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무엇보다 "살아봐"라고 읽고 싶다  [사라바1]

 

빗기운을 머금어 눅눅한 공기. 흐릿한 시야.

이런 날에는 슬픈 책을 읽으면 백발백중 눈물을 흘리게 된다.

어제 읽다 만 [사라바]1권을 끝내고 이제 2권을 읽어야 하는데, 이거, 슬픈 내용은 아니겠지.

1권까지의 내용으로는 마지막에 가서 눈물 흘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고 하는 주인공 아유무의 희한하고도 색다른 성장과정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아유무의 인생은 살 만하고 버틸 만했으니까.

 

'역아'의 형태로 세상에 나왔어도 아유무는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살아왔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석유 관련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이란에서 태어난 아유무는 작은 얼굴, 동그랗고 귀여운 눈, 긴 목에 매끈한 피부 등 여성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유순했기에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늠름한 아버지와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머니, 그리고 아유무까지는 완벽한 하나의 가족을 이루기에 모자람이 없었지만 누나에 이르러서는 좀 분위기가 달라진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은 누나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외모를 지녔고, 성향 또한 마이너리티 지향이었다.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이란에서 살았을 때는 이 네 명도 무척 행복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이란에서 호메이니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자 귀국한 이들은 일본에서 살게 된다. 야다 아주머니가 주인인 공동주택 야다맨션에서 거주하며 이모와 외할머니 등과 교류한다.

어린 시절에도 자주 기행을 일삼아 유모이자 가정부였던 바츨로부터 욕실에 가둬지는 벌을 받기도 했던 누나는 학교에서 삐쩍 마른 외모와 기행 덕분에 '당산나무'로 불린다. 그리고 아유무는 밤이면 누나가 방의 벽을 깎아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다시 이집트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준비하던 가족은 누나의 방 벽에 가득 새겨진 '고둥'을 보고 말문이 막힌다.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고둥은 빙그르르 감긴 껍데기 끝에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보고 아잔의 소리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인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아유무는 계속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의 관계에 대해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아 한다.  하지만 아유무의 '도피'는 어쩐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데 힘을 쓰기는 커녕, 그저 무시하고 보지 않으려 하는 데에 있는 것만 같다. 이집트에서 보통의, 그렇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친구 야곱을 만든 아유무는 야곱과 자신 사이에만 통하는 인삿말 "사라바"를 만들어냈다.

 

아라비아어인 '맛살라마(안녕)'와 일본어인 '사라바(안녕)'를 조합한 '맛사라바'를 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야곱은 단순히 '사라바'라고 하는 걸 마음에 들어했다.

실제로 야곱이 말하는 '사라바'는 아름다웠다.

마치 '안녕'이라는 의미가 아닌 말처럼 들렸다. 빛나는 가능성을 내포한 반짝이는 세 글자로 여겨졌다.-257

 

아버지에게 온 한 통의 편지로 집안에 '험악함'이 흐르고 부모님은 급기야 이혼에 이른다.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온 남매는 다시 '야다 맨션'에서 야다 아주머니와 나쓰에 이모에 둘러싸인 생활을 시작한다.

 

이제 인생의 빛나는 시기인 청춘의 문에 들어선 아유무는 자신의 인생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스구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입에서 되뇌이면 차분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말, "사라바"

아유무와 야곱의 우정 안에서 생겨난 말 사라바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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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아서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를 찾아라[셜로키언]

 

셜록에 열광하던 시기는 아주 잠깐, 한때이지 않았나 싶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까지의 질풍노도의 시기.

그 때에는 무언가 모험을 찾아 헤매는 본능에 이끌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도, 12소년 표류기에도 관심이 갔다.

모험 소설과는 조금 다른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추리 소설이란 것에는 쉽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으나 다행히도 친구 하나가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 시리즈를 모으면서 하룻밤 읽고 와서는 간추려서 얘기해주곤 했기에 탐정들의 이름 정도는 알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라. 그 시절, 셜록과 루팡, 아가사 크리스티에 푹 빠진 친구 하나쯤은 꼭 있었다.

친구는 사건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다 일러주지 못했지만 반짝반짝 하는 눈으로 볼을 붉히며 입가에 말라붙은 침자국이 허옇게 번질 때까지 탐정들의 '멋짐'을 있는 힘껏 전파했다.

쉬는 시간마다 앞 타임에 이어 뒷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학교 갈 맛이 났다고나 할까.

나는 순정만화에 빠져 있었기에 이런 류의 추리, 즉 앞뒤전후를 잘 꿰어맞춰야 하고 트릭과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그래도 뭔가 색다른 매력이 있기에 저렇게 질리지도 않고 탐정, 추리물을 파고드는 것이겠지, 하고 막연히 그 아이의 열정에 조용히 박수를 보냈었다.

지금은 그 아이의 열띤 이야기 솜씨만 떠오를 뿐, 셜록의 사건과 풀이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사냥 모자와 멋지게 휘어진 파이프, 체크코트 정도는 단 한 번 보고도 잊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그림자만 보아도 저건 '셜록'이구나, 하고 알고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영국 드라마 시리즈로 나온 현대적 셜록에 맛 들여 몇 꼭지 보았고 드라마 제작 과정을 세세하게 취재해서 보여준 책 [셜록:크로니클}을 보고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셜록 시리즈 최초의 작품은 [주홍색 연구], 셜록의 죽음을 다룬 작품은 [라이헨바흐 폭포]

그렇지만 정작 셜록을 탄생시킨 작가 아서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는 것은 안 비밀.

 

[셜로키언]은 말 그대로 셜록의 열렬한 팬을 일컫는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책이면서 셜록을 탄생시킨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을 전면에 내세운 추리소설이다.

1900년대의 아서 코난 도일과 2000년대의 셜로키언 해럴드 화이트.

두 개의 시간대가 나란히 달리면서 색다른 재미를 준다.

실제 인물인 아서 코난 도일과 허구의 인물인 해럴드 화이트의 이야기는 따로 떼어 읽어도 전혀 손색 없이 진행되지만 결국에는 두 개의 시간을 나란히 놓고 보면 절묘한 이야기가 탄생하는 구조다.

 

셜록이 등장하는 스스로의 작품을 싸구려 통속물이라 치부하면서 이제는 셜록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을 죽여버리기로 결정한다.

그 유명한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디아스토커를 쓰고 긴 외투를 입은 남자 셜록은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한편 2010년의 어느날 해럴드는 셜록 홈스 연구 단체 중에서도 세계 제일로 꼽히는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의 신입 회원이 된다. 앨곤퀸 호텔 만찬장에서는 인용 게임이 한창이었다.

누군가 "살인이 났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여섯 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에 나오는 구절. 이라고 대답하며 위스키를 기울이는 것이다. (사실, 셜로키언들의 활동 중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이 게임이다. 얼마나 작품들을 속속들이 읽었으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단 한 구절을 듣고 출처를 맞히다니!)

이 날의 화제는 동료 회원 알렉스 케일이 '성배'가 된 아서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를 공개하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약속 시간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는 그를 찾아 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알렉스 케일의 시체였다.

 

작품 속에서 셜록을 죽여버린 아서에게 폭탄소포가 날아들고 딸려 온 편지에는 <스테프니에서 발생한 잔혹 살인. 욕조 안에 죽어 있는 신부>라는 살인 사건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었다. 경찰을 대신해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로 결심한 아서는 드라큘라 같은 괴기 소설 쓰기에 취미를 갖고 있는 브램을 '왓슨'삼아 탐문수사에 나선다.

 

해럴드는 아서 코난 도일의 증손자인 서배스천의 부탁으로 알렉스가 찾았지만 사라지고 만 일기의 행방을 좇는 동시에 알렉스 살인 사건의 비밀을 밝히기로 한다. 해럴드에게는 세라라는 전직 기자가 '왓슨' 격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이제 형식적으로나마 셜록과 왓슨 콤비이 모양새를 갖춘 1900년대와 2000년대의 탐정단은 각자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실로 '셜록'스러운 추리를 펼친다.

셜록의 창조자이자 아버지격인 아서 코난 도일과 셜록의 아들격인 해럴드가 '셜록' 스타일로 지혜를 짜내는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아서 코난 도일은 여성들의 참정권 쟁취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여장을 불사한다.

콧수염을 밀고 파우더로 얼굴을 뽀얗게 만들고 아이라인까지...

해럴드는 알렉스의 살해 현장에서 벽에 쓰인 "기본이지"라는 문장에서 벽의 피는 살인자의 피라는 것까지 추리해낸다. 셜록 홈스가 사건을 푸는 방식은 귀신같은 관찰력도 아니고, 발자국과 독극물에 관한 백과사전적 지식도 아니고, 변장술도 아니고, 개를 활용한 추적술도 아니라 바로 집중력! 생각의 힘, 논리력으로 싸우는 셜록처럼 집중을 하고자 하는 해럴드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도 재미있다.

 

결국, 두 개의 사건은 아서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장으로 서서히 모아지고 해럴드는 셜록이 사라지고 말았던 라이헨바흐 폭포 앞에 다시 서게 된다.

 

두 개의 시간대가 교차되면서 이거, 자칫 헷갈리거나 어지러워지는 것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두 개의 시간대에 있었던 일은 독자성을 띠면서 두 탐정의 확실히 다른 성격만큼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갔다.

그러면서도 일기라는 한 점을 향해 질주하는 두 탐정.

짜릿한 한 판 승부였다.

 

아서 코난 도일과 해럴드로 인해 '셜록'은 허구의 인물일망정 더욱 뚜렷하고 개성 강한 인물로 떠올랐다.

셜로키언으로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지 못해 아쉬웠지만 뭐 어떠랴.

지금부터 셜로키언이 된다면.

셜록은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 중이다.

전형적인 모습으로 안락의자 탐정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진화해 나가는 셜록!

앞으로 또 어떤 참신한 셜록이 나올지 기대만발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의 시나리오 각색을 맡은 작가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은 그 서막에 지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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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즈만큼이나 작가 코난 도일의 삶도 알고 보면 재미있어요. 말년에 강신술에 빠져서 요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니까요. ^^
 
범섬 앞바다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5
홍상화 지음 / 한국문학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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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그녀가 있네 [범섬 앞바다]

 

그다지 사랑이 고픈 것도 아니면서 잡다하게 읽는 책 속에 한 권쯤은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여러 권 조금식 읽다 만 책들 사이에는 핑크빛, 혹은 옅은 레드라도 사랑의 훈김이 조금 깃들여져 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그렇게 배열하여 놓은 것이니만큼 내가 구축한 책의 장벽 속에는 '사랑'이야기가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서 커다란 밤식빵 덩어리에서 밤 한 톨 찾아 떼어먹는 재미를 누리듯 여러가지 사랑 이야기를 맛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송승헌, 유역비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제3의 사랑]을 읽는 동안 재게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쉬이 진정시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어 살짝 홍조 띤 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울로 그 모습을 체크해 보지 않아 확실히 장담할 순 없지만 볼에 손을 대었을 때 약간은 평소보다 높은 열기가 감지되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제 3의 사랑은 짝사랑,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류의 결론이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하나하나의 행동과 상황들이 나를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결국엔 소설이 끝남과 동시에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랑,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사랑, 여전히 환상 속의 사랑...이라는 강력한 현실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정신 차리자. 송승헌 같은 멋진 남자가 나와 인연이 있을 리 없고, 애초에 나 또한 단 한 번의 인연으로 가정을 버리고 사랑을 좇아갈 사람이 아니지 않나...

 

[범섬 앞바다]는 [제3의 사랑]을 덮고 나서 바로 시작한 책이었는데, 분명 사랑 이야기이긴 했지만 무언가 현실 이야기 같으면서도 현실 이야기 같지 않은, 말하자면 '이어도'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제3의 사랑]은 읽고 나서 현실을 강력하게 인정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어도'를 찾아 나서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같은, 이 환상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 이런 사랑,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가이지만 초기단편을 쓸 때 자신이 진짜 작가이구나, 인식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소설가의 나날들에 잠식당해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한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초기단편을 영어로 번역 중인 외국인 마이크의 말 한 마디에 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애수'라는 카페의 여주인으로 마이크의 말에 의하면 그 여인은 어떤 남자라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비극적인 아름다움.

이렇게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설명되기 때문에 여인은 더욱 신비한 존재로 각인된다.

영혼을 다 바친 사랑이 파국에 달했을 때만이 보일 수 있는 비극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그 여인은 마침내 소설가에게 마음을 허락한다.

여인이 운영하는 카페 '애수'에는 독특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그곳을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렬한 인상을 받을 만큼 섬뜩한 느낌을 주는 해저 사진. 10개 정도 되어 보이는 해저 사진은 음울한 색깔의 기암절벽과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담고 있다.

이것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이 된다.

 

예술이란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거예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잔인함까지도...사랑이 바로 그런 거지요.-137

 

운동권 남자친구가 신문 도중 동료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으려고 난로를 껴안아 얼굴이 화상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 그 일로 여인은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데, 소설가는 그 복수가 아마도 자살의 형태가 될 거라며 그녀를 어떻게든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려고 애쓰는 도중에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범섬으로 그녀를 초대한 소설가는 잊었던 예술혼이 불타오르기라도 하는 듯, 소설가는 글쓰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는데...

여인은 자신이 죽으면 바람이 일지 않는 범섬 앞바다에 화장해서 뿌려달라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이 앞으로 어떤 형식으로 실현이 될지 책의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짧은 분량이니만큼 속도는 휙휙 붙어서 어느새 끝을 향하게 된 [범섬 앞바다] 이야기.

비극이면서도 비극이 아닌,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이 묵직한 추를 드리운 채 내 가슴 속에 가라앉았다.

이런 사랑이 있을 수 있나.

예술로 승화시킨 사랑이라는 말은 흔하게 들어왔지만 범섬 앞바다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던 그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실현시키다니...

 

이런 사랑이라면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마음 속에 담아 두고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렇기에 더 오래오래 각인되고 비현실적임에도 언젠가는 이런 사랑을 해내리라 , 해보리라 되뇌게 되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혹은 케케묵은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깊고 푸른 범섬 앞바다 속에 펼쳐져 있는 바위는 그 사랑을 암흑 속에서도 가끔씩 반짝반짝 빛나는 빛 속에 드러내 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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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랑
쯔유싱쩌우 지음, 이선영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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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애'도 선택이다 [제 3의 사랑]

 

[제3의 사랑]은 2015년 송승헌, 유역비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던 걸로 유명하다.

도시 연애소설 [제3의 사랑]이 중국 드라마 [절애]로 제작된 후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 상영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주인공의 얼굴은 상상 속의 얼굴이 아니라 송승헌, 유역비의 이미지로 굳어져 버리게 되었지만 그건 또 나름의 장점을 지닌다.

내 취향에 맞는 인물로 남자 주인공을 상상해 낼 수 없고, 여주인공의 얼굴에 마음대로 내 얼굴을 덧씌울 수 없다는 것이 큰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

 

예전에 만화방이라는 것이 있었을 때, 19금 칸에 [절애]라는 일본 만화가 꽂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아유...낯뜨겁게 이렇게 대놓고 19금이라 적혀 있는 걸 어떻게 꺼내 보지...했지만 제목이 너무나 애절하게 가슴을 파고든 까닭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세트를 꺼내 무작정 읽었다. 그 만화에서 말하는 '절애'란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

짧은 탄식과 긴 여운을 남기고 그 만화는 그렇게 기억 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제3의 사랑]을 만났는데, 중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제목이 [절애]라고 했다.

음...제3의 사랑이란 혹시 ...그것?

하지만 안심하시라. 동성애를 다룬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세상의 모든 낭만적인 사랑이 딱 두 종류일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세상에는 제3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모든 사람이 감동하지만,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며,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사랑이다. -491

 

이제 제3의 사랑의 실체를 눈치채셨는지?

 

언제나 자신의 일에 당당하고 앞을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여자 추우.

어느날 그녀의 여동생 추월이 회사 상사에게 버림받았다며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한다.

도대체 자신의 여동생 추월을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빠뜨린 사람이 누구냐며 불같이 화를 내던 추우는 그 남자, 임계정에게 돌진한다.

치림기업의 본부방 임계정은 말 그대로 모든 여성의 선망의 대상, 백마탄 왕자였다.

크고 마른 체형에, 단정한 얼굴. 돈 많고 잘생긴 남자의 전형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렸다.

하지만 임계정에게 있어 추월같은 여자는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일 뿐. 오히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복잡한 회삿일에 매여 있던 그에게 다짜고짜 들이닥친 교통사고같은 여자인 '추우'가 오히려 신선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씨앗은 바로 여기서 싹트고 있었으니...

여동생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자기도 모르는 새 끌리고 만 추우는 임계정으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받고 당황한다.

추우가 전남편 좌휘에게 이혼 선언을 하고서도 꿋꿋이 버티던 모습을 허물어버린 장소였던 비행기 안. 추우의 옆자리에 앉아 2시간 내내 울음을 쏟아내는 걸 보았고 심지어 손수건까지 건넸던 남자가 바로 임계정이었던 것이다.

추우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부터 임계정은 그녀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던 것이다.

가장 안좋은 상황에 맞부딪혔지만 이미 사랑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변호사라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추우는 다가올 10월 국경절에 정략결혼을 앞둔 남자와의 불장난은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리하여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도 이혼녀인 추우에게 매달리는 남자와의 인연을 거부하려 하지만...

사랑이란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가 없는 모양인지.

끝이 보이는 길을 향해 둘은 달려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제3의 사랑에 대한 진한 후회만이 으스스하게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다 이렇게 절절하지는 않은데 책을 읽는 내내 이상하게도 마음이 저리는 부분이 툭툭 튀어나온다.

뻔하고 뻔한 한국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는가 싶었지만 '대륙의 기운'이랄지, 약간은 다른 문화의 차이가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준다.

한국드라마에서 흔한 시어머니의 텃세라는 것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랬고, 약혼녀의 존재로 인해 이루어지는 삼각관계가 사뭇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랬다.

그 외에 중국의 '꽌시' 문화가 아는 인맥을 동원하는 형식으로 나오는 것만이 조금 거슬렸을 뿐, 나머지는 연애 소설의 밀고 당기기가 아주 적절히 구현되어 있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거칠고 냉혹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만만한 남자로 보이지만 그녀에게 사랑받기 위해 어린 시절의 상처까지 거짓말로 포장했던 여린 남자.

그는 자신의 사랑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실천하고 감추었던 속깊은 남자였다.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를 지켜라도 보기 위해 출근길 그녀가 잘 보이는 커피숍에 먼길을 마다않고 돌아서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던 순애보를 쓸 줄 아는 남자였던 것이다.

연약한 여심은 그 세심함에 무너져 내린다...

서로를 간섭할 자격이 없기에 더더욱 상처주는 말들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연인들.

 

"미래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건 내가 고민할게요."

이런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 어쩔 수 없이 '절애'를 선택한 그녀에게는 쉬운 선택지들을 두고 어려운 답을 선택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에 한 번은 이런 격정적이고 절절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여.

절애는 선택이지만 '그런 사랑'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깨닫길.

 

끝으로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인 [홍루몽]의 형식을 연상시키듯 회장체의 본문 구성에 인상 깊은 구절을 제목으로 삼아 나눈 글의 형식이 인상깊었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이 세상의 사랑이란 결국 둘 중 하나

이 남자 정말 마약같아

우린 처음부터 그 어떤 교차점도 없었다

나만 보고 따라와요

내 심장이 쿵 하고

사랑, 가끔은 가장 쓸모없는 감정

나를 사랑했던 여자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슬픔이 내 마음을 수몰시켰다

적어도 나한테 먼저 얘기는 해줘요

그는 결국 미안하다고 했다

 

제목들을 다시 짚어보며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다시금 심쿵했던 순간들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제3의 사랑에 이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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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3 - 하늘이 알려준 시간
다니 미즈에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3]

 

'추억의 시 수리합니다'

허름하고 척 봐도 오래된 시계방의 쇼윈도에 놓인 동으로 된 금속판.

아무리 봐도 시계에서 '계'자가 떨어져 나가 수리가 필요한 듯 싶지만, 또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간판이다.

한때는 북적였던 쓰쿠모 신사 거리. 지금은 셔터 내려진 거리로 변한 적막한 장소이지만 이 거리의 곳곳에는 개성 있는 가게가 간혹 남아 있다.

할아버지의 시계방을 물려받아 시계를 수리해주고 있는 슈지, 헤어살롱 유이에서 일하는 미용사 아카리, 쓰쿠모 신사의 다이치.

이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추억은 방울방울 솟아났다가 툭 터지고 그 터진 틈에서 한때 괴로웠던 상처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퍼뜨리곤 한다.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3]권은 시리즈로 제작되었지만 앞의 1,2권을 읽지 않아도 전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슈지와 아카리 사이에 싹튼 사랑은 점점 더 진행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면 된다.

 

모두 4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첫번째 [별을 새긴 회중시계]는 별을 사랑한 남자와 여자의 안타까운 어긋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슈지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어린 시절 고쳐달라고 했던 회중시계의 기억 위에, 다이치가 있는 신사의 새전함에  십자가 장식이 달린 은으로 된 체인을 버리고 가려 했던 여자의 추억이 겹쳐진다.

태엽을 감아 재깍재깍 경쾌하게 다시 움직이도록 고쳐주었던 회중시계는 이제 다시 슈지의 손에 놓여진 채 인연을 기다리고 있다.

"시계가 정말 아무 말도 못하는지 확인해볼래? 그게 태어난 곳에서 말이야."-58

신기하게도 시계 하나가 슈지의 손에 들어왔을 뿐인데, 셜록 홈스가 소매 끝을 보고 그 사람의 인생 전반을 다 추리해 내는 것처럼, 슈지도 거기에 얽힌 사연을 본 듯이 그려내곤 한다.

그리고 이제는 슈지의 연인인 아카리와 신사의 다이치까지 그 능력에 동참하여 사람들의 얽혀 있는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주려 힘을 모은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별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그려져 읽는 내내 마음이 뭉클뭉클해졌던 이야기였다.

 

슈지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골동품 가게 딸 민 이쿠미가 시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카리는 그것이 신경쓰인다. 어쨌거나 슈지와는 사귀는 사이인데 아름답고 사귐성 좋은 여자가 슈지와 함께 일하고 있으니...이렇게 슈지와 아카리의 알콩달콩 사랑에 잠시 방해꾼이 나타나면서 여지껏 평화롭고 순조로와 보였던 슈지와 아카리의 사이는 좀 더 단단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뒷부분의 이야기로 갈수록 '가족'이라는 테마가 두드려져 보인다.

복잡한 가정 사정을 슈지에게 내보이기 싫어 거짓말 했던 아카리는 시계 하나만 보고도 척 하고 알아맞히는 속 깊은 슈지이기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이상 속일 수 없게 되었다.

아카리와 동명의 딸을 찾아나선 낯선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캐다 보니 그 가족의 이야기는 현재 아카리의 아픔과 어쩌면 궤를 같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법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가 잠시 펼쳐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현실에 안착하고야 마는 기묘한 환상서술 방식에 이 소설의 묘미가 있는 듯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을 듯한 시계방에서 추억의 시를 수리해주는 슈지의 존재 자체가 환상적이기 그지없다.

재깍재깍 태엽을 감아주어야 돌아가는 시계처럼 우리의 인생도, 가끔씩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환상적인 마법사 슈지의 세심한 추리와 도움으로 이렇게 한번씩 쉬어가면서 인생에 윤활유를 칙칙~ 뿌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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