

화염은 이미 탑의 꼭대기 층가지 휘감고 있었다.

백육십 년 전에 지은 오층탑은 열기에 바들바들 떨기라도 하듯 몸을 움츠렸다.(...)

쇼와 32년 (1957) 7월, 바야흐로 장마가 개려는 시기의, 새벽녘의 일이었다. -6

 

덴노지 주재소 인근의 탑에서 발생한 화재 장면이 프롤로그로 제시된다.

이 프롤로그는 안조 세이지, 안조 다미오, 안조 가즈야 삼대에 걸친 경관 이야기를 이어주는 중요한 장면이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변변한 일거리조차 없던 시절 공사현장 날품팔이를 하던 안조 세이지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려 한다. 경시청이 대대적으로 순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고 순사에 지원한 그는 경찰에 채용되고 경찰 훈련소에 들어가서 세 명의 친구를 만난다.

하야세 유조, 가토리 모이치, 구보타 가쓰토시. 이 셋은 그 후로도 안조 집안과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융통성 없는 옹고집에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고 남이 나쁜 짓을 할 때 잠자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을 보면 안조 세이지는 경찰관이 되기에 꽤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동기생 중에서 가토리는 출세해서 경찰서장이 되고 싶다고 했고, 구보타는 현장에 먼저 뛰어들고 싶다고 했으며 하야세는 단호하게 사복형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후에 얼추 비슷하게 이들의 꿈은 이루어진다.

마을의 경찰 아저씨를 꿈꾸던 세이지의 꿈은 아내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주재소에 상주하며 지역 경찰 업무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주재소가 없다고 하지만 "막걸리 순사" 라는 한직이 있는 모양이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소한 시비를 다루고, 시간 나면 들에 나가 일하는 이들과 막걸리를 기울이며 거나하게 흥취를 돋우는 경찰 아저씨.

격무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시골로 가서 "막걸리 순사"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남편이 있어서 "주재소"의 풍경이 꽤나 가깝게 그려진다.

그렇다면, 나도 "막걸리 순사"의 아내로 시골에 제대로 정착해서 살 수 있을까.

나는 뜬금없이 이마에 지렁이 몇 마리가 그어진 노후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세이지가 덴노지 주재 경관이 된 후 인사를 돌면서 전임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녀석한테는 아들이 셋 있었지. 다들 어른이 되었는데 그중 한 놈도 경관이 되질 않았어."

경찰로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경관은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을 그르쳤다는 소리다, 라는 구절에서 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이 잡혔다. 경관 삼 대 이야기라니,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여주고 그것을 보고 자란 이들의 반듯한 이야기겠구나. 기대했다.

하지만 너무 바른 길로만 뻗어가는 길은 심심하고 재미가 없다.

어딘가, 삐뚤어질테다!! 하는 녀석 하나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어디서 어떻게 휘이~ 비튼 이야기를 보여 줄까, 궁금해졌다.

 

주재 경관이 되었다고 수사원 흉내는 내지 말라던 선배의 충고가 있었지만 두 건의 살인사건을 연계시켜 의문을 품게 된 세이지는 결국 덴노지 오층 탑이 불타던 날, 그 장소를 지키지 않고 이탈했다가 다른 곳에서 사고사하고 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순직으로 처리되지 못했다.

 

세이지의 두 아들 중, 장남이었던 다미오는 아버지의 동기생이었던 삼촌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마치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진학도 할 수 있었지만 경찰에 입문한다.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일반 경찰이었지만 실상은 경시청 공안부 스파이로 활동한 것이었다. 공안 스파이로 일하는 동안 심각한 정신적 외상 장애를 입게 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가 근무했던 바로 그 주재소에 돌아오면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 세이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겠다는 열의가 지나쳐서였을까...이 대째인 경관 다미오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록 순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으로 위안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경관 이 대의 죽음에는 분명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경관은 되지 말라는 작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안조 가즈야는 대졸 경찰관으로 채용된다.

삼대 경시청 경찰관.

삼 대째에 이르면 세월은 꽤 흐르고 흘러 2000년대에 가까워지게 된다. 경찰학교를 졸업한 가즈야는 경관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내부고발자 역할을 떠맡아야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가, 염려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경관의 피가 그냥 이어져 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지능적으로 진화한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도 당하고,저렇게도 당했던 그 울분을 삼 대째에는 씻어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즈야의 활약은 앞선 이 대보다 월등히 탁월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경찰소설임에도 경찰소설이 지녀야 할 덕목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연호가 사용되던 시절은 약간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그 부분을 지나고 나면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세이지 대의 이야기가 손자 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끊이지 않고 물흐르듯 연결되는 것을 지켜보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그야말로 유장한 대서사시다.

한 집안, 그것도 경관 삼 대로 이어져 오는 집안의 비밀이 끝내 밝혀지고야 마는데...

그 비밀이라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전쟁이라는 큰 상처가 많은 이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시킨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한 집안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크게 도드라지게 하여 보니 그 상처가 아물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장난 삼아 읽었던 만화 <시티헌터>도 생각나고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 도 생각난다.

하나는 타락한 듯 보이는 전쟁영웅이자 탐정 이야기지만 [경관의 피] 이면에 흐르는 내용과 상통하고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경찰소설의 이야기라 표면적으로 비슷해보인다.

 

어찌 되었건 삼 대를 이어 경관을 지낸 집안의 비밀이 그렇게 교훈적이거나 모범적인 내용이 아니었지만 마무리의 찐한 감동은 더할 나위 없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식으로 오리무중 암담한 시기에 빠져 있을 때, 자네의 부친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경관은 아니었다네. 라는 말에 현혹당해 잠시 아버지를 의심했던 아들은 곧  눈부신 경외감을 되찾았다.

경찰 이야기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가족의 이야기가 아닐까, 했던 번역자 의 말에 진정 공감한다.

일이 늦어지면 사실상 주말 외에는 같이 식사할 시간도 내기 어려운 요즘의 아버지들.

아이들에게 늘상 뒷모습만 보여주기 일쑤고, 같이 부대껴 놀아야 할 주말에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 코스프레를 하느라 근엄한 표정만을 짓고 있는 아버지.

우리 아이들은 그래도, 아빠의 부드러운 속마음을 눈치 채 주고 있기를 바란다.

훗날, 쑥스럽게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들어와서 아이들 앞에 짠! 내놓는 아빠를 찰칵!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잠자는 자기들 엉덩이를 툭툭 쳐주고 조금만 건드리면 반사적으로 쭉 뻗어내는 다리를 쭉쭉이로 펴주는 아빠의 울퉁불퉁한 손길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경찰이 되면 안 된다. 다른 많은 직업들이 있으니까~ 좋은 걸로 골라 잡아!!" 라는 남편의 말 너머에는 내 뒤를 이어 경찰이 되어라~ 하는 당부의 뜻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훗날 막걸리 순사의 아내도 되고, 또다른 경찰의 어미도 되는 것이야?

이렇게 김칫국물을 훌훌 ~ 들이마셔 본다.

도도하게 흐르는 경관 삼 대의 긍지.

우리 집안에도 흐르지 말라는 법 없다!!

 

가즈야의 활약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면, 근간인 [경관의 조건]을 기대하시길!!

나도 얼른 읽고 싶다. [경관의 피] 를 읽고 느낀 감동이 사그라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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