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정말이지 낭비가 심해, 아론." 페기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은 누가 가까이 다가오면 반가워할 거야. 너는 그 여자의 속셈을 알아보느라 분주하지."
내가 말했다. "어떤 여자의 속셈을 말하는 거야?"
"넌 그것조차 보지 못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고. 넌 그 여자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누가 낭비되게 내버려 둔다는 거냐고? 지금 루이스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pp.264-265)
토요일에 일자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산에 갔다며.
응.
아카시아 꽃 많이 피었지?
못봤는데? 냄새도 안나던데?
아빠 친구가 일자산 갔다가 아카시아꽃 많이 피었다고 사진 찍어 보내줬던데?
아 나는 너무 앞만 보고 갔나? 못봤어.
아니 어떻게 그걸 못봐?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곰곰 생각해봐도 내가 아카시아 나무를, 꽃을 본 기억이 없다. 어떻게 그랬을까? 피지 않아서 못본걸까, 피었는데도 못본걸까? 아무리아무리 떠올려봐도 아카시아 나무가 기억에 없다.
일요일에 다시 일자산엘 갔다.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했지? 하고 산에 오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못보고 지나쳤을까 싶었다. 아카시아가 지천이었다. 여기저기 온통 아카시아나무였고 꽃이었다. 달큰한 냄새까지 났다. 아카시아 껌, 그 냄새다, 했다. 게다가 윙윙 들리는 벌들의 소리. 머리 위로 벌들이 아주 많이 날고 있었다. 자주 볼 수 있는 평범한 꿀벌부터 엄지손가락만한 큰 벌까지. 진짜 벌천지(!) 였다. 혹여라도 벌이 내게 달려들까봐 쪼그라들 정도로 벌이 많았고, 시선 닿는 곳마다 아카시아 꽃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걸 못보고 갔던거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대체 나는 뭘 보고 간거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갔길래 산을 온통 가득 채운 아카시아나무를 못보고 지나친거지? 한두그루도 아니었는데?
그러자 '앤 타일러'의 책 속 문장이 생각났다. 나는 아카시아를 낭비되도록 두었구나, 싶어서. 이렇게 보란듯이 피어서 자기 향을 피워내고 있는데,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다니, 아카시아는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성실히 해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의 몫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를, 내가 몰랐다. 내가 아카시아 나무를 낭비하고 있었다. 아카시아 꽃을 낭비한 채로 두었던 거구나.
어쩌면 아카시아 나무에 대한 것만은 아닐 거다.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모르는 채로 지나치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스쳐지나갈 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을 낭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낭비하고 있는 채로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넌 그 여자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라는 페기의 말이 자꾸만, 자꾸만 생각난다.
연휴동안 슬픈 일을 겪었던 친구가 아침에 내게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내게 위로 받고 싶다고 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친구는 나를 낭비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달라고 말하다니. 내가 글을 쓰는 게 지금의 친구에게 좋은 일이라면,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아울러 다른 친구에게도 얘기하고 싶었다. 주말에 내가 그 친구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을 찾고, 손을 내밀수 있는 만큼 내밀었으면 좋겠다.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을 낭비되게 두지 말고, 자신의 슬픔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 한껏 이용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소중한 사람에게 낭비되지 않아야 한다.
토요일 밤늦게 본 『아이가 다섯』은 무척 좋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성장한 성숙한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고 있다. 안재욱은 재혼할 생각이 없다면 나쁜 놈입니까, 라고 물었고, 소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도 아이들 때문에 재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우리의 상황은 다른 연인들과 다르니까, 라며 안재욱의 말을 이해했다. 안재욱은 아이들이 다 크면,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 같은 마음이면 그때 함께 살자고 말했다. 소유진의 막내가 어려서 막내가 스무살이 되려면 14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안재욱은 자신이 기다리겠다며, 그때까지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줄게요, 했다. 와- 이 둘의 대화가 너무 좋았다. 이해해요, 기다릴게요,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줄게요, 라는 모든 말들이 다 좋았다. 게다가 섣불리 영원을 맹세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같은 마음이라면, 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14년 후면 쉰이 될텐데, 많이 늙겠네, 라는 얘기를 하면서 소유진은 일본 출장 갔을 때 먹으면 7년씩 젊어 진다는 달걀 얘기를 꺼낸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될 때, 그때 거기가서 그 달걀을 두 개씩 먹고 14년 젊어지자고, 그리고 함께 살자고. 전경린의 「부인내실의 철학」이 한 구절이 이와 같다.
"......당신은 아이들이 언제 다 자란다고 생각해요?"
"열여덟 살. 둘 다 열여덟 살을 넘기면 다 키운 거야......"
"나보다는 당신이 늦겠네요."
"나를 기다려줄 거야?"
희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나 기다려줄 거야?"
"당신이 지금이라고 할 때까지. 얼마든지...... 당신 아는 사람들이 다 죽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죽고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을 때까지......"
"당신의 말은 늘 나를 놀라게 해. 당신 몸처럼."
기윤은 희우의 뒷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그때가 되면 우리 북해도로 여행을 가요. 그곳엔 하나 먹을 때마다 7년 젊어지는 검은 계란이 있대요."
"하하. 그런 이상한 계란이 있다고?"
"틀림없이 있어요. 7년씩 젊어진다는 검은 계란이."
"정말?"
"정말이라니까요. 북해도에 눈이 있는 만큼이나, 온천이 있는 만큼이나 확실히 있어요. 우리 그곳에 가면 검은 계란을 똑같이 두 개씩만 먹어요. 그리고 함께 20년만 더 살아요."(전경린, 부인내실의 철학 中)
아이가 다섯의 드라마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저런 대사를 써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음... 어쨌든,
이 남자와 이 여자는 참 성숙한 사랑을 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면, 드라마속의 골프선수 사랑을 재미있게 봤을것 같은데, 그 사랑이 더 눈에 들어왔을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조곤조곤하고 다정하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귀기울여주는 쪽에 마음이 끌린다. 멋지다. 안재욱이 드라마상에서 젠틀해서 너무나 좋다. 게다가 소유진이야말로 매력이 터지는데, 사내연애를 숨기고 있는 그들앞에 차대리가 팀장님인 안재욱을 좋아한다고 소유진에게 말한 것이다. 팀장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자기는 천천히 팀장님에게 다가갈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회사 일로 모든 부서원들이 안재욱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때, 소유진에게 '내가 조수석에 앉게 도와줘요' 라고 말한다. 그러나 차대리가 안재욱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이미 소유진이 타고 있었다. 내게는 이 장면이 아주 놀라웠다. 소유진이 괜히 착한척 하면서 뒷자리에 앉았다면 그건 그대로 서운할 사람이 생겼을 거다. 안재욱은 안재욱대로, 그리고 양보한 소유진은 소유진대로. 그러나 소유진은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멋져! 크.
이십대 중반에 내게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같이 근무하던 다른 여직원이 내게 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그래서 회식자리에서 그에게 고백할거니 그를 불러달라 말했을 때, 나는 가서 친절하게 잠깐 나가보라고 말했다. 그때 그 여직원은 그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거절을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심한 그녀를 위로했는데, 아아 그때의 내가 너무나 바보같다. 소유진으로 치자면 조수석을 양보한 셈이다. 으윽. 그래놓고 나는 또 얼마나 마음 아파했었나. 병신... 나는 그때 그녀에게 '나도 그남자 좋아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다가섰어야 했는데..모지리 모지리 모지리.. 나는 그때 왜!! 그녀에게 그를 내 마음대로 양보한걸까. 왜 착한척 했을까... 어휴 바보같다 진짜... 그랑 사귀지 못해서 바보같은 게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내가 바보같다는 거다. 소유진이 그러했듯 자신감을 갖고 내 감정을 숨기지 말했어야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당시 친했던 형과 술을 마셨는데, 시간이 지났고 서로의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말했었다. 형, 내가 그 때 그 친구를 좋아했었어요, 라고. 그때 형이 말했다. 왜 진작 말 안했냐, 걔도 너 좋아했는데, 라고. 둘이 담배 피다가 그가 말했었다고 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이 병신은 왜 또 이대로 지 감정을 숨겼을까...뭐, 안될라고 그런 거겠지. 결과적으로 그와 어떻게 되지 않았던 것은 잘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의 내가 됐을 수 있었던 걸테니. 그를 만나서 좋다고 고백하고 사귀었다면, 사람일은 모르는거지만, 혹시 그와 결혼이라도 했다면, 아... 내가 그랬다면 삼십대에 사랑했던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테니.. 과거에 바보였던 게 다행이었던 것 같다... 음....
혼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혼자라고 생각한다. 내 곁에 있으면서 내가 누군가와 싸울 때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 편인 사람이 24시간 365일 내 곁에 붙어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그 사람이 없을 때 싸우지 못해 얻어터지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나 스스로도 누군가와 싸울만큼 강해져야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 지금 내게 너무나 좋은 여행친구가 있지만, 언제까지나 이 친구와 함께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이 좋게도 그동안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이 일치했고 시간을 같이 낼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란 법은 없다. 우리가 시간이 맞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이 일치하지 않을 때 내가 여행을 포기하기 보다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가 갈 수 있으려면, 내가 혼자서 여행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뭐가 됐든 나는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스스로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많이 돌아다녀서 내가 할 수있는 것들을 해내면서 살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한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 할 수 있도록, 혼자서도 부족한 게 없을 수 있도록. 누구 때문에 혹은 누가 없어서 포기하는 일들이 생기기보다는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낭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도 당신을, 그리고 나를,
낭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한다.