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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ㅣ 이덕일의 역사특강 2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4월
평점 :
악역을
자처한 성군, 태종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는 왕의 자리.
참으로
존귀하지만 고독한 자리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역성혁명을 거쳐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그 과정에서 뼈아픈 진통이 한바탕 나라를 휩쓸고 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의 우왕좌왕하는 시기에
허수아비 왕들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새로운 혁명을 꿈꾸었던 정도전은 힘을 가진 이성계를 만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실로 많은 이들이 그를 도왔고, 그 중에는 문과 무에 정통한 아들 이방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힘들게 왕위에 앉은 이성계는 어째서 사랑했던 아들 이방원과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었나.
아버지에게
칼끝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아들 이방원은 끝내 가슴에 응어리를 남긴 채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했다.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고 한창 혈기왕성한 때의 이방원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었던 영화 <관상>에서는 이방원을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의
약점인 목을 잡아 뜯고 피를 봐서라도 왕의 자리에 오를 이리상, 진정 역적의 상” 이라고.
이방원,
즉 태종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리는 면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이덕일은 악역의
길을 묵묵히 걸은 성군으로
이방원을 조명하고 있다.
사회의
문제점을 정면에서 해결하고 수많은 비난을 무릅쓰며 악역을 자처하는 것으로 구민(丘民)들에게 천명의 소재를 확인받은 이로 꼽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민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 그래서 구민(丘民-들판의 백성)을 얻는 자는 천자가 되고, 천자를 얻는 자는
제후가 되며, 제후를 얻는 자는 대부가 된다. -맹자, 진심 하
정도전이
토지 개혁으로 이성계에게 개국의 천명이 내렸음을 입증했다면 이방원은 공신들을 숙청하고 종부법을 제정해 자신에게 천명이 내렸음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2
이성계와
정도전이 고려 말의 구민들을 얻었다면 이방원은 조선 초의 구민들을 얻은 것이라고 작자는 말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는 “세월호”의 사태를 보며 무너져내린 공권력에의 신뢰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통감한다. 국무총리의 사퇴도
심지어 고개 숙인 대통령의 조문도 희생자들의 가족 앞에서는 쓸데없는 “액션”에 불과하다. 문제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파헤치는 작업들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으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가를 찾으려고 언론은 혈안이 되어 있다.
누구
한 사람, 내 탓이라고 나서는 이 없고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며 몸을 사리기에 급급한 꼴을 보며,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부끄럽다고 말하는 이 조차
있는 실정이다.
바로
지금, 이 때, 이방원과 같은 “악역을 자처하는” 리더가 절실하다.
자신이
행했던 악역은 모두 천명의 결과이며 자신이 왕의 관상은 아니지만 국왕이 된 것은 모두 하늘이 시킨 것이라며 왕위에 오른 자기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했던 이방원이지만, 그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권력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권력이란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는 것처럼 두려워해야 하는 것임도 잘 알고 있었던 이방원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군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세종 못지 않은 성군의 자질을 보여주었고, 백성들은 훗날
“태종우(太宗雨)”기사로
그의 뜻을 기렸다.
야사에
전해져 오는 것이긴 하지만, 태종우는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태종이 임종할 때 세종에게 ‘가뭄이
극심한데 내가 죽어서라도 알게 된다면 이날에는 반드시 비가 오게 하리라’라고 말했는데, 훗날 과연 그렇게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피의
숙청으로 공신들의 원망을 샀지만, 태종우 고사가 말해주듯이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이방원.
정몽주를
죽여 개국의 전기를 마련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부왕을 쫓아냈으며, 네 처남을 비롯한 공신들을 가혹하게 숙청해 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온갖 비난과 저주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악역을 자처했기에 조선은 번듯하게 기틀을 세우게 되었고 세종으로 연결되는 문화의 시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사이
태조께서 아주 귀여워하시던 두 아들을 잃고 상심하시던 것을 생각했다. 비록 내 몸은 나라의 주인 되는 영예에 있었어도 어버이를 뵙지 못했고,
혹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전 殿에 나아갔다가도 들어가 뵙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 그럴 때마다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필마를 타고 관원 한 명만
거느리고 조석으로 아버지를 모셔서 (昏定晨省) 내 마음을 나타내고 싶었다. -태종실록, 18년 8월 8일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피를 흘리며 쌓아올린 조선의 기틀 뒤에는 이렇게 짠한 마음을 가진 이방원의 노력이 있었음을...안타깝게도 맞서야만 했던 부자의 관계를
돌아보며 한 번쯤 짚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특히나 “이방원”은 진정한 리더를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입해 본다면, 꼭 필요한
인물상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