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삶 속, 반짝이는 아름다움 [원, 우리가 하나였을 때]
연말이 되면 거리에 짤랑짤랑 울려 퍼지는 구세군의 종소리.
그걸 들으며 저벅저벅 한걸음에 다가가 다만 얼마만큼이라도 모금함에 쑥 집어넣을 수 있는 도량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이들 어렸을 적엔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한 두 번 기부는 해봤을지언정,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부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내 팍팍한 삶에 진심으로 휘청이면서 '저 기부금은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하느님께 벌받을 만한 혼잣말을 되뇌인다.
아프리카 수단 땅처럼 메말라 쩍쩍 갈라진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무 무미건조해진 거 아닌가, 윤기 있는 보드라운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연말을 맞아 좀 윤택해진 마음으로 새해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원, 우리가 하나였을 때]는 이렇게 열사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처럼 생활의 열기에 허덕이다 못해 마음이 비쩍 말라버린 내게
촉촉함을 선사해주었다.
강렬한 레드와 블루의 대비로 만나게 된 이 책은 샴 쌍둥이 이야기다.
내게 두 팔과 두 다리, 온전한 장기가 있음을 먼저 감사하게 하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온전하게 태어난 내 두 아이들에 대해서도 새삼 고마워하게 만든다~
그레이스와 티피는 샴 쌍둥이, 다른 말로 결합 쌍둥이 자매다.
그들은 좌골부 결합형, 세 다리 쌍둥이에 속한다.
머리가 둘, 심장도 둘, 폐와 신장도 두 쌍이다.
팔도 넷, 하지만 제대로 움직이는 다리는 둘이고 모양만 그럴듯한 다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달려 있다고 한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기형의 사람을 매체에서 접했을 때, '참 안 됐다', '불행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가 만나고 조사해 본 그들은 생각보다 행복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책 속 자매들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작가가 직접 만나 본 결합 쌍둥이의 삶을 적절히 녹여내고 있기에 현실감이 더해진다.
이제 16살인 그레이스와 티피의 이야기는 주로 그레이스의 나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이어져나간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학교에 나갈 수 없는 그들은 홈스쿨링으로 대체했지만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실직한 데다 사람들이 보내준
후원금이 바닥나는 바람에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부할 형편에 처하게 된다.
막내 동생인 드래건으로부터 학교는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학교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늑대들...그러니까 친구들 틈에 바로 던져 넣지는 않아."-58
학교에서 존과 야스민이라는 친구를 만나고 점점 다른 친구들과도 상호 소통하게 되면서
16살 여느 학생들처럼 시시콜콜한 고민도 하고 공부도 한다.
형식을 보자면 보통 소설보다는 행간이 넓은 것이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띄엄띄엄 그들의 마음을 음미하게 하는 자유시 형태다.
빽빽한 글자들 속에서 이 쌍둥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
이런 간격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깊이 마음 속으로 스민다.
그레이스는 좀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라면 티피는 왈가닥에 가깝다.
그들은 한 몸이지만 또 다른 인격체이기도 하다.
미술 시간에 처음 만난 존이라는 친구는 그들에게 각각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두 사람인 것처럼.
하나이면서 둘이기도 한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해야 할까 혼란스럽던 차에 존의 인사 방식으로 길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
그들은 각각 따로 따로인 인격체인 것이야...
히치콕 영화를 사랑했던 부모님 덕에 히치콕 영화의 최고 여배우 두 명의 이름을 얻게 된 그레이스와 티피.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이름을 얻은 것을 그들 자신은 잔인하다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들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일자리를 잃은 부모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제의하지만 이 곳에서, 이 학교에서 떠나기 싫었던 그들은 일상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동의하고 돈을 얻는다.
가식 없는 다큐멘터리에 스탭들도 감동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 생각한 순간, 이들에게 먹구름이 드리운다.
일상적인 감기를 앓은 줄 알았는데 그레이스의 심장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하나이자 둘,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삶에 일생일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날이 다가왔다.
바로 분리 수술.
지금처럼 함께 잘 해낼 수 있어,
우린 함께 할 운명이야.
서로 떨어지면, 죽게 될 거야.
넌 우리가 함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난 너한테 기생해서 살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네 생명을
갉아먹고 싶진 않아.-338
생명을 두고 도박했고 희비가 엇갈린 안타까운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키스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했던 이 아름다운 영혼들은 결국
비극 속으로 걸어들어가야만 했다.
딸랑딸랑. 구세군의 자선 냄비가, 사람을 모으는 방울 소리가 왜 이리도 머릿속을 맴도는 건지...
얼굴 잔뜩 찌푸린 스크루지가 개과천선해서 자선 냄비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는 모습이 겹쳐 드리워진다.
메마른 이 마음에 포근한 첫눈처럼 내려앉는 아름다운 사연이다.
혹은 악마로 보고 혹은 돈벌이 도구로 보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생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는 것 뿐인 것을.
내 삶이 힘겹다 하여 두 눈 막고 귀 닫고 외면해선 안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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