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요, 우리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역시나 제목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책이다.
카레와 빵같은 음식이 주가 되는 책은 아니지만, 카레와 빵이 주는 포근함을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자꾸만 그 맛을 음미하게 되는, 그야말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책이다.
스르르 책을 열고 작가의 이력부터 꼼꼼히 읽어나갔는데...앗! 어느새 끝이 보인다.
분명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눈을 반쯤 감고 아이와 터덜터덜 유모차를 밀고 나왔는데, 길지도 않은 시간, 잠에 빠진 아이를 마냥
들여다보며 발길 가는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집 앞 어귀인 것을 깨달았던...내 소싯적 한 때가 문득 떠올랐다. 평화로운 산책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쉬워지는 기분...
이렇게 끝내면 어떡해요? 하고 작게 항의하고픈 심정.
분명 대단한 반전이 있으리라 기대한 것도 아니고, 끝이 덜 난 채 흐지부지 마무리지어진 것도 아니지만 왠지 주인공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져서 그만...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한 풍경을 잡아내어 감각적으로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 그 풍경은 그러나 약간의 낯섦을 품고
있었다. 결혼 2년 만에 병으로 죽은 가즈키. 남편 가즈키가 병으로 죽자 시부(시아버지)와 둘이서만 생활하는 며느리 데쓰코. 분명 평범한 풍경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그저 '시부'라고 이름처럼 부르고 함께 생활하고 있는 남편의 아버지. 칠 년 전에 죽은 남편은 데쓰코 안에 여전히
살아 남아 있었다.
데쓰코가 시부를 위해 소스를 건넨다. 마지막 만두는 걸쭉한 우스터 소스에 푹 찍어서 먹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13
이런 소소한 풍경들이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게 한다. 디테일 속에서 마음들이 살아 움직인다.
데쓰코에게는 이와이라는 남자 친구도 있다. 자, 이쯤되면 데쓰코라는 스물 여덟의 젊은 며느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이도 없고, 친정 부모도 계신데, 보통의 경우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정상 아닌가?
남자 친구는 프로포즈도 했다!
미묘한 상황은 자칫 통속적인 분위기로 흐를 수 있으나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왠지 잔잔하고 물흐르듯 고요하다.
'어서 집을 나와 이와이의 청혼을 받아들이라구' 하고 큰 언니라도 된 듯이 조언을 건넨다면, 이 분위기에서는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선수처럼 야유를 받을 것만 같다.
왠지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짐짓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라고 동의한다는 표현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
차츰 그녀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씩 소개되기 시작한다.
시부와 그녀가 살고 있는 옆집 처녀, 무무무. 어느나 갑자기 웃지 못하게 되어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서 지내고 있다. 웃는 법을 잊어버린
승무원이라니...그런 그녀의 주위에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든다. 심각한 증상의 환자 앞에서도 자꾸 웃는 산부인고 의사, 무릎을 꿇지
못하는 승려.
파란만장한 인생들은 파란만장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귀띔을 받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채 어느날 들이닥친 일을 헤쳐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인생들은 누구나의 인생에 겹쳐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데쓰코의 인생도 그들과 살포시 포개지고 얹혀지고 ...흘러간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여러 인생들끼리의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데쓰코의 남편 가즈키의 차에 얽힌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있던 사촌 동생 도라오, 일기 예보관으로 일하다 정년을 앞두고 취미를 찾던 시부가
만나는 등산녀. 슬그머니 풀어놓는 시어머니 요코의 이야기, 그리고 남편 가즈키와의 소중한 추억. 차마...잊을 수 없는. 묻어두고 가끔 꺼내
들여다 보는...
새로운 인물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남편과의 아릿한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주는 간결한 문체 때문에 스미듯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죽은 남편과의 추억 때문인지. 혼자 남겨질 시부에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데면데면한 친정과의 관계 때문인지.
가족은 만들기 싫다는 핑계로 이와이의 청혼을 거절했던 그녀가 변화할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가즈키처럼 죽어버린다고-33
그래도 살아 남은 사람은 살아가게 마련인지.
이와이가 남겨준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에 얽힌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녀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때문에 한 번쯤 고민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왠지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로 희망을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있는 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