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춤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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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나는 환상 속 나비 [나와 춤을]

 

 

 

 

 

온다 리쿠의 본격적인 단편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달의 뒷면] 이후 '다몬'을 주인공으로 하여 옴니버스 식으로 이어진 단편 5개가 합쳐진 [불연속 세계]를 읽어본 것이 다이다.

온다 리쿠는 장편이어야 제대로 읽는 맛이 난다고...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불연속 세계]를 읽어본 이후로는 단편으로도 충분히 환상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었다.

[나와 춤을]은 그 확신에 도장을 한 번 더 "꽝" 하고 찍어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19편의 단편들은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짝을 이루기도 하며 예전 작품의 후편 성격을 띠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변심>에서는 동창회 연락을 묻는 전화를 마지막으로 사무실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다가  그가 남긴 흔적을 시선으로 따라가니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더라.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그를 꼭 찾아 주어야겠다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지만 <오해>라는 단편에서 그 뒷이야기가 짠~ 하고 나타난다. 어느 정부 부처에서 기밀이 누설되고 있다. 내부 사람에 의해 데이터가 빼돌려지는 것 같다는 보고가 올려졌다. 수사 팀에서 내사를 위해 팀을 꾸렸고 자신들만의 암호를 정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개에 관한 이야기를 쓴 <충고>와 고양이를 쓴 <협력>은 역시 짝을 이루는 엽편.

 

<변명>은 모노드라마의 형식으로 한 여인이 무대에 오른다. 구직 활동 중인 학생이라는 설정으로 어떤 일의 상황을 혼자 쭉 설명한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숨은 뒷이야기라고 한다.

 

역시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들어본 적 없고 읽어본 적 없는 이야기들 뿐이라 무슨 작품의 뒷이야기라고 해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단편 하나하나가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좀 긴 것은 좀 긴 것 대로.

무작정 시작하고 약간 아쉬운 듯 할 때 끝나버리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단편의 매력.

 

무엇보다  나와 춤을]에서는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배경을 상상만 해도 저절로 이야기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달의 뒷면]에서 물의 세계를 다루었을 때도 느꼈지만 어쩜 상황 설정이 물흐르듯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주사위 7의 눈>보이지 않는 7의 나라에서 나온 여자가 선동 행위를 한 사람을 체포하는 장면은 무지 비현실적이지만 금도끼, 은도끼 설화의 친숙함 때문인지 어느덧 현실로 받아들이고 만다.

 

 

<소녀계 만다라> 수시로 움직이는 교실 너머로 부쩍부쩍 다가오는 범선. 세계를 움직이는 '그녀'가 움직이는 만다라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소녀는 끔찍한 모습에 긴긴 비명을 질렀다.

이것 역시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만을 잔뜩 키워놓은 채, 아쉽게도 끝나고 말았다.

 

이집트와 에게 해, 교토.

온다 리쿠의 시선이 닿는 지구상의 어떤 곳이라도 곧 SF영화의 배경이 되어버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다음 단편을 읽으면 보다 확실히 온다 리쿠가 창조한 세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도쿄의 일기>

간토 대지진 직전이 배경인 영화는, 의자 속에 남자가 있고 그 의자 위에서 남녀가 정사를 나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미스터리 작가의 단편이 원작이라는데...-266

 

나는 일본의 자동판매기가 영 불편하다. 꼭 로봇 같은 게 인격이 느껴진다. 괜히 뿅뿅 소리를 내면서 불빛은 깜박이지 (도쿄는 점멸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이후 세 시간 뒤 날씨 흐림' '뜨거우니 주의하세요'하고 말을 걸어온다.(...)

이윽고 그들은 서로 연락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정보를 주고받아 단일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을까.-275

 

벚나무 숲에 피의 비가 내린다.

일본 문학작품의 제목이 아니다. 실제로 벌어진 사실이다. (...)

귀신 가면을 쓰고 긴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춤추고 있다.

피리와 북을 든 작은 동물들이 발치를 달려간다.-279

 

비행기에서 친구가 준 꾸러미를 풀어보니 색색의 예쁜 별사탕이 나왔다.

조그만 분홍 별을 살며시 입에 넣었다.

은은한 단맛과 함께 하나의 우주가 입 안에서 팡 터졌다.-295

 

 

 

 

어느덧, 나는 팔랑팔랑 가볍게 날개를 펄럭이며 온다 리쿠가 펼치는 세상을 가볍게 내려다보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었다.

내가 나비인 것인지, 나비가 나인 것인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푹~ 빠져 있었다.

온다 리쿠의 [나와 춤을]을 읽는 동안, 세계는 조금씩 움직였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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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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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레, 중독의 끝은 어디인가  [데빌스 스타]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읽으면서 따뜻한 목도리를 두르고  당근 코를 단 한겨울의 눈사람이 섬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너무나도 두툼한 [스노우맨]의 첫 책장을 넘길 때는 이 많은 분량의 소설을, 아무리 추리소설이라지만, 하루만에 후딱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해리 홀레 시리즈에 좀 익숙해 지고 나니, 해리 홀레 시리즈만큼은 하룻밤에 후딱 읽어내는 것 따윈 일도 아닌걸.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아직 다 나오지 않은 미출간작을 어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게끔 되었다.

이번 [데빌스 스타] 역시 "과연 해리 홀레 시리즈"라 할 만큼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속도와 긴장감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는 아마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해리 홀레의 매력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거슬러 올라가며 읽는 역순의 순서를 취하게 되었지만, 해리 홀레가 짐 빔에 절어 살게 된 역사를 한눈에 꿰게 되면서는 방탕한 그의 생활도, 늘 술을 들이부어야만 잠이 드는 그의 버릇도 이해하게 된다.

 

 

 

 

최초 작품인 [박쥐] 이후로 세 번째 작품인 [레드 브레스트]로부터  본격적인 해리 홀레 시리즈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리즈의 기본적 구조가 잡혀나가고 해리의 캐릭터가 구체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레드 브레스트], [네메시스], [데빌스 스타] 이 세 작품을 흔히들 '오슬로 3부작'이라고 말한다.

시리즈 초반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보다 정상적인 신체, 명료한 정신 상태를 가진 해리를 만나볼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몸의 흉터가 늘어나고, 한두 군데씩 절단되고, 정신적으로 어둡고 피폐해져 가는 과정이 이어지지만...

그래서 더더욱 해리 홀레를 형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갈수록 불행해지는 해리 홀레 홀레를 보면서 같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처럼 축축 처지지만 그게 또 해리 홀레에게 중독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잘 적응되지 않지만 이번 [데빌스 스타]의 배경은 찌는 듯한 여름이다.

늘 오슬로의 추운 날씨를 배경으로 스산하게 펼쳐지던 이야기가 확 분위기를 바꿔 한여름의 태양빛을 유난히도 자주 거론하는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면 눈이 먼다고 했던가. 무서운 연쇄 살인 현장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만들어준 요 네스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엘리베이터 표식으로 각 장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

왠지 " 띵~" 소리가 나면 몸이 자동적으로 엘리베이터에 실리고, 중간에 문이 열리는 법 없이 한 층 한 층 오르게 되면서 익숙한 긴장감에 몸을  맡기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밟아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의도한 바대로 긴장감은 층을 오를수록 더해만 간다.

 

포의 <검은 고양이> 에서와 흡사하게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갇힌 마부의 아내가 결국 숨졌지만 입안에 감돌던 돼지의 피 맛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고 벽을 통과해 걸어다니기 시작했다...는 괴담을 시작으로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이어진다.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방식조차 기괴하게 시작한 [데빌스 스타]는 연쇄 살인의 형태 또한 기이하기 그지없다.

스물 세 살의 미혼 여성이 대낮에 자기 집 욕실에서 총을 맞아 사망한다. 그녀의 손가락은 절단되어 사라졌고, 눈꺼풀 속에서는 빨간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그 이후 족족 일어나는 실종 사건에는 연관된 단서가 있었다. 숫자 5와 데빌스 스타.

펜타그램에 의미를 부여한 해리는 그것을 좇아 가 보지만 진짜 범인은 쉽게 잡혀주지 않는다.

의식을 치르는 듯한 살인의 환상을 꿈꾸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서들 때문에 해리는 한동안 동분서주 해야만 했다.

 

 

사건은 7월의 휴가철, 직원들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때 일어났으므로 기피 대상 1호였던 해리 홀레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경찰청 강력반 최고의 형사 톰 볼레르에게도.

겨울 내내 해리는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엘렌 옐텐이 살해된 사건을 재수사 하는 데만 신경을 쏟다가 톰 볼레르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했다. 경찰청 안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심증을 가진 해리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일로부터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해리와 톰은 사건을 추적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얽힌 원한을 풀어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해리가 엘렌의 사건의 집착할수록 곁에 있던 라켈은 점점 더 불안하기만 하다.

 

"앨런 튜링이라고 들어 봤어? 튜링은 암호를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가 어떤 관점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어."

(...)

"말하자면 글자와 숫자를 넘어선느 차원이라고 할 수 있지. 언어도 넘어서는 차원. '어떻게'는 모르지만 '왜'는 알려주는 대답. "-274

 

살인 사건과 더불어 해리 홀레와 톰 볼레르의 대결 또한 이번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줄기이다.

"데빌스 스타" 사건을 수사하면서 끝내 알고 싶어했던 "왜"는 범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지만 톰 볼레르와의 대결에서 해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을지는 미지수다.

해리와 톰 볼레르는 악연으로라도 이어져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알코올에 의지하고 몸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복수에 집착한 해리가 잡고 싶어했던 것과, 톰 볼레르가 바치고자 했던 모호한 "충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한 줄기가 아니었을까.

가는 길이 엇갈리긴 했지만 그들의 작가가 묘사하는 그들의 모습 뒤켠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악'과 함께 가는 길을 택한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인지.

 

오슬로 3부작을 끝으로, 해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목격한 그는 더 어두운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라켈과 함께 하는 행복한 한 때가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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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언제나 광속 - 시 한 수, 그림 한 장
김주대 지음 / 현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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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가득한 시,서,화 [그리움은 언제나 광속]

 

 

 

시인의 감성을 따라가기는 언제나 버겁다.

 

시인은 풍경을 읽는 자가 아니라 풍경 속의 일부가 되어 풍경과 나란히 걷고 있는 자

라고 밝힌 김주대 시인.

 

그 말 앞에 또 한 번 겸손하게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허투루 보아 넘기는 풍경 하나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고

그 의미를 똑똑 두드려 맑은 편경 같은 울림을

전달하는 시인.

 

시 한 수에

상상을 보태어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시서화가

황홀하리만치

풍부하게

펼쳐지는

책을 보는 것도

참. 좋다

 

 

먹의 번짐 하나만으로도

기가 막힌 풍경을 연출할 수 있다니..

 

달의 지평선에 지구가 뜨면

어느 날 나는 거기 있을 것이다

 

그림을 보고 글 한 줄 읽었을 뿐인데

내 몸 가득 묵향이 번지고

아름다운 말들이 스며든다.

 

 

요즘은 손글씨를 많이들 선호한다.

키보드로 찍어눌러 탄생한 글자들은

종류가 많고 다양하긴 하지만

왠지 글쓴이의 감정이 쏙 빠져버린 듯

알맹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내 온전한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쓴

손글씨가 그리워지는 요즘.

 

연필보다 펜이나 만년필

그보다는 붓.

작은 감정의 기복 하나도 다 담을 수 있어서

선 하나 그어도

그을 때마다 다른 맛이 느껴지는

그 붓의 맛과 멋을

이 책에서 미치도록 맡았다.

 

<죽음>

그 한 번의 경험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죽음은

가장 위대한 통찰

가장 먼 탈출

-170

 

 

 

 

 

마음의 소를 찾아 여행을 떠나라고 권유하는 듯.

우연히 맞아떨어진 "봄"이라는 같은 시간에

나는 무엇을 찾아 떠나볼까.

 

빌딩 꼭대기에서 연푸른 새싹을 찾아가는 소의 마음을 헤아려 볼까나.

 

 

무엇보다 싱숭생숭해지기 쉬운 봄에

내 마음 한자락을

꽉 붙잡아주는

 

시,서,화

 

묵향 가득한 시, 서, 화를  찬찬히 넘겨 보며

참으로 호사스러운

봄날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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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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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제대로 이별하려면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라 [환상의 여자]

 

이상하게도 가슴 시린 추리 소설이다.

한 남자의 순정이라고 할까. 그 순정의 끝이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이야기였다.

과거에 얽매여 현실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아니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한 남자가

과거의 여자를 만났을 때.

잘 숨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 속의 뭔가가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

남자는 그녀를 잠깐 만났을 뿐인데, 그녀도 잠깐의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그 한 순간의 접점으로

여자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남자는 그 여자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아내와 이혼한 뒤, 장인 어른의 법률 회사에서 나와 스스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어느날 회의 참석차 길을 나섰다가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녀, 료코를 만났다.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만났으나 가장 사랑하는 여자인 료코와는 5년 만의 재회였는데...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죽음을 알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28

 

변호사 사무실의 전화에 남겨진 그녀의 목소리는 무슨 일인가를 의뢰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 의뢰건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그녀, 료코.

그녀는 '라오'라는 클럽의 마담이었다.

장례 절차를 의논하던 그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가 만났는데,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료코는 "료코"가 아닐지도 모른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을리게 하는 부분이었다.) 만일 그녀가 료코 본인이 아니라면 이것은 틀림없이 또다른 사건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형태로 범죄를 꾸며 료코로 행세하게 된 것이라면, 도대체 왜?

 

그가 그녀의 과거에 대해 확실히 물어봐두지 않은 것은 그 자신에게도 씻을 수없는 상처가 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그걸 후회하게 될 줄이야. 아니 애시당초 서로에게서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기에 자석이 끌어당기듯 서로 강렬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의 자살 후 반년 동안 마음을 감추고 묵묵히 학교에 다녔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료코는 그런 그를 간파하고는 "괴로우니까 도망친다고 생각하겠지만, 도망치니까 괴로워지는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비슷한 짐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그걸 꿰뚫어보았다고, 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이 그녀의 과거 행적을 찾아 헤매는 것이라 좀 지리한 면이 있었다. 언젠가는 밝혀 질 일인데 뭐 이렇게 질질 끄나. 이 변호사란 양반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무실의 오래된 비서까지도 말리는, 불이 일고 있는 게 뻔한 곳에 섶을 지고 뛰어드나,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딱딱한 껍질 속에 너무나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닌 여자로 그녀를 회상하면서도 그 웃는 얼굴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던 그가 이제 와서 그녀의 과거를 파헤쳐 본댔자, 뭐가 달라진다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야쿠자의 대모격인 가오루코는 진실을 알고 있을까. 가오루코는 자신의 선에서 덮을 테니 스모토에게는 이쯤해서 손을 떼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덮어두려, 덮어두려 해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이 시키는 일은, 석연치 않은 부분을 끝까지 추궁해야 한다며 그를 이끌었다. 야쿠자간의 세력 다툼, 22년 전 지역 개발에 얽힌 음모, 권력자들의 잇속 챙기기 등의 거대한 흐름 중 료코는 어느 대목에서 희생당한 것일까.

 

 

그 상태에서 며칠간 책을 덮었다.

'뻔하고 뻔한 결말로, 그녀의 과거는 드러나고 남자는 진짜 료코를 찾아낸 뒤 그녀의 "의뢰"를 해결해주었다며 마음 홀가분해 하겠지.'

그런데, 괜히 마지막 남은 몇 장이 굉장히 신경쓰였다.

역시 추리소설은 마지막 반전이 중요한데, 이걸 안 읽고서는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할 수 없지.

다시 그 마지막 반전을 확인하려고 책을 펼쳤다.

결론.

역시 추리소설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그녀가 끝내 밝히지 않은 과거에는 그녀가 '료코'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확실히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섣불리 판단했던 것 이상의 얽히고 설킨 인생사가 반영된 것이었다.

변호사 스모토와 그녀가 서로를 한 눈에 알아보게 된 이유와도 서로 통한다고 할까.

어쩐지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즈음에는  내 눈꺼풀의 잔영에 오래 전 영화,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리빙 라스베라스>가 겹쳐졌다. 세라와 벤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만 갔지만 그 둘의 사랑은 보는 이를 전율하게 했었다.

음울함, 보고 있기 고통스러울 만큼의 좌절감, 하지만 끝끝내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둘만의 진하고 깊은 이해. 

스팅의 한없이 우울한 OST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인생의 겨우 몇 달을 함께 했을 뿐인데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는 시점에서 생각나는 단 한 사람, 스모토 세이지에게 편지를 남겼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비밀까지도 고백하고 있는 편지를 읽고서야...

스모토는 그녀와 제대로 결별할 수 있었으리라.

 

처음 시작은 날카로운 칼의 베임으로 스스슥,

가운데는 하드 보일드한 과거 추격전으로 와다다닷, 

마지막은 아스라한 여운을 남기는 순수 그 자체로 스르륵.

 

[환상의 여자]는 제목 그대로 환상적인 추리 소설로 기억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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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5-04-2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추리소설일 듯해요.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손을 뗄 수 없은 것 같아요.

남희돌이 2015-04-21 10:40   좋아요 0 | URL
네. 중반이 좀 지루하긴 했지만 마지막의 반전을 읽으면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선화에게 - 정호승 시선집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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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자락에 '해우(解憂)' 하다 [수선화에게]

 

 

예전에 학교 앞에 <차밭골>이라는  전통 찻집이 있었다.

 

바람결에 얻어 들은 문자 하나 있었으니

풍다우주  (風茶雨酒)라 하였다.

바람 불면 차를 마시고 비가 오면 술을 마신다.

 

그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바람이 불면 발길을 <차밭골>로 돌리곤 했었다.

무슨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것도 아니면서 괜히 '서시'처럼 이마를 찌푸리거나 얼굴을 어둡게 하고서 쓸쓸히 거닐어 보고 싶어지는 바람 부는 날.

전통음악 흘러나오는 전통찻집에 앉아 쪼르르 녹차를 따르며 근심거리를 풀어냈다.

차를 많이 마시면 뒤따르는 고통이 있었으니 ~

마시는 족족 아래로 내려오는 신호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차밭골>의 화장실에는 절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해우소(解憂)"라는 팻말이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근심 걱정을 풀어내시오.

차를 따르며 그 맑은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한 번, 차를 마시느라 생기는 근심을 버리러 가느라 또 한 번.

 

 

정호승의 시선집 [수선화에게]를 읽으며 해우소(解憂)가 떠올랐다.

4월이라 봄이 한창 무르익어야 할 때인데 이상하게 바람이 불어 봄날의 흐뭇함을 만끽하지 못하고 우울 모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박항률의 어딘지 모르게 고요하고 너무나 정적인 그림들이 곁들여진 시집은 어느 곳을 펼쳐도 그 곳이 바로 해우소가 된다.

쭉 늘어선 제목을 훑어내려가다가 마음이 머무는 어느 하나를 콕 집어 그 페이지를 펼치면 금세 그 시가 불러내는 정경에 사뿐 발을 내딛게 된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이 한 마디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랴.

누군가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날,

이렇게 되뇌어 보리라.

 

 

외로움의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데

그 외로움이란 것이 미치는 파장은 여간 큰 것이 아니다. 

그 외로움이란 놈을 

물안개 자욱한 물가에 핀 수선화 바라보며

이렇게 이렇게 어루만질 수도 있구나.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는데...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는데...

 

헛헛함을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을 때

정호승 시인의 시가 내게로 와서

해우소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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