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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1 ㅣ 세계문학의 숲 38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진호 옮김 / 시공사 / 2014년 1월
평점 :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소설 [밤은 부드러워 1,2]
마침내
겨울은 그 위세를 떨구고 얌전한 봄기운이 온 세상에 만연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으로 쭈욱쭉 기지개를 펴자 온몸의 관절들에서 뚜둑뚝 소리가 나는데, 그마저도 반갑다.
봄밤.
볼에
살짝 바람을 불어넣고 가만가만히 내뱉어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
봄과
밤은 마치 한 몸인 듯, 은근히, 그리고 소리 없이 내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흩날리는
벚꽃잎과 향내 진동하며 가녀린 가지가 휘어지도록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복숭아꽃들은 낮에 보아야 황홀하건만, 어째서 ‘봄’하면 ‘밤’이
떠오르는지... 아마도 밤인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은근한 반짝임들에 매료된 내 정신이 봄과 밤을 한 몸으로 이어주는 듯하다.
봄비를
맞아 촉촉해진 대지에서 흙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날. 나는 봄과 한 몸인 ‘밤’이 제목에 떡하니 들어 있는 소설 [밤은 부드러워]를
읽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열풍이 불어닥친 지난 해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로 보거나 책으로 다시 읽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온다.
돈과
사랑, 상류사회, 그리고 매력적인 남과 여의 캐릭터.
피츠제럴드가
성공적으로 그려낸 그 세계에 제대로 한 번 푹 빠졌더라면 그 잔상을 되살려 [밤은 부드러워]에도 좀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주
오래 전, 고전이랍시고 무턱대고 글자만 좇으며 읽어내렸던 기억에만 의지하자니 “개츠비”의 이미지가 가물가물하다.
피츠제럴드의
걸작이라는 “개츠비”에서보다 좀 더! 작가인 피츠제럴드를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그의 자전적 소설 [밤은 부드러워]
첫
부분부터 묘사되는, 우리 정서에는 없는 ‘상류사회’의 분위기가 참 낯설었다.
하루키의
[더 스크랩]이라는 에세이를 얼마 전에 읽었는데, 하루키의 피츠제럴드에 대한 관심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하루키가
<에스콰이어>지에 실린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의 추억담을 보고--
깅리치가
당시 한물가고 있던 피츠제럴드에게 보내는 따뜻함이 절절이 전해지는 아주 좋은 글이었다. (101)
**
뉴욕에 관한 오래된 기사를 읽다보면 ‘포 헌드레즈’라는 말이 곧잘 나온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에도 ‘연배가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포
헌드레즈의 존재를 믿으려 해도 뉴욕은 점점 변해간다’고 하는 기술이 나온다. (...) 피츠제럴드가 말했듯이 미국 사회가 가진 본질적인 활력이
그런 유한계급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3)
포
헌드레즈란 사교계의 중재자인 워드 맥앨리스터가 뉴욕시 상류사회 저명인사들에 대한 ‘4백인 ’이라는 리스트를 만든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하루키는
[밤은 부드러워]에 피츠제럴드라는 인간이 그대로 깃들어 있다고 평했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기에 도대체 어떤
인물이 피츠제럴드의 현신인지...궁금해하며 읽었는데, 크게 2부로 나뉘어진 이 책에서 그 인물을 찾아보면 딕 다이버라는 인물이 딱~ 나온다.
시간적
순서대로 하자면 2부부터 읽고 1부를 읽어야 하지만, 작가는 일부러 딕 부부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빛나는 열여덟의 로즈메리라는 여배우를 통해 딕
다이버 부부를 돋보이게 하고자 했는지. 1부의 첫 등장인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은 로즈메리이며, 1부는 대부분 그녀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프렌치
리비에라(프랑스어로는 코트 다쥐르)의 쾌적한 해안, 마르세유와 이탈리아 국경 중간 쯤에 분홍장밋빛의 크고 당당한 호텔이 있다. 경의를 표하는
종려나무 가지들이 햇빛에 달아오른 건물 전면을 식혀주고, 그 앞으로 짧고 눈부신 모래사장이 펼쳐 있다. -13
이곳,
사교계의 중심지인 바로 이 곳으로, 영화배우이긴 하나 아직 여러 모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제대로 첫사랑을 일구어보지도 못한 로즈메리가
찾아온다.
그
곳에서 딕 다이버라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열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빛나는 푸른 세상 같은 눈을 가진 그에게 푹 빠져 버린다.
딕이
니콜이라는 거의 완벽한 여성과 성공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그들 부부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딕 다이버의 세계에
포함된다는 것은 섬세한 배려와 정중함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 시즌 동안 딕 부부(딕 부부는 호텔에 머물지 않고 근처의 언덕에 집을 지었다.)의
모임에 초대된 이들-매키스코 부부, 에이브럼스 부인, 덤프리, 시뇨르 캄피온, 토미 바르방 등-은 완벽한 딕 부부의 사교술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로즈메리가 모르는 사이에 매키스코 씨와 바르방은 결투를 벌일만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절대로 로즈메리에게 틈을 줄
것 같지 않던 딕도 어느덧 로즈메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등, 완벽한 예절에 싸여 있을 것 같던 상류사회의 사람들이 허술한 틈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특히 딕의 무너짐은 2부에 가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1부의 끝 무렵, 누군가를 배웅하기 위해 역으로 나간 그들은
마리아 월러스가 누군가를 총으로 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호텔에서 흑인의 죽음으로 상기시킨 붉은 피는 완벽한 세계에 사는 것 같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서서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로즈메리가
나타나기 전부터 딕은 부유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아내 니콜과의 관계가 영속되지 않으리란 불안감에 흔들리고
있었다.
낭만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인 딕 다이버는 아내 니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런 소망이 좌절됨에 따라 점점 술에 빠진다.
2부.
완벽한
부부인 줄로만 알았던 딕과 니콜의 충격적인 과거.
1917년으로
돌아가 딕과 니콜의 처음 만남이 펼쳐진다. 부유한 집안의 상속녀인 니콜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요양을 하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딕과 만났고 니콜을 지켜주고 싶었던 딕의 희생으로 결혼에 이른다. 딕은 본인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재산이 있고 성공한 의사였지만,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자인 니콜과 돈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자신의 몫은 자신이 분담하고, 혼자 여행할 때는 3등석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니콜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씀씀이는 헤퍼지고 느슨한 상류사회에 젖어들게 된다. 부자의 생활양식은 딕의 정신을 황폐해지게
만들었다.
니콜의
건강이 나아지면서 의사인 딕은 필요 없게 되고, 딕은 기꺼이 다른 남자에게 니콜을 보내 준다. 자신의 이상이 서서히 붕괴되는데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니콜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주면서...
작아지고
움츠러들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숨어사는 딕.
작가
스스로 신앙고백과도 같은 소설이라고 말한 [밤은 부드러워]
사뭇
낭만적이던 1부의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지고 결국에는 딕의 꿈과 이상이 스르륵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니 피츠제럴드의 순탄지 않은 인생을 엿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돈”이라는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상류사회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그들도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가 더 필요하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 아~ 부럽다!”
그러나
그들을 포장하고 있는 번듯한 껍데기를 한 꺼풀만 벗겨도 서서히 곪아가고 있는 환부를 최소한 한 군데씩은 찾아낼 수 있었다. 삶의 의미를 무조건
돈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간다.
자신만이
니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딕이 알콜에 잠식당해 가고, 반면에 니콜은 병이 나아가면서 새로운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찾아가는
과정은 뭔가가 변화해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과도기에 있는 세상.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다가오고 있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부드러운
밤 바람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나직한 한숨이 들리는 듯한 소설로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