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흥망사
김성렬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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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흥망사]

 

부산의 용두산 공원을 가면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와 꽃시계가 있다. 그 유명하다는 그 곳을 우러르며 한참을 올라왔는데,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무심히 모이를 쪼아대는 비둘기 떼들과 어르신들의 모여앉은 모습이다. 관광 상품을 즐기기 이전에 무심코 드러난 생활의 단면을 먼저 접하게 된다.

한껏 들뜬 마음은 어르신들이 장기판 주변에 모여들어 훈수를 두거나 구경하는 모습, 또는 때가 한참 지난 아코디언의 구슬픈 음색들을 듣는 순간 잘 익은 파김치처럼 팍 수그러들어 묘한 입맛을 남긴다.

비단 용두산 공원 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어느 한갓진 공터나 마당에서도 어르신들의 시간 죽이기를 만날 수 있다.

파릇파릇한 연예인들의 춤사위를 보는 것처럼 흥이 나는 일이 아니므로 얼른 시선을 회피하고 싶어진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비슷한 연배들과 어울려 시간이나 죽이고 있지...싶어 불편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며 에고 에고 소리를 달고 산 지도 한참 되었는데...

오지 마라고 손사래쳐도 성큼 쫓아오는 게 나이인 것을 왜 그렇게 애써 외면하고 싶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괴물 흥망사]는 부푼 마음을 안고 나들이를 갔다가 그렇게 맞닥뜨리게 되는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 +]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일본에서 [세계의 끝 여자친구]번역본이 나왔는데, 역시 '한국의 젊은 작가'로 소개됐어요. 100세 시대가 다가오기 때문에 아마도 환갑이 될 때까지는 젊은 작가일 것 같네요.(...)

라고 하면서 박완서 선생님과 자신의 단절은 경험론적인 단절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전쟁을 겪었는데, 저는 안 겪었으니까요. 그 밑의 세대들과도 보릿고개 체험, 농촌 체험 등에서 차이가 나고요. 그런데 1968년생 이후로는 경험이 균질해요.-51

 

즉, [괴물흥망사]의 작가와 읽는 독자인 나 사이에 김연수가 말한 "경험론적인 단절"이 심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우리 사랑 흘러흘러>, <괴물흥망사>, <광덕의 아내>, <오후의 산책>, <한 여사 연대기> <개가 되어 버린 김씨의 기이한 경우에 관한 사례 보고>, <즐거운 수학여행>, <꿈과 같이> 등 8개의 단편이 묶인 소설집인데 작가의 이력도 그렇거니와 문체에서도 너무나 고색창연한 어투가 묻어나서 도무지 쉽게 와닿질 않았다.

현재 대진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연구와 논문 쓰기를 주로 하던 분이라 문장의 흠결은 따질 수 없으나 요즘 나오는 소설과는 살짝 뭔가가 다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삶과 세계의 구체적 질감을 세밀하게 느끼고 그를 즐기는 르네상스적 감각의 부활을 꿈꾼다 고 했지만, 작가의 꿈은 나와는 너무도 멀리 있어서 쉽사리 그 곳까지 건너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나의 세대에서 느끼지 못했던 그 시절의 흘러간 이야기들을 주워삼기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한 나절 들었다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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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타자 2014-06-2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읽기에는 그렇게 낡아보이지는 않았는데요?오히려 은근한 문장으로 삶의 비밀을 잘 보여주는 맛이 있어서 좋았어요.

남희돌이 2014-06-2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느끼셨군요~아직, 제가 수련이 덜 되었나 보아요. 하긴, 작가의 작품을 뭐라고 할 만한 깜냥이 못 되는데...리뷰를 쓰다 보니 제 느낌은 이렇다고 적어놓았네요.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
이병욱 지음 / 학지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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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과 정신분석의 만남 [프로이트와 함께 하는 세계문학일주]

 

 

 

예전에는 문학의 '고전'에 대한 거부감 없이 죽 읽었었다.

그야말로 철없던 시절, 도서목록에 있으니까. 꼭 읽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이유로 <파우스트>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니, <부활> 같은 작품들을 겁없이 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대략 줄거리를 파악하고 나서, 음. 이런 내용이구나. 입력 끝.

여기까지만 하고 끝냈다.

그래서 나의 세계고전문학에 대한 지식은 줄거리에 대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딱 거기까지.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굴곡 많은 인생의 굽이들을 돌아 어느덧 아이 둘의 엄마가 되고 보니, 새삼 그 고전들을 다시 읽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배웠던 조선 왕조의 임금들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으로 나뉘어 한 임금의 생애를 조명하고도 각기 다른 영화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아 알 수 있듯이,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넓게, 그리고 깊이 무언가를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영조와 정조, 광해와 연산군. 이 키워드들만 떠올려도 한없이 빈약했던 나의 지식과 역사인식에 대한 무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판국이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갔지만, 세계고전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말, 수박 겉핥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나의 독서가 뼈저리게 부끄러워진다.

바로 이 때, 나의 무지를 구원해줄 도움의 손길이 짠하고 나타났으니, 그것은 또 다름아닌 "책"이라는 물건이다.

종이로 만들어지고 모양이 네모지다고 그 안에 든 것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책 한 면만 읽어도 금세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깨닫게 해줄 정도로 막강한 지식의 파워를 가지고 있는 책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질 뿐...

 

근엄한 얼굴의 프로이트가 나에게 "세계문학일주"를 권했다.

나는 무조건 "예스"를 외치며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그 넓고도 깊은 바다 속에서 때로 헤매고 때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기도 했지만, 짠물을 마시며 얻는 게 꽤 있었다.

특히나 문학작품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논하는 것보다, 작가와 작품의 상관관계를 정신분석의 선상에 두고 분석했을 때, 그 작품의 위상이 달라보이는 묘한 체험을 하게 된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달까.

작가들이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 작가의 그늘을 발견하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으며 꽤 두툼한 책이었는데도 금세 읽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몇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재미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던 이 책의 속살을 살짝 공개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 이 말은 곧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에 놓여 살아가는 아일랜드인들의 고충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버나드쇼, 112

 

그의 모든 작품이 처러한 자기 분석의 결과이며 자신의 환상을 글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때, 카프카야말로 꿈과 환상 그리고 현실의 절묘한 배합을 통하여 인간 내면의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낸 불세출의 천재적 작가였다고 생각된다. -143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무의식의 밑바닥가지 몸소 체험하고 그 경험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복잡다다한 인간 심리에 통달했던 최초의 심리소설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75

 

결국 그의 삶을 통해서 프루스트를 괴롭힌 세 가지 사실은 자신이 유대인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동성애자라는 사실, 그리고 부모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

솔직히 말해서,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동성애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런 점에서 처음에 그가 출판을 의뢰했을 때 앙드레 지드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지드 역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프루스트에게 정중히 사과했지만 말이다. -229

 

어쨌든 융과 헤세 모두 아프락사스를 숭배하는 신도요 사제들이었다.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쌍둥이 같은 존재다. -147

 

물론, 대개의 세계문학 작품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들이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고,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확실히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 세계문학작품과 정신분석이 긴밀한 연관이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작품이 작가의 자전적 작품은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작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저 프로이트의 손을 잡고 세계문학일주를 하고 왔던 소감은 왠지 뿌듯하다...로 결론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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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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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노래 [몽환화]

 

 

# 환상의 노래

 

들으면 들을수록 멋진 곡이었다. 정신이 함께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힙노틱 서제스천 hypnotic suggestion>, 최면 암시라고 번역하면 될까, 딱 맞는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2

 

물어보나 마나 처참했을 거다.

북극성이나 샛별같이 완벽하게 제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그래서 할퀴고 후벼파고 야금야금 제 속을 갉아먹었을 거다.

자괴감이라는 것이...

특히나 창작의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라면 궁극의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 손쉬운 재료를 눈앞에 두고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며,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느슨한 듯 팽팽한 듯 그 길을 걷기가 어렵다.

곧게 걸으려 해도 곧 미로처럼 엉키고 말리라. 곧 아득히 깊어지는 심연만이 그를 집어 삼킬지도 모른다.

비뚤비뚤한 발자국을 남기며 걷던 욕심쟁이 바보인 그는 제 그림자를 잡으려다 미쳐 날뛰고 결국은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노란 나팔꽃이 한 송이 나풀. 떨어진다.

 

 

도쿄에서 팬드럼이라는 밴드의 키보드를 맡고 있었으며, 거의 팀의 리더 격이었던 도리이 나오토가 자택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흑과 백 위로 떠오른 노란 나팔꽃

 

                                 

 

 

 

두 개의 강렬한 프롤로그로 첫 수가 두어지자, 그 뒤로 흑과 백이 차근차근 집을 쌓아간다.

딱...딱...따닥.

땀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들숨 날숨이 차례로 교차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둘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 사이로는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는 한 판 승부의 시간.

흑과 백의 우열은 어디서 갈릴 것인가.

 

니시오기쿠보독거노인 강도살인사건

도리이 나오토가 자살하고 얼마 후,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 또한 집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손녀 아키야마 리노는 경황이 없던 와중에 할아버지의 집에서 노란 꽃이 피었던 화분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의문을 품는다.

노란 꽃 화분에 의문을 품은 아키야마 리노는 노란 꽃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다가 가모 요스케로부터 블로그 답글을 받았고, 그와 좀 더 접촉해서 물어보려다가 거부당하자 요스케의 동생 가모 소타와 의기투합하여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노란 나팔꽃. 몽환화.

 

꽃잎은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가늘고 긴 꽃잎은 촉수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103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저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약속해 주십시오. 만약 그 꽃의 씨앗을 발견하면 곧바로 제게 연락해주십시오. 아시겠죠?

그게 싫다면 씨앗은 전부 버리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117

 

한 발 앞서 사건을 진행해나가고 있는 듯해 보이는 가모 요스케는 살인사건 자체보다도 노란 나팔꽃과 연관되어 있는 일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리노와 가모 소타.

흑과 백은 어느 순간 대립을 멈추고 바둑판을 꽉 채우겠다는 공동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듯하다. 속속 바둑판의 빈틈이 메워지고 집은 완성되어져 간다. 결국은 누구의 승리랄 것도 없이 바둑판을 채운 흑과 백의 돌은 그 자체로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몽환화의 무늬를 또렷이 바둑판 위에 드러낼 뿐이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프롤로그 2에 언급된 어린시절의 가모 소타, 이바 다카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서 이미 슬픈 예감을 했었는데...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 것인지.

 

독단적으로 사건의 우위를 점하며 치고 나가고 있는 가모 요스케로부터 MM사건이라는 단서를 들은 가모 소타는 아키야마 리노와 함께 예전의 사건 기록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팬드럼 밴드의 새 키보드 멤버로 들어왔다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종적을 감춘 여성이 첫사랑 이바 다카미가 아닌가...의구심을 품는다. 그녀는 왜 그를 보고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린 시절 갑자기 만남을 중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모 소타. 집안의 연례행사로 가족 모두 나팔꽃 시장에 나가 나팔꽃을 보러 다녔던 기억- 이바 다카미 또한 그 꽃시장에서 만났었지. 메일을 주고받으며 한여름 같은 사랑을 키워나갔었는데, 자신의 메일을 보고 만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그 사랑은 곧 끝나고 말았다. 이바 다카미 또한 단칼에 만남을 거부했었는데...

 

그녀와 나팔꽃은 또 어떤 형태로 연관되어 있을까.

 

노란 나팔꽃은 에도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의 꽃이기도 하면서 그 신비한 내력을 좀처럼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환상의 꽃, 금단의 꽃.

 

 

#어느 집이나 남들이 모르는 사정이 있지

 

오사카 대학의 물리에너지 공학 제 2과에서 연구하고 있던 가모 소타. 경찰청 생활안전국 범죄억제대책실 실장이라는 형 요스케는 왜 그렇게 데면데면한 것인지. 열 세 살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일까.

형은 어머니와 피가 섞이지 않았고, 내가 친자식인데...

 

집안일로 아무래도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원자력 공학에 모든 것을 걸 것인가 하는, 미래가 달린 진로 고민을 하던 차에 알 수 없는 의심쩍은 행동을 하고 다니는 형의 뒤를 좇으며 노란 나팔꽃 사건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되는 가모 소타.

진짜 깜짝 놀랄 만한 일은 남들이 모르는 집안 사정 안에 있었다!!

가모 집안 삼대에 걸쳐 관여해온 문제는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몽환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가문 또한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킨 자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의 의무를 져야 하는 처지였다.

빚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고, 의무감의 발로에서든 뭐든 그 빚을 책임감 있게 떠맡은 두 가문의 후계자들은 심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함으로써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최고가 되고 싶고, 환상의 소리를 얻고 싶어 금단의 꽃에 손을 댄 자들의 최후는 씁쓸했다.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누출 사건이나 우리 나라의 세월호 사건 또한 어디서부터 잘못을 짚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뿌리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그러모으고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한 진리를 몽환화에 빗대어 나직하게 충고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오랜 기간 추리 소설을 써오면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 누구보다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파헤쳐 온 사람이 아닌가.

심혈을 기울여 써 낸 작품이니만큼 전하는 메시지 또한 묵직하다.

꿈과 같은 세계에 집착하다 보면 현실을 망각하게 된다.

단단히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뿌리는 사람, 거두는 사람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알게 모르게 조력해온 두 가문처럼 세상을 떠받치는 힘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은 뿌린 자가 거두는 것이 맞다.

강직하고 누구보다 곧았던 슈지 할아버지의 죽음에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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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 2014 서점 대상 2위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3
기자라 이즈미 지음, 이수미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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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요, 우리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역시나 제목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책이다.

카레와 빵같은 음식이 주가 되는 책은 아니지만, 카레와 빵이 주는 포근함을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자꾸만 그 맛을 음미하게 되는, 그야말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책이다.

 

스르르 책을 열고 작가의 이력부터 꼼꼼히 읽어나갔는데...앗! 어느새 끝이 보인다.

분명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눈을 반쯤 감고 아이와 터덜터덜 유모차를 밀고 나왔는데, 길지도 않은 시간, 잠에 빠진 아이를 마냥 들여다보며 발길 가는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집 앞 어귀인 것을 깨달았던...내 소싯적 한 때가 문득 떠올랐다. 평화로운 산책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쉬워지는 기분...

이렇게 끝내면 어떡해요? 하고 작게 항의하고픈 심정.

분명 대단한 반전이 있으리라 기대한 것도 아니고, 끝이 덜 난 채 흐지부지 마무리지어진 것도 아니지만 왠지 주인공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져서 그만...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한 풍경을 잡아내어 감각적으로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 그 풍경은 그러나 약간의 낯섦을 품고 있었다. 결혼 2년 만에 병으로 죽은 가즈키. 남편 가즈키가 병으로 죽자 시부(시아버지)와 둘이서만 생활하는 며느리 데쓰코. 분명 평범한 풍경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그저 '시부'라고 이름처럼 부르고 함께 생활하고 있는 남편의 아버지.  칠 년 전에 죽은 남편은 데쓰코 안에 여전히 살아 남아 있었다.

 

데쓰코가 시부를 위해 소스를 건넨다. 마지막 만두는 걸쭉한 우스터 소스에 푹 찍어서 먹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13

 

이런 소소한 풍경들이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게 한다. 디테일 속에서 마음들이 살아 움직인다.

 

 

데쓰코에게는 이와이라는 남자 친구도 있다. 자, 이쯤되면 데쓰코라는 스물 여덟의 젊은 며느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이도 없고, 친정 부모도 계신데, 보통의 경우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정상 아닌가?

남자 친구는 프로포즈도 했다!

 

미묘한 상황은 자칫 통속적인 분위기로 흐를 수 있으나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왠지 잔잔하고 물흐르듯 고요하다.

'어서 집을 나와 이와이의 청혼을 받아들이라구' 하고 큰 언니라도 된 듯이 조언을 건넨다면, 이 분위기에서는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선수처럼 야유를 받을 것만 같다.

왠지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짐짓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라고 동의한다는 표현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

차츰 그녀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씩 소개되기 시작한다.

시부와 그녀가 살고 있는 옆집 처녀, 무무무. 어느나 갑자기 웃지 못하게 되어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서 지내고 있다. 웃는 법을 잊어버린 승무원이라니...그런 그녀의 주위에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든다. 심각한 증상의 환자 앞에서도 자꾸 웃는 산부인고 의사, 무릎을 꿇지 못하는 승려.

파란만장한 인생들은 파란만장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귀띔을 받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채 어느날 들이닥친 일을 헤쳐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인생들은 누구나의 인생에 겹쳐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데쓰코의 인생도 그들과 살포시 포개지고 얹혀지고 ...흘러간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여러 인생들끼리의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데쓰코의 남편 가즈키의 차에 얽힌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있던 사촌 동생 도라오, 일기 예보관으로 일하다 정년을 앞두고 취미를 찾던 시부가 만나는 등산녀. 슬그머니 풀어놓는 시어머니 요코의 이야기, 그리고 남편 가즈키와의 소중한 추억. 차마...잊을 수 없는. 묻어두고 가끔 꺼내 들여다 보는...

 

새로운 인물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남편과의 아릿한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주는 간결한 문체 때문에 스미듯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죽은 남편과의 추억 때문인지. 혼자 남겨질 시부에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데면데면한 친정과의 관계 때문인지.

 

가족은 만들기 싫다는 핑계로 이와이의 청혼을 거절했던 그녀가 변화할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가즈키처럼 죽어버린다고-33

 

그래도 살아 남은 사람은 살아가게 마련인지.

이와이가 남겨준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에 얽힌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녀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때문에 한 번쯤 고민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왠지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로 희망을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있는 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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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모 특급 살인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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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머리는 어디에? [이즈모 특급 살인]

요시키 형사 시리즈 제3탄

 

 

역에 흘러든 시체 토막.

기괴하고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84년 4월 20일.

각기 다른 열차의 그물 선반에서 시체의 일부가 든 종이봉투가 하나씩 발견되었다.

두 팔, 두 넓적다리, 두 종아리, 몸통. 모두 7개의 종이봉투가 발견되었지만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다만, 몸통 부분에서 대두와 보리의 낱알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달까.

그리고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철도를 이용해 토막난 시신을 여기저기 뿌려댄 형국이다.

옷은 남아 있지만 상표 레이블은 제거됐고, 반지도 손목시계도 없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지문도 황산이 부어져 있어 모두 지워진 상태. 신원불명으로 만들려는 수작이 틀림없다. 사체의 절단면을 랩으로 꼼꼼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초반부터 하드한 사건현장이 제시된다.

절단된 사체.랩으로 씌워져 있어 냄새는 덜하다고 하지만, 비닐이 코팅된 종이봉투에서 검은 비닐에 싸여진 사체의 부분이 꺼내어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욱.

바로 밥을 먹고 난 후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형사가 된 지 10년 쯤. 제대로 된 휴가를 얻어 여행을 하려던 요시키는 돗토리 역에서 여기저기 눈에 띄는 제복 경관의 모습을 보고 사건이 일어났음을 감지한다.

때마침 돗토리 현경 형사과에서 근무하던 경찰학교 시절의 친구 이시다를 만나 토막살인의 전모를 전해 듣게 되는데...

고작 아웃라인을 들었을 뿐이지만 형사로서의 감으로 사건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요시키는 사체의 발견 시각과 위치를 열차시각표와 꼼꼼하게 대조해 본 뒤 나름의 추리를 세우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은 합동수사로 결정되어 요시키와 이시다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피해자의 머리가 발견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중,

신문에 실린 토막살인에 관해 날아든 투서로 피해자가 K대학 역사민족한 교실 조교 아오키 교코임을 알게 되고, 탐문 수사 결과 아오키 교코와 라이벌 관계로 알려져 있던 노무라 미사오라는 여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 머리를 찾고 나서 그 시체가 아오키 씨라고 증명되면 그 때 찾아오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192

 

요시키는 이 말을 듣고서 그녀가 범인임을 거의 확신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머리를 찾지 못하면 공범이로 점찍은 그녀의 남동생을 오래 붙잡아둘 수도 없고, 그녀의 범행을 확인할 수가 없다.

 

이즈모 1호와 후지 라는 두 블루트레인을 이용한 살인과 사체유기의 트릭은 전부 요시키가 밝혔다.

열차의 트릭이 밝혀지기까지 특급열차가 달리는 것을 눈으로 좇는 것처럼 박진감이 느껴지는 전개에 사뭇 흥분이 일었다.

이미 용의자로 떠오른 노무라는 트릭이 밝혀지고 요시키가 그걸 밝혔음에도 시체의 머리가 발견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는지,  섬뜩하고 냉정하게 대처한다.

모두가 그녀를 범인으로 점찍고 마지막 단 하나의 증거를 찾기만 하면, 끄인데도 왠지 그녀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에 흥미를 보여주는 요시키에게 살짝 웃음을 보이기도 할 만큼 여유만만이다.

과연 그녀는 범행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을 만큼, 확신에 찬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요시키가 헛다리를 짚었는지 잠시 멈칫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신화와 전설의 집합체 <고사기>를 연구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던 두 여인의 이야기가 주축이 되는 만큼, 옛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표지에 불안함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토끼가 왜 등장했는지에 대한 힌트도 역시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신의 의지를 거역하고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승산이 없는 허무한 싸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면 나는 하쿠토 해안의 그 흰토끼처럼 가죽이 벗겨져 벌거숭이가 되는 것일까. -372

 

오곡의 기원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사체에 흩뿌려진 낱알들의 의미도 파악하게 되고, 이 낱알들이 나중에 범인을 검거하는 중대한 미끼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살짝 밝힌다.

야마타의 오로치는 옛이야기 속 괴물이지만, 인륜을 비웃는 오만한 괴물은 바로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이 아닌가.

사람이 괴물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마음에 원념이 쌓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커다란 원한으로 시작한 일이라도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것이리라.

신이 내린 벌...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이는 범인의 최후가 왠지 애잔하다.

여자라서 더 철저하고 계획적이고 세밀할 수 있지만, 역시나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는 한 남자의 시선이 있어, 끝까지 악역을 맡고서 저벅저벅 죗값을 치르러 걸어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더욱 아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표지를 벗기면 하드커버가 나오는데, 이 질감이 무척 좋다. 구겨진 무늬가 들어가면서 약간 가슬거리는 게...

무척 마음에 든다.

역시...흰 표지보다 검은 표지가...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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