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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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력 넘치는 경찰 소설 [경관의 조건]

 

 

#말하자면, 경관이란...

 

[경관의 피] 이후 손꼽아 기다려왔던 사사키 조의 [경관의 조건]!

허걱 소리 절로 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망설임 없이 덥석 집어들어 읽게 된 것은 전작이 남긴 어마어마한 여운 때문이 아닐 수 없다.

경관 삼대에 도도하게 흐르는 경관의 피가 불러일으키는 기대감이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에 입신한 안조 가즈야가 경관으로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온힘을 다해 밀어붙이는 모습은 마치 은행잎 모양 머리 상투를 바짝 쪼아올려 붙이고 투견처럼 상대를 향해 달려드는 스모 선수의 박력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경관의 조건]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상처였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가즈야에게 경관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말하자면, 경관이란...

그 뒤를 이어갈 말들을 독자에게 적어넣으라고 살짝 토스하는 모양새지만 작가의 의중이 충분히 느껴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독자를 단숨에 가즈야의 입장에 감정이입하도록 쉴새없이 떠밀어댄다.

우리나라에서 지금의 경찰이란 죽어라 공부해서 그 테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태해지는 일만 남았을 뿐인 대표적인 철밥통 중의 하나로 인식된다. 각종 비리와 로비에 얽힌 모습이 뉴스에 보도될 때면 작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멋진 경찰, 경찰다운 경찰은 이 땅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만을 하도록 뉴스보도에 이끌려다닌 탓도 있겠지만 정말 박력 넘치는 경찰을 보고 싶다, 는 것이 로망이 되어 있던 시기에 [경관의 조건]은 이런 나의 목마름을 일시에 해소시켜준 시원한 경찰소설이 아닌가 싶다.

 

 

#가즈야와 가가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한때 대부라 불렀던 가가야 히토시를 부패와 탐욕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경시청에서 내쫓게 된 가즈야. 가즈야는 어떤 외부 압력에도 회유당할 우려 없는, 혈통이 확실한 젊은 경찰관 이미지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이유로 발탁된 것이었다. 그것이 폭력조직을 상대로 정보 수집 임무를 행하고 있던 가가야 히토시를 경관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게 될 줄이야. 결과적으로 윗선의 명령으로 가가야의 부하가 되었다가 가가야를 보기좋게 배신한 꼴이 되고야 말았다. 거기에는 가즈야가 사귀던 여성이 가가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고 판단력이 흐려진 탓도 있으려나.  

"아닙니다, 대부님. 오로지 대부님이 문제였습니다."-13

가가야는 자신을 수사 대상과 유착해, 그들과 똑같은 가치관으로 사는 일탈 경찰이라고, 이미 경관의 길에서 벗어난 낙오자라고 여기는 가즈야의 심정을 금세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모범 경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비해 자신은 정의롭지 않은 길로만 가는 타락한 경관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그 후 가즈야는 경부 승진 시험에 합격해 간부로서의 이력을 밟아가게 된다.

사회적으로 조직범죄가 이슈가 되자 조직범죄대책부의 무능을 묻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가즈야는 조직범죄대책부 1과 2계의 신임계장으로 부임한다.

 

 

[경관의 조건] 에서는 철저하게 계급으로 쌓아올려진 조직 내에서 드러나게 마련인  계급사회의 위선과 폐해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윗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장기판 위의 말로서 움직여야만 하는 경관들. 그런 경관들 가운데에서 가가야와 가즈야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보자.

조직범죄대책부 간부 회의에서 6년이 지나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폭력조직 정보수집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과거 일당백의 실력을 보여주었던 가가야를 복직시킨다.

각성제 불법소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가즈야는 묵비로 무죄를 쟁취했던 것이다. 박쥐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조폭들 사이에서는 그 일로 전설의 형사가 된 가가야는 경시청 최강의 조직폭력배 전문 형사로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가야와 가즈야의 9년만의 재회.

5과에 배속되었지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가가야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마약과 관련된 폭력조직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1960~70년대 학생운동 사안 때  잠입수사 요원으로  활약하다 신경이 닳고 인격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이후 인질사건 때 자살로 죽은 가즈야의 아버지와는 완전 다른 인격체다.

아버지뻘인 가가야와 가즈야는 경찰이 추구하는 정의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을 따름인데 둘 사이의 간극이 아직은 깊고 넓어 보인다.

 

 

#박력 넘치는 경찰소설이란 이런 것

 

가가야에게서는 음지에 사는 인간 특유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폭력의 냄새가 난다.

경관의 입장이면서도 뒷골목을 지배하는 인간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며 그들이 제공하는 헤택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가가야에게서 위화감을 느낄 법도 한데, 어쩌면 그렇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해 보이는 걸까.

가즈야는 보지 못한 경관의 긍지라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할까.

과거 내부고발자의 누명을 쓴 이후로 남들의 수근거림에 관해 체념하듯 넘기는 방식을 익힌 가즈야는 말 그대로 FM의 길을 걸어간다.

상명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경관의 긍지를 지키려는 모습에서 희석된 경찰조직의 단단함을 보게 된다.

라이벌로 맞서게 된 이 둘의 대결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강렬한 케미가 솟아난다.

정상적인 것, 원년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즈야와

원시적인 것, 날것의 자유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가가야의 대비에서 피어나는 열정적인 갈등이

미친듯이 피를 들끓게 한다.

 

저는 계장님이 가가야 경부를 고발한 게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관할서를 포함해 조폭 수사를 담당한 지 오래되었지만, 가가야 경부 같은 수사 방법에는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거래를 하기 시작하면 그건 더는 경찰이 아닙니다. 제 양복은 싸구려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명품 옷을 걸치고 맞설 생각은 하지 않아요.-358

 

가가야에게도, 가즈야에게도 마음이 동한다.

이들이 온몸으로 대변하려는 경관의 조건은 표면적으로는 날선 칼들의 맞부딪침처럼 챙챙 맞설 때 불꽃이 튄다.

과연 이 조건들이 하나의 길로 들어설 때가 올까?

아아, 다른 어떤 소설들에서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전율이 찌르르 온몸을 관통한다.

가가야가 가즈야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것.

호루라기 하나가 전하는 감동의 여운에 한동안 푹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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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선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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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땅,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리 [미드나잇 선]

 

모든 것이 끝이다, 생각하는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몸 하나 뉘일 곳으로 어디를 선택할까?

자신의 생이 다하는 그 때, 이 세상 가장 끄트머리로 그 몸을 지일질 끌고 들어가고 싶어질까?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다음 월요일이 시작되는데도 일요일의 자정 무렵이면

몸이 땅 속으로 꺼져들어갈 듯이 축 처진다. 별다른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일요일의 존재는 그러한데, 하물며...

인생이 끝장난 것 같은 절망이 자신을 엄습해오고, 마침 뒤에서는 총을 든 누군가가 자신을 바짝 뒤쫓아 오고 있다면...

그 도망자는 어떤 곳을 자신의 몸 뉘일 곳으로 어떤 장소를 점찍을까.

 

한밤중에 버스에서 내려도 희미하게 붉은 태양이 섬을 가로질러 바다로,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곳.

바다 뒤로는 북극인 핀마르크 고원(노르웨이 최북단에 위치한 주). 선의 끝.

권총을 재킷 주머니에 넣은 깡마른 사내 하나가 '코순'이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부디 숨기에 좋은 장소이길 원하며 사내는  그 곳에서 은신한다.

그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린 사미족 남자하나의 도움으로 교회에 잠시 머물 수 있었다.

계획 없는 계획대로 울프란 가명 뒤에 숨은 그는 뱃사람으로부터 도주하는 중이었다.

뱃사람의 밑에서 마약 빚을 수금하고 때로는 사람 죽이는 일을 했다지만 그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힌 일이 없었는데...딸아이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큰 건을 하나 해치워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약하고 한심한 바보여서...뱃사람을 배신한 부하 구스타보를 처리하는 대신에 그와 돈을 나눠 갖고 뱃사람에게는 거짓보고를 했다.  그는 이제 구스타보 대신 스스로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뱃사람은 자기가 찾는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죠.-40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멀리서 볼 때 지극히 단조로워 보이던 풍경은 끊임없이 변했다. 초록색과 적갈색 헤더로 뒤덮인 부드러운 갈색 토양은 돌투성이에 여기저기 파인 흔적이 있는 달 표면처럼 변하더니, 내가 도착한 이후로 반쯤 회전한 태양의 빛을 받아 갑자기  불타오르는 듯했다. 마치 부드럽게 경사진 비탈을 타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 모든 풍경 위로 고아활하고 끝없는 하늘이 펼쳐져 ㅇㅆ었다. 왜 여기서는 하늘이 훨신 넓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왜 여기서는 땅이 둥글게 구부러지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은지 모르겠다. 잠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40

 

다음을 감히 기대하기 어려운 예측불가능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울프와 딱 어울리는 장소, 백야의 땅.

 

 

그러나 그 곳에서 그는 미망인이 된 교회 목사의 딸이자 교회 관리인인 레아와 사랑에 빠진다.

신경쇠약에라도 걸리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을 가끔 찾아오는 순록에 익숙해지고 어린 소년 크누트의 수다에도 적응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조차 한 치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다니.

세상 끝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한 사내 앞에 나타난 가엾지만 강인한 여성 레아.

그들의 척박하고 황량한 삶은 사랑으로 인해 환하게 밝혀질 것인가.

정처없이 부유하는 마음을 잡으려 마을의 예언자격인 여자와 하룻밤을 자기도 하지만 그의 마음엔 불안함이 가시질 않는다.

'당신은 반사된 상을 쏠 거야.'

추적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죽은 순록의 사체를 찢어 부패하기 시작하는 그 살과 가죽 사이에 자신을 욱여넣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토록 생에 대한 미련은 질기기만 한데...

 

도망칠 것인가, 구원받을 것인가, 구원할 것인가?

책 뒤에 새겨진 이 한 줄의 문장이 이들의 운명을 대변한다.

 

오슬로 1970 시리즈 중 하나인 [미드나잇 선]은

막다른 상황에 몰린 뒷골목 거친 남자의 최후를 보여주지만

그런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이 있어 버텨낼 수 있어!

거친 남자의 인생과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간을 버텨내온 여자의 한숨이 겹쳐지는 그 순간,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랑.

절체절명의 순간에 찾아온 사랑은 안타까운 이별을 고하지 않고 열린 결말을 남기며

희망을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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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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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위한 헌신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명치 끝을 지그시 누르는 묵직한 통증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남아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잖아? 이런 결말..

네 명 중 누군가는 범인이어야 맞는 거였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아닌 제 3의 인물이 범인이기를 내심 바라는 마음이 슬그머니 솟구치기도 했다.

법정에 불쑥 불러세워진 뜬금없는 증인들이 사건의 방향을 종종 바꾸었듯이 이번에도 그랬기를...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에 반해서라도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는 순진무구한 마음과 아무래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건대 결말은 새드엔딩일 수밖에 없음을 직감한 듯 착 가라앉은 마음이 뒤죽박죽인 채로 결말을 맞이했다.

꼬일대로 꼬인 사건을 풀어헤쳐도 끝에 남은 건 속시원한 해갈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이런 사건을 애시당초 기획, 연출, 완성해낸 악마같은 작가에 대한 원망 뿐. ^^

현실은 때론 소설보다 더 추악한 진실을 드러낼 때가 있기에 차라리 소설 속 이야기에서 위안을 구하려했건만...

지독히도 현실적인 소설 속 이야기 앞에 현실과 환상의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붉은 집 살인사건], [유다의 별] 등으로 유명한 도진기 작가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 최신작이다. 그의 단편은 읽은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장편이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부장판사로 재직 중인 작가라고 해서 특히 법정 씬이 기대가 되었는데, 작품 속 변호사 고진은 판사직을 내던진 이래 처음으로 법정에 등장한 것이라고 했다.

의외인데? 라는 생각도 잠시, 변호사와 검사의 치열한 공방, 증인을 이용한 색다른 신문 방식 등이 현장감 있게 펼쳐져서 기대한 바가 충분히 충족되었다.

 

"남편을 죽여 주세요."

42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예술가가 빚은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여인 김명진.

그녀는 변호사 고진을 찾아와 황당한 의뢰를 하고 곧바로 거절당한 뒤 돌아간다.

 

수줍음이 사라진 시대, 그 조그만 웃음에는 세파에 찌든 남자의 마음을 잡아끄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 미추와 선악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만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나쁜 놈이라고 무작정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11

 

흔히들 경국지색이라고 하는 미인들은 그 절정의 미모로 인해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곤 한다고, 역사책이 전한다. 김명진이라는 여자의 미모는 어떤 불행의 파장을 예고하고 있는 것일까.

 

김명진은 남편 신창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다. 하지만 곧 집을 나와 혼자 지내면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신창순은 응하지 않았다. 신창순은 블라디보스톡 항구 주변 막다른 골목에서 낚싯줄에 목이 졸린 채 죽었고, 쓰레기봉투에 덮인 채로 발견되었다. 김명진은 남편살인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처연한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는 소름 끼치는 살해 방법.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는 법인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 직접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인자가 되고 말 것인가? 그녀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법정에 서지 않기로 유명한 '죽음의 변호사' 고진이었다.

검사는 김명진의 거짓말 탐지기 결과와 여러 명의 증인을 들이대며 그녀의 유죄를 부르짖었고, 이례적으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다.

고진은 신창순이 죽기 전, 러시아로 신창순 부부를 만나러 갔던 대학 동기들에게 눈을 돌린다.

김명진의 여동생 김해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궁현, 부자인 임의재, 대학교수인 한연우.

대학시절 신창순을 비롯한 네 명의 남자는 김명진을 사이에 두고 농담처럼 '결혼'을 걸고 오래달리기 시합을 한 사이다.

아마도 이들 인생에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된 때가 바로 이 순간이 아닌가 싶다.

김명진이 딱 부러지게 자신의 의사표명을 하는 여자였다면, 수동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들의 운명은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을...

김명진과 신창순의 결혼 생활이 불행했음이 밝혀지자 나머지 세 명의 이름이 저절로 떠오른다.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그들 중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신창순을 살해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모두 탄탄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데...

남자들의 마음에 편서풍을 일으키는 이 여인을 위해 한결같은 순정을 키워오다 끝내 자신의 나머지 삶을 헌신하고 만 그 남자가 가엾다.

 

자신의 삐딱한 입술처럼 인간을 삐딱하게만 바라보는 고진의 법정 씬은 한마디로 통쾌했다.

검사의 도발에도 쉽게 걸려들지 않고 한발 빼고 서 있는 유유자적한 모습.

때를 기다려 한 판에 쏟아부을 줄 아는 커다란 배포.

생각 외로 사건이 풀리지 않자 고진은 이유현과 함께 직접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기로 한다.

사건 현장을 보고, CCTV를 보고...무심한 얼굴로 사건해결을 했다고 선언한다.

그의 고민은 이제 더이상 누가 범인인가, 가 아니라 용의자를 어떻게 법정에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일 테다.

공판 기일이 엎어지길 몇 번, 마침내 범인을 법정에 세우는 그 순간까지의 치밀한 심리전이 간만에 가슴을 뛰게 했다. 변호인이 마지막 기일에 변호사를 사임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라니!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변호사의 깊디 깊은 속을 헤아릴 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녀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한 남자 뿐.

애당초 이 비극은 법정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는 고진의 말이 무채색을 띤 채 메아리되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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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집중력 - 하루가 달라지는
나구모 요시노리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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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집중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하루가 달라지는 오후의 집중력]

 

[1일 1식], [공복으로 리셋하라] 등으로 유명한 나구모 요시노리.

그는 삿포로에 '나구모 클리닉'을 개업, '여성의 소중한 가슴의 미용과 건강, 기능을 지킨다'는 신조로 연간 1,000건 이상의 유방암 수술, 재건수술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독자적인 회춘 건강법을 소개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이번 책은 하루가 달라지는 [오후의 집중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집중력'을 주제로 해서 수면, 식사습관, 음식 등의 이야기부터 집중력이 지속되는 사람의 라이프 핵심, 뇌를 제어해 집중하는 법, 모티베이션을 높여 집중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포괄적인 범위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환갑을 넘은 나이지만 하루에 6시간 잠을 자고도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집중력'이 인생의 장애물을 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새벽 3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오전 9시까지 매일 6시간, 하루의 4분의 1시간을 '인생의 보너스'라 부른다. 그 시간 동안 책을 집필하고, 강연회를 준비하며 사업을 계획하고, 학문에 힘쓴다고 한다.

나머지 시간은 의사로서 진료, 저녁 식사 모임, 수면 시간으로 채운다.

하루 24시간을 정말 알차게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았으며 고비를 많이 겪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때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것은 '집중력' 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까지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지만 현역으로 지망인 의과대학에 합격한 것도, 의사국가시험에 한 번에 합격한 것도, 가슴을 전문으로 한 새로운 의료를 기획하고, 불과 2주만에 책 한 권을 써낸 것도 모두 집중력 때문.

집중력이 솟아나게 하려면 수면, 운동, 식품, 환경 , 자기 자신의 뇌 등 몸과 마음의 상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왜 집중할 수 없는지, 어떻게 하면 집중할 수 있는지,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다루고 있어 이 책을 참고로 하면 집중력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을 뛰어넘는 충고들도 몇 있지만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인 만큼 저자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가령, 수면은 3시간이면 충분하다, 낮잠은 건강에 좋지 않다, 오후 회의에 집중하고 싶으면 점심을 굶어라, 아침부터 물을 마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차나 커피는 '알칼로이드라는 독' 이라고 말하는 것 등은 얼핏 보기에 말이 안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그럴 만도 한데~?'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의사의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생활패턴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므로 저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머지 뇌를 제어해 집중한다, 모티베이션을 높여서 집중한다, 인생은 '집중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류의 이야기에는 새겨 들을 것이 있다.

다만, 일상생활을 단순하게 하면 할수록 고민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으므로 원패턴 생활을 고집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의 건강법을 강요하는 것 같아 받아들이기에 좀 껄끄럽다.

 

식사는 1일 1식으로, 저녁밥은 스스로 만들지만 외식을 하려고 해도 늘 가던 음식점만 같다. 아침과 점심, 배가 고프면 땅콩 같은 간식을 먹거나 요구르트, 큰실말, 낫토 등 끈적끈적한 식품을 먹는다.

'매일 같은 생활이 질리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과 의학적 이론으로 구축된 나만의 건강법이다. 자기 페이스를 지키며 원패턴으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전혀 괴롭지 않다.-168

 

저자의 모든 일상을 따라하는 것은 무리일지라도, 당장 '집중력'을 높일 필요가 있거나, 집중력을 꾸준히 기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새겨두어야 할 것이 몇 가지 보인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비우고 건강하게 집중하는 법을 이 책에서 찾아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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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아도 행복한 프랑스 육아 - 유럽 출산율 1위, 프랑스에서 답을 찾다
안니카 외레스 지음, 남기철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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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럽 출산율 1위의 비밀 [아이를 낳아도 행복한 프랑스 육아]

 

우리나라도 이제 저출산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조부모, 부모 때에는 셋 이상 낳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우리 때만 해도 '외동'인 아이들이 몇 없었는데, 지금은 외동을 넘어서 아이가 없는 집도 꽤 눈에 띈다.

삼포세대가 유행어처럼 번진 요즘 세대 사이에서는 맞벌이가 기본이다 보니 아이 낳는 일은 "꿈"처럼 되어 버렸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매달렸고 대학을 목표로 죽어라 뛰었으며, 대학 진학 이후에는 학점은 기본이고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던 청춘들이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입에 달고 산다.

연애할 시간도 없어서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들을 하고 부모님이 주선하는 선보다 더한 기준을 통과해야만 만남을 가질 수 있다.

어찌어찌해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남자 혼자 벌어서는 집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하니, 여자는 맞벌이가 기본.

아이를 낳으면 여자는 그 즉시 경력단절이 시작되어 아이를 아예 포기하지 않는 이상은 직장에 순조롭게 복귀하기가 힘들다.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면 그 때부터 엄마와 직장여성 사이에서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여자들은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좌절하기 일쑤다.

저출산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보니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고는 있지만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 전체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은 당분간 저출산이 지속될 것만 같다.

 

[아이를 낳아도 행복한 프랑스 육아]는 유럽 출산율 1위, 프랑스의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독일 출신 기자인데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기 위해 독일에서 남부 프랑스로 이주하여 지금은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 독일에 계속 살았다면 여전히 아이 낳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만큼 같은 유럽에 속해도 육아에 관한 한, 독일과 프랑스의 문화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뚜렷이 대비된다.

대부분의 프랑스 부부들은 고민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며 아이를 둘 이상 키워도 취미와 직장일을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외모를 가꾸는 일도 훌륭히 해낸다.

일과 양육을 조화롭게 병행하는 여유로운 삶.

분명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마지 않는 이상형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유럽권이라도 독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프랑스에서는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수년간 취재해 온 저자의 이야기들 속으로 빠져 보자.

 

 

쉽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프랑스인.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즐기기도 하고 그릴 파티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나기도 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 이유는...

우선 독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보육환경,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을 지극히 당연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사고방식, 게다가 프랑스인들은 아이를 낳으려는 욕심이 많다.

(저자가 독일인이므로 이 책에서는 독일과 프랑스를 대비시켜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기 전에 즐기던 생활을 출산 후에도 변함없이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독일에서는 힘들지만 프랑스에서는 가능하다.

프랑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평등한 사회라는 목표를 세운 반면, 독일은 예전부터 남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고, 100년 넘게 지속되어온 선입견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프랑스 정부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독일 정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여자가 의사, 남편이 자동차 판매원인 경우처럼 남녀의 직업에서 권위의식을 따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의식이 유독 강한 프랑스 여자들은 남자를 고를 때에도 개방적으로 생각하고 파트너를 고를 때 별로 골머리를 않지 않으며 이상적인 남성상이 독일과 확연히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남자, 여자들로 하여금 내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여자들이 가진 비밀스런 부분을 존중해 주는 남자를 원한다. 그리고 프랑스 여자들 중 절반 이상이 사회생활에서 남편의 외조를 원한다. -48

 

출세해서 돈을 많이 벌고 명예욕이 강한 남자는 가족을 위해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프랑스 여자들은 독일 여자들보다 의식이 깨어 있는 듯하다.

 

독일 부모들은 자식을 최고로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여자들에게 희생적인 엄마의 역할을 강요하며 워킹맘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저출산은 보육시설 부족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자녀를 직접 돌봐야 한다는 부모들의 잘못된 신념이 더 큰 문제다.-79

 

프랑스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보육시설이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교육에 돈을 들이는 일이 많지 않다. 오후에 학교에 남아 숙제를 봐주는 사람은 선생님이다. 프랑스 부모들은 자녀들이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어린이집과 학교를 굳게 믿는다. 초저녁까지 아이를 봐주는 곳이 없어서 직업을 포기한다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아내의 수입이 많을수록 가사 분담이 분명해진다. 프랑스 여자들은 분명히 돈을 잘 번다. 그리고 가사노동의 분담에서도 눈에 띄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 -203

 

잘게 다진 당근과 호박, 콩과 쌀을 함께 넣고 은박지에 싸서 찐 대구, 까망베르 치즈, 신선한 딸기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1~3세 유아 점심식사 메뉴 -234

 

독일과 프랑스 중 어느 나라가 우리와 비슷한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독일과 많이 닮아 있다.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그러하고 정부의 의식도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프랑스에 근접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가 평등하고 결혼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아이 낳는 일은 행복하다는 의식이 지배적인 프랑스, 과연 유럽 출산율 1위의 명성을 누릴 만하다.

우리나라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으며 아이를 낳은 엄마를 위해 보육정책을 강화하고 누리교육과정 중 혜택을 주고는 있지만 눈에 띄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평등"이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 때문에 직장과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사는 엄마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프랑스로 이민을 가고 싶지 않겠는가?

프랑스 부모는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주문을 늘 마음에 새긴다.

이 말이 널리 널리 퍼져서 엄마들의 마인드가 바뀌고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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