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찾아드는 불안과 부끄러움 [홀드
타이트]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는 아들은 입학 첫날 새 운동화를 산뜻하게 차려 신고 집을 나섰다.
오랫동안 신으라고 꽤 여유 있는 사이즈의 운동화를 준비해 준 이모 덕분에 손가락 하나 둘은 너끈히 들어갈 만큼 헐렁한 신발이었다. 엄마인
나는 새학기를 잘 보내고 오라는 마음으로 운동화 끈 끝에 리본을 만들어 주고 아들에 대한 염려의 마음도 함께 꽉 졸라매었다.
한 걸음 ,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기를...
신 나고 즐거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충만하기를...
유치원 때부터 툭하면 친구들이 괴롭힌다며 울먹울먹 하던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솔직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집에서는 누나랑
투닥투닥 할 때면 누나보다는 자기 편을 들어주는 엄마가 있어 오히려 누나가 울먹울먹 하곤 했는데, 이제 학교 가면 누가 제 뒤를
돌봐줄까...
여전히 어려 보이고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울집 막내의 뒷모습이 마냥 안쓰러워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한 달 간의 학교 적응 후 담임 선생님과의 첫 상담 시간.
질질 짜고 울고 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했던 아이에 대해 청천벽력 같은 선생님의 평가가 내려졌다.
"오늘도 말 안 들어서 혼 났는데, 음...수첩에는 3건이 적혀 있네요."
"화장실에서 소리지르고 뛰어다닌 것, 복도에서 옆 반 아는 여자친구 놀려서 울린 것."
"그리고 옆 짝이 자기 목을 조르는 장난을 쳤는데, 그만하라고 하지 않고 '더 해봐, 더 해 봐.' 하며 오히려 부추겼네요. 자기 잘못을
지적하면 "예" 하고 받아들이는 법이 없고요."
요즘 들어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지, 학교가 너~ 무 편해서 그런 것인지, 엄마인 내 눈에도 개구쟁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긴 했는데, 정작
선생님으로부터 너무나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보니 정신이 멍~ 해졌다.
"어머니 마음은 이해하지만 옆의 친구를 나무라시기 보다, 내 아이는 내가 단도리 한다 생각하시고, 가정에서 지도 잘 해 주십시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네, 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보는 내 아이와 학교 생활하는 내 아이가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뭐랄까...
자기에게 이로운 말만 하고 불리한 말은 쏙 빼놓은 아이에 대한 배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그동안 순한 양으로, 어리광쟁이 막내로 내 무릎을 파고들며 눈웃음 짓던 아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뭐, 대단한 범죄에 연루된 것도 아니고 아이로 인해 수업이 엉망이 될 정도로 난동을 피우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아이가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4학년인 딸은 일기에
"일기를 쓰고 있는데 낮에 피아노 학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괜히 눈물이 났다."고 적어 놓았다.
일기를 읽은 걸 들키지 않으려니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었고, 안 물어보자니 궁금해서 견딜 수 없고...
진퇴양난에 빠진 나는 그냥 정면돌파하기로 했고, 아이는 엄마가 일기를 읽었다는 것 때문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별 일 없었다" 며
끝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내 아이에게게 일어나는 일을 세세하게 알고 싶어하면 병이겠지만, 혹시나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혹은 문제가 일어나기 전의 전조 증상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지 않았을까. 그래도 프라이버시를 끝까지 지켜주었어야 했을까.
할런 코벤의 [홀드타이트]를 읽은 후에 불안과 부끄러움이 나란히 찾아들었다.
언제까지 자식을 보듬어 주어야 하며 언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하는지.
부모로서 지켜주어야 할 자식의 비밀은 어느 선까지가 한계인지.
만약 내 아이에 대한 의심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
수많은 '만약에'가 이 작은 새가슴을 두드려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열 여섯 살 애덤은 의사인 아빠와 변호사인 엄마. 말 잘듣고 상냥한 여동생 질과 함께 나무랄 데 없는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애덤이 6개월 전 아무 설명 없이 아이스하키를 그만두겠다고 한 이후 애덤의 아버지 마이크는 애덤의 모든 것이 수상쩍게만 보인다. 침울해지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에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얼마 전 친구인 스펜서가 학교 옥상에서 자살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아들의 행동은 영 미덥지가 않다. 애덤의 컴퓨터에 감시장치를 설치한 부모는 의문의 이메일을 발견하고 애덤의 방황이 스펜서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가출한 애덤을 찾아나서는 부성애 가득한 아버지 마이크는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린다.
한편 지능은 높지만 계속해서 광기에 시달려온 내시라는 남자는 피에트라라는 여자와 짝을 이뤄, 무자비한 살인 두 건을 연이어 저지른다.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밝혀지게 되지만 과거의 어느 지점에 상처를 간직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인면수심의 범행을 저지른
것을 정당화할 만한 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부녀를 강간한 남자는 살해당했지만 그녀는 그의 아이를 낳게 되는 비극.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것이 불러일으킨 엄청난 2차, 3차의 커다란
범죄.
아이의 미래를 위한답시고 현재의 작은 잘못을 덮어놓고 무마해줄 수 있는 정도의 권력자로서 권력을 남용하는 부모.
부모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뭔가 불만을 표출하고 싶어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아이들.
이 수많은 "꼬투리" 들이 교묘하게 맞물려서 거센 물줄기로 인해 휙휙 꼬여가는 세탁조의 빨래들처럼 단단하게 얽혀 가는데 ...
가출, 납치, 살해 처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이 마치 순리인 양 차례차례 벌어지기만 하고 한 번 벌어진 일들은 깊고 길게 패인
칼자국처럼 쉽사리 봉합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어떤 장면에서든 마주칠 수 있는 일들이어서 더욱 섬뜩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현실인 듯 현실 아닌, 현실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마지막의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부모가 아이들에게 신경 쓰고 있는 만큼 아이들도 부모의 행동을 눈치 채고 있다는 사실.
어쨌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하나로 통하는데 그 마음들이 시작점이 다른 평행선으로 나란히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시작점이 다르다면 어느 한 지점에서 교차하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 아닌가.
아직 1학년이라고 너무 쉽게 아이의 잘못을 용인하고 묵인하는 부모가 되어서 속으로 곪아들어가는 상처를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반성을 한다.
내 아이를 믿어주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인 부모이지만 가장 먼저 뒤통수를 맞을 수 있는 사람도 부모임을 알아야겠다.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이 못난 부모의 마음은 그래도 내 자식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서 꼬오옥 보듬어 안아주고 싶다.
순진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얼굴을 마구 부벼대고 싶다.
홀드타이트. 꼭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이의 손? 아니면 세상의 냉혹하고 무자비한 잣대?
내 아이를 고작 한 달 경험한 선생님의 냉정한 평가를 믿고 아이를 몰아쳐야 할지, 내가 품에 안고 키워오면서 보아온 품성과 행동들을 믿어야
할지.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 내 마음에는 죽죽 사선으로 내리긋는 빗줄기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