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 시간에 한 여학생이 내게 말을 건다.

“선생님, 출석은 성적에 얼마나 들어가요?”

“왜요? 많이 빠졌어요?”

“네...”

사실 난 학생 때부터 출석에 대해 그다지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성향은 가르치는 입장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학생들이 너무 안온다고 하면 출석을 부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출석을 안부르고 넘어가고,

부른다 해도 반영을 잘 안한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어느 분의 말에 따르면 “출석은 성실성의 징표”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살아온 내 방식을 바꾸기는 싫어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이 질문을 하면서 난 집안일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학생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제가요, 학기 초에 남자친구랑 헤어졌는데요

그게 너무 슬퍼서 술만 마셨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하다, 이렇게 말해줬다.

“참 나쁜 친구군요. 왜 하필 학기 초에 헤어지나 그래.”

난 학생에게, 다른 선생님들은 세 번 정도 결석을 하면 F를 줄지 모른다,

그러니 다른 선생님들께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하되

갈 땐 나랑 같이 가자고 했다.

헤어졌다는 변명이 잘 안먹힐 때, 내 존재가 조금이나마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까봐서.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해주는 이유는

내게서 없는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이 마흔 하나, 슬프게도 난 사랑이 시작되어도 별반 설레지 않으며

이별의 아쉬움에 더 이상 눈물짓지 않는다.

20대 때, 집안에서 반대한다는 이유로 허구한 날 술을 마시며 울던 세월이 내겐 있었지만

무뎌질 대로 무뎌진 내 가슴은 떠난 이제 사랑에 아파해줄 여력이 없다.

그런 내가 보기에 사랑이 떠났다고 술을 마시며 슬퍼하는 여학생은 얼마나 멋있는가.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를 멋있게 보는 것과는 달리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고,

추워지는 날씨만큼 외로움도 더 커갈 것이다.

그런 것도 다 인생의 재미라는 걸 깨닫기까진 앞으로 두세번의 사랑을 더 해봐야 하겠지.

지금 그녀를 멋있게 보는 나도

20대 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었고

이대로 확 죽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었다.

내가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그때의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미모까지 갖춘 그 여학생에게 한마디. “힘내세요. 세상에 남자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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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11-2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의 아픔까지도 감싸주시다니 너그러운 부리님입니다.
그 여학생이 무척 고마워 했을 것 같아요.
하기야 사랑도 다 때가 있는 법일까요?
서로를 아끼고 감싼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텐데 말입니다.
^*^

마늘빵 2007-11-2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우려되는건, 그 여학생은 진심일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거짓으로 부리님을 이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_-

부리 2007-11-26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아아 사려깊은 아프님... 앞으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진짜인지 검증하는 장치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장치라봤자 그 친구의 친구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지만요
전호인님/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없다지만, 때가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그러운 게 아니라 아마 여학생이 그래서 더 멋져 보였는지라 그런 말을 했나봐요...^^쉿 이건 비밀.

물만두 2007-11-2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우린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이죠.
훗날 그 여학생 님을 기억하며 그 마음에 감사할 겁니다.

Mephistopheles 2007-11-26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라면 "그런데 그게 수업불이행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라고 꽤나 딱딱하게 말했을 듯..^^

2007-11-26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11-2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짠~해요. 여전히 부리님은 멋져요. 부비부비(^^ )( ^^)

깐따삐야 2007-11-2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 교수님 짱 멋지다.
그리고 여학생, 부럽네요.
저는 묵묵히 레포트 쓰고 농담까지 해가며 발표를 마쳤는데.
그나저나 실연의 감정마저 부러워할 나이가 오긴 온단 말이죠?!

부리 2007-11-2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네 그렇습니다 실연의 감정도 제 나이엔 부럽습니다. 글구 제가 멋진 게 아니라 여학생에게만 잘해주는 거라는 설이 있어요^^
마노아님/아이 여기서만 멋진 척을 해서 그렇지 실제론 나쁜놈이라는 설이 있어요
속삭님/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근데 정말 그렇단 말인가요...? 그날이 오기를 빌어야겠군요! 호호
메피님/미녀에 강한 메피님이 조금 부럽긴 합니다만...그게 사실은 마님한테 혼날까봐 그리 되신 거죠??
물만두님/제가 늘 만두님한테 감사하듯이..^^

프레이야 2007-11-26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남자는 많습니다. 부리님도 그 중 하나..^^

가시장미 2007-11-2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남자는 많다는 말.. 저한테도,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할 때마다 들려줬던 말 같은데요? ㅋㅋ 세상에 남자는 많죠. 하지만 제 짝은 한 명일 뿐이죠. 그리고 그 짝을 만나기가 더없이 어렵기에.. 사랑이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

웽스북스 2007-11-2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부 때 선생님 한분이 생각나네요
수업을 못나올 것 같은 사람은 수업 시작 전 결석 사유를 적어 교탁 위에 올려놓으면 결석처리하지 않겠다,라고 하시고는 몇달 후에, 정말 실망했다,면서- 고작 이유가 '아프다' 정도밖에 없느냐고 하셨었어요
본인은 '교수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오늘같은 날은 도무지 수업을 못듣겠어요' 와 같은 좀더 젊은이다운 다양한 이유들을 많이 기대했다고. 고작, 그 나이에 이 정도 수업을 빠지는 이유가 이런 것들 밖에 없느냐고-

하루(春) 2007-11-2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어떤 남자는 3개월 사랑하고 3년을 아프더라도 3년 아픈 쪽이 낫다던데... 님도 다시 열정을 불태워 보세요. ^^

미즈행복 2007-11-27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 없는 소리 하나
수업을 빠져도 성적이 잘 나오면 어떨까요? 그럼 "아, 너는 안 들어와도 이렇게 잘하니 괜찮다" 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성적과 상관없이 "이건 나를 무시하는거야" 라던가 "성적만 좋으면 뭐해? 사람이 성실해야지. 수업에 오는 것은 학생의 기본이야" 라고 하는 사람이 대다수겠죠? 근데 수업 안오고도 성적이 잘 나온다면 그건 교수의 수업이 별 내용이 없다는 걸까요? 아님 그 학생이 매우 비상하다는 걸까요? 어느 경우건 수업 안 온것에 대한 변명이 안되나요? 오히려 괘씸죄가 될까요?

다락방 2007-11-27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마흔 하나, 슬프게도 난 사랑이 시작되어도 별반 설레지 않으며
이별의 아쉬움에 더 이상 눈물짓지 않는다.


공감하는 문장인데 씁쓸해요.
어쩐지 오늘은 이 글을 읽고 쓸쓸한 하루가 될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7-11-2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있는 한, 사람은 자신에게서 지나가 버린 것, 없는 것을 기대하게 되지요. 젊음은 늙음에게 관대함을, 늙음은 젊음에게 패기 있을 것을. 부리 님이 늙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여학생의 사유가 진심이었다는 전제 하에서, 멋있는 사건이에요.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 저 부리님 팬 할래요~)

sweetmagic 2007-11-2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학교 모 교수님은 타과 학생이 "자신의"수업에 "갑자기" 들어와 공개 프로포즈 했다는 이유로 프로포즈 하러 온 학생을 온 학생이 있는 면전에다 타박에 구박에 연설을 했다지요.그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리셔서 프로포즈 받은 학생을 공개비난 하셨다는... 갑자기 그 사건이 생각나네요.

춤추는인생. 2007-11-27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지도교수님이 부리님이시라면 전 정말이지 단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완벽한 출석을 자랑할꺼예요^^

비로그인 2007-11-2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교수님이 부리님이시라면 전 강의실에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고 다른 루트로 찾아가겠어요,술마시러....

네꼬 2007-11-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비님, 멋지다. 앗, 나도 모르게 오타가... (일부러가 아니고 마노아님 댓글 보다가 그만...) 그러나 그냥 두겠어요. 멋진 교수님.
: )

부리 2007-11-29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꾸님/앗 나도 모르게 오타가...^^ 멋지다고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끼야!!
승연님/음, 전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춤인생님/저도 님이 제 학생이면 지금처럼 휴강많이 안할지도 모르죠^^
매직님/잠깐 타박을 잘못 이해했어요. 때렸다는 걸로...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자기 수업을 침해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좀 거시기 하네요. 제가 아는 사람 중 실습실에서 생일케이크 놓고 노래부르는 걸 보고 케이크를 엎어 버린 놈이 하나 있지요....저랑 안친함
주드님/아이 왜그러세요 제가 주드님 좋아하는 거 아시면서^^
다락방님/님은 마흔하나 되기 전에 사랑 많이 하시길! 8-9년 남지 않았나요 혹시??
미즈행복님/공부는 어차피 혼자하는 거니 수업 안들어와도 성적이 좋을 수는 있지요. 과목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경우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수업이란 꼭 학문만을 배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학생 땐 몰랐는데 요즘은 수업에서 인생을 배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하루님/많이 아파 봐서 아픈 게 무섭습니다 뭐 그렇다고 제가 다시 사랑을 안하겠단 건 아니어요. 제 몸이 반응을 잘 안한다는 거죠..
웬디양/아 그분도 참 나름 낭만 있네요. 근데 학생 입장에서 날씨 핑계를 대며 수업에 빠지긴 정말 어렵지요...^^
장미님/짝은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혼은 한명과 하겠지만, 그간 자신을 사랑해줬던 사람이라면 다 인생의 짝 아니겠어요..
혜경님/어머 전 아줌마구요 위장남자랍니다

가시장미 2007-11-30 10:29   좋아요 0 | URL
어머어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제 인생의 짝은 도대체.. 몇명일까요? -_-a ( 아무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으흐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