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홀레, 중독의 끝은 어디인가 [데빌스 스타]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읽으면서 따뜻한 목도리를 두르고 당근 코를 단 한겨울의 눈사람이 섬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너무나도 두툼한 [스노우맨]의 첫 책장을 넘길 때는 이 많은 분량의 소설을, 아무리 추리소설이라지만, 하루만에 후딱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해리 홀레 시리즈에 좀 익숙해 지고 나니, 해리 홀레 시리즈만큼은 하룻밤에 후딱 읽어내는 것 따윈 일도 아닌걸.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아직 다 나오지 않은 미출간작을 어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게끔 되었다.
이번 [데빌스 스타] 역시 "과연 해리 홀레 시리즈"라 할 만큼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속도와 긴장감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는 아마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해리 홀레의 매력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거슬러 올라가며 읽는 역순의 순서를 취하게 되었지만, 해리 홀레가 짐 빔에 절어 살게 된 역사를 한눈에 꿰게 되면서는 방탕한
그의 생활도, 늘 술을 들이부어야만 잠이 드는 그의 버릇도 이해하게 된다.

최초 작품인 [박쥐] 이후로 세 번째 작품인 [레드 브레스트]로부터 본격적인 해리 홀레 시리즈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리즈의
기본적 구조가 잡혀나가고 해리의 캐릭터가 구체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레드 브레스트], [네메시스], [데빌스 스타] 이 세 작품을 흔히들
'오슬로 3부작'이라고 말한다.
시리즈 초반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보다 정상적인 신체, 명료한 정신 상태를 가진 해리를 만나볼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몸의 흉터가
늘어나고, 한두 군데씩 절단되고, 정신적으로 어둡고 피폐해져 가는 과정이 이어지지만...
그래서 더더욱 해리 홀레를 형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갈수록 불행해지는 해리 홀레 홀레를 보면서 같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처럼 축축 처지지만 그게 또 해리 홀레에게 중독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잘 적응되지 않지만 이번 [데빌스 스타]의 배경은 찌는 듯한 여름이다.
늘 오슬로의 추운 날씨를 배경으로 스산하게 펼쳐지던 이야기가 확 분위기를 바꿔 한여름의 태양빛을 유난히도 자주 거론하는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면 눈이 먼다고 했던가. 무서운 연쇄 살인 현장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만들어준 요 네스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엘리베이터 표식으로 각 장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
왠지 " 띵~" 소리가 나면 몸이 자동적으로 엘리베이터에 실리고, 중간에 문이 열리는 법 없이 한 층 한 층 오르게 되면서 익숙한 긴장감에
몸을 맡기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밟아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의도한 바대로 긴장감은 층을 오를수록 더해만 간다.
포의 <검은 고양이> 에서와 흡사하게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갇힌 마부의 아내가 결국 숨졌지만 입안에 감돌던 돼지의 피 맛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고 벽을 통과해 걸어다니기 시작했다...는 괴담을 시작으로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이어진다.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방식조차 기괴하게 시작한 [데빌스 스타]는 연쇄 살인의 형태 또한 기이하기 그지없다.
스물 세 살의 미혼 여성이 대낮에 자기 집 욕실에서 총을 맞아 사망한다. 그녀의 손가락은 절단되어 사라졌고, 눈꺼풀 속에서는 빨간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그 이후 족족 일어나는 실종 사건에는 연관된 단서가 있었다. 숫자 5와 데빌스 스타.
펜타그램에 의미를 부여한 해리는 그것을 좇아 가 보지만 진짜 범인은 쉽게 잡혀주지 않는다.
의식을 치르는 듯한 살인의 환상을 꿈꾸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서들 때문에 해리는 한동안 동분서주 해야만 했다.

사건은 7월의 휴가철, 직원들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때 일어났으므로 기피 대상 1호였던 해리 홀레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경찰청 강력반
최고의 형사 톰 볼레르에게도.
겨울 내내 해리는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엘렌 옐텐이 살해된 사건을 재수사 하는 데만 신경을 쏟다가 톰 볼레르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했다.
경찰청 안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심증을 가진 해리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일로부터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해리와 톰은
사건을 추적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얽힌 원한을 풀어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해리가 엘렌의 사건의 집착할수록 곁에 있던 라켈은 점점 더 불안하기만 하다.
"앨런 튜링이라고 들어 봤어? 튜링은 암호를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가 어떤 관점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어."
(...)
"말하자면 글자와 숫자를 넘어선느 차원이라고 할 수 있지. 언어도 넘어서는 차원. '어떻게'는 모르지만 '왜'는 알려주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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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사건과 더불어 해리 홀레와 톰 볼레르의 대결 또한 이번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줄기이다.
"데빌스 스타" 사건을 수사하면서 끝내 알고 싶어했던 "왜"는 범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지만 톰 볼레르와의 대결에서 해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을지는 미지수다.
해리와 톰 볼레르는 악연으로라도 이어져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알코올에 의지하고 몸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복수에 집착한 해리가 잡고 싶어했던 것과, 톰 볼레르가 바치고자 했던 모호한 "충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한 줄기가 아니었을까.
가는 길이 엇갈리긴 했지만 그들의 작가가 묘사하는 그들의 모습 뒤켠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악'과 함께
가는 길을 택한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인지.
오슬로 3부작을 끝으로, 해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목격한 그는 더 어두운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라켈과 함께 하는 행복한 한 때가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