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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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들아, 과감히 건너라! 사와자키가 지켜보고 있다.[천사들의 탐정]

 

날개 없는 천사들에게.

 

10대를 날개 없는 천사들이라 부르는 하라 료. 아니, 사립탐정 사와자키의 10대가 문득 궁금해진다.

어느 틈엔가 나이를 먹었고, 한층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하는 사와자키 또한 지울 길 없는 과거의 이력을 갖고 있는 걸까.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유일한 단편집인 이 책에는 아슬아슬하고 힘겹게 현재를 버텨내고 있는 10대들이 등장한다. 그것 때문일까. 이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안녕, 긴 잠이여] 등을 통해 원숙한 탐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사와자키의 10대를 살금살금 캐내고 싶어지는 것은.

장편에서 가끔씩 등장했던 사와자키와 와타나베의 관계가 확실하게 밝혀지고 드러난 것은 이 책을 엮으며 새로 쓴 작품 <탐정을 지망하는 남자>를 통해서다.

직업으로서의 탐정에 대해 고민하는 사와자키의 모습이 보여 흥미롭다.

 

"왜 탐정이 되면 안 되는 거죠?"

"왜 탐정이 되고 싶은 거냐?"

"그건....팔 년 전에 아저씨와 구사나기 아저씨가 그 폭력조직 사무실에서 저를 구해낸 것처럼, 그러니까 도움이 되고 사람 목숨을 구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329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파릇파릇한 청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은 사와자키와 사건으로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사이다. 청년의 순진무구한 말에 사와자키는 잠깐 감동했다고 했다.

이런..아저씨. 겉으로는 딱딱하고 빡빡하게 굴면서 마음 속은 완전 여린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

후훗. 혼자 웃음을 짓기가 무섭게 사와자키는 작고 가벼운 감동에서 재빨리 발을 빼낸다. 의뢰인의 돈을 받고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 탐정이라며. 탐정은 그냥 직업일 뿐이라고 가시를 바짝 세운다. 뭔가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그런 직업.

원래 형사였던 옛 파트너 와타나베의 이야기는 여기서 짠~ 하고 등장한다.

자신이 탐정이 되기까지의 일을 이제는 이야기하고 싶다며 살짝 장벽을 내리는 사와자키의 모습에서, 이제는 꽤 마음이 약해졌구려~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싶어진다.

탐정이 되겠다는 결심 같은 건 한 적이 없음에도 어쩔 수 없이 탐정으로 우뚝 서서 살아가는 사와자키를 보며 그를 찾아온 청년은 어떤 결론을 내리고 돌아갔을까.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말한 청년이 사와자키의 어떤 점에 이끌려 탐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인지는...

[천사들의 탐정]에 실린 6편의 단편을 죽 읽어보면 안다.

한없이 무뚝뚝하고 정 없이 굴다가도 뭔가 사연이 있어 그를 찾아오거나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일에는 무심한 척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비록 12세 미만의 어린 아이가 장난처럼 찾아와 깜찍하게 자신을 속이고 의뢰를 맡겼을 경우라도, 그 거짓 없는 표정에 꼼짝 없이 넘어가고 만다는 것을.

어쩌다, 어떤 경로를 통해 사와자키와 인연이 된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사와자키를 찾아온 이들은 글쎄...자신의 삶의 어느 한 부분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지 않고 약간의 빛이라도 비춰지는 곳으로 옮겨올 수 있는 것은 사와자키 덕이라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비에 젖은 짙은 빨강색 운동복을 입고, 어린이용 노란 우산을 든 소년이 어떤 여자를 경호해달라는 의뢰를 한다.

엄마의 옛 남자에게 협박 전화를 거는 소년이 있다. 여섯 살 난 딸이 뺑소니 당한 것이 자신의 옛 여인이 낳은 아들의 짓이 아닌가 의심하는 한국인 스파이.

캐딜락 '엘도라도'를 타고 온 의뢰인이 자신의 딸을 조사해 달라며 찾아온다. 딸은 섹스중독 아버지를 미행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 밤에 열여섯 살 소녀 가수가 자살하기 직전 잘못 전화한 곳이 하필 사와자키의 탐정 사무소라니. 의뢰인이 없어도 사와자키는 조사에 나선다.

 

어쨌거나 사와자키의 손이 닿으면 그가 대충 미리 짐작했건, 뒤통수를 맞건 사건은 해결되고야 만다.

10대의 날개 없는 천사들이 어지간하면 사건에 휘말려들지 않기를 원하건만 어른들의 세계에서만 "악의"가 번뜩이는 것은 아니다.

 

소년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짓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모두 사악하지는 않듯 어린이라고 다 정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16

 

사와자키는 저렇게 철벽같은 방어막을 쳐 놓지만 필터 없는 독한 담배를 즐겨 피는 그라도 어쩔 수 없이 흐물흐물해지는 부분이 있는가 보았다.

힘겨운 한 시절을 건너는 10대들을 바라보는 사와자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마 뜨거운 보호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사연이든 소중히 다루고 최선을 다해 해결하려는 모습이 꽁꽁 싸매고 싸매도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이 봐요, 아저씨~ 티 다 나거든요. ^^

거칠고 고독한 외모에서 무뚝뚝함이 뚝뚝 묻어나지만 10대들을 쓰담쓰담 어루만지는 그 손길만은 한없이 부드러우리라는 것을...간파당하셨습니다!

 

의뢰인을 대신해 하얀 꽃 한 송이를 도로변에 무심한 듯 툭 던져주고

쌀쌀했던 날 밤에 잘못 전화를 걸어왔던 소녀는 자살 같은 것 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을 발동시킬 줄 알고

캐딜락 '엘도라도'를 타고 오는 의뢰인은 사절인 사와자키.

 

그래, 너. 그래 바로 너.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보여준 진짜 사나이. 사와자키를 소리 높여 불러보고 싶다.

<강남 스타일>에 맞춰, 한바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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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라이프 1
다카기 나오코 지음 / artePOP(아르테팝)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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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처자  상경기 [뷰티풀 라이프 1]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이 동경했던 "상경"

지금도 유효한가요?

대학을 간다 해도 "In Seoul" 이어야 알아준다든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가야한다는 이상한 "신념"이 통용되는 것이 말이죠.

 

 꿈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처자 상경기, 뷰티풀 라이프!

일러스트 에세이라고나 할까요?

저자 다카기 나오코는 최근 꽤 여러 권의 책으로 제 이목을 끌고 있는데요...

데뷔작은 [150cm 라이프] 라고 해요.

그 외에도 [30점짜리 엄마], [효도할 수 있을까?], [혼자 살기 9년차], [배빵빵 일본식탐여행 한 그릇 더!] 등이 있다네요.

일본 작가들의 이런 일러스트 만화는 쉽게 읽히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물론 문화면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정서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소제목들이 일단 재미있어요.

 

비디오 대여점에서 퇴짜 맞다

신나는 그림 도구 쇼핑

이상야릇한 통신 판매 알바

두근두근 경품 추천 알바

공모전으로 역전을 꿈꾸다

지망생 친구들과 나누는 꿀 정보

빈손으로 즐기는 쇼핑몰 나들이

 

어릴 적 여느 아이들처럼 꽃가게나 빵집 주인이 되고 싶었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네요. 중고생 시절 만화가를 꿈꿨고, 그 후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를 목표로 홀로 상경하게 되죠.

자신의 상경기가 이번 [뷰티풀 라이프]에서 주로 펼쳐질 예정입니다!

 

빽도 연줄도 기댈 곳도 하나 없이 통장 잔고만을 믿고 무작정 동경으로 상경.

방 하나 얻고 필요한 것들을 간소하게 마련하고 보니 생활비가 당장 급하게 되었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꿈만 가지고 간 크게 움직인 셈입니다.

고정적인 일거리 하나 없이 "잘 되겠지~"란 마음으로 , 크흐흐...

일단, 알바를 시작합니다.

행운권 추첨 알바,통신 판매의 전화 접수 알바 등등.

그야말로 진짜 "사회"가 무엇인지를 몸소 부딪쳐 알아가게 되는데요.

왠지 모르게 짠하면서 묘하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씩씩한 것은,

지금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이후에 과거의 경험담을 회상하며 그리기 때문일까요?

비참하다거나 슬펐다는 식이라기보다는

으쌰으쌰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일찌감치 자신의 관심사를 파악한 뒤 한 우물만 팠던 덕에 별 고민 없이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이런 선택을 지지할 여유가 있을까요?

 

좋아하는 과목은 미술 뿐이지!

뭘 해도 잘하는 우수한 사람은 그 중에 뭘 더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까요?

'잘하는 게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힘들지 몰라. 헷갈리겠어~'

그런 쓸데없는 걱정도 했어요. - 76

 

느긋하다면 느긋하고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인 마인드, 좋아요. ^^

 

 

전문대 미술과를 졸업한 후, '그림 그리는' 직업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에 직면하고서 디자인학교에 다시 입학. 졸업 후 별 지장 없이 나고야의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내지 못하고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도 있었답니다.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인지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네요.

현실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일러스트 에세이.

답답한 현실의 벽에 막혀 좌절 중인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 같은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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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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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하게 뱉어내는 피의 역사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는 <롤링 스톤>의 편집장이었으며 작가이자 뛰어난 음악평론가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형수, 게리 길모어의 막냇동생이다.

게리 길모어는  폭력과 광기로 점철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그의 성겻탓이든, 집안 분위기 탓이든 결국, 혹은 마침내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고 스스로 총살형에 처해달라고 주장했다.

1977년 미국에서 10년 만에 부활한 사형제도에 의해 처형된 첫 번째 사형수였고, '피의 속죄'라는 모르몬 식의 엄격한 대가를 치른 사람이었다. (1996년 유타 주에서 총살형이 다시 집행되었으므로 최후의 총살형 사형수는 아니다.)

 

"게리 형, 보고 싶을 거야.""우리 모두 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날 자랑스러워 할 필요는 없어. 자랑할 게 뭐가 있다고. 난 그저 총에 맞아 죽는 것뿐이야. 못할 짓을 저지른 대가로 말이지."

그것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604

 

게리 길모어의 죽음을 TV로 접하게 된 마이클의 감상은 간결하다.

-그 마지막 감정의 굴곡은 대비할 길이 없다.-605

 

가족의 어두운 역사, 더 나아가서는 피의 역사가 될 수도 있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은 가족에게 세습된 내력, 그것은 무엇이며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담담하게 파헤쳐 간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조차 진실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는, 먼저 들은 이야기를 적고, 다시 한 번 그 이야기의 끝을 되짚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따졌다.

미국의 개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의 뿌리를 찾아가고,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녔던 자신의 기족사의 흔적을 찾아낸다. 자신의 가족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운명의 힘을 강조하는 대신, 자신의 가족사에서 비극의 정점을 이루는 순간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가장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감정'의 농도를 최대한 낮춘 다음 사실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리하여 이 논픽션은 드라마틱하고 비통한 삶의 순간을 함께 거슬러감에 있어 독자가 작가의 내력에 대해 한 점 의심 품을 여지를 없게 한다.

 

"게리가 어렸을 때, 그가 살인자가 되는 데 영향을 줬을 만한 어떤 사건이 혹시 있었습니까?"-20

 

자신의 집안 역사 어딘가에 모든 것을 풀어줄 열쇠가 있을지, 무엇이 이토록 많은 희생과 폭력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해줄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를 어쩌면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 진실을 찾아내고자 한다.

 

너무 길고 너무나 개인의 가정사에 관련된 이야기여서 처음엔 읽기에 적잖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살인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음침한 가족의 내력에 점점 호기심이 생겼다.

읽는 내내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생생하게 전달받기 어려운 교도소 내에서의 끔찍한 악행들을 볼 수 있고, 엇나가기로 작정한 한 사람의 행동을 통해 그 내력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책장을 어서 넘기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형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집안의 내력, 나아가서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타락과 폭력의 시대에 휩쓸린 인간의 나약함이라고 치고, 조금은 동정을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온전한 인간을 이루는 것이 혈통인지, 환경인지, 혹은 운명인지.

딱 부러지는 답은 있을 수 없지만 이렇듯 고통 속에서 삶을 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개인에게 엄청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용감하게 가족의 역사를 훑어내리려는 결단을 내린 작가가 대단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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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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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인문의 결합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일반적인 여행책들은 이제 넘쳐난다.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은 여행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일상에서의 도피, 색다른 경험.

여행지에서의 독특한 사유.

이것들은 여행을 떠나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다만, 현실에서의 일탈을 경험하고 왔다는 만족감만을 선사할 뿐이다.

여행은 언제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의 경험담은

여행기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또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 터이지만 여기저기 나풀거리며 살아온 탓에

디아스포라적 삶에 젖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의 "지금, 여기"는 또다른 '여행'의 묘미를 선보여주지 않을까.

 

서정은 독특한 화자이다.

서울 출생이지만 모스크바에서 정치문화를 공부했고 러시아에 한참 정착한 뒤에 여행의 맛을 알게 되어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며 유럽을 살폈다고 한다.

그녀가 밟은 땅의 이동경로도 흥미롭지만 그 기록의 깊이와 넓이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니다.

 

여행은 내게 낯선 것 가운데 낯익은 아름다움을 확인하며 불안을 넘어설 힘을 얻는 계기로 지각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불안을 온전히 규명하게 되지는 못할지라도, 무력한 시도에 머물지라도.--7

 

서양을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러시아를 택했다는 작가는 다시 그 러시아라는 창문으로 유럽을 바라보았다. 유럽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변두리를 기회가 될 때마다 밟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물들이 도스토옙스키, 고흐, 쇼팽이었고,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샤갈, 카잔차키스였다.

작가는 여행을 인문과 결합시키면서 여행을 불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작가의 여행기에서 일단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어 기쁘다.

매주 혹은 한 달에 한두 번, 시간 날 때마다 푸시킨 미술관, 톨스토이 뮤지엄, 바스네초프 아틀리에 등을 산책 가듯 다니는 러시아인들.

소비에트식 교육의 영향으로 러시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식인과 예술가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을 평생에 걸쳐 반복한다고 한다.

그 곳에서의 생활에 길들여진 탓에 가는 곳마다 작가와 사상가, 화가와 음악가의 삶을 시간여행하듯 되짚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작가.

그래서 그의 글은 도시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체취를 느낀 이야기로 시작해서 점점 확대되어 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이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 구별되는 신선한 점이다.

 

 

러시아어의 섬세하고 풍부한 운율을 느껴보려는 모든 노력은 끝내 푸시킨으로 통한다. (...)

러시아인들은 술자리의 시작과 끝을 적절한 시 한 수 던지는 것으로 열고 맺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13

 

풍부한 문학적 토양을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함으로 여기고 그것을 한껏 누리는 모습이 부럽다.

 

어느 날 교실 발표회 때 아이가 외운 여덟 줄짜리 짤막한 시는 어휘의 선택과 배치의 절묘함, 일상어가 지니는 리듬감의 극대화를 통해 완벽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언어 감각을 깨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잘 조합된 단어들을 지속적으로 외우면서 세상을 발견할 채비를 갖추는 것이다.-14

 

시인 푸시킨의 서재를 둘러보며 한 편의 시 같은 한 천재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집을 방문하고 작가의 불안한 인간상을 떠올린다.

 

러시아에서 작가의 위치는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와 좀 다르다. 러시아의 작가들은 계몽주의적 사명을 띤 교사이자 비판적 저널리스트이며 거의 유일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작가는 사상가와 다름없었다.-44

 

시대와 불화한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 기념관을 나서며 모딜리아니가 직접 그린 그녀의 스케치를 보고 시대의 뮤즈였던 그녀를 회상한다.

 

사랑스러운 아내 벨라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샤갈이 러시아와 연관이 있었나?

 

고골이 러시아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던 것처럼, 샤갈 또한 그랬다. 노예적 심리 상태로 자의식이 졸고 있었던 러시아, 비극적 가락을 덮어버릴 유머 감각을 지닌 존재가 그들의 러시아였다. 이야기를 이미지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을 즐겼던 샤갈은 고골 외에도 셰익스피어와 라퐁텐의 작품에 삽화를 그려 넣었다. -170

 

러시아를 벗어나 베를린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보고, 괴테를 통해 문예 도시의 면모를 바이마르에서 찾는다. 남프랑스에서 고흐의 절정의 순간을 떠올리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토마스 만을 회고한다.

그리고 마침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 그리고 그리스에서 어떤 자유와 조우한다.

 

 

인간 의지에 대한 결의에 찬 확신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는 나같은 사람조차 카잔차키스의 저 흔적을 더듬는 묘사에는 금세 무장 해제 상태가 된다. 피할 곳이라고는 아예 없는 한낮의 폐허에서 맞이하는 정적, 그 속에서 망자를 불러일으키고 정신의 높이에 가닿는 것이야말로 진정 그리스적이지 않은가. -355

 

여행을 떠난다면...

머리를 비우러 가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는 것의 시간과 공간을 넓혀

인문학과의 조우도 고려해보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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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덴탈 유니버스 - 우리가 몰랐던, 삶을 움직이는 모든 순간의 우주
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 / 다산초당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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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우주  [엑시덴탈 유니버스]

 

 

 

어린 시절에는 강경옥의 [별빛 속으로] 같은 만화책을 보며 밤하늘의 별이 빚어내는 SF적인 요소에 환호했다.

우주에 대한 환상은 우주인, 혹은 만화 속에서 고생담을 거쳐 영웅이 되는 주인공의 이미지가 다였다.

고등학교에 가서 "지구과학"을 공부하면서는, 이렇게 머리 터지게 어지럽고 어려운 걸, 왜 배워야 하나.

내가 대학에만 가봐라, 절대로, 다시는 이런 "류"의 책은 보지 않으리라, 했다.

 

내가 원하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환상적이기만 한 것들을 골라 보다 보니, 어느새 바보가 되어 있더라...

알맹이는 전혀 없는 공갈빵만 먹다가 이제는 그 단맛과, 텅 빈 속이 질리기 시작하더라.

TV 속에서 과학자들이 나와 한담처럼 툭툭 던지는 초끈이론, 상대성 이론 들을 알아먹지 못하는 내가...

참 못나 보이더라.

 

우리가 사는 동안에 우주를 직접 밟아볼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우주의 기원과 더불어 내가 발딛고 살아가는 지구의 기원 정도에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우주라는 것은 너무도 멀고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져서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엑시덴탈 유니버스]는 뜻밖의 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가이자 이론물리학자인 엘런 라이트먼 덕분에 우주에 대한 흥미가 조금 솟아올랐다고 할까.

MIT 최초로 과학과 인문학 교수에 동시 임명된 이력에 끌리기도 했고,

그 이력을 디딤돌 삼아 그의 책을 읽는 동안, 과학과 인문학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도 궁금증이 생겨났다.

(하나의 예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처럼 과학적 논증을 가지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려 드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짜증이 난다.(...)

나에게는 영적인 삶과 과학적인 삶을 이해하기 위해 그런 구분이 필요하다. 내 안에는 종교와 과학 모두를 위한 공간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우주와 물리적 우주 모두를 위한 공간도 존재한다. 이 각각의 우주는 자기만의 힘을 지니고 있다.-93)

 

 

 

과학의 발달로 우주는 이제 더이상 미지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러면서 더더욱 많은 논쟁의 씨앗을 낳았다.

1장 <우주의 우연>에서는 다중의 우주, 다중의 시공간 연속체, 3차원 이상의 우주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단 하나의 우주만 존재한다고 해도 일부는 보이고 일부는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우리 주변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 우주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에 관한 서로 다른 수많은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그 일곱 가지 관점을 탐험한다.

과학과 종교,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덧없는 본질 사이에서 빚어지는 충돌, 인간의 존재가 그저 하나의 우연에 불과할 가능성, 현대 기술이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도록 단절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우연의 우주, 대칭적 우주, 영적 우주, 거대한 우주, 덧없는 우주, 법칙의 우주, 분리된 우주.

 

우주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접근은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물리학과 철학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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